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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 코너/키레네 안테나

국제기도의 집(IHOP)-되살아난 늦은 비 (밥 드웨이)



되살아난 늦은 비 (밥 드웨이)
키레네 번역

올해 초 국제 기도의 집(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IHOP)은 캔자스시티에서 열린 패션 포 지저스(Passion for Jesus)라는 컨퍼런스를 후원했다. 이것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크게 프로모션되었다. 이 컨퍼런스의 목적은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컨퍼런스의 두번째 세션에서 IHOP 대표이자 이사인 마이크 비클은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를 풍유적으로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설교를 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그의 종말신학과 "신부의 패러다임의 계시(revelation of the bridal paradigm)"를 설명했다. 비클은 교회 안에 어떤 철저한 변화가 있기까지 예수께서는 재림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무 때에나 오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전세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에서 신부의 정체성을 가지고 중보를 부르짖을 때까지 오시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가 뜻한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며 "신부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를 나누어 주는 (impart) 특수한 기름부음에 관한 어떤 내용도 (거기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실, 비클의 용어의 많은 부분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일 것이다.

이 기사에서 나는 마이크 비클의 운동이 풍유화된 성경말씀, 깊은 내면의 삶의 경건주의, 그리고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이 1940년대의 이단적 늦은 비 운동의 수정/완화된 변형을 재연하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비클은, 1983년 [다윗의 장막의 영 안에서 24시간 기도를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실제 음성을 들음으로써 그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그런 취지로 표지판을 세웠는데, 비록 하나님께서 그것을 설립하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는 다윗의 장막의 영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결국 "예언적(대언적/선지자적) 찬양 기도"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들이 이를 알아내자 IHOP은 태어났다.

늦은 비의 종말 시나리오

IHOP 웹사이트에는 불신임 받은 늦은 비 운동과 그들 스스로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려는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확인들과 부정들이 실려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종말교회가 대환난 속에서 엄청난 권능으로 일어나 하나님의 적들을 물리친다고 하는 늦은 비의 핵심 교설 중의 하나인 요엘의 군대 (Joel's Army) 교설을 믿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또한 그들 시절에 존재했던 (그들이 생각하기에) "패배한" 교회로는 예수께서 재림할 수 없었다고 가르쳤다.

전에 다루었듯이, 신사도개혁(운동)의 핵심 리더들은 이 개념을 붙잡았고 같은 것을 가르친다. 이 교설은 너무나도 별나서 이를 지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를 처음 제안한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비클이 늦은 비 시절의 폴 케인 같은 선지자들과 과거에 연합한 사실을 고려할 때 이것은 특별히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비클과 IHOP이, 그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늦은 비의 영향을 정말로 받아 왔다고 결론 짓는다.

비클은 교회가 대환난을 통과할 뿐 아니라 교회가 이를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대환난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잘 들으시오. 교회가 대환난을 일으킨다. 내 말 뜻은 - 그건 교회이다.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뻗고 기도하고 바로에게 심판을 풀어 놓은 것 같이 대환난에서 심판을 풀어 놓는 것은 예수의 리더십 하의 있는 기도하는 교회이다. 환난기의 교회는 바로 앞에 선 모세의 처지에 있지만 그건 바로나 이집트는 아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라고 불리는 큰 종말기 바로이며, 요한계시록은 기도하는 교회가 풀어 놓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책이다.
비클의 종말론에서는, 특수한 타입의 기도를 열쇠로써 가진 교회가 적그리스도를 패배시킨다. 늦은 비 버전은 그것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회군(會群)이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 쪽 버전 공히 엘리트 종말교회가 하나님의 적을 물리치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일어날 때까지 "하늘에 붙들려 계신다". 얼 폴크는 실제로 그 제목의 책은 1980년대 중반에 저술했다.

