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5 삶이 곧 예배여야

은강의 당신께로의 여정
2-5
'종교화'에 대해서 그는 길게 얘기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비경험적 고정관념이 내게도 참으로 많구나 싶다.
그에 의하면 신앙생활이란 것이 뭐 그리 엄청난 고난도의 특별한 의식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애쓰는 정도의 의미였다.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신자라고 할 수 있나요?]
문득, 물어 봤다.
성경은 읽어 보지 않았어도 기독교신앙의 기본 진리가 '사랑'이라는 거 정도는, 사실 웬만하면 다들 알고 산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이거야 나도 수없이 들어왔다.
저런 액자 하나쯤은 어딜 가나 걸려 있다. 가게에 음식점에 사무실에, 도처에서 쉽게 만난다.
우리가 진정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다면.
그래, 진정 사랑하며 살 수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인가.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에게 사랑받고 사는 삶, 서로 관심을 기울이며 서로 헤아려 주고 서로 정성을 쏟으며 산다면.
나는 교회에는 다니지 않지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꿈은 있다.
진정으로 참된 사랑에 대한 소망은 있다.
그렇다면 나도 기독교인이랄 수 있나.
내 시건방진 소견이지만, 교회에 다니는 주변 사람들 몇이나 다니지 않는 나나, 사랑에 관한 자세에서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 보이지는 않는다. 대충 나도 그들이 사랑하는 거만큼은 하고 사는 거 같다. 때로는 오히려 내가 더 많이 사랑하려고 마음 쓰고 있는 거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사랑에 가치를 둔다면, 그 사랑이 기독교의 기본 실천 항목이라면, 비록 교회에는 나가지 않지만 나를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나?
[교회가 신자의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 일백 프로 아니예요, 일단은.]
그가 말한다.
[만약에 어떤 훌륭한 신자가 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교회 없는 곳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그 때 그 사람을 보고 교회에 다니지 않으니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신자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는 거죠.]
아 그렇네, 말 된다. 정말 그렇구나. 그런 생각은 미처 못했다.
그럼 나는?
[그러나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내 안에 받아 들이고 내가 그 분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전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사랑'으로 가득찬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면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높은 수준의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고양된 사람이라는 인정은 받을 겁니다.]
하나님을 받아 들여?
내 안에?
기독교 신앙의 최고 가치가 사랑이어도, 하나님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그 사랑도 기독교적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저 자신이 무교회주의자는 아니예요.]
그렇겠지. 무교회주의자라면 교회에 다닐 리가 없지.
물론 교회는 필요하다. 나도 안다. 같은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그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면서 '으쌰으쌰'도 해야 신이 나서 '사랑'도 더 하게 되는 거지. 일반적으로 사람은 여럿이 함께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법이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요즘에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 무렵엔 참 준비물이 많았다. 집에서 다 가져가야 했다. 아이는 아침이면 별 거 별 거를 다 가져갔다. 종이상자는 기본이고, 깡통, 나무토막, 플라스틱 작은 병, 골판지, 심지어는 부화 안 된 개구리 알에 부화되어 헤엄치는 올챙이까지, 뭐 기억도 다 나지 않는 온갖 걸 정말, 날마다 날마다 학교는 가져오랬다.
살림하며 나오는 잡동사니들을 나는 하나도 버릴 수 없었다. 언제 무얼 가져 오라고 할 지 몰라 커다란 상자에 혹시 싶은 것들은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상자는 작은 고물상이었다. 갖가지 색깔의 선물 포장끈, 플라스틱 충전재며 크기 다른 우유팩들에 작은 유리병.. 사소해 보이는 거 하나도 버릴 수가 없었다. 사는 일이 늘 그렇듯, 버리고 나면 꼭 아쉬운 일이 생겼다.
그렇게 한동안 모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웬만한 준비물은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준비물 안내가 오면 내 작은 고물상을 뒤적거려 열심히 챙겨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준비물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 날도 주섬주섬 준비물을 찾아 내 주었는데 아이가 말했다.
"이거 안 가져 가.."
어딘지 찜찜한 아이의 표정을 나는 얼른 눈치 채지 못했다.
