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2 - 9 미우라 아야꼬를 아세요? (은강)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7. 15. 01:17


은강의 순례여정

 
[미우라 아야꼬를 아세요?]

미우라 아야꼬? 삼포능자?
아니, 그 일본의 여류 작가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나? 대충 대중적인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몇 십 년 전에 읽었던 그녀를, 거의 잊고 지냈던 그녀를 그에게서 듣다니 조금 뜻밖이다.

삼포능자, 내가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는 그렇게 불리웠었다.
감수성 좋은 우리들을 그야말로 눈물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그녀의 대표작 <빙점>.
그 때 그걸 읽고 울지 않은 우리 반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 무렵 우리들은, 소위 '대중소설'에 빠져 있었다. 사춘기 소녀들의 술렁거리는 심사를 대리만족 시켜주는 애틋하기 그지없는 사랑 이야기를 우리는 설레이는 가슴으로 읽었다.  
우리를 사로잡았던 인기 작가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작가들의 책이 한두 권 정도는 항상 교실에서 돌아 다녔다. 그리고 누군가 하나쯤은 수업 시간에 그걸 읽었다.   

그 때는 앞 사람 등 뒤에 적당히 숨으면 내가 선생님에게 보이지 않을 거라고 여겼었다. 내 눈에 선생님이 보이지 않으니 선생님 눈에도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왼쪽 왼쪽 아니 아니 쪼꼼 오른쪽 응응 됐어 됐어 등 좀 세워 봐 그래 그래 됐어 그대로 그렇게 앉아 있어, 앞자리에 앉은 친구의 등 뒤에 숨어 소설책 위에 교과서나 공책을 살짝 얹은 채 그 아래에서 조금씩 분위기 살펴 가며 읽었다.

나중에 나중에 진실을 알았을 때, 나는 웃었다.
내가 선생님으로 교단에 서 보니, 도대체 사각지대라고는 없는 곳이 교실이었다. 머리카락만 보아도 지금 저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이 교실이었다. 한 쪽 어깨만으로도 어깨 주인의 속마음이 읽어지는 곳이 교실이었다.  
아, 그 때 선생님들이 봐준 거였구나, 망신주면 자존심 상할까봐 넘어가 준 거였구나.  
별 수 없었다. 내 선생님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눈치껏 넘어가 주었다.

어쨌거나 그걸 몰랐던 시절에, 하긴 뭐 알았어도 기를 쓰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지만, 인기있는 책들은 수업 시간에도 쉬지를 못 했다. 누구는 학교에서 누구는 집에서, 온 학급이 거의 읽을 때까지 책은 노냥 바빴다. 자기 손에 올 때까지 진득하게 못 기다리고들, 얼마나 남았나 몇이나 더 봐야 하나 수시로 확인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책은, 우리에게 허용된 외부 세계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달리 문화 공간이 마련되어 우리가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와 집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전부였다. 그저 책 속에서나 다른 세계와 겨우 만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알게 된 다른 세계들은 우리 모두를 얼마나 달뜨게 했던지.

삼포능자의 <빙점>은 요샛말로 하자면 인기짱이었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어도 주인공 꼬마 소녀에게 닥친 그야말로 '장난 같은 운명'이 읽는 이의 심금을 절절하게 울렸다.
 
지금도 생각난다. 누구였던가, 수업 시간에 결정적인 장면을 읽다가 그만 못 참고 펑펑 울고 말았다. 물론 처음에는 참았겠지,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이 격해져 훌쩍대는 소리가 그만 온 교실에 들리고 만 것이었다.
선생님만 빼고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왜 우는지, 저렇게 울려면 어디를 읽고 있어야 하는지.
그 장면에서 울지 않은 친구는 없었다. '교양있게' 눈물만 흘리느냐 적나라하게 펑펑 우느냐 차이만 있었다. 나는.. 어지간하면 큰소리는 안 내려고 꺽꺽 애쓰면서, 울면서도 책은 놓지 않았었나 보다.   


주인공 여자 아이가 학교 무대에 선다. 춤을 추기 위해서다. 출연하는 아이들이 다함께 맞추어서 입는 새 춤옷이 필요하다. 그런데 엄마가 그 옷을 해주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는 물론 아니다.

