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2 - 12 성경책을 열다 (은강)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8. 24. 14:58


은강의 순례여정

주제에 나는, 목사로부터 받은 성경책을 하나 갖고 있다.
결혼 선물이었다. 가까운 후배가 목회 공부를 하던 사람과 결혼을 했고, 결혼한 지 얼마 후에 목회를 시작했다. 그들 부부가 내 결혼 선물로 성경책을 고른 것이었다. 그 때도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 부부는 주었고 나는 웃으면서 받았다.

20년 넘는 동안, 책꽂이에서 빠져나올 기회라곤 오로지 책 정리할 때 뿐이었던 성경책을, 나는 드디어 책꽂이에서 꺼냈다.
깨끗했다. 하긴 책 깨끗한 게 무슨 자랑이랴만, 오래 묵은 책 답지 않게 얼룩 없이 색도 고왔다.
붉은 색 가죽 장정, 모서리에도 붉은 칠이 되어 있다. 양의 피를 의미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이걸 새 책이라고 해야 하나 낡은 책이라고 해야 하나?
오래 된 가죽이어선지 냄새는 나지 않는다. 아니다, 잘 맡아 보니 여리게 남아 있는 듯도 하다. 희미하지만 가죽 냄새 맞다.      


<貫珠 聖經全書>


관주 성경전서.
표지에 금박으로 인쇄되어 있다.
뒤집어 뒷면을 본다. 대한성서공회, 작게 양각되어 있다. 이건 한글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진 유일한 가죽 장정의 책인가 싶다.

붉은 가죽 표지에 붉은 칠이 된 옆 면으로 인해 책은 전체적으로 품위있어 보인다. 누가 봐도 성경책임이 분명하지만, 성경 아니라 해도 이 정도면 겉모양이 과히 떨어지지는 않는다.
책을 준 후배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후배는 열심히 사모 역할을 잘 하는가 보았다. 그들이 연 개척교회는 많이 커졌다고 들었다. 물론 연륜도 쌓인 거고.
바닷가 작은 도시였는데, 놀러는 갔을지언정 그곳을 찾을 생각은 못했다. 인사 삼아 가볼 수도 있었을 텐데.

표지를 연다.
안 쪽에 종이를 댄 가죽이 뻣뻣하게 열린다.  
20년 만에 열리는 표지, 이 책도 팔자가 어지간히 사납다. 책으로 태어나 어쩌면 20여 년을 그저 묻혀만 살았단 말인가, 처음 선물 받고서도 그저 겉만 구경했다. 책장을 넘겨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一九六四年
貫珠 聖經全書 簡易 國漢文 한글판
大韓聖書公會 發行'


1964년, 관주 성경전서 간역 국한문 한글판, 대한성서공회 발행.
숫자까지 한자로 쓰여있다. 한자로 쓰인 숫자는 오랜만에 본다. 아니 숫자뿐 아니라 한자도 오랜만이다. 요즘엔 신문에도 한자가 없는데.
'한글판'이라는 말만 한글로 쓰여 있다. '판'자는 왜 한자로 안 썼나 모르겠다.
또 넘겨본다.


'舊約全書'


구약전서.
선민으로 선택된 유대인들과 하나님의 이야기. 구약, 옛 약속.  
 
한 장 더 넘긴다. 구약의 책 목록이 주욱 나와있다. 한자로 쓸 수 있는 말은 다 한자다. 쪽수를 알려주는 숫자도 한자다.
創世記 出애굽記 레위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빼곡 들어찬 한자를 들여다 보고 있자니 눈도 어지럽고 머리도 어지럽다. 글자들이 한글만큼 빠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구약이 모두 39권으로 되어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신약은 27권이다. 살다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걸 기억하는 경우가 꽤 있다. 당연하게도, 중요한 건 기억하지 못한다.
구약 39권의 제목들을 눈으로 훑어 본다. 몇 개 빼고는 낯설다.  
내가 읽어야 할 '고린도전서'는 신약이다. 그건 안다.
무더기 무더기 넘기며 신약을 찾는다. 구약은 1331쪽으로 끝난다.


'新約全書'


신약전서.
이곳부터 예수님 이야기인가.
끄트머리로 가 봤더니 423쪽으로 끝난다. 구약의 삼분의 일이 채 안된다. 양이 중요한 건 아니지.

고린도전서는 바로 찾았다.
16장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고 263쪽에서 시작한단다. 내가 읽어야 할 곳은 15장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을 '꼭' 읽어보라고 했다. 꼭 읽어보래서, 나는 서둘러 성경책을 꺼냈었다.

15장, 찾았다. 282쪽이다.
빼곡한 글자들, 게다가 세로쓰기, 너 오랜만이로구나 반기기엔 좀 많은 듯한 한자.. 이거 읽다가 자전 찾아보는 일 생기는 거 아닐까.


兄弟들아 내가 너희에게 傳한 福音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고린도전서 15:1, 간역 국한문 한글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크,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내'가 누구람, 고린도전서를 누가 썼다고 했더라? 미우라 아야꼬가 가르쳐줬는데, 입력이 되어있지 않다. 그녀의 책에 있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찾아본다.
바울이 썼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냈다는 두 통의 편지 중 앞의 것.

가만 보니 성경에는 편지가 많다. 무슨 서 무슨 서, 웬만하면 다 '서'로 끝난다. 그래서 번역본 이름도 '간역'인가. 편지 간 바꿀 역.  

