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선지서

[애 3:19-24] 눈물과 소망



주님 다시 오실 날에 하루 더 다가가며..

성삼위 하나님 아버지를 송축합니다.
그 분의 크고 높은 이름을 기립니다!
가장 높으신 그 분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베푸셨고 베푸시고 베푸실 그 분의 은덕에 감사하고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주 예수 크리스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이 메시지를 읽는 독자를 축복합니다!


메시지 본문:

나의 고난과 쓰라림, 쑥과 쓸개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은 아직 그것들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좌절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속으로 되새겨 보니 나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주/야웨님의 사랑! 그 때문에 우리 소멸되진 않네.
그 분의 어지심 때문이어라.   

이것들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오 크십니다, 님의 미더우심[각주:1]!
(구약 '이르미야[각주:2]의 애가' 3:19-24 사역)


성경 인물들 가운데 가장 슬펐던 사람 한 명을 꼽는다면 구약의 대언자 이르미야(예레미야)일 것입니다. 이르미야는 가히 슬픔과 눈물의 대언자라고 할 만 합니다[각주:3]. 어쩌면 성삼위 하나님의 슬픔을 대변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다 왕국의 패망기를 생생히 지켜 본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최후의 선왕(善王)인 요시야 왕을 비롯한 유다 말기의 5대 왕들, 요시야-예호아하즈-예호야킴-예호야킨-제데키야[각주:4] 등의 통치기인 50여년 간을 살면서 예루샬렘 시와 성전의 파괴 등 종말을 지켜 봤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슬픈 시대의 대언자로 그를 세우셨지요[각주:5].

이르미야란 이름은 "주/야웨님께 선임 받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처럼 어린 나이에-아마도 청소년 시절 부르심을 받은 그는 하나님이 모태에 생기기 전 이미 아셨고 태에서 나오기 전 성별하셨고 여러 나라의 대언자로 직접 택하신 인물이었지요[각주:6]. 실제로 그는 여러 나라를 향해 대언을 하며 훗날 미쯔라임(에짚트)으로 끌려가 거기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추정됩니다[각주:7].

이르미야는 52장에 걸친 긴 예언서 겸 일종의 역사서이기도 한 '이르미야 서'를 썼고[각주:8], 그것으로도 아쉬운지 애가(哀歌)를 따로 곁들여 처음부터 끝까지, 쇠망해 가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을 전하다 간 사람입니다[각주:9].  

그런데 그런 처지의 사람이 오늘 본문과 같은 소망의 말씀,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줬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일대 전환 또는 역설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런데 실상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언제나 "다음"이라는 가능성과 소망과 또 다른 챈스, 미래를 내다 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여느 동물이 아니기에 절망과 역경 속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갖곤 합니다. 사람은 희망을 갖기 살기에 사람입니다! 정도에 따라 누구나 그런 하나님의 형상[각주:10]을 일부나마 지니고 삽니다. 그러나 어떤 희망이냐, 어디에다 희망을 두느냐에 따라 참 희망의 가치, 더 나아가 본인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희망의 질 내지 품격이 문제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된, 거듭난 사람들은 참 소망인 예수 크리스토님 안에 소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사도 파울은 믿음/소망/사랑은 "늘 있다"고,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이라고 노래했지요[각주:11].

시편 기자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고, 그 분 안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러니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랄까요? 나의 소망은 오직 주님 안에 있습니다. (시 39:7)

너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라, 내 혼. 그 분으로부터 나의 소망이 오기 때문이어라.  (시 62:5)

님은 나의 소망, 오 주 야웨님! 내 어린 시절부터 나의 신뢰 대상! (시 71:5)

이런 시편 말씀들을 이르미야도 응당 기억하고 적응하면서 살았을 터입니다. 특히 위의 시 71:5 말씀은 정말 그에게 딱 맞지 않나요?!

그런데도 이르미야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끊어졌구나, 나의 힘 그리고 주 야웨님으로부터의 내 소망!'"  (애가 3:18)

사실 이런 절규는 이르미야의 상황으로 볼 때 어느 모로나 타당하다고 할 수 밖에 없지요.  자기 눈 앞에서 '처녀 찌온'(=예루샬렘)이 적국에 유린을 당하고 파괴되는데 그런 탄식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요! 바빌론 군대에 의해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 길바닥 여기저기 쓰러져 있고 여인들과 청소년들이 칼날의 밥이 돼 가는데 어찌 그러지 않을까요! [각주:12]
굶주린 어린이가 정신이 흐릿해져 엄마 품에 안긴 채 "곡식과 포도주는 어디..?"라고 묻다가 죽어 갑니다[각주:13]. 이런 모습을 원수들이 보고 박수를 치며 비웃습니다[각주:14].
우리네가 과거 36년간 일제(日帝) 치하에 있을 때 같은 느낌을 가졌을 성 싶네요.   