비클은 그리스도께서 돌아 오실 수 있기 전에 크리스천들이 어떤 형태의 기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그의 교리를 설명한다:

지금 이 기도운동이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정말 빠르게!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1%가, 어쩌면 10%가, 이것을 붙잡았다고 말하는 대신 매우 빨리 증가하고 있다고 말할 때에는...알다시피 이는 한 세대 전보다 열 배나 커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것을 붙잡아 가는 이 기도운동이 빨리 증가하고 있는 만큼이나, 아직도 그리스도의 몸의 90%의 사람들은 이것에 마음조차 쓰고 있지 않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고 전세계적으로 부르짖기 전에는 오시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오셔서 나를 용서하소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신부의 정체성 속에서 예수로부터 소중히 여김을 받는 자임을 이해하는 속에서 부르짖는 것이다.
이 엘리트주의에 유념하라. 여기서 비클은 분명히 그의 운동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언급하며 암시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에 따라 -- [이 땅에서의 그분의 계획을 집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해서] -- 기도하는 행위를 쓸모 없는 것으로 그린다.

이런 생각을 판명해 주는 구문은 다음 구절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 계시록 22:17) 우선, 성령과 신부가 그리스도께 오시라고 하는 것인지 또는 (구절 후반부에서와 같이) 성령과 신부가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와서 구원을 얻으라고 초청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나는 전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도록 부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초대라고 믿는다. 둘째로, 어떤 경우에든 이 구절이 특수한 신부 패러다임의 계시를 가진 일부 엘리트 종말집단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를 주신 이래 그분의 재림을 위해 기도해 왔다. 우리는 주의 만찬에 참예하며 그럼으로써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할" 때마다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의 식사교제를 그리는 마음을 함축적으로 진술한다. 온 세기에 걸친 크리스천들이 [성경으로부터 타당하게 유추할 수도 없는 개인적인 계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기도를 해왔다고 암시하는 것은 모욕적인 것이다.

비클이 그의 모든 메시지를 통해서 강조하는 또 다른 관념은 앞으로 가장 위대한 부흥이 있을 것이며 이는 대환난과 동시대에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늦은 비의 관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는 것이지만, 성경 어디에서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놀랍게도 비클은 마태복음 24장이 이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이 (열) 처녀들의 비유 안에는 너무나도 많은 원리가 들어 있다. 이것은 종말기의 비유이다. 나는 그렇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위대한 마태복음 24장의 위기와 부흥이 펼쳐지는 때와 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잠깐. 마태복음 24장이 종말의 대부흥을 가르친다고? 어디서? 그 반대를 가르친다: 종말의 큰 배교. 여기 몇 구절이 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태복음 24:5, 9-12, 24)

마태복음 24장에는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적들을 물리치는 대부흥을 단 한 절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고 비클은 단 하나도 예증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가르침이 거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아직 마태복음 24장에 있다. 이것은 모두 종말의 때에 대한 것이다 -- [마태복음 24장과 세 개의 비유]. 예수께서는 이 세 개의 비유를 통해서, 역사상 가장 큰 부흥의 시간과 -- [대환난이라고 불리는] -- 역사상 가장 큰 근심의 시간에 승리의 행진을 하도록 교회를 준비시키고 있다.
성경은 그저 이 부흥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경은 환난기 동안 믿음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순교한다. 비클이 묘사하는 부흥이란, 이스라엘의 농사철과 관련된 구약의 구절들을 풍유화함으로써 생긴 늦은 비의 가르침이다. 비클은 이 존재하지 않는 부흥을 반복해서 언급하며, 이것을 처녀들의 비유를 풍유화하는 데 있어서의 중심물로 만들고 있다.