바쁜 아침이어서 얼굴은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었다.
"응? 왜? 오늘 이거 안 한대?"
당연히 내가 물어 볼 수 밖에.
그런데 아이의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친구들하고 똑 같은 거 가져가고 싶어요."
그제야 놀라서 아이를 바라봤다.
아니, 이게 무슨 말? 똑 같은 준비물이라니, 어떻게 같아질 수가 있어, 집집마다 사는 게 다 다른데. 우리는 '요구르트' 먹고 옆집은 '야쿠르트' 먹잖아.
"문구점에 있어요.."
"문구점에서 판다고?"
끄덕끄덕.. 아이 표정에 기대감이 서렸다.
"이게 정말 다 문구점에 있어?"
"애들 다 그거 사 와요."
오오.. 나는 얼마나 둔한 엄마였나.
한도 끝도 없을 듯한 아이의 준비물을 챙겨 주면서 나는 자주 툴툴거렸었다.
엄마 없는 애는 증말루 학교도 못 다니겠네, 이런 준비물을 다 어떻게 애가 챙겨, 의무교육이라면서 이게 뭐야.
그런데, 엄마가 챙겨주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발빠른 상혼이 수고해 주고 있었던 거를 나만 몰랐나 보다.
나중에 얘기 들어 보니, 그걸 다 누가 집에서 챙겨주냐고 희귀종 취급을 했다. 3학년 즐거운 생활이요, 2학년 슬기로운 생활이요, 학년과 과목만 대면 문구점에서 알아서 척척 내준단다. 세상에나, 개구리 알도 팔았단다. 우리는 개구리 알 잡으러 병 챙겨 온 식구가 나들이를 갔었다.
아이는 매번 저만 친구들과 다른 걸 가져가는 게 싫었던 거다.
잠시 설득해 보려 했지만 막무가내 소용없었다. 너만의 특별한 준비물을 가져가는 것도 괜찮지 않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로 같은 걸로 가져가고 싶어? 집에 있는데도 싫어? 자신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 다른 이유도 더 없었다. 친구들하고 똑같은 거, 오로지 그거였다. 지 딴에는 많이 참았던가 보았다.
그 날 문구점에서 준비물을 사서 들려 보내고, 며칠 뒤 나는 고물상을 대강 정리했다. 그 후로는 준비물이 마침 집에 있는 거면 보내기도 하고 없으면 사기도 했다. 몇 번 사 줬더니 아이도 '같은' 걸 계속 고집하지는 않았다.
어린 아이도 그럴진대, 하물며 오래도록 그런 삶에 익숙해진 어른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같은 장소에 모여 함께 예배하며 어울리며 느끼는 동질감을 어찌 작다하랴.
교회 뿐 아니라 어느 공동체이건 마찬가지이리라. 경험이나 감정을 공유하며 산다는 건, 멋진 일이기 이전에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괜히 호모 사피엔스인가.
나도 무교회를 지지하려던 건 아니었다. 단지 원칙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말하는 원칙은 일단 내 비위에 맞았다. 혼자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는 있다는 원칙.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초대 교회에서 많이 변질된 감이 있어요. 교회 자체가 '종교화'에 앞장서는 듯할 때가 있거든요.]
이상할 것도 없다. 교회 뿐이겠는가.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되지 않는 것이 무엇이랴.
[우리는 구약 시대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해요. 히브리 신앙의 원조인 아브라함은 종교적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냥 자기 부족을 거느리는 부족장이었을 뿐입니다. 별 업적도 없는 사람이예요. 자기 이웃에게 잘해 주었고 나그네에게 친절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고 순종했어요.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신뢰와 순종'의 관계를 유지했지요.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이 기독교인에게는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이것은 '교회'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삶이 그대로 예배가 되어야 해요.]
언젠였던가, 우연히 접하고 인내심 부족으로 읽기를 포기한, 그 골치 아프게 길디 긴 예수의 계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로 시작되어 끝도 없이 이어졌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또 누가 누구를 낳고..
아브라함. 하나님께 자신의 외아들조차 제물로 드리려 했던 구약의 인물.