그런데 그뿐일까요..
이르미야는 거기서 더 나아가 참 대언자로서 같은 처지 속의 동족에게마저 버림 받고 비웃음을 당합니다[각주:15]. 거짓 대언자들은 맨날 듣기 좋은 소리만 했지 이런 참극에 관한 참된 계시를 받지도, 예언을 들려 주지도 않았습니다[각주:16]. 자고로 올곧은 소리를 하는 대언자들은 으레 미움과 괄시를 당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이르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쓸개즙으로 배불리고 쑥에 취한 듯 하다고 고백합니다[각주:17]. 밤낮 흐르는 눈물 탓에 눈자위가 부르트고, 창자 속이 부글부글 끓고, 피부가 마냥 거칠어지고, 뼈가 쇠하고, 간이 땅에 쏟아질 정도라고 탄식합니다.
정말 본인이 아니고선 실감하기 어려운 아픔이지요.

이르미야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듯 합니다.
때로는 적들에 대한 혐오감, 동족들의 배척과 '왕따' 당하는 소외감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때로는 늪 같은 깊은 회의와 황당함, 당혹에 빠져 들기도 합니다. 마냥 내내 흐느껴 울기만도 합니다. 본문에서처럼 좌절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르미야는 아나톹에 거주한 사제(제사장) 지족(레빝) 출신으로..오랜 옛날 슐로모 왕을 배신한 뒤 결국 파직되고 아나톹으로 추방된 대사제 아비아타르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각주:18]. 그러기에 그의 소외감은 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르미야는 눈물과 탄식과 절망으로 모든 것을 매듭짓질 않습니다.
왜냐고요? 그야..하나님 때문이지요. 이런 절체절명의 극한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오히려-역설적으로 하나님만이 참 소망임을 느낍니다!
송곳 들어갈 자리도 없을 만큼 정말 모든 게 콱 막혀 버린, 앞이 캄캄한 상황일 때, "실낱 같은" 소망의 빛이 아닌 오직 하나의 거대한(!) 소망이 있다면..바로 주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아니 사면초가라도 하늘 위로, 아니 내 속에 하나님의 도움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보다 더 크십니다.

원수의 위협이 크면 클수록(!),
다가온 상황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슬픔이 벅차면 벅찰수록(!)
오히려 하나님께 둘 우리의 소망은 더 커집니다.

왜요..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은 여전하시기 때문이지요.
그것들은 아침마다 새롭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신실하다는 히브리어 낱말 '에무나'는 동사 '아만'(확증하다, 지지하다, 믿을 만 하다, 충성하다, 신실히 하다, 견고히 하다, 신뢰하다)에서 파생된 수많은 낱말들의 하나로, '에메트'(진리/신실/성실/충성)와 같은 어원을 나눕니다.
 
바꿔 말하면..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는 한결 같다는 뜻이 됩니다.
어떻게 날마다 변함 없이 한결 같은데 아침마다 새로우냐..논리적으로 모순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한결 같으니까 아침마다 새롭지요! 아침마다 새로우니 한결 같지요. 고대 유대의 날짜 계산은 저녁부터였으므로 아침은 하루의 한가운데인 셈입니다.

고대 전도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갈파했습니다만[각주:19], 하나님은 변함 없이 한결 같으시면서도 그 사랑과 진리가 늘 새롭습니다! 역설 아닙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역설입니다!

이르미야의 '크십니다, 님의 미더우심!'이란 이 고백은 찬송가 '오 신실하신 주'의 가사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각주:20]. 그 시작과 후렴은 "Great Is The Faithfulness!" 라고 반복하고 있지요[각주:21]

여기서 잠시..

이르미야 애가는 다른 애가들처럼 시가요 노래이며 일종의 정형시입니다.
이르미야가 그 격한 슬픔과 서러움 속에 보통 사람 같으면, 거의 맨 정신이 아닐 텐데도 이런 정형시를 썼다는 것 자체가 놀랍지요. 성경 각 권서의 장/절 수는 대부분 훗날 생긴 것이지만, 고대에 이미 히브리어 알파벹 순으로 정해진 것들이 있습니다. 시 119편이 그 예이며 본 애가도 그렇습니다.

이르미야의 이 애가는 모두 5장으로 돼 있고 그 구성이 다음과 같습니다.

1장: 22절 히브리어 알파벹순(매 절의 첫 자)
2장: 22절 알파벹순
3장: 66절 히브리어 알파벹x3 (매 3절마다 알파벹이 바뀜)
4장: 22절 알파벹 순
5장: 22절 무순

즉 위치로나 뼈대로나 본 서의 핵심은 제3장이라고 할 수 있고, 제3장 가운데서도 22-33절은 핵심적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슬픔과 절망 속의 소망 즉 주 야웨님의 사랑과 진리입니다! 그래서 애가 전체는 이르미야 자신의 눈물처럼, 그리고 이 핵심 부분은 보석처럼 빛나는 듯 합니다. 눈물 속 보석이랄까요. 

