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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

미국 추수감사절의 역사적 진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첫 추수감사절 상식들 가운데는 잘못된 것이 많다. 진실보다는 상당히 미화, 포장됐고 일부는 왜곡돼 있다. 예컨대 플리멑(Plymouth)에 첫 상륙을 해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잔치를 드린 미 건국 선조가 '청교도'였다거나 그들이 영국에서 박해를 받던 끝에 마치 곧장 신대륙으로 향한 것으로 알고들 있다.

또 추수감사절에 관해 백인인 청교도만 기억할 뿐, 우리와 피는 물론, 일부는 엉덩이 반점까지 나눈 몽골계열에 가까운 미국 원주민에 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거나 잘 알지 못한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은인이었다! 원주민 없는 첫 미국 추수감사절은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아울러 신대륙에서의 감사제는 플리멑 정착촌 이전에도 치러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신대륙 초기 정착민들이 늘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과장된 역사만 알고 있기가 쉬웠다. 역사적 문헌에 기초하여 이를 바로 잡고자 이 글을 쓴다.


'청교도'(Puritans) 아닌 분리파 필그림들(Pilgrims)

미국 추수감사절에 관한 대표적인 오해는 첫 추수감사절을 지킨 사람들이 '청교도'였다는 설. 엄밀히 보면 잘못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 11월 신대륙 플리멑에 첫 상륙한 미국 건국 선조는 청교도가 아닌, '필그림'(순례자)으로 불린 분리파(Separatists)였다.
[ 미국 추수감사절과 미 건국사를 미화시키려 드는 사람들은 대체로 '분리파'라는 명칭이 싫어 '청교도'로 모두 통칭한다. 특히 청교도 사상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러나 진실은 진실대로 밝혀져야 옳다. ]
  
청교도는 그보다 수년 후 매사추세츠주 베이(Bay) 정착촌에 와서 머문 사람들이다. 분리파는 신대륙에 첫 회중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선교성이 강한 퓨리턴들은 결국 플리멑을 영적으로 흡수해 버린다. 분리파는 청교도들과는 달리 주로 제네바 역본성경을 사용했다가 훗날 제임스왕 역(KJV)으로 바꾸게 된다. 


필그림의 역사적 배경

1532년, 잉글랜드 왕 헨리8세가 첫 왕비인 에스파냐 아라곤 출신의 캐터린과 이혼하려고 로마 카톨맄에서 이탈, 영국 국교회 수장이 된다. 뒤를 이은 엘리자벹1세는 국교회의 개신교적 성격을 강화한다. 16세기 후반 영국 기독교는 크게 두 종파로 나뉜다. 로마교회로부터의 독립만으로 만족하는 국교회와, 제2의 종교개혁을 통해 교황 뿐 아닌 주교제까지 정화(purify)해야 한다는 청교도(Puritans)였다.

그러나 청교도가 기성교회 제도 안에서 개혁을 해나가자는 것과 달리, 국교회란 있을 수 없으므로 분립해야 한다는 분리파는 본거지를 게인스보로와 스크루비에 두었다. 노팅엄셔의 스크루비 마을은 그들의 중심지인 동시에 훗날 필그림의 플리멑 정착촌의 영적 지도자였던 윌리엄 브류스터(장로)의 고향이었다. 또, 브류스터와 같은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인 존 로빈슨 목사, 소지주였던 윌리엄 브랟퍼드 등도 분리파에 매료됐다. 브랟퍼드는 훗날 신대륙 매사추세츠 플리멑 정착촌의 제2대 총독이 된다.

국교회 이탈을 용납치 않았던 영국왕권은 분리파를 박해, 투옥했다. 엘리자벹1세는 신대륙 개발을 추진하면서 종교 분파에 비교적 관대했으나, 뒤를 이은 제임스1세와 찰스1세는 심한 박해를 가했다. 제임스1세는 제임스왕역 성경전서(KJV) 번역을 주도한 왕이다.