유명한 이야기다. 나도 알고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오래 살았나 보다. 일백 살에 아들을 얻었다는데, 그러고도 아마 한참을 더 산 모양이다.
아브라함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는 그 부분의 성경 내용을 함께 보내 주었다.
백 살에 얻은 그 귀한 아들을, 어느 날 하나님은 당신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개역한글)
번제? 제사인가 본데.. 번? 태울 번(燔)? 태우는 제사?
어린 이삭을 데리고 그 아이를 '번제'로 드리기 위해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
나이든 아버지가 나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 아들을 제물로 드릴 산을 향해 여행을 하는 장면은 영화에도 등장한다.
기억에, 길은 황량했다. 사막이거나 광야이거나, 그리 크거나 높지 않은 언덕들이 멀리 있고 땅은 좀 메말라 보였다. 누렇게 뜬 줄기 거친 관목들이나 목마른 잡초들이나 겨우 돋아 있던 길들. 화면은 온통 누런 색이었다. 빛바랜 낡은 사진.
사흘 동안 황량하디 황량한 길을 걸어 부자는 드디어 목적지인 산에 도착하고, 영화에서는 아브라함이 나뭇가지로 단을 쌓아 불 피울 준비를 한다. 나뭇가지들은 불 붙이면 활활 금새 타오를 듯 했다. 나뭇단을 제법 높이 쌓았었다.
어린 이삭이 묻는다.
"아버지, 번제에 쓸 양은 어디에 있어요?"
아버지가 대답을 했던가.
아브라함은 칼을 간다,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가는 칼.
칼이 보이고 손이 보이고 숫돌이었던가 가죽이었던가, 벼린 칼날에 쏟아지던 빛.
배우가 누구였더라, 하긴 영화 제목도 생각이 안 난다. 무심한 듯 체념한 듯 그러나 안타까운 듯, 어쩌면 묵묵히 어쩌면 고요히, 쉽사리 그 속을 짐작할 수 없게 배우는 아브라함을 연기했었나.
이윽고 준비가 끝나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쌓아 놓은 나뭇단 위에 눕힌다. 그 말없는 손길. 그런 다음 두 손으로 칼을 높이 든다.
어린 이삭은 아직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었을까, 저항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살려 달라고 외치거나 벌떡 일어나 도망가지 않는다. 아이의 표정에 두려운 기색이 있었던가... 긴 시간 지난 오늘, 아이의 그 표정을 되돌려 볼 일이 생기게 될 줄이야.
배우는 고개 들어 하늘을 잠시 바라 보았던 것도 같고 그냥 허공을 일별했던 것도 같다. 나뭇단 위에 높이 뉘인 아들을 흘깃 바라 보았던 것도 같고 그냥 무시해 버렸던 것도 같다.
이윽고 길게 휜 날카로운 칼을 마악 내리치려는 찰나, 하늘 어딘가에서 거룩한 음성이 들려 오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개역한글)
이야기의 반전.
아브라함은 칼을 내려 놓고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숫양 한 마리를 근처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 양으로 번제를 드린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세기 22:16~18, 개역한글)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약속을 지켰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세월을 두고 번창하고 예수는 그의 42대 손이라니까.
후우, 모르겠다.
도대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그런 지시를 하신 거지. 무슨 생각이셨을까.
그가 보내준 창세기 해당 본문을 또 다시 읽어 본다. 내가 혹시 잘못 읽은 건 아닐까.
하지만 맞다. 제대로 읽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꼭 그렇게 시험을 해야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내게도 아들이 있다. 내 사랑하는, 내 사랑스런 아들.
그 아들을 데리고 죽음의 여행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심사를, 내가 짐작이라도 한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외람이고 참람이다. 내 죽음이어도 못할 노릇일 텐데 하물며 아들의 죽음임에랴.
[하나님은 왜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을까요? 아브라함이 순종하리란 걸 알고 계셨을 텐데요.]
어쩌면 너무 식상한 질문일 듯 했지만, 그래서 웬만하면 묻지 않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그렇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런 시험까지 하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면 좋을까.