그 엄마는 오래 전에 자기 아기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슬픔에 겨워 어쩔 줄 모르다가, 잃은 자기 아기 또래의 여자 아기를 입양해서 키웠다. 물론 갖은 정성을 들인다. 친딸을 사랑하던 그 마음으로 입양한 아기를 길렀고 아이는 건강하고 이쁘게 잘 자랐다. 학교에도 들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자기가 기르고 있는 딸의 친아버지가 자기 친딸을 치어서 죽게 한 사고 차량의 운전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드디어 시작되는 엄마의 갈등.

기른 정이 홈빡 들어 너무나도 사랑스런 딸, 그러나 친딸을 죽인 원수의 핏줄, 그게 빙점의 주 갈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음껏 미워할 수도 욕심껏 이뻐할 수도 없는 지독한 갈등 속에서, 엄마는 딸에게 새 춤옷을 해주지 않는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엄마만 바라 보다 그냥 연습용 춤옷으로 무대에 선다. 새로 해입은 아이들은 흰 색, 그 아이의 연습복은 붉은 색. 그런데 이게 오히려 그 아이를 프리마돈나처럼 돋보이게 하고, 아이는 슬프도록 아름답게 우아하게 춤을 춘다...


이야기가 저렇게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어디랄 것도 없이 훌쩍이며 읽었지만, 특히 주인공이 혼자 헌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그냥 줄줄줄 울었다. 문제의 친구도 바로 그 무대 묘사 부분을 읽은 거였다. 하필 감정이 풍부한 친구가 수업 시간에 그 장면을 읽었던 것이 불운이었지.  
그 날 우리는 압수당한 책을 찾기 위해, 참 백방으로 노력했었다. 책 주인이 우리 중에 없었으므로, 동네 언니에게서 누군가가 빌려 온 책이었으므로 우리는 기를 쓰고 그 책을 찾아와야 했다. 반 전체가 단체로 책임의식을 느꼈다.
니가 가라 아냐 니가 가라 뺏긴 니가 가라 아냐 걔는 약해 그럼 누가 가는 게 젤 효과 있냐, 설왕설래, 배가 산으로 가게 생긴 약식 회의를 거쳐, 결국은 여럿이 한꺼번에 몰려 가 참회와 애교를 있는 대로 동원해 겨우 찾아왔다. 높이 든 손에 책이 들려진 채 교실 문이 열렸을 때, 와아아~ 우리는 개선장군 맞이하듯 소란을 떨었다.

그 시절 무엇이 귀하지 않았으랴만, 책도 참으로 귀했다.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부족했다.
우리나라 출판업은 겨우 걸음마 단계였고 그나마 나오는 책들을 자식이 원하는 대로 사줄 수 있을만큼 경제력이 있는 부모도 드물었다. 참고서나 고전을 사 주기도 어려운 판에 저런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주옥 같은 명작'을 사 줄 부모가 있었을 리야.
학교 도서관이 있었지만 너무 낡은 책들 뿐이었다. 위험을 감수하며 수업시간에 읽어야 할만큼 재미있는 책들은 그 곳에는 없었다.  
교실 밖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는 유일한 통로인 책 구하기가 이렇듯 쉬운 시절이 아니었으니, 누군가 한 권 들고오면 온 학급이 돌려가며 읽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도 했던가.

지금 아이들이 그 재미를 알까, 책 한 권을 반 전체가 돌려가며 읽는 맛.
언제 내 차례가 되나 침 흘리며 기다리는 맛, 드디어 내 손에 들어 오는 순간의 그 충족감.    

빙점은 그렇게 돌려가며 읽은 숱한 책 중에서도 드물게 생명력이 길었다. 정말로 학급 전체가 거의 다 읽었고, 우리는 제법 오랫동안 그 책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 책을 읽었을 당시에는 삼포능자였다가 외래어에 대한 한글의 표기가 달라지면서 미우라 아야꼬로 이름이 바뀐 작가.  