레이던(Leyden) 공동체

결국 스크루비 분리파는 1607-1608년 두 해에 걸쳐 국왕의 훼방을 무릅쓰고 고국을 떠나 보다 더 자유로운 네덜란드로 이주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종교박해에 반대하던 비교적 자유로운 국가였다. 유대인들이나 프랑스·독일의 칼뱅주의자들도 네덜란드나 네덜란드 식민지로 이주해 신앙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에 1년간 머문 분리파는 종교논쟁 끝에 1609년 대학촌인 레이던으로 옮겨 자리잡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브랟퍼드는 성경(히브리서 11장)에 따라 이들을 나그네/순례자들 즉 '필그림'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 명칭은 1800년대초까지 별로 쓰이지 않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순례자였음을 알았다"는 브랟퍼드 총독의 글이 발견된 후 폭넓게 인용되기 시작했다.

로빈슨은 공동체교회의 정식 담임목사로 안수 받고, 브류스터는 지도장로가 된다. 지도자들은 레이던의 경건한 학풍과 지적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고 일반교도들은 주로 방직공으로 일했다. 그러나 낯선 언어문화, 낮은 생활수준과 저임금, 스페인의 침략위협, 네덜란드 문화와 관습에 젖은 자녀들의 정통신앙·도덕·정체성 상실 위기 때문에 딴 해결책을 모색한 결과 신대륙 이주를 결심한다.

처음엔 남미의 기아나로 갈 생각도 했지만 북미주 버지니아로 가기로 최종 결정하고 생활수준의 향상을 위해 떠나자고 공동체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레이던 공동체가 신대륙으로 모두 이주하는 데는 1620년부터 약10년이 걸렸다. 메이플라워 외에도 많은 배가 이들을 태워 날랐다.
존 로빈슨 목사는 한동안 머물며 공동체를 돌보다가 아쉽게도 항해도 못 해본 채 미리 별세했다. 마치 카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숨진 모쉐처럼.


메이플라워

분리파인 레이던 공동체의 첫 항해팀은 네덜란드에서 '스피드웰' 호를 구입, 1620년 7월 델프트샤벤에서 출항해 '메이플라워호'가 정박해있던 영국 사웉햄튼 항에 도착했다. 투자협회(머천트 어드벤처러)와 7년 고용계약을 맺고 메이플라워를 용선 계약한 상태였다.

사웉햄튼에서 일부 추가된 분리파 성도들과, 투자가들이 고용한 식민지개척자들과 합류해 모두 120여명이 승선했다. 그해 8월5일, 두 배가 대서양에 동시 출범했으나 스피드웰에 물이 새자 영국 다트멑 항으로 되돌아와 수선해 재출발한다. 그러나 또다시 물이 새는 바람에 영국 데번셔의 플리멑 항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스피드웰을 팔고 메이플라워만 타고 플리멑 항을 떠났다.

그런 와중에 20여명이 항해를 포기하고 102명만 출발했다. 70명의 남녀 성인과 32명의 어린이들, 닭 몇 마리, 개 두 마리 등이었다. 44명의 필그림은 자기네를 '성도'(Saints), 나머지 60여명의 합승객들을 '이방인'(Gentiles)들로 호칭했는데 이것은 양측 사이의 불화를 예고했다. 아울러 다수의 착각과는 달리 미 건국선조들이 다 경건한 신교도들은 아니었다는 시사를 해 준다. 미 건국선조들의 상당수는 프리메이슨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메이플라워는 무게180톤급, 길이90피트로 가족당 면적이 매우 좁았다. 1620년 9월6일 순풍을 받아 시작된 66일간의 긴 항해여정은 이내 잦아진 폭풍으로 거칠고 험난했다. 파도가 갑판 위로 몰아쳐 존 하울랜드가 하마터면 쓸려갈 뻔했다. 한번은 가운데 빔(가로대)이 꺾여 큰 쇠나