기도로 얻은 아들이랬는데, 줄 때는 언제고 애지중지 한참 키워 놓으니 다시 달라시다니, 빚쟁이 무슨 빚 받아 가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멀쩡한 아이를 하필 번제로 바치라니?
참.. 정말.. 이해 못할 하나님이시다.
[저거 안다고 나서는 사람들, 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가 운을 뗀다.
식상할지도 모를 질문을 보내 놓고, 나는 내심 살짝 긴장해 있었다. 저런 질문 한다고, 실망하려나?
그런데 아.. 그의 답변에서 조심스러움과 신중함이 같이 감지된다. 그리고, 이 화두는 어쩌면 기독교인들의 입에 충분히 많이 오르내리는 것인가도 싶은 느낌.
약간 냉소적이기도 한 그의 어투에,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만약에 은강님이, 유명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칩시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왜 은강은 새 컴퓨터를 두고 낡은 컴퓨터로 글을 쓸까요'라는 질문에(그 무렵 새 컴퓨터를 샀지만 거기에 문제가 있어 나는 낡은 컴퓨터를 계속 쓰고 있었는데, 그에게 자문을 구하느라 그도 알고 있었다) '뭐, 무슨 사정이 있나 보지' 또는 '내가 알아, 왜 그러는지' 이런 반응을 보일 겁니다. 그런데 수세기 지나 '은강학'이 유행하는 시대에서는 '은강학'을 전공한 교수가 모른다고 절대 말 안 합니다.]
은강학 진도를 막 나가네.
못하지. 말도 안 된다.
저건 '은강학'의 핵심이 아니다. 정말 '은강학'이라는 게 생긴다면 그 학문을 연구하는데 저건 절대로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없다.
그가 들어준 예에 잠시 웃는다. 하나님을 향해 꼬여 있던 기분이 풀어진다.
그는 가벼운 한 마디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다. 좋은 재주다.
[아브라함이 실제 인물이 아니고 저 이야기가 신화라면, 설명은 엿장수 맘입니다. 목소리 큰 엿장수 해석대로 따라가도 별 지장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실제 인물이에요. 그리고 기록은 저게 답니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습니다.
'신화'를 해석하는 것과 '사실'을 해석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실'의 해석은 철저하게 '기록된 것' 중심이어야 합니다.]
[당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이삭에게 어떤 경험이 필요했는지, 이 사건을 통해 어떤 새로운 다짐이 그들 사이에 있어야 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요했으리라는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역시 그는 합리적이다.
아브라함의 굳은 신뢰를 아신 하나님이 그것을 표현할 기회를 주셨고, '네가 나를 이렇게 신뢰했으니' 하시며 테스트를 취소하신 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줄 복을 천명하셨다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후우.. 이야기가 이렇게 되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건가. 아브라함이 가진, 당신을 향한 '전폭적 신뢰'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
기회를 주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내 사랑을 알릴까, 호시탐탐 아이 주변을 살피며 나는 기회를 엿본다. 귀찮더라도, 힘들더라도, 아이가 원하거나 아이에게 필요한 일이 생기면, 기회로구나, 해 주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랴.
아이를 향한 내 사랑이 드러나질 기회를 얻으면 반갑듯, 당신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이 드러나질 기회를 헤아려 베풀어 주신 걸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던 걸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얼마나 아끼셨던 걸까.
하나님과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하나님.
이건 시시비비 가려가며 내 취향 대로 생각할 문제가 아닌지 모른다.
지금 이 시대를, 그것도 아브라함이 살았던 땅과는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 끄트머리 반도에서 살아가는 내가, 아브라함이 살았던 문화를 동일한 코드로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아브라함을 모른다.
아브라함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에 복종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는 거다.
내 짐작 내 판단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나님은 그런 말을 내게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에게 했다. 아브라함이 듣고 아브라함이 판단했다. 나에게는 시비 걸 권리가 없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보여주고, 인간은 거기에 맞게 그저 행복하게 살면 되었다는 구약의 시대. 기독교의 본질은 그것에 있는가.
이미 너무 '종교화'되어 개인의 신앙이 설 자리가 좁아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지금, 기독교는 이 시대를 위해 어떤 꿈을 지니고 있는가.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차마, 그에게 그 말은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