여기 있는 것은 되살아난 늦은 비이다. 되살아난 형태에서는 [반삼위일체, 나타난 아들들, 그 외 최초 버전을 불신임 받도록 한 다른 몇 가지의 그릇된 가르침들]은 빠졌다. 하지만 이 늦은 비 특유의 종말 교리는 잘 살아 있다. 두 운동 모두에서, 교회는 "패배했거나" 또는 "계시가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교회를 위해 돌아 오시지 못하신다. 두 운동 모두에서, 환난기 동안 하나님의 적들을 쳐부수는 자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교회이다. 두 운동 모두에서, 특별한 체험과 계시에 은밀히 관여한 그들 엘리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크리스천들은 무지하고 부족한 사람들로 여겨진다. 두 운동 모두는 이전에 있었던 어느 것보다도 위대한 종말의 부흥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풍유화된 성경말씀

IHOP의 가르침에 너무도 핵심적인 [신부의 패러다임]은 남녀 사이의 관능적 관계와 유사한 "예수님과의 친밀함" 관념을 만들어내는 아가서의 풍유적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K. 젠토프트는 이런 '예수'의 문제점들을 CIC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숨겨진 비밀스런 뜻을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문제 많은 행위는 그들이 선전하는 [로멘틱한 예수] 말고도 다른 길에서도 많은 해악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처녀들의 비유에 대한 비클의 해석을 보자. 우선, 성경해석학적 지지 없이 그는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비유들이 "종말 시대의 리더십"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클은 "그는 특별히 리더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처녀들의 비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충성되고 깨어 있으라는 경고이다. 비클은 더 나아가서 비유 속의 다섯 명의 두 집단은 예수와의 친밀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분은 슬기로운 것과 악한 것을 대조하지 않는다. 그는 슬기로운 사람과 그리 슬기롭지 못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들은 주를 시인하는 사람들 신분에 속한 자들이다. 이들은 오늘날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주를 향한 사랑은 끝까지 꾸준하다. 하지만 그들의 주님과의 연결. 예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그들은, 심장 수준에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져 있다. 내 말은 친밀함의 수준에서. 나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을 잃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이 시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친밀함을 잃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이다.
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왜 '친밀함'의 수준이 얘기거리가 되는가? (신부의 패러다임은 관능적인 것을 암시함을 기억하라 -- 성경은 '친밀함'이라는 용어를 절대 쓰지 않는다.) 나는 이 기사 다음 부분에서 이층안(二層案)을 다룰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비클은 문자적인 해석을 별로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비유 자체는, 시시한 크리스천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이 잃은 자들임을 가르친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5:10-12)

예수께서 혼인 잔치에 문을 닫으시며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비클은 비유에 나오는 그들을 크리스천이라고 해석한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또 다른 이런 경고들(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의 "주여, 주여"하는 자들과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문맥에서 보면, 마태는 (제자들) 일부는 주를 진정 알지 못하는 거짓 제자들임을 경고하고 있음이 너무 명확하다.

비클에 의하면 등은 사역이다: "그들 모두는 등을 들고 있었다...그들 모두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사역을 가졌다. 그들은 거듭 났고, 그들은 처녀였고, 그들은 기능하는 사역을 가졌다." 비클은 믿는 자들을 '처녀들'이라고 부른 고린도전서의 구절 때문에 그들이 거듭났다고 여긴다. 하지만 비유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실 때에는 글자 그대로 유대인의 결혼 양식의 언어를 사용하셔서 요점을 강조해서 이야기하신다. 이 이야기에는, 비유에 묘사된 그대로의 상황에 있는 것처럼 문자 그대로의 기름, 등과 처녀들이 나온다. 기름, 등, 처녀 같은 용어가 다른 곳에서 다르게 사용되었듯이, 모든 사소한 것들이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풍유적 방법은 모든 곳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는다. 따라서 비클에게는 등은 사역이고 처녀들은 참으로 거듭난 크리스천들이다.