고린도는 로마제국 아가이아주의 수도란다, 아주 큰 도시였단다.
바울이 그 곳에 교회를 만들었고, 이후 그곳에 직접 가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곳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쓴 편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의 '나'는 바울이다.

바울. 그에게서 바울 이야기는 몇 번 들었다.
율법주의를 가장 경계한 사람이, 그에게 듣기로는 바울이었다.
예수의 제자는 열 둘이다. 그건 나도 안다. 그건 너무나도 유명한 얘기다.
그러나 바울은 그 열 둘에는 속하지 않은 사람이랬다.

바울은 생전의 예수를 만나 제자가 된 게 아니고, 십자가 사후, 부활한 예수를 만나 사도가 되었다고 했다. 늦게 되었지만 그의 공은 엄청나서 지금의 기독교가 있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란다. 예수의 가르침을 정리한 바울의 글들이 수준이 높다 보니, 후세의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는 바울이 만들어 낸 종교라고 비하하는데 쓰기도 했단다.

전국민의 애창곡 '사랑'의 가사도 바울이 쓴 글에서 따온 것이란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교훈에서 발췌한 모양이다.
'사랑은 언제나..' 로 시작해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로 끝나는 노래.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최고라고 웅변하는 노래.

사실 나는 그 노래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노랫말이 지나치게 반듯하고 어긋장이라도 놓고 싶게 심히 계도적이다.
무진장 잘 참아야 하고 시기도 하면 안 되고 거기에 온유하기까지 한 게 사랑이라 했던가.
사랑이란 걸 하다 보면 화를 내게도 되는 거고 시기 질투도 하게 되는 거지, 설령 그러한 경지를 이상으로 삼을지언정 노래로 그렇게 가르치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서, 함께 부를 일이 있어도 열심히 따라 불러지지는 않는 노래였다. 그저 따라 하는 척이나 했었다.
그 노랫말의 원전이 성경이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교훈적인가.


兄弟(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傳(전)한 福音(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傳(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救援(구원)을 얻으리라 (같은 책, 15:1~2, 한글 독음은 원문에는 없음, 이하 같음)


아.. 이건.. 머리가 꼬인다.
한자 섞인 거야 '성경'이니 약간의 권위의식이 작용한 걸로 봐준다치고 무슨 문장이 이러냐.  

전체적인 의미야 그럭저럭 파악은 되지만 문장은 해괴하다. 이건 완전히 고어체다.
조사의 쓰임도 그렇거니와 그 흔한 쉼표 마침표도 하나 없이 그냥 줄줄이 이어 쓴 것이, 낯설고 물설어 적응하기 만만치 않겠다.

게다가 바울은, 그에게 듣기로 똑똑하고 말 그대로 잘난 사람인가 보긴 하지만, 아무리 잘났기로 이렇게 다짜고짜 말을 놓아도 되나? 이거 뭐 완전히 해라체잖아.
읽는 나도 넓게 보면 '너희'의 범주에 들어갈 테니 초장부터 어째 바울에게 대접 받지 못하는 기분이다. 콩이야 팥이야 따지고 든다면 대접 받을 자격이야 내게 없는지 모르지만, 바울 저나 나나 피차 초면인데 초면에 이건 좀 결례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傳(전)하였노니 이는 聖經(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罪(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葬事(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1:3)


갈수록 태산이네.. 이건 '사랑'으로 읽어야 하나. 오래 참기?
대체 이렇게 주술 관계가 안 맞는 문장이 만인의 애독서라니. 저 문장 대로라면 그리스도는 죽어서 스스로를 장사 치렀다는 말이 되지 않나?
으... 한숨이 나온다. 계속 이런 식일 거 아냐. 이걸 어떻게 읽어 나간담..

잠깐 망설여 보지만 별다른 수가 있을 리 있나. 그냥 대강 넘어가는 수 밖에.
한 번에 해독이 안 되는 일이 쌓이면 짜증이야 좀 나겠지만, 어쩌겠냐 뜻만 이해되면 넘어가야지. 성스러운 경전이니 그런가 보다 넘어가자. 내가 다시 쓸 것도 아니고 뾰족한 수가 없지.

읽어가다 보니 그가 읽기를 권유한 이유를 알겠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쓰여있다.
성경대로 죽은 예수는 역시 성경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 게바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어 보여 줬고 열두 제자에게도 보여 줬고 오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한 번에 보여 주기도 했단다.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람 중의 많은 수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한다. 이후에도 야고보와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났다고 쓰고 있다(4~8절).

문장이 맘에 안 들긴 해도 이해에 커다란 지장은 없어, 그럭저럭 읽어는 나간다.
부활의 의미, 신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언급되어 있다.
나에게는 여전히 '신화'에 가까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나 바울에게는 확실한 '사실'이었다.
바울에게 있어 부활은, 부활 이전의 모든 것을 다 더해도 그 비중이 부활보다 커질 수는 없어 보였다.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지금 전하는 것이나 믿음도 헛것이란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전파를 탄다.
의학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거고 대개 그 사람들은 죽어 있던 동안의 경험에 대해서 증언을 한다.
증언에는 주로 강이나 문이 등장한다. 강을 건너려거나 문으로 들어 가려다가 사공이나 문지기로부터 당신은 아직 때가 안 되었다고 제지를 받게 되고, 그래서 돌아왔더니 자기가 죽어 있었다고 하더라 이렇게 된다.
그들도 다시 살아 났으니 부활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문장이 이상한 대로 의미 파악이 어둔한 채로 마음 너그러이 가라앉히며 겨우겨우 읽어 나갔는데, 그렇게 나가다가 그만 막판에 딱 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