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이슈/영적싸움 도우미

용사 하나님 (영적싸움도우미시리즈6)



구약 성경에서 주/야웨(예호바) 하나님은 자주, 전쟁터에 나선-출전한 용장/용사 내지 전사/무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용사/전사 하나님은 영적 싸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승전 비결이 그 분에게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지금 신학 연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므로 이에 대해 학적으로 깊이 파고 들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영적 싸움과 연관하여 간단하고 손쉽게 잠시 생각해 보죠.

그렇다면, 하나님은 고대 신화에 나타나는 일부 전쟁신들처럼 정말 방패를 들고 칼을 휘두르시냐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거룩한 칼날에 피를 묻히시냐도 연상해 보게 되지요.

성경엔 하나님이 칼을 빼신다는 등 하나님의 무장과 무기에 관한 말씀들이 나타납니다.
에페소서에는 '하나님의 완전무장(온몸갑옷/전신갑주)'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신이신 맨 몸으로는 싸움이 안 되고, 이런 무장과 무기가 꼭 필요하신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지요.

또한..보좌에 앉아 계신 성부님이 과연 일어나셔서 몸소 갑옷을 입으시고 칼을 차시고 방패를 드시고 마귀 싸탄과의 전쟁에 출전하셔서 칼을 휘두르고 방패로 막으며 싸우시냐고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상대방의 피를 튀기며 칼에 유혈이 낭자하게 되냐는 식의 의문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모습은 심지어.."검을 쓰는 사람은 검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과 언뜻 모순돼 보일 수도 있지요.

우선 분명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영적 존재이시며 따라서 그런 무기를 쓰지 않고도 말씀과 입김(숨결)만으로도 승리하실 수 있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방 신화 속 제신들처럼 몸소 무장을 하고 무기를 지니고 출전하여 싸움을 하시거나 그 분의 '하늘 보검'으로 사람들을 직접 죽이시는 분이 아니지요.

비록 '전쟁의 하나님' 또는 승전왕으로 묘사됐어도 그러합니다.


따라서..구약에 나타난 용사 하나님의 개념은 상징적인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적이라고 해서 실질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이 실제로는 우리 성도를 위해 싸우시지 않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마귀와 그 악의 세력과 싸우신다는 것은 구약을 비롯한 성경 전체에 극명히 그려진 현실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용사'의 모습으로 스스로 상징 내지 비유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계시하는 독특한 방법이며, 동시에 지식과 슬기가 주로 시공간 속에서 감관으로 제한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시각적 표현 내지 연상법을 썼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사이심은 말과 글만의 허풍에 불과한, "속 빈 강정" 식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을 분명히 믿어야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골리앝을 이길 때의 다빋처럼.


성자님이 곧 용사 야웨님!

구약에 나타난 용사 하나님은 곧 성자님, 즉 예수 크리스토로 임마누-엘 하여 오시기 전의 주님이십니다. 이 점은 제가 이런저런 글에서 거듭 되뇌어 온 것으로, 여기서 재차 확인하고 강조하렵니다.

신학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구약의 주/야웨 하나님도 언제나 성삼위일체로 활약하셨습니다.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은 한 분이신 세 신격(성부/성자/성령님) 즉 '우리'로서 역사해 오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자님은 본질 상 보이지 않는 "불가견적"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약간 더 분석적으로 말해 보자면, 성부 하나님이 성삼위의 대표자시라면, 성자님은 성삼위를 인간 앞에 대리하신 하나님, 성령님은 성삼위를 대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요. 물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제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흙으로 빚으실 때도 성자님의 모습과 형상으로 빚어졌으며..서늘한 에덴 동산 속을 거니신 하나님도 성자님이시고, 아브라함을 '아브람'때부터 자주 방문하시고 천사들을 대동하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분도 성자님이셨지요.

그래서 훗날 예수님께서 아브람보다 먼저 계셨고 아브라함과 직접 대면하여 보신 적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야콥이 야뽁 강가에서 씨름한 그 분도, 모쉐가 뵀던 분도 성자하나님이시지요. 왜냐고요? 바로 주/야웨님은 성부 하나님이신 동시에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기도 하신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미쯔라임 출국(=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에 앞장서서 이끌어 내신 용사 하나님 역시 성자님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용사 하나님은 이 때 미쯔라임의 잡신 신상들을 쳐 부수고 떠나셨지요. 참 신은 오직 주/야웨님을 입증해 보여 주시려고!
에집트의 신전이나 피라믿 등 옛 유적터에서는 가끔 고고학팀에 의해 부서진 고대 신상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대다수의 진보주의 신학자들이나 이단자들은 이 용사 하나님의 실체를 몰라 자주 헛소리를 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하나님은 잔혹한 폭력적/유혈적인 신으로, 신약의 하나님은 온정과 사랑의 신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견해이지요. 이런 오착된 견해의 대표적 사례로는, 열렬한 스베덴보리 파('새교회') 교도였던 3중장애자, 헬렌 켈러를 들 수 있을 터입니다.
[ 켈러는 결코 거듭난 참 신자가 아니었음을 독자는 바로 아시길! ]
 