비유에서 모두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기 때문에, 비클은 그 열 명이 "메시야를 신랑하나님으로서 좇는 일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신랑하나님의 '계시'가 다른 구절들의 풍유를 기초로 만든 비클 스스로의 발명임에는 신경 쓰지 말라. 하지만 그의 해석에서 한 구절의 풍유화는 다른 구절들의 더 나아간 풍유화를 받쳐주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제 역사상 단 한번, 인류 역사상 오직 한번, 하나님의 사람들이 도처에서 세계적으로 예수님을 신랑왕 - 신랑하나님으로 볼 때가 있을 것이며, 그것은 종말의 때이다. 요한계시록 22:17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비클은 그 인용에서는 옳았다. 성령과 신부는 진짜로 "오라"고 하셨다. 그(분)들은 요한이 계시록을 쓴 이래 이를 말해 오셨고 이 초청은 온 교회사를 통해 유효해왔다. 비클의 해석에는 장점이 없다. 하지만 만약 비클의 생각을 따른다면, 그가 제안하는 바는, 종말의 때에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사역(등)을 가지고 신랑하나님의 계시와 함께 하는 리더들을 지금 우리가 가진다는 것이다.

비클의 안(案)에 있어서 비유가 풍유화된 또 하나의 부분은 기름이다: "기름 - 기름은 성령님과 연결된 심장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은밀한 생활을 양성하면,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생활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가...이는 당신의 심장을 하나님께로 내미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은밀한 이력(履歷)을 쌓고 있다 - 그것은 기름, 성령님과의 연결이다." 기름이,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나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생활"임을 의미한다는 증거가 마태복음 문장 어디에라도 있는가? 확실히 없다. 마태복음의 대조는 깨어 있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러나 마태의 뜻은 비클의 해석의 하나의 요인으로조차 포함되지 못한다. 왜 그랬어야 하는가? 이것은 그의 늦은 비의 종말론적 설계와 맞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 언제 재림하실 지 우리가 모른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서 그는 아마도 모르는 체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전 교회가 신랑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하나님의 적들을 물리치고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시도록 부르기 후까지 예수께서는 돌아 오시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돌아 오실 때, 이런 것들이 모두 일어나고 있었다면, 분명히 전 교회는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의 상태에 있을 것이고 재림의 타이밍 때문에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비클의 해석은 마태복음의 내용으로 봐도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의 종말론적 설계를 바탕으로 본다고 해도 말이 안된다.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풍유적인 접근방식은 성경의 뜻이 성령에 감동된 저자에 의해 확정된다는 개념을 공격한다. 슬기로운 풍유가는 그 자신만의 뜻을 찾아낸다. 결국 풍유를 생각해 내는 독자가 성경의 뜻을 결정한다. 성경에 감동을 불어 넣으신 하나님이 결정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문장 자체와 직접 관련없는 아이디어가 새로운 해석들을 일으키는 창조적 아이디에이션(관념화)을 위한 토대가 되며 접촉점이 된다.

깊은 내면의 경건주의

나는 이전의 CIC 기사에서, 두 종류의 크리스천이 있으며 분류별로 어떤 엘리트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여러 형태의 경건주의를 설명했다. 늦은 비와 마찬가지로 마이크 비클의 IHOP은 경건주의를 전혀 새로운 수준으로 데려 가며, 처녀들의 비유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이를 보여 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더 좋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연결을 가진 크리스천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은 하나님과의 더 나쁜, 또는 적은, 연결을 가진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는 경건주의를 증진시켜 왔다. 경건주의는 성경적이지 않으며, 비클은 비유에서 경건주의를 찾아내기 위해 처녀들의 비유를 오역하고 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셨기 때문만 아니라, 바로 전 비유(종의 비유)와 바로 다음 비유(달란트의 비유)에서 충성되지 못한 자들을 비신자로 묘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 경우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4:50,51)  논점은 같다: 주인은 예상치 못한 때에 오신다. 달란트의 비유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5:30) 처녀들의 비유는 비클의 크리스천의 모습의 이층안(二層案)을 가르치지 않는다.

