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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적싸움 도우미

승전의 하나님 (영적싸움도우미시리즈4)





승전의 하나님


영적 전쟁은 물리적 전쟁처럼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상대를 두고 싸움을 한다는 생각이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기억한다면, 하등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의 피와 몸이 아닌 악령들을 상대하기에 언제나 이겨야 합니다. 이 싸움에 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만 하면,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에 늘 승리하기 위해서는, 물론 승전(勝戰) 비결을 알아야 합니다. 그 비결의 하나는 먼저 아군의 군세를 알고 적군을 아는 데 있지요. 우리는 적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 아군을 먼저 알고 나를 알고 적을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하고 나가더라도 우리는 먼저 아군과 나를 안 뒤에 적을 알면..입니다.

우리의 아군은 누구입니까? 
가장 먼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승전왕(=전승왕)이시지요. 하나님께는 패배나 실패란 없습니다. 언제나 이기십니다. 예컨대..하나님은 참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를 어떡하든지 죽이려고 하는 마귀의 온갖 전략과 시도를 모두 깨뜨리셨지요.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 놓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놓아 두시질 않습니다. 천사들, 사람들을 통해 늘 승리하십니다. 

마귀가 메시아를 십자가에 달 때, 마귀 쪽 사람들은 자기네가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이단의 괴수"를 없앴다고들 날뛰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자 마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맡아논 사망의 족쇄와 쇠사슬을 끊다니~."라며 신음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켜 예수님의 부활을 최대한으로 묵비사안, 사기 내지 조작사건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돈을 뿌려 가며 증인들의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디 진짜 비밀이 있겠습니까? 부활은 수많은 증인들을 통해 입증돼 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파울은 "사망아, 네 쏘는 것, 너의 화살이 어딨냐?"라고 묻습니다.


다빋은 개선가/승전가인 시 24편 후반부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누가 이 영광의 왕이신가?
     힘 있고 강하신 주/야웨님!
     전쟁에 강하신 주/야웨님!" (24:8)


사실 다빋처럼 이 진리를 실감한 사람도 없었지요. 다빋 자신이 적과 싸울 때마다 패배를 모르고 연전연승한 용장에다 승전왕이었지 않습니까? 그는 목동 시절부터 양을 움키려는 사자나 곰을 물리치더니,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욕 보이는 거인 골리앝도 물맷돌 하나로 때려잡았지요.   

그 승리의 비결이 어디 있었습니까. 다빋이 비록 전술/전략에 능하고 용맹과 담력이 뛰어났다곤 하나 비결과 비책은 따로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다빋에게서 영적 승전 비결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빋은 이어서 노래합니다.


    "누가 이 영광의 왕이신가?
    만군의 주/야웨님 그 분이 곧 영광의 왕!"


만군(萬軍)의 주/야웨님! - 바로 여기 다빋의 백전백승의 열쇠/비결이 있었지요.

만군의 주 곧 "야웨(또는 예호바) 쩨바옽"은 "수많은 무리의 주님"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중요한 대속(代贖) 칭호들(Redemptive Names of God)의 하나입니다. 모든 대속 칭호들은 곧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크리스토에게도 해당되지요. 대속의 하나님이 곧 그 분이시니까요.   

야웨 쩨바옽은 성경에 자주 나타납니다. 이 문구가 본디 뜻하는 바는 곧 하늘의 군대, 곧 셋째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들을 거느리고 계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다빋은 펠리쉩 적장 골리앝과 맞닥뜨릴 때, 이 만군의 야웨의 이름으로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슈무엘A=삼상 17장 참조) 


다윋의 승전으로부터의 교훈

골리앝에 대한 다빋의 승리는 영적 싸움에 관한 중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시사해 줍니다.

  첫째로, 마귀는 상투적으로 겁 주기 전술을 쓴다는 것입니다.

골리앝 같은 거인을 누가 쉽게 두려워 하지 않겠나요? 그의 키는 6 암마(=큐빝, 즉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까지의 길이) + 1 제렡(한 뼘)이라고 했으니 2.9m..즉 3m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덩치는 또 오죽했겠습니까?

지상엔 고대로부터 거인족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을 해석하는 한 학설에 따르면, 네필림은 본래 천사들과 인간 사이의 '교배종' 같은 거인이었다고들 말하지요. 
그 옛날 이스라엘 광야 1세대에서 뽑힌 12 첩보원들이 카나안을 정탐할 때, 10명은 아나킴(아낰 족)을 보고 "우리 스스로를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다"고 한 것을 미뤄볼 때 그들의 체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민수기 13:32).
그러므로 골리앋 형제들은 네필림이나 아나킴과 대동소이했거나 그 후손이었을 터입니다.

고대 거인족은 오늘날 기네스북 신기록 상으로 세계 최장신의 사나이들보다 덩치가 더 컸음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10 첩보원들은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초라하게 보인 겁니다.

그러나 두 첩보원-예호슈아와 칼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만군의 주님을 신뢰하고 의존했기에, 오히려 그런 거인들이 한낱 '메뚜기'로 보였을 터입니다(민수기 14:6-9). 그래서 "그들은 우리 밥입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누구를 메뚜기로 보느냐..자신이냐 상대냐..이 영적 시각의 차이에 따라 승리가 좌우됩니다. 할렐루야!

