김삼 2011. 11. 21. 16:23



어느새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코 앞이다.
이 한 해도 끝을 향해 달려간다. 여느 때 같으면, 철 따라 자연스레 할 일이 정해지고, 시간의 흐름을 가늠한다. 일 년 사시사철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곳에 이사를 오니,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아, 시간 감각이 둔해진다. 

시간이 가는 속도는 절대로 일률적이지 않다. 실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열 손가락 사이로 잽싸게 빠져나가는 물처럼 붙들어 두지 못하는 세월. 아쉽다고 허무하다며 애꿎은 세월을 타박한다. 때론 참으로 세월 더디 간다며, 시곗바늘 움직이기 전에 마음이 앞서 가서 조바심에 바동거리고. 지루해서 몸이 비틀릴 때는 일 분이 한 시간 같이 길게도 느껴진다.                                                                     
우리 가족의 삶도 작년과 올해는 무척이나 다사다난했다. 
많지도 않은 세 식구가 각기 흩어져 홀로 지낸 쓸쓸한 시간. 
다시 만나 적응하며 같이 기뻐하던 시간.
예상치 않은 실망스런 결과를 수용하며 인내해야 했던 긴 갈등의 시간. 
새 삶의 터전에서의 적응과 예상치 않은 도전의 시간. 

한 때는 시간이 너무 느릿느릿 가서 안타깝기도. 때론 후다닥 지나가서 아쉽기도 했다. 다 지나가서 다행이지 싶던 순간들이 오니 한시름 놓기도 한다. 기다리다 지치기도 하고, 후다닥 지나가길 바라던, 아니 아예 지워버리고 싶던 시간이 부끄럽기도 하다.

허나, 이 모두가 다시 한 번쯤은 되돌아보며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고 복을 세며 경건 훈련의 기회로 삼는, 언제고 소중한 지나간 시간이다. 이 시간 때문에 희망하고 소망하는 용기있는 믿음으로 내일을 살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은 말쑥하게 차려 입고 출근하는 아들을 배웅하며 이 아이와의 지난 일 년 반 동안의 삶을 되돌아본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응시한 Public Affairs 자리에 큰 기대를 걸었다.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동안 일하면서 신임을 쌓아 많은 사람의 추천도 있었지만, 쓴 고배를 마신 아들아이. 미국 경제난으로 말미암아 최근 졸업생을 뽑는 자리지만 치열한 경쟁으로 이미 대학원과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밀려났다. 

점점 어려워져만 가는 구직난. 무작정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에 해병대 장교 스쿨에 가겠다며 두 번이나 원서를 내고 절차를 밟았지만, 두 번 다 낙방했다. 점차 아이 얼굴에는 웃음도 줄어든다. 혼자 좌절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니 자기가 겨우 22살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아직 늦지 않았느냐며 나의 동의도 구한다. 불확실한 장래의 그림자가 아이를 덮을 때마다, 아이는 불안해하고 우울해했다. 

이사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아이는 이곳에 있는 직장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사를 오자마자 청소년 센터에서 청소년 담당 리더로 일을 하게 되었다. 졸업한 지 일 년만이다.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직종은 아니다. 자신의 전공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필요 이상의 자격을 갖추었다. 시간도 들쑥날쑥 이다. 그러나 쓴 고배를 수 차례 마시던 지난 일 년 동안 겸허해졌다는 아이는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했다. 

덕분에 우리 집 저녁 식사 시간은 그 날 청소년센터에 있었던 이야기가 밥상머리 화제였다. 
한 무책임한 부모에 분개하기도 했고..
새로 생긴 엄마의 남자 친구 때문에 불안해진 어린아이의 평소 같지 않은 난폭한 행동을 안타까워 하며.
문 닫는 시간이 지나도 부모가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아 불안해하는 어린아이들의 부모를 한심해 하며.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도 무엇인가 생산적인 것을 하려고 하는 의지도 동기도 관심도 없는 청소년에게서 느끼는 이질감과 쇼크 먹은 이야기에 공감하며, 아이의 이야기에 몰입했다.

우리 부부는 안면부지의 아이들을 안쓰러워하며 장차 아이가 이룰 가정의 중요성과 부모의 책임을 역설하기에도 바쁘다. 어느 날 아들아이는 난데없이 이런 곳에 자신을 한 번도 보내지 않은 엄마 아빠가 고맙다고 한다. 이혼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줘서 자기 부모가 자랑스럽단다. 
다행히 점점 아이의 충격과 푸념은 시간이 가면서 줄어든다. 당장 그만둘 것 같고 일하는 환경에 좀처럼 동화되지 않을 것 같던 아이에게 변화가 온 것일까. 

정주성 동물처럼 게임에 매여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이 운동을. 비디오 제작과 창의성 있는 활동을 하며.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아이들에게 변화가 왔다. 운동에 재질이 있는 아이가 자신은 전혀 운동에 소질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아이에게도 변화가 왔다. 축구팀에 들어가겠다고 한단다. 공 던지는 것을 가르쳐주고 칭찬해 준 것밖에 없는데.