비클은 좋은 종류의 크리스천과 덜 좋은 것과 사이를 나누는 여러가지의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연결된 상태"인지 "연결되지 않은 상태"인지이다. 비클은 말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심장에 연결되어 있기를 원하신다. 이는 매일 하루 종일 하나님을 느낀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알려 준다. 신부의 패러다임으로 주님을 밀고 들어가서 그분께 연결되어 있으면 나의 심장이 부드러워지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그분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나오고, 예수의 피가 내 죄를 씼었음을 믿고,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나아오고도" 아직도 내게는 마이크 비클 같은 어떤 엘리트 크리스천들에게만 계시를 통해서 얻어지는 무언가가 모자라다고 믿어야 하는가? 경건주의는 꽤 영적으로 들리지만, 이것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과 종교개혁의 솔라스(solas, 다섯 개의 '오직')를 공격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데려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모든 참 크리스천들에게 똑같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에베소서 2:13)

엘리트 의식을 가진 IHOP의 리더들은 가짜를 팔고 있다. 관능적 친밀함 선상에서 "예수에 대한 열정"을 마음에 그림으로써, 그들은 그들을 모세 같이 만들어줄 엘리트 계층으로 승격했으며, 세상에 전염병을 불러 내릴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거짓말을 그들은 받아 들였다. 대환난이 그들의 훌륭한 영적 권능과 용맹을 발휘할 무대가 될 것이라는 상상 속으로 그들은 스스로를 주입시켜 왔다.

진짜로 무서운 것은, 이 "열정"을 받기 위해 그들의 자녀들을 캔자스시티로 보내라고 그들이 크리스천들을 큰소리로 불러 모으는 것이다.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니 조심하라. 이런 젊은이들은 엘리트주의 늦은 비 이설의 개정판으로 인도되고 있다. 만약 아이들이 마이크 비클을 믿으면 그들은 그들 부모의 믿음이 전혀 부적합하다고 확신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마이크 비클의 교리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랑하나님의 계시"를 더하도록 배우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모른다고 하시는 어리석은 처녀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를 관능적 애인으로 여기는 것에 해당한다. 그 어리석은 "처녀들"은 비클의 거짓 가르침을 믿지 않는 사람 모두가 되는 셈이 된다.

"연결된 그리고 연결되지 않은" 말고도 이런 경건주의 버전의 또 다른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몸을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자들"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비클은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가까이서 하나님의 심장을 체험하는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특별한 계시를 소유한 특권자들은 보통의 크리스천들보다 하나님의 심장에 더 가까운 셈이 된다. 히브리서는 몇 개의 구절에서 하나님께로 다가감을 말하는데, 특별 계시를 가진 엘리트 집단에 해당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한 어느 것도 "신랑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 몇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4:16; 7:25; 10:22)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께로 다가감은, 더 나은 경건함을 달성한 어떤 엘리트 크리스천 계층에 참여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로 인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그분의 은혜의 역사로 우리의 마음은 정결해진다. 성경이 우리에게 확증을 주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며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위안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길을 만드셨고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아감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이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의 (추측 속의) 비밀을 우리가 조금 알기 때문이 아니다. 비클의 버전은 사람중심적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어떤 크리스천들이 양성해 온 (추측 속의) 매우 깊은 체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은밀한 생활"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 너의 심장을 내미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묻는다. "주 안에서의 은밀한 이력 속에서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힘써 발전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게을리 하고 있는가?" 비클은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의 부족함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도록 돕고 있으며, 그래서 비클의 계시에 바탕해서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얻기 시작해야 한다고 그들이 생각하도록 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셨는지 설명함으로써 우리를 격려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며, 우리 스스로의 개인적 경건 또는 "하나님 안에서의 이력"의 수준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롭고 용서하시는 구원자를 찾은 경건치 못한 죄인임을 매우 확신한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후가 되기까지는,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비클의 "신랑하나님의 계시"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신부의 상징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것이 평범한 크리스천들은 갖지 못한 (모자라게 가진) "열정"을 가진 엘리트 종말 집단에만 제한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종말론적 잔치를 이렇게 그리셨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상, table)에 앉으려니와" (마태복음 8:11) 구약의 성도들은 구원의 믿음을 가진 역사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잔치에 참여한다. 참여는 "신랑하나님의 계시"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을 때 종말론적 잔치에서 마셔질 '잔'을 언급하셨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23-25)

