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2 - 10 너무 세속적이고 너무 종교적이고(은강)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7. 27. 19:25

은강의 순례여정
.
.
.
.
.

불이 켜졌다.
영화가 끝났다.
그러나 나는 얼른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설 수가 없다.

늘 그랬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앉은 자리에서 쉽게 일어서지를 못했다.
때르르릉 원시적으로 종 울려 영화가 끝났음을 알려주던 시절에도 그랬고 종 대신 밝게 불이 들어오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주는 여운과 만든 이들의 수고 같은 것들 때문에, 길디 길게 올라가는 자막 사이로 흐르는 음악을 들으면서 내내 앉아 있곤 했다.

예전 영화관이 그립다. 시간 구애 받지 않고 아무 때나 표를 사서 들어갈 수 있었다.
상영하는 도중에 들어가면, 문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말 그대로 앞이 캄캄했다. 보이는 건 오로지 스크린 뿐, 까만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선 채로 기다리면 이윽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군데군데 빈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조심조심 사람들을 지나 빈 자리에 앉았다. 때로 빈 자리가 없으면 자리가 날 때까지 벽에 기대어 서 있기도 했다. 그러다 어디서 누군가가 일어나 나가면 얼른 그 자리에 앉는 거다. 그렇게 영화를 보았다.
때때애르르릉, 시끄럽게 종이 울려 영화가 끝났음을 알려줘도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보지 못했으므로 본 곳이 나올 때까지 계속 봐야 했다. 영화가 감동적이면, 다 보았더라도 중간에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내처 보고는 했다.

그 때는 그게 불편했었다. 지정석이 없으니 자리 잡고 앉을 때까지는 일단 좌석 확보가 관건이었다. 여럿이 가면 자리 잡기는 더 난감했다. 때로는 급한 대로 떨어져 앉아 관람하기도 했다. 좌석을 정해서 표를 팔면 좀 좋아, 궁시렁거렸는데 막상 좌석을 정해 표를 파는 지금, 영화가 끝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얼른 일어나 좌석을 비워주어야 하니 이건 또 아쉽다. 감동적인 장면을 다시 한 번 더 보려고 나가지 않고 기다리던 맛, 그 맛을 잃었다.
지나간 건 모두 다 그리움이던가.


[영화관에서, 영화 끝났어도 계속 자리에 앉아있는 심정 같은 것인가요?]

그가 물었다.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어, 말을 하기엔 가슴이 먹먹해서, 나는 말없음표만 몇 개 찍어 메일을 보냈었다. '길은 여기에'를 읽었다는 말과 함께.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오래 전에 했던 게임이 생각났다.
게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유희였다. 젊은 치기 가득했던 지적 유희, 선배로부터 전수받은 한량 놀음.
책을 한 권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우리의 식사를 제물로 바쳤다. 책이 주는 감동의 정도에 따라 바치는 끼니 수는 달라진다. 일단 감동적이면 한 끼를 굶었고 감동이 크면 두 끼도 굶었다. 아주 드물게는 하루를 바치기도 했다.

일견 사치일 수도 있었으나 그 시절 우리에게 그것은 일종의 예의였다. 글쓴이나 책에 대한, 그리고 그 책을 읽은 우리들 자신에 대한 예의였다.
배 부른 돼지보다 배 고픈 소크라테스를 갈망했던 때, 감동적인 책을 읽고 나면 실제 밥이 먹히지 않았다. 위장이 감동으로 채워져 밥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밥이 들어가면 감동은 밥과 뒤섞여 이내 그 순수성을 잃고 말 것이었다. 감동이 소화되어야 밥이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그러니 감동이 크면 자연 여러 끼를 굶을 수 밖에.