눈물과 보석.. 둘 다 빛나며 둘 다 고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기독교시인 김현승은 그의 시 '눈물'에서 이렇게 노래하지요.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 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이처럼 눈물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 속 소망은 눈물 속 보석처럼 더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둘은 기차바퀴처럼, 레일처럼 언제나 함께 갑니다[각주:22]!
우리의 슬픈 눈물은 보석 같은 참 소망 곧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자신의 극한상황과 극도의 절망감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유일한, 한결같고도 새로운 참 소망이 있음을 믿고 고백했고, 우리에게 이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최근..미국 연방의회 하원은 '혐오법령'[각주:23]이란 것을 표결에 붙여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은 오바마 대통령도 적극 바라던 것으로, 발효되기까지 상원의 표결과 대통령의 서명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뉴욕 주의회는 동성애자 결혼을 허용하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해 상원과 주지사의 서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 아동성애자들 등을 보호하는 이런 법령들이 발효되면, 동성애자들의 설 자리는 점점 넓어지는 반면 기독교인들이 설 자리는 현저히 좁아지고 졸아들게 됩니다.
미국은 또 이미 이단 등을 '혐오'하지 못하게 하는 기존법이 있습니다만, 앞으로 동성애자들처럼 타 종교, 메이슨 등에 대한 비평도 맘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걸핏 하면 혐오범죄로 몰아대고 제소할 테니까요. '혐오범' 규정 대상은 해석하기에 따라 광범위해집니다. 


이것은 주님과 사도 서신서나 요한계시록이 예언했듯, 세상이 점점 더 캄캄함 어둠 속으로 달려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앞으로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참된 크리스천들은 점점 더 어려움과 박해를 겪게 됩니다. 
 
이런 어둠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오로지 하나님께만, 주 야웨님이신 예수 크리스토께만 소망을 걸 수 있습니다.

예수 크리스토는 우리의 소망입니다(티모테A 1:1)!
주님은 유일한 우리 영혼의 닻줄입니다(히브리서 6:19 )!
그 분은 우리 영광의 소망입니다(콜로새서 1:27)!   

아무리 큰 슬픔과 괴로움과 탄식, 아무리 큰 실망과 낙담과 좌절, 절망, 죽음도 우리의 소망을 거둬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는 변함 없이 크고 아침마다 늘 새로우니까요!


우리의 참 소망,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기억하고 믿고 바라며 고백하는 
티엘티 독자들에게
주/야웨님의 영광과 복이 넘치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1. 신실하심, 미쁘심 [본문으로]
  2. = 예레미야 그리스어/70인경 표기: '이에레미아스', 영어 표기: 제러마이어 [본문으로]
  3. 애가 1:2 참조 [본문으로]
  4. 참고: 한글 성경 표기 요시야-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본문으로]
  5. 그는 여대언자 훌다를 비롯, 제파니아(스바냐), 하바쿡(하박국), 다니엘, 에제키엘(에스겔) 등 대언자들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본문으로]
  6. 이르미야(예레미야)서 1:6,7 참조. 이하 '이르미야' 서로 표기. [본문으로]
  7. 이르미야서 43:7 참조 [본문으로]
  8. 이사야, 에제키엘(에스겔), 다니엘 등 4권이 함께 4대 대대언서(대선지서, Major Prophets)로 꼽힌다. 나머지 대언서들은 '소대언서',(소선지서. Minor Prophets)로 불린다. 즉 책 길이에 따라 대/소로 구분된다. [본문으로]
  9. 애가 자체에는 기자의 이름이 명시돼 있지 않으나 문체나 역사 배경 등이 이르미야와 가장 걸맞음. 만약 그가 아니라면 그의 비서 바뤀(이르미야서 32:12)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본문으로]
  10. image of God [본문으로]
  11. 그의 코린토A서 /고전 13:13에서. [본문으로]
  12. 애가 1:6, 18,19 등 참조 [본문으로]
  13. 2:12 [본문으로]
  14. 2:15 [본문으로]
  15. 애가 3:14. 이르미야 20:7:10 참조 [본문으로]
  16. 애가 2:9 끝 [본문으로]
  17. 3:15, 19 참조. [본문으로]
  18. 왕들A(왕상) 1:7, 2:26,27 참조 [본문으로]
  19. 구약 전도서 1:9 등 [본문으로]
  20. 21세기 새찬송가 393장 (옛 '통일찬송가' 447장) [본문으로]
  21. KJV(제임스왕역 성경) 본문에서 딴 것. [본문으로]
  22. 하나님의 사랑 곧 헤쎄드는 하나님의 진리 곧 에메트와 자주 병행된다. 예: [본문으로]
  23. Hate Crime Bil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