유월절 식사에는 출애굽기 6:6,7에 나오는 네가지 약속과 관련된 네 개의 잔이 있었다. 세번째 잔은 "내가 너희를 속량하리라"는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시며 이 세번째 잔을 제공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네번째 잔을 마시는 것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모든 구속된 백성들과 함께 나눌 때까지 보류하셨다. 재미있게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나눌 네번째 잔은 출애굽기 6:7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 -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이 언약의 말씀은 성경의 주제가 되는 것이며 요한계시록의 끝까지 되풀이 된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요한계시록 21:3) 예수께서 그분의 교회로 돌아 오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참으로 그분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공중에서 그분을 만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7). 그 때 그분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네번째 잔을 나누실 것이다.

이것을 더욱 예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우리가 주의 만찬에서 나누는 잔을 "축복의 잔"이라고 부른다 (고린도전서 10:16) 이것은 최후의 만찬에서 주께서 축복하신 잔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1:26에서 바울은 주의 만찬에서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잔", 이 세번째 잔을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주께서 흘리신 보혈을 기념하기 위해 받으며, 그렇게 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육체로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에 그분 없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론적 잔치에서 그의 넷째잔을 나누리라는 그의 약속을 예수께서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한다. 또한 우리는 구속받은 모두와 함께 그렇게 할 것이다.

이 기대하는 넷째 잔이 나누어지고 이와 관련된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이 모두 실현될 때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일어난다. 이것이 세기를 통해 크리스천들이 나누어 온 희망의 일부이다. 비클은 이것을 소수의 엘리트, 즉 교회사의 종말에 교화된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로부터 빼앗기를 바라고 있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나는 다음과 같은 보장을 제공한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해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분은 육체로 하늘에 오르셨고 스스로 육체로 돌아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당신이 참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당신의 죄는 용서받고 그리스도의 신부에 참여하게 된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라는 뜻이지, 복음의 소망으로부터 옮겨진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로마서 10:9) 당신은 구원받았다. 이 영원한 소망이 참됨은 그의 영단번의 피흘림을 통해서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하신 것 때문이지 당신이 예수께 한 것 때문이 아니다.

반면에, 마이크 비클은 "신랑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과의 은밀한 이력(履歷)", "신랑을 향한 열정", "그들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계시", 그리고 그 외의 경건에 관한 개념에 있어서 어떤 정량화(定量化)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제공한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의 경건의 수준에 기초한 이 보장이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잘 생각해 보라. (마이크 비클에 의하면): "그 [은밀한 이력]이 얼마나 강하거나 약한 것인지 아무도 잴 수 없다. 아무도 진짜로 알지 못한다. 당신은 이것을 꼬박 측량할 수조차 없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만약 당신이 IHOP과 마이크 비클의 추종자라면, 이것이 뜻하는 것은 당신이 현명한 처녀들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있으며 이런 당신의 신분을 당신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기실, 당신은 은밀한 이력이 자격을 얻을만큼 충분히 좋다는 것을 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무모한 것일 것이다. 비클은 당신이 미련한 처녀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정 당신 앞에서 문을 닫고 당신을 모른다고 하는 예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 비클의 정의에 의하면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자격을 갖출 소망이 없는 것이다.

비클의 풍유적인 해석은 그 자신의 상상에 의한 것이지 성경저자가 뜻한 바로부터가 아니기 떄문에, 당신의 소망을 그가 제공하는 것에 두는 것은 이를 그 자신의 상상에 두는 것을 뜻한다. 나는,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해 확실하게 되었고,  또한 성경저자들이 뜻한 바에 따라 문자적으로 해석된 성경에 의해 뒷받침되는, 복음의 소망을 당신에게 제공한다. 주 예수를 믿으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이며, 당신은 매우 확실하게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가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마이크 비클의 추종자라면 당신의 개인적 신비스러운 계시의 수준과 개인적 경건에 기초한 그의 그릇된 소망을 버릴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소망을 그 대신 그리스도와 그의 완성된 사역에 두라.

[출처] 마이크 비클과 국제 기도의 집 (IHOP)|작성자 키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