우리도 자칫 성경을 오해하면 쉽사리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지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 같은 분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거죠. 우리가 성령께서 주시는 분별과 통찰의 눈으로 성경을 신중히 묵상해 보면,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하나님은 항상 공의/정의의 신이신 동시에 사랑과 온정의 신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자주 진리와 사랑의 (번역에 따라 "인자와 성실의"일 수도 있음)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은 상호반대/이율배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호일치/완전병행 개념이지요.
참 사랑 곧 하나님의 아가페는 참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출전하신 용사 하나님은 곧, 택한 백성(선민)을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서 싸우시되, 그 분과 선민을 거슬러 적대하는 마귀와 어둠의 세력은 과감히 물리치거나 적군을 박멸해 버리시는 반면, 선민은 사랑으로 지키시고 돌보시는 양면성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용사 하나님은 미쯔라임 출국 당시, 파라오와 그 신민들을 열 재앙으로 엄벌하시고 그것도 부족해서 전마차를 타고 추격해 온 파라오의 대군을 홍해 바닷물 속에 몽땅 수장시켜 버리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단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게 고스란히 보호하여 인도해 내셨지요.
그 후 40년 광야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은 어린아기를 안듯이 업듯이, 독수리가 날개 위에 새끼를 얹어 나르듯이 그들을 지키고 이끌어 마침내 약속의 땅 카나안으로 끌어 들이십니다. 이 분이 용사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전사(戰士) 하나님의 완전무장

하나님은 인간 세계의 텀(term)으로 자신을 늘 실감나게 묘사하십니다.
그 한 예가 그 분의 '완전무장' 모습이죠. 에페소 6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곧,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화의 복음으로 예비된 군화, 믿음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기도 등 7가지의 공방(攻防) 장비와 무기들이지요.

사도 파울은 이 개념을 분명히 "하나님의 완전무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약의 이 개념은 구약의 예샤야후(이사야)서가 그린 예언적 그림에 메아리 쳐 화답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의를 갑옷(호심경/護心鏡=가슴받이)으로 걸치시고
         구원의 투구를 그 분 머리 위에 쓰셨다네
            또 그 분은 응징의 속옷을 입으시고
                열심을 겉옷으로 두르셨네!" (예샤야후=사 59:17)


구약 성경에는 또 하나님의 상징적/비유적인 무기/병기가 자주 나타나지요.
칼이나 활/화살, 창 등이 그러합니다(시편 7:12, 예레미야애가 3:12).

특히 하나님의 칼은 그 분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주 크리스토의 환상 계시 가운데 입에 양날검을 지니신 모습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전사 무장 모습이 곧 영적/상징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 상징은 막연하고 허황된 신화적 그림이 아니라, 영적이고 구체적/실질적으로 적용되는 권능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사도 파울은 이 용사 하나님의 완전무장을 우리가 갖추기를 촉구하고 있지요.
이 무장을 우리가 갖추기만 하면, 우리도 승승장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적군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시므로 우리는 잠자코 가만히 있어도 그 분께서 일일이 다 보호해 주신다는 식으로..일종의 태평안일무사주의 같은 것을 목청 높여 강조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최고주권이란 것은 우리의 "팔자 좋게 늘어짐"이나 무위도식을 위한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믿음의 의지를 발휘하여 적극 힘쓰고 애써 그 분의 완전무장을 걸치고 힘입지 않으면, 치명적인 전상(戰傷)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게 성경의 경고입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가 적대할 상대이지, 해롱해롱 어울려 장난할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죠.
마귀 군대를 물리치지 않으면, 그가 우리를 침투하여 무장해제 시키고 정복하려 들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요?
그런데도 '절대주권'을 믿고 우리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사전(事前)에 자진하여 자체무장 아닌 무장해제를 한 채로 머뭇거리고 있다면, 누가 대신 싸워 줍니까??   
나의 싸움은 내가 싸워야 할 뿐,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물론 온 성도가 함께 싸우기도 해야 합니다만..영전은 단체전 속의 개인전이고 백병전입니다.

하나님의 완전무장에 대한 부분적 설명과 그 효과 및 적용은 추후에 하게 됩니다.


자가 충돌/격돌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한 가지 참고로..우리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용사/전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적과 싸우실 뿐더러, 선민/의인이 회개하지 않고 악한 길에 머무를 때, 우리에게 '충돌'하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시 7:12, 예렘 3:12).

아군이 아군 상대로 공격하는 소위 '친전'(friendly fire) 비슷한 상황일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자해(自害)나 오폭(誤爆)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광야시대나 카나안 정복 이후 판관 시대, 특히 왕국시대에 두루 걸쳐, 하나님이 이러한 "아군을 치는 용사"로서의 모습을 자주 발견합니다. 자기 백성이 좀체 말을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은 되레 적을 들어 아군을 치십니다.  

윤용진 박사('키렙' 소장,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바로 이 용사 하나님의 이중적 면모를 면밀히 살폈습니다. 윤 소장은 그의 '여호와의 전쟁신학'(그의 논문집으로 매우 학적임)에서 이것을 '승리의 신학'과 '징벌의 신학'으로 나눠 표현했더군요.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오늘날도 성도가 잘못할 때 엄히 꾸짖고 징계하십니다().
비둘기처럼 온유하고 신사적인 성령님을 통하여 과거 전쟁시대보다는 훨씬 온유한 방법으로.
타일러서 안 되면 잘 안 되는-풀리지 않는- 상황을 통해서라도 성도의 잘못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분의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허용하시는 상황이지, 결코 자녀들이 "밉쌀스러워서"가 아니지요(신명기 8:5, 잠언 3:12). 그래서 징계 없는 자녀는 참 자녀가 아니라고 히브리서는 말합니다(히 12:8).
그러므로 우리 잘못으로 하나님께 충돌/돌격 내지 징계를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반항할 것이 아니라 두렵고 겸손한 맘으로 견디고 인내해야 합니다(잠 3:11, 19:18).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잘 파악하고 알아서, 무거운 징벌을 받기 전 제 때 제 때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이 슬기롭고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