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모세오경

마라의 언약과 성취



마라의 언약과 성취



바탕 본문: 미쯔라임 출국기(출애굽기) 15'22~27




요 며칠동안, 구약 성경 미쯔라임 출국기(출애굽기) 15장을 깊이 음미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미쯔라임(애굽)을 떠나 홍해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갈라진 홍해의 마른 해저를 밟고 건너, 미쯔라임 군대의 추적도 따돌립니다. 예호봐(여호와/야웨)님의 권능으로 미쯔라임 군대는 홍해 속에 수장되어 전멸했는데, 오늘날도 해저에서 옛 전차 바퀴 등 그 흔적이 발견된다는군요. 


홍해 건느기와 미쯔라임 군대로부터의 구출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거족적인 찬양이라는 이 장쾌하고 승리적인 사건(출 14'1~15'21)이 있은 거의 직후, 마라의 치유언약 사건이 전개됩니다. 



홍해를 건넌 뒤, 이스라엘 백성은 슈르 광야로 진입하여 사흘동안 물이 없는 행군을 계속합니다. 목말라 어쩔 줄 모르던 그들은 한 곳에서 물을 발견하고는 급히 서둘러 퍼 마시다가 비명을 지르며 오만상을 찌푸렸습니다. 물 맛이 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왜 이럴까요? 

왜 하필 하나님은 사흘 동안 물이 없는 곳으로 그들이 걷도록 하신 다음에, 왜 하필 쓴 물이 있는 곳으로 이끄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모종의 영적 의미를 찾게 됩니다. 



되돌아 보면, 이스라엘은 얼마 전부터 지도자 모쉐와 아론을 쉽사리 원망하곤 했습니다(출 14'10~12). 그들은 조금만 불편한 상황이 찾아와도 인내와 감사, 기쁨보다는 곧장 불평과 원망으로 치닫곤 했습니다. 

이왕이면 감사와 찬양을 할 것이지, 왜 그랬을까요?


450년전 아브람에게 미리 예고하셨던 미쯔라임 노예생활과 약속하신 민족 해방 사건과 관하여, 옛날부터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선택을 질시하며 특히 450년 노예생활 종식과 해방을 시기한 존재가 바로 마귀 싸탄 그 자였습니다. 마귀는 불평과 원망의 선구자이죠! 태초 이전, 셋째 하늘-천상에서부터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독생하신 아드님이신 성자님을 한없이 질투하여, 자기 맘에 맞는 천사들을 꼬드기고 구스르고 규합하여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쫓겨난 자였으니까요. 


그는 그래서 광야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충동질하여 그들을 원망과 불평의 화신으로 만들어 갑니다. 

원망과 불평은 집단 속에 가장 빨리 번지는 초급성 전염 증세의 하나이죠. S 등 이단집단들이 기성교회를 파괴할 때 써 먹는 상투적이고 일차적인 수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광야생활 초기에서부터 이스라엘을 훈련/연마 하기 위하여 '담금질'과 테스트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일이 생기면 금방 헤헤거리고 감사하는 듯 하다가 약간만 불편한 일이 있어도 불만의 입술이 불거져 나오고 불신과 불평 속에 투덜거리기 쉬운 백성을 참고 계십니다. 


그런데 노예생활에서 갓 벗어난 이 백성에겐 어떤 자극과 훈련(training 보다 discipline)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흘간 물 없는 광야를 헤매도록 이끄신 거 같습니다. 

그리고는 쓴 물입니다. 