아무튼 골리앝은 큰 덩치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굉장한 무장을 했습니다. 놋투구를 쓰고 물고기무늬 갑옷을 입고, 베틀채 같은 거대한 창을 쥔 데다 거대한 칼을 찼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겉 모습과 겉치레로 최대한 호기를 부리며 다가옵니다. 때로는 우왕~ 하고 포효하며 달려드는 사자처럼, 때로는 화려하고 광명한 천사처럼. 

자, 그러니..온 이스라엘 군대는 멀리서 골리앝의 덩치와 중무장한 모습을 바라만 봐도 오금이 저려 와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키가 큰, 나름의 거인이던 샤울 왕 조차도 골리앝 앞에서는 떨었다니, 골리앝이 얼마나 거인이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샤울은 소년 다빋이 골리앝을 상대하려 나가겠다고 하자 말립니다. "너는 소년이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장수였다"고. 그러자 다빋이 뭐라고 합니까? (슈무엘A=삼상 17:33-37 참조 바람)

다빋 역시 고대의 예호슈아와 칼렙처럼 만군의 주님을 의존하고 그 이름으로 골리앋을 상대합니다. 예..만군의 야웨 이름으로. 여기 이 이름으로가 중요합니다.

도대체 만군의 야웨가 누구이시기에 그 이름이 그처럼 권능이 넘치고 강력했던 것입니까?

자신이 기다리고 열망하던 누군가가 도우미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하나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거 같다"이지요. 물론 과장법이지만 그만큼 큰 도움으로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군의 야웨를 의지함은 천군만마를 넘어 그 훨씬 이상이라 해도 과언도 과장도 아닙니다. 왜냐고요..? 만군의 주님의 권능은 세상 모든 군대를 초월하니까요!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세상은 적을 먼저 알라지만..우리는 아군 즉 하나님과 우리와 나 자신을 먼저 아는 것이 승리의 기본임을. 

어디 볼까요?

다빋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목동 시절 양떼를 돌볼 때 사자나 곰이 나타나도 하나님이 늘 지켜주심을 깨닫습니다. 그가 성령님의 영감으로 쓴 대표작인 시편 제23편에서도 느끼듯, 그는 자신이 양떼를 돌보고 지키고 구하듯 하나님도 자신을 그렇게 하신다는 확신 속에 평생을 살아갑니다. 다빋이 평범해 뵈는 목동에서 비범한 용장, 더 나아가 승전왕이 된 내력이 그겁니다. 

그는 어떤 경우라도 만군의 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지키시고 이기게 하셔서 승리를 얻을 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적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우리가 참 믿음을 갖는다면 다빋처럼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튼..우리는 먼저 아군-하나님과 우리(천사와 참 교회, 동료 성도들), 나 자신-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파울은 믿음의 아들 티모테에게 말합니다: "네가 성경을 알아왔으니.."
성경을 아는 것도 아군을 아는 것이며, 진리와 영적 싸움의 비결을 아는 것입니다.

다빋 역시 어릴 적부터 듣고 배워 익힌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만군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았기에 다름 아닌 그 분의 이름으로 전투에 임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키가 3m 넘는 거인 적장도 두렵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는 무거운 샤울 왕의 갑옷도 번거롭기만 하여 사양합니다! 다빋은 골리앋의 중무장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요?..우리에겐 하나님의 완전무장/온몸갑옷이 따로 있기 때문이죠!
다빋은 가히 만군의 주/야웨님의 이름으로 무장하고 나아가는 셈입니다. 물론 다빋은 미리 준비한 물매와 물맷돌을 지니고 나아가지만, 그것을 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가 주로 의존한 것은 만군의 주님의 이름입니다.

우리의 칼과 창, 우리의 군마가 우리를 이기게 하지 않지요. 전능신이신 만군의 하나님께는 그런 유형적 무기가 무용지물이나 다름 없습니다. 무기 없이도 이기게 하실 수 있으니까요! 그보다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무형적 무기 즉 영적인 무기입니다.

이 사상은 다빋의 시편 곳곳에 고백으로서 나타납니다.
다빋의 시편은 전쟁 용어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이 한 특징이죠.
다음은 몇몇 예입니다.


     어떤 이는 전마차들, 어떤 이는 말들을 뽐내나
     우리는 주/야웨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 (시 20:7)

     많은 군대로써 구출 받은 왕이 없고
     용사가 힘은 많아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네
     구출에 있어서는 말들도 헛되니
     그 센 힘으로도 구하지 못한다네. (시 33:16)

     (하나님이)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구리활을 당기네!
     주님은 또 주님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고..(시 18:34,35a)

     주 야웨님, 나와 다투는 사람들과 다투소서
     내게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싸워 주소서!
     방패와 손방패를 들고 일어나 나를 도와소서
     창과 단창을 빼 드시어 나를 뒤쫓는 무리의 길을 막아 주소서
     내 영혼에게 말씀하소서: "나는 너의 구원이다"라고. (시 35:1-3)


이런 말씀들은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영적 싸움을 치를 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김삼의 글은,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함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