실제로 밥을 굶기도 했고 그저 상징으로 감동의 크기만 전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굶기로 맘 먹은 그 끼니 수가 그 책을 읽고 받은 느낌에 대한 우리의 척도였다. 믿을만한 사람이 여러 끼 짜리라고 말하는 책은 반드시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많은 책들이 우리들의 식사를 제물로 가져갔다.
나는 그 무렵 최인훈, 이청준에게 빠져 있었고 속속 발표가 진행되던 조세희의 팬이었다.
나중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묶여져 나왔지만 처음 그 연작들은 단편으로 따로 따로 발표가 되었었다. '문학사상'에도 실렸고 당시 서울대 신문이었던 '대학신문'(지금도 여전히 이름이 대학신문인지는 모르겠다)에도 실렸다. 대학신문 창간 몇 주년인가 기념호에 실린 '기계도시'에 나는 반했다. 그 단편을 읽고는, 여러 곳에 나뉘어 발표된 조세희의 연작들을 찾아내 열심히 모으기도 했었다.
한 선배는 리영희의 열렬팬이어서 <8억인과의 대화>에 이틀을 바쳤다. 정말로 굶었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도 우리를 제물로 삼았던 책이다. 그 밖의 많은 책들..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길은 여기에>는 미우라 아야꼬의 자전적 소설이었다. 삼부작 중 첫째 권이다.
그녀의 책 중 <성경 이야기> 두 권과 <길은 여기에>를 우선 구입해 놓고는, 뭐 먼저 읽을까 표지를 구경하다가 그래도 소설이 낫겠지 후자를 먼저 손에 잡았었다. 읽는데 오래는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읽고는, 읽기는 마쳤어도 얼른 일어나질 못하고 계속 앉아 있는 거였다.
'길은 여기에'라는 영화를 보고, 영화는 끝났는데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글쎄,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내 끼니를 제물로 바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오래 전 그 때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이리라. 그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은 별로 안 산다. 한 번 읽어 볼만이야 하지만 간직하고 싶은 욕구는 크게 들지 않는 책이었다.
13년에 걸친 그녀의 투병 생활은 참으로 끈기 있었다. 눈물겨운 싸움이었다. 가히 감동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이 통째로 감동은 아니었던 거다.

영화 끝난 영화관에 혼자 앉아서, 나는 전체적인 책의 흐름이나 내용 보다는 등장 인물 하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이 나를 붙잡고 자리에서 선뜻 일어서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마에까와 다다시, 실존 인물.
미우라 아야꼬와 같은 병인 결핵을 앓으면서 함께 투병 생활을 하다가 그녀와 사랑을 하게 되고,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자.
사랑하는 여자에게 감정적 부담을 지우게 될까 염려해, 그간 주고 받은 모든 편지와 선물을 곱게 포장해 여자에게 유물로 남겨주고 간 남자.


"아야짱, 나는 지금까지 아야짱이 용기를 가지고 살아 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도해 왔는지 모릅니다. 아야짱이 살기 위해서는 내 생명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약한 나로서는 당신을 구할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힘없는 나를 벌주기 위해서 나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길은 여기에, 설우사, 67쪽)  


모르겠다.
기독교는 스스로 벌 주는 것을 권하는 종교인가.
최소한 허용하는 종교인가.

기나긴 투병에 지쳐 살아갈 의욕을 잃은 미우라 아야꼬에게 마에까와는 저렇게 말한다. 그러면서 손에 돌을 들고 자신의 발을 내리 찍어 상처를 입힌다.
생명을 아끼고 소중히 하라고 삶을 진지하게 대하라고 여러 번 말해 왔지만 여전히 허무와 우울에 빠져있는 미우라 아야꼬를 향해, 자신의 몸으로 항변하는 마에까와.
그러한 남자의 모습에서 미우라 아야꼬는 어떤 빛을 본다. 그 진지함에 감동받아 마에까와를 사랑하게 되고 그 남자의 종교인 기독교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미무라 아야꼬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남자, 마에까와라는 사람의 존재는 나에게 경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만한 힘이 자신에게 없다고 스스로를 벌하는 그 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사람 자체는 놀라움이었다.
사랑을 가꾸어 나가는 그 정성이라니, 이건 도저히 사람의 경지가 아니다.

대체 인간이 이렇게 살 수도 있나?
무슨 사람이 이렇게도 철저하게 경건 성실 진심 전심으로 일관하는가.

매사 매시, 마에까와에게는 대충이라거나 적당히라거나 어쩌다보니 같은 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 항시 마음을 다했고 그렇게 움직였다. 예수님을 잘 모르는 내 보기에 그건 거의 예수님 수준이었다.
도대체가 흔들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도 힘든 투병 생활을 하면서 연인 돌보는데 쏟아붓는 헌신과 정성에는 그야말로 빈틈이 없었다. 아야꼬의 입원실에 방문할 때면, 그녀뿐 아니라 다른 입원환자들의 필요까지 채워주었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매번. 자기 자신 역시 중증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라는 게 과연 한 인간을 이 정도 수준까지 고양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마에까와를 이렇게 만든 것이 정녕 신앙이란 말인가.

