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7. 3. 09:35



은강의 순례여정



당신은 사랑에 자신이 있는가.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해낼 수 있는가.

첫사랑을 잃은 후 오랫동안, 사랑은 내 삶의 화두였다. 그 쪽에서 나를 떠났는데 그 진정한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너에겐 내가 필요하지 않아, 너는 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어.

까무라칠 노릇이었다. 이 무슨 영화 대사같은 말이라니.
첫사랑,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 이성으로 받아들인 사람, 그런 사람을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니 물론 말이 안된다. 그런데 그 첫사랑은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삶은 때로는 기차놀이 같다.
나에게 허용된 건 앞 사람의 허리이다. 내 앞 사람은 그 앞 사람의 허리를 잡고 내 허리는 뒷사람이 잡는다. 내 허리를 잡은 사람을 나는 잡을 수 없고 내게 허리를 잡힌 사람은 나를 잡을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차놀이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사랑이 떠난 자리는 사랑으로 메워야 한다지만, 나는 잃은 사랑을 앓는 것만으로 바빠서 다른 사랑은 쳐다보지 않았다. 

나에게 자기가 필요없다고?  

문제가 너무 어려웠다. 내 수준을 넘는 문제였다. 그 사람이 안다는 '나'를 정작 나 자신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자기에게 내가 필요없다고 할 일이지, 그냥 내가 싫어졌다고 할 일이지, 이게 대체 무슨 암호 놀이냐.  
내 사랑을 조문하며 곱씹고 곱씹었다. 어느 날은 알 것도 같다가 다음 날이면 헷갈렸다. 정답지가 딸려있는 문제집도 아니어서, 알 거 같았던 순간에도 문득 자신은 없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가 말한다.
안다, 사랑이 기독교의 기본 교리라는 건 이제는 거의 이 시대의 상식이다.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너무 흔하게 나돌아 진지하게 음미해 볼 겨를도 없이 지레 식상해져 버린 사랑에 관한 계명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해 패러다임을 갖고 있죠.]

으앗 패러다임, 이거 얘기가 좀 골치 아파지는 거 아냐.
패러다임(paradigm), 사고의 틀. 그래 뭐, 당연히 종교에 대해서도 갖고 있겠지.

전에, 아이 문제로 조언을 구할 일이 있어 어느 입시 미술 학원에 찾아갔었다. 이리저리 잠깐 구경하던 중, 게시판에 걸린 강의 시간표에 시선을 주었다가 눈에 번쩍 띄는 과목 이름을 하나 보았다.

발상의 전환.

호오 이거 이거, 발상의 전환? 아니 강의 과목이 '발상의 전환'이라니, 논술이나 작문 학원도 아니고 무슨 영재교육 학원도 아닌 미술 학원 수업 시간에 '발상의 전환'이라니, 내 보기엔 제목 자체가 바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이 미대 입시의 새로운 추세라고 했다. 음악을 들려 주거나 글을 한 편 읽게 하거나 토론을 하게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일련의 추상적 과정을 거치게 한 후 그에 관해 떠오르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단다. 설명만으로도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애들이 그걸 그려내나요? 뭐 수준 차이가 크죠 잘하는 애부터 손도 못 대는 애까지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니까 대학에서 실기 시험에 쓰는 거고요.
내 머리 속에서 미술 학원이라 하면 주로 그리이스 로마 시대의 잘생긴 남자들이나 죽어라 그려 대는 곳이었는데, 그렇게 달라졌을 줄이야.

급변하는 시대를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를 사는 이들은 일견 불쌍도 하다.
사회문화적 패러다임이 지독히도 빠른 속도로 변해, 따라 잡는다고 잡아도 잡고 보면 뒷북이다. 느린 시대를 살아온 나이 든 사람들은 변화 속도에 자신을 맞출 재간이 도무지 없다. 무언가 새로운 거에 간신히 적응하고 나면, 더 새로운 것이 이미 기다리고 있다. 끊임없는 적응, 적응의 종교화.  
각종 기계장치 전자기기만 빠른 속도로 변하는 게 아니라 사고 방식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건 점점 사라지고 '상대적'인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절대가치 절대진리는, 어쩌면 조만간에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될른지도 모른다.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다방면의 패러다임이, 기어이 종교에서마저도 적용이 되는 건가.
여기서도 패러다임의 전환인가.

[그 중의 하나가 '요구하는 신, 바치는 종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신이 항상 인간에게 무언가를 요구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칩니다.]