아무튼 백성은 모처럼 마시려던 물이  쓰디쓴 것을 발견하자, "왝~, 이게 뭐야?! 물맛이 왜 이렇게 써?? 빛 좋은 개살구네~." 하면서 순식간에 지도자 모쉐를 향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뭘 마실까요?"라고 따지듯 캐묻습니다. 또 그 물과 그 지역을 '마라'(쓴 것)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믿음의 기다림과 인내라곤 조금도 없이 마귀의 충동질에 따라 급반사적으로 불평과 원망부터 하는 백성을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지켜보십니다.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고 이미 생각해 오셨을 터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해갈부터 해 주시려고 모쉐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쉐는 이 나무를 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우리는 '신천지'식 비유풀이를 경계해야 하지만, 여기서 여러 그루도 둘도 아닌 이 '한 나무'를 눈여겨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이 하나의 나무는 장차 오실 메시아 곧 예수 크리스토님이 지실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거의 분명합니다! 쓴 물을 치료하시려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마라-쓴 것(bitterness). 쓴 뿌리. 마치 백성 속에 가득한 불평과 원망 불신 자체와도 같은 이 쓴 물은 이 나무를 던져넣는 순간 고쳐져서 단 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뿌려놓은 온갖 죄와 악, 그리고 불신과 저주로 가득한 세상 속의 죄인들을 치료할 십자가를 지시려고 생명수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쓴 물이 고쳐져 단 물이 되어 목말랐던 백성들이 맘껏 양껏 마시고나자,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즉 그들이 불신과 원망 불평 대신, 오직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 경청하고 순종하면 전에 미쯔라임엔 재앙으로 내려졌던 병을 내리시지도 않을 뿐더러 백성의 모든 병을 치료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나는 너희를 고치는 예호봐(예호봐 라파)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특별히 반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징벌과 저주로서 온 독질 외에는 아무 병에도 노출되지 않게 지키셨고, 심지어 옷과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메리바에서처럼 그들은 끝내 감사할 줄 모르고 계속 거듭거듭 불신 속에서 하나님을 시험했기에 결국 그들 1세는 예슈아와 칼레브 두 사람 말고는 광야에서 다 망해 버리고, 그들의 후예인 2세들만 카나안 정복세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 언약은 훗날에도 유효했고,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진리입니다. 할렐루야.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셔서 백성을 위경에서 건지셨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샤 등 여러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치유했고, 왕이나 고관이 치유 받은 예들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대언자(선지자) 말라키가 예언한 바 치료의 빛을 발하는 의로운 해가 비춰 백성들이 외양간에서 뛰쳐나온 송아지처럼 "방방" 뛰게 하실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말 4'2).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으로 오셔서 믿음으로 나온 유다 백성들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신 치료자-예호봐 라파님은 바로 예수 크리스토님이십니다! 여러 죽은 사람들을 되살려내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사도가 되어 수많은 환자들을 고쳐 주고, 사도 파울 등 후기 사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늘날도 의로운 해는 여전히 치료의 빛을 발합니다. 

예호봐 라파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치료자이십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고침을 받습니다.  


마라에서 하신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요즘 소위 '신사도적 개혁운동'을 하는 인사들이나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은 기도와 간구로 나라와 백성이 고쳐진다는 둥, 회개와 겸손으로 땅이 고쳐진다는 둥 구약적인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나 민족, 땅이 고쳐진다고요? 과연 이것이 맞는 주장인지 한 번 알아봅시다. 


만약 나라나 민족이 고쳐진다면, 왜 40년 광야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은 고쳐지지 못해 끝내 1세들이 몽땅 멸망 당했나요? 또 그 2세들이 고쳐졌나요? 고쳐졌으면 왜 나라가 멸망해 버리고 아씨리아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나요? 바벨론 포로기 후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고쳐졌나요? 고쳐졌다면 왜 주후 70년 예루샬렘이 비참하게 멸망했나요?


민족이 고쳐진다면, 왜 니네베(니느웨)는 요나의 경고를 듣고 일시 고쳐지는 듯 했다가 다시 망해 버렸나요? 


이것은 고치신다는 말씀과 달리 하나님이 무능하셨기 때문인가요? 아니죠!

백성들이 끝없는 불신과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기네 스스로 망해 버린 것이죠.


신약시대에 지상의 어느 땅이 고쳐졌나요?



따라서 오늘날 백성과 나라나 땅이 기도나 금식으로 고쳐진다는 신사도들의 말은 황당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님은 마귀가 한시지배하고 있는 죄와 악의 메이트릭스인 이 세상에서 민족 치유나 나라 치유 등 모종의 거대치유를 하지 않으십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 '치유'됐다는 것입니까?

따라서 이런 기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개인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의지와 믿음을 중시하십니다. 


우리의 의지가 제멋대로의 의지로 행동한다면 하나님은 그냥 두고 지켜보십니다. 

우리가 믿음 없이 불신 속에 행할 때 하나님은 물론 성령으로 도우시다가 나중엔 관망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믿음과 의지로 행동할 때 하나님은 고치시고 이루십니다. 


그 분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