영화는 끝났는데 나는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선한 행동이란 어쩌면 한계가 없는 걸까, 사람은 무한히 선하게 살 수도 있는 존재이던가.
나는 살면서 성악설 쪽에 표를 주었었다. 인간은 후천적으로, 배우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선해진다. 마에까와는 바로 그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엔딩 크레딧도 다 올라가고 음악도 사라지고 영화관에 불이 들어온 지는 이미 오래고.

마에까와 다다시.. 마에까와 다다시..
빈 스크린 가득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며 망연자실 앉아 있다가, 번쩍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다.

갑자기 영화 위에 현실이 팟 겹쳐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영화는 사라지고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다.
가만 가만, 그러니까 기독교 신자가 되면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거 아냐,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하더라도 아무튼 원칙적으로 저래야 된다는 거잖아.

벌떡,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런 세상에, 저건 내 몫은 아니다. 주제를 알아야지.
원칙은 기본적으로 지키라고 있는 거다. 지킬 수 없는 원칙임을 사전에 알았다면 아예 시작조차 않는 게 낫다. 괜한 호기심으로 얼쩡거렸다가 나중에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무슨 사서 고생할 일 있냐, 젊어 한 때는 이미 지났다.  

후.. 저렇게까지 고양된 정신이라면, 그래 부럽긴 하다. 바람직한 인간형이다.  
그러나 나는 마에까와처럼은 살 수 없다. 재고? 일고의 여지도 없다.
못한다. 저건 내 수준보다 절대적으로 위다. 한없이 위다. 나로서는 어림없다. 근처에도 못 간다. 흉내도 낼 수 없다. 마에까와는 사람 같지도 않다. 그렇게 사는 사람을 나는 내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 들은 적도 없는 거 같다. 유유상종이랬던가, 미우라 아야꼬도 대단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음.. 끼니를 걸러주지 않기로 맘 먹은 게 조금 부끄럽다. 그렇지만 사실 미우라 아야꼬의 인품이나 매력은 책과는 관련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었다.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도 했다.
마음에 항상 중심이 잡혀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흔들리지 않는 삶, 갈등이 별로 없는 삶. 그 때 잠깐 가슴이 저렸었다.
인생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아주 작은 선택조차, 하려는 그 순간에는 이런 저런 망설임으로 시간을 끄는 나에 비해 그는 참 평화롭게 살고 있어 보였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흔들려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믿어서 행복하지 않은 종교를 남에게 권하는 일은 나쁜 심보라고도 덧붙였었다. 자기는 그렇게 심술맞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안다, 나는 그의 말을 믿는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믿어서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도 마에까와처럼 살고 있나, 설마?

아니, 그건 아니다. 내가 보기엔 아니다.
그는 일단 재치와 해학이 풍부한 사람이다. 짧은 말 한마디로, 나를 혼자 한참씩 깔깔거리며 웃게 하곤 했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마에까와의 재치도 수준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재치는 극도의 경건함에 눌려 조금의 웃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잘해야 그저 빙긋 한 번 미소지으면 그걸로 다인 분위기였다. 자신의 뛰어난 감성도 평상시에는 거의 드러내지 않다가 단가라는 짧은 글이나 미우라에게 보낸 편지에서만 살짝 보여주었다.
마에까와랑 함께 있으면 항상 진지한 대화만 나누어야 할 거 같다. 가벼운 농담이나 시답잖은 얘기라도 한 마디 했다가는 금방 훈시를 들어야 할 거 같다.

그도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 것이었다. 나는 그걸 믿는다.
그렇지만 마에까와만큼, 거의 극도로 청빈하거나 금욕적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둘은 분명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그러나 개인 차이라고 자신할 수 있나.  

하긴, 미우라 아야꼬가 본 것이 마에까와의 모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마에까와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니니까.
내가 아는 그 또한 그의 전부라는 보장도 없다. 그도 메일 속 상상의 인물이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하는 말들을 듣고 있을 때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그리 어려운 일 같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마에까와를 보고 있자니 멀리로 도망가고 싶어진다.
마에까와 수준의 청빈 금욕 절제 희생 봉사들은, 인심을 잔뜩 써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줘 봐도 도저히 내가 미치는 높이가 아니다. 마에까와의 경지는 오르지 못할 나무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는데. 살아보니 옛말 그른 거 별로 없던데.


신앙을 갖는다는 건 역시나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신앙을 지니고 경건하게 살기에는 나는 너무 세속적이고, 속세의 즐거움에 빠져 희희낙락 살기에는 나는 또 너무 종교적이다.

이 나를 어떡하나.
참, 비극이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