그 미우라 아야꼬를 그가 어떻게 알까. 여학생 취향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소설 '빙점'을, 남학생들도 그렇게 돌려가며 보았을까 설마? 그랬다면 읽으면서 그들도 울었을까?
인간의 감성이란 게 너나 없이 큰 차이 나는 게 아니겠거늘 어찌 책 읽다 우는 남학생은 상상이 잘 안 되는 건지, 이것도 아마 고정관념이다.


[삼포능자, 미우라 아야꼬. 주부 작가였죠. 일본에서 가장 정신적 영향력이 컸던 작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어요. 남편과 같이 잡화상을 하면서 소설 빙점을 썼습니다.]

그랬구나.
책에만 관심을 두었지 작가에 대한 관심은 미처 챙기지 못했었다.
여성이 쓸 만한 소재여서 여성이라는 거 정도만 알고 있었고, 그 때 이후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계기가 다시 없었다.

[미우라 아야꼬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것도 아시나요?]

아니오, 전혀요.

[작가가 깨우친 기독교 사상을 바탕에 깔아서 쓴 글이지요. 더 정확히는 기독교 사상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썼답니다.]

미우라 아야꼬에 대해서는 <빙점>과 하나 더 <양치는 언덕>이라는 소설 말고는 아는 게 없다. 내가 아는 거라곤 그거 두 권에 들어있는 게 다고, 그나마 오래 되어 제목이 기억나는 거조차 스스로 신기할 지경인 지금이다.
그런데, 그 <빙점>이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고?

글쎄, 기독교 교리로 이해될 만한 것들이 내용 중에 있었을까.
풋, 생각날 리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줄거리도 잘못되었을지 모르는데.
너무 슬퍼서 참 많이도 울었다는 기억만은 강하게 남아 있다. 다시 읽어도 그렇게 눈물이 날까.

[사랑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임을 말해주고 있구요. 같은 작가의 '양치는 언덕'도 그런 의미에서 유명해요.]

<양치는 언덕>도 아네.
그건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였다. 그 역시 슬펐고, 가슴이 아렸었다. 구체적 내용은 잊었지만 두 남녀의 관계를 안타까워했던 당시의 감정은 아련히 기억난다.

사랑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 그렇구나.
사랑이야 뭐 문학의 영원한 소재인 거고, 용서가 함께 다루어진 책이었구나.

사랑과 용서. 
보통 사랑하기 전에 용서를 먼저 한다. 가슴에 맺힌 게 있으면 사랑하기 어렵다. 용서가 선행되지 않은 사랑은 가짜다. 
어? 아니다, 사랑하니까 용서를 하는 거 아닌가? 사랑하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없다. 그러니 사랑이 먼저다. 용서를 하기에는 사랑이 필요하다.
가만, 그럼 사랑하지 않으면 용서도 못해? 그건 아닌데? 사랑하지 않아도 용서는 할 수 있다. 용서와 사랑이 늘 필요충분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뭐가 먼저지? 사랑? 용서? 엿장수 마음?
으, 괜히 시작했다.
가끔 이렇게 안 해도 좋을 생각까지 하느라고 메모리가 부족하다.

<길은 여기에>라는 그녀의 책도 읽었느냐고 그가 물었다.
아니, 읽지 않았다. 제목은 낯설지 않은데 읽은 기억은 없다.

[한 평범한 주부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런 영향력있는 작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도 잘 나와 있구요. 그녀가 성경에 관해 쓴 책도 있는데, 초보자도 접할 수 있게끔 쉽게 썼어요. 그 책으로 기독교 공부를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웬만한 목사 강의보다 나을 겁니다.]

미우라 아야꼬를 권하고 있다.
물론 강권은 않지만, 이런 말을 듣고서 읽지 않을 도리는 없다. 인터넷 서점의 내 보관함에 책이 몇 권이나 담겨져 있더라.. 거기에 보태면 바로 무료 배송 주문이 가능할 거 같긴 하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추억하게 되다니.

[메일 주고받는 동안 미우라 아야꼬 생각을 줄곧 했어요. 님은 어쩐지 그 작가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습니다. 한 번 읽어 보세요, 꼭 기독교적 색채가 아니어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런.. 가슴 한 켠으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