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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선지서

[호세아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바탕 본문: 구약 호세아서 

구약 성경의 '호세아'서는 참 특이하면서도 하나님의 쓰나미 같은 공의와 사랑을 맛보여 주는 책입니다.
특이하다는 말은..대언자 호세아가 직접 자신의 삶 속에서 행동과 체험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달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체험'이란..하나님께 순종하여, 음란한 여성과 직접 결혼해 자녀들을 낳은 사실입니다(호세아 1:2-9). 놀랍지 않은가요?!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의 삶 속에서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구약 대언자들 가운데는 이처럼 직접 실천한 자기 삶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메시지를 보여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세아 말고도 에제키엘(에스겔)이 대표적이지요.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가장 위대한 사도/대언자, 예수 크리스토님이 그러했습니다!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지요.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여 고메르라는 여인을 찾아가서 결혼해 아들딸을 낳았고 하나님은 그 아들딸마다 직접 예언적인 이름을 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드러낸 이름들이죠. 이즈레엘(심음/plant), 로루하마(불쌍히 여김 받지 못한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 등의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 심정은 타락한 이스라엘이 다시 '루하마'(불쌍히 여겨짐)와 '암미'(나의 백성)이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고메르는 음탕한 본성을 못 버려, 남편과 자식들을 놔 두고 다른 외간 남자들과 어울려 지내기에,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그녀를 찾아가 사랑해 주라고 하십니다. 호세아는 여기 복종해 그녀를 값을 주고 사서 다시 함께 부부로 지냅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야로브암 2세 왕 치세기 즈음 대언자로 활약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생비유'를 통해 호세아가 섬기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적인 음란 죄를 신랄히 경고하시고 저주를 예언하시면서도 동시에 사랑으로 타이르십니다.

하나님의 이 공의와 무한한 사랑 그리고 경고와 끈끈한 애정이 어린 타이름이 계속 반복되는 모습은..유한한 우리를 거의 어지럽게 합니다!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아..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그저 그 사랑에 놀라고 압도되어 마침내 눈물을 터뜨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언서 여기저기 그런 내용들이 매우 많지요만 호세아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야웨님은 바알 신과 가신 테라핌, 주상(오벨리스크) 등을 섬기며 한없이 음탕해진 이스라엘을 무서운 재앙과 전쟁과 저주로써 경고하시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은 도무지 귀 기울이지도 않고 들은 체도 않습니다. 마치 남편이 안타깝게 짝사랑하다시피, 떠난 아내를 애타게 찾고 불러도 세상 욕정과 쾌락에 팔려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상황처럼. 이스라엘은 심지어 작심하고 하나님을 떠나 그 분을 적대시하기까지 합니다(9:7a).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하여금 자기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음란에 눈이 어두워 주/야웨님을 진정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5:4). 그래서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나의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구나!"(4:6).

이스라엘이 끝내 순종하지 않자, 결국 하나님은 본서에 예언하신 그대로 행하셔서 이스라엘 국민 다수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강국 아씨리아 군대에 무참히 짓밟히게 놔 두십니다(9:3, 11:5). 그러나 선민을 영원히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지요.

그 와중에도 하나님은 거듭거듭거듭 경고와 더불어 택하신 선민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십니다. 그 사랑은 그 어떤 장해와 방해도 넘나드는 마치 쓰나미 같은 사랑입니다. 마치 거대한 물결이 방파제를 타고 넘듯,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도 높고도 깊고도 넓고도 뜨겁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가리운다는 말은 이런 하나님의 초자연적 아가페 사랑의 실천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이건 결코 인간 속에서 우러나는 유의 윤리적/자연적 사랑이 아니지요.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권능으로 부어져야만 열매가 나타나는 초자연적 사랑입니다.


호세아서엔 다른 많은 대언서들처럼 이른 바 '메시아 예언'(Messianic Prophecies)이 포함돼 있습니다. 본서 여기저기에 참 메시아로 오실 예수 크리스토에 관한 예언들이 뿌려져 있습니다(예: 3:5, 6:2, 11:1). 

하나님의 이 무한한 사랑은 이스라엘/유다의 '남은 무리'(the Remnant), 그루터기(the Stump)와 같은 메시아의 백성들에게서 결정적으로 나타납니다.
언제나 메시아를 기다리고 그 분을 모실 길을 맘으로 예비하는 소수의 남은 무리(이사야 10:20,21)가 있었지만..오실 메시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요셒/마리아로부터..복음이 퍼진 뒤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던 120명까지 모두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참 메시아와 함께 지냈지만 이제 그들 속에 바로 그 메시아의 영을 영원히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명절을 지키러 해외에서 모국 수도 예루샬렘을 찾았다가 오순절 당일 그들의 영언을 듣고 달려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결신한 국제 유대계 사람들도 이스라엘/유다 출신의 '남은 무리'에 포함됩니다. 훗날의 샤울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크리스토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바로 우리가 그 일부이죠(2:23).

예수 크리스토 안에 표현된 하나님의 이 무한한 이 사랑을 표현할 길 없어 사도 파울은 사랑의 4차원으로 묘사합니다(신약 에페소서 3:18,19).

하나님은 이제 20, 21세기에 선택된 '남은 무리'-거듭난 무리들의 참 교회인 우리의 남편이십니다(호 2:16,19,20). 죄와 우상들로 음란했던 우리를 타이르고 변화시켜 위로해 주시고 최상급 포도원-평화와 복-을 주시고 마귀 세상의 '괴로운(아코르) 골짜기'에서 우리에게 소망의 문 곧 예수 크리스토를 활짝 여셨습니다(2:15)!

하나님은 과거와 같이 지금도 세상의 잃어진 뭇 영혼을 향해 부르십니다.
"돌아오라!"고. 말씀을 받아 돌아오라고(14:1,2). 고아들이 사랑을 먹고서야 살아가듯(14:3끝), 참 아버지가 없던 세상의 고아였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만 살 수 있으며.. 이젠 "돌아가자!"(6:1)고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불의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이끌고 하나님 앞에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님께 드려야 할 종들입니다.

다시는 세상 신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님은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해야 합니다(14:3). 하나님만이, 주 예수 크리스토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기에(13:4)!

지금도 우리는 이 시대의 '남은 무리'(요한계시록 12:17)로서 우리를 위하여 정의의 씨를 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둘 때입니다. 우리의 묵은 땅을 갈아 엎고 하나님의 의의 소나기를 받아 사랑의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10:12).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열매를 알릴 때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느끼고 그 초자연적 아가페를 성령의 권능으로 이웃 사랑에다 실천하며, 하나님을 힘써, 밝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6:6)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늘 귀 기울이고 그 분의 이끄심에 응해야 합니다.  


오직 무한한 아가페 사랑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