그렇지 바치지. 그것도 그냥 바치나, 정성을 들이 부으며 아주 많이 바치지.
헌금도 바치고 기도도 바치고 예배도 바치고 절도 바치고 공양미도 바치고 돼지머리도 바치고 소머리도 바치고 통돼지도 바치고 기왓장도 바치고 등에 불도 켜서 바친다. 바치고 바쳐도 부족해서 뭐 더 바칠 게 없으랴 머리를 짜 낸다.
그렇게 해야만 신이 자신에게 복을 돌려줄 거라고 믿는다. 바친 게 없으면 바라지도 말라는 거지, 신에게서조차도.
기브 앤 테이크, 현대인의 계명.

[이러한 것들이 실은 인간이 지닌 종교적 옛 본성입니다. 타락한 마음이죠.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잘보이려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부인데,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배격합니다. '너희 제사 때문에 하나님이 견디지 못하시니' 같은 말이 선지자를 통해 선포되었거든요.] 

제사 때문에 견디지 못하시니? 하나님이? 
흠.. 
 
[그런데 이러한 패러다임이 종교 지도자들의 필요에 의해서 강화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 지도자의 이익에 맞게 도구화되어 온 경향이 강합니다. 지도자들은 종교를 빌어 인간의 욕심도 나무라고 자기 중심주의도 나무라고 심한 쾌락주의도 나무랍니다. 그렇게 했을 때 종교 지도자의 몫이 커지니까요.]

어라, 얘기가 이렇게 되네..

[저런 패러다임으로 성경을 읽으면, 꼭 그렇게 요구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심하고 읽으면, 놀랍게도, 이렇게 요구하지 않는 종교도 없을 정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인간을 위해 있습니다. 절대로 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인간을 위해 있다? 그것도 기독교가?

종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인간을 위해 있나 신을 위해 있나.

그의 얘기와 초점은 좀 다르지만, 신이 종교를 만든 게 아니라면, 종교라는 제의를 만들어낸 게 인간이라면, 종교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맞다. 종교적 행위 또는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나 적어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있으니까 만들어 냈을 거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변질되어 왔는가.
긴 시간을 두고, 물리적인 변질에 종교 지도자의 필요까지 가미되어, 지금에 와서는 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는가.
         
종교라면 나는 일단 구속감을 느낀다. 더우기 기독교에서 가장 큰 구속감을 느낀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내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바쳐야만 혼나지 않을 거 같다. 내 시간도 바치고 내 노동도 바치고 내 돈도 바치고 심지어는 내 미래까지도 바쳐야 할 거 같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교회에서 예배를 봅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하는 것이 더 건전하리라는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너 자신을 위해서 하라고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창조주라면,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잘 살아 드리는 것 밖에 무엇이 더 있을 수 있겠어요?]

나왔었던 이야기다.
내가 내 아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정말이지 그저 저나 잘 살아주면 그걸로 그만이다.
그렇지만 모르겠다. 그 관계가 하나님께도 그대로 적용이 될까. 아이를 향한 내 마음이 정,말,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일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구조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입니다. 바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죠.]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5:12 개역개정)


[계명이란 신앙의 최고 기준입니다. 그 최고 기준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입니다. 너희끼리 그냥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지요. 즉, 모델이 있는 겁니다.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는 모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모델로 다른 사람을 또 사랑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아아 그런가..
그렇게해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는 것이 기독교의 소망인가.
하나님이 먼저 사랑을 준다.. 모델로 보여질 '완전한' 사랑을 준다.. 그것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 준다.. 완전한 사랑.. 완전을 추구하는 사랑에 대한 꿈은 지니고 있었다, 나도.

살아오는 동안, 어떤 기독교인으로부터도 사랑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관심 갖지 않으니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나는 생각보다 많이 기독교에 대해 잘못된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어디에서 만들어졌나, 어쩌다 만들어졌을까.
내가 지닌 고정관념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크려나.


사랑은, 오르사랑보다는 내리사랑이 크다.  
어떤 자식이 어미가 저를 사랑하듯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떤 아비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듯 자기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 갚으며 사는 거다.

기독교의 사랑도 말하자면 내리사랑이라는 거다.
오르사랑은 올라가다 힘에 부쳐 사라지기도 하겠지만 내리사랑은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증폭되기가 쉽다. 역행은 어렵지만 순행은 쉽다. 거슬러 오르긴 어렵지만 흘러 내리기는 쉽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퍼져 나가는 사랑.. 그렇게 점점 커져 가는 사랑.
내 어머니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에게 주었을까, 나는 그 사랑을 받았나.

내 받은 그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두고 나는, 사랑을 알기 위해 그 긴 시간을 앓았을까.

그러고도 모자라, 아직도 나는 사랑에 이다지도 서툰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