청소년 센터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동료에 의하면 아들아이 때문에 죽어 있던 청소년 프로그램이 살기 시작했단다. 아이들은 넘치는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발산하면서 자발적이 된다. 아이들은 자극을 받고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의 숫자가 급증한단다.  

아이들에게만 변화가 온 것은 아니다. 아들에게도 변화가 왔다. 자신이 보여 주는 관심에 아이들이 반응하고 움직이고 다가오는 것을 보며, 먼저 심고 거두는 법칙을 배운다. 사랑이든 관심이든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다는 자신의 가치를 보는 기쁨이 찾아왔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라는 많은 아이를 보며 너무 당연하던 자신의 환경을 감사해 한다. 인생을 보는 눈이 조금씩 성숙하고 자신이 성장하면서 아이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날려 보낸다. 

간간이 아들에게 성실하게 일하고, 하는 일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열심을 내서 얼마나 엄마 마음이 좋고 자랑스러운지 모른다고 했다. 이 모든 체험이 아이의 인격과 장래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을 젊은 아들은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아들의 출근은 청소년센터가 아니다. 새로운 직장으로의 출근이다. “하나님이 길을 여셔서 누군가가 너에게 기회를 주면, 어디 가서도 너는 참 잘할 거야.”라며 아이에게 수시로 해 주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미국 육해공군 중 뛰어난 인재만 보내는 인근의 Naval Postgraduate School에 얼마 전에 아이가 취직되었다.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보수와 등록금 안 내고 대학원을 할 수 있는 조건에. 하나님은 이렇게 길을 열어주셨다. 

청소년 센터에서는 일 끝난 후에 시간 나는 대로 봉사를 한다. 지난 5개월 동안 정이 많이 든 아이들과 동료를 쉽게 떠나지 못하겠나 보다. 아이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라며 상사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봉사하겠다고 했단다. 

이제 세상을 향해 겨우 발을 내딛는 인생 초년병 삶이 시작부터 순조롭지가 않았다. 그러나 돌아 보면 그 굴곡의 시간 동안 하나님이 하신 일이 보인다. 사람은 낙심하고 좌절하고 불평한다. 그게 체질이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신 분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여 더 나은 사람으로 빚어가신다. 

기다리게 하시는 동안 우리의 눈과 마음 문을 여시고 깨닫게 하신다. 생각이 정립이 된다. 인생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진다. 안 되고 일어나지 않는 일도 하나님의 은혜다. 젊은 패기에 해병대를 지원했지만, 지금은 안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아이가 말하듯이, 혈기왕성하나 인생 경험이 없는 아이는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아이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그분은 이 아이를 너무 잘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르치신다. 어떤 풍파와 혼란 가운데도 내가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친히 가르치신다. 그래서 기다리게 하신다.

계절의 구분은 없어도 내가 사는 곳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한 타운이라 더 좋다. 이곳에서 한동안 살 생각에 나는 마음이 들떴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남편도 파병이 안 된다. 주말이면 원근각처에 갈 곳도 많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발령지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곳을 나는 한동안 마음에 담지 못했다. 아들 J군이 취직을 하고, 이 일이 해결되고, 저 일이 마무리된 후,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 환상의 날을 꿈꾸며, 은근히 나를 짓누르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서두른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표가 정해져 있기에. 그런데 하나님은 정해진 코스를 지나가게 하신다. 시간이 걸리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재촉하고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것을 못 견뎌 한다. 그러면서 서두르다 일을 망치기도 한다. 기다림에 서투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이 먼저고 궁극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하고,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기도 하다. 기다리는 믿음의 결실은 언제고 나의 성장과 성숙이다. 기다리는 동안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고 우리의 믿음도 덜 요동을 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가장 합당하고 선한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고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은 삶의 요동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야 해도, 나의 믿음의 대상은 언제고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결과물과 시간표에 대한 믿음이 아니기에. 나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하나님도 나를 가까이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품이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피난처임을 몸소 체험한다.

이렇게 인생 초년병 아들의 삶을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는 나의 눈은, 돌아보는 우리 모두의 눈이 그렇듯, 아이러니컬하게도 완벽한 20/20이다. 이 완벽한 눈으로 사람은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한탄하고, 진정 하나님의 도움이었는지 의심하여 갖은 우연의 법칙을 만들어 내고, 이랬더라면 좋았을 걸 하며 자책하며 평안 대신 불안을 소득으로 얻기도 한다.

설사 이런 위험 요소가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이 완벽한 시력으로 되돌아 볼 수 있을 때가 참 좋다. 주로 긴 기다림 후에, 많은 세월이 지나간 후에 되돌아 보면 내 삶의 구석 구석이 더 잘 보인다. 나의 삶 구석구석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나를 도우시고 보호하신 손길의 선명함. 그분의 신실하심과 사랑의 확신. 가슴을 가득히 채우는 감사. 단단해지는 믿음의 소산물. 이 모두 보배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막막한 날들, 모든 것이 희미한 날들을 두려움 대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은혜다. 이 은혜 때문에 세월이 갈수록 나의 기다림도 점점 평온해진다. 

이렇게 완벽한 시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오늘이 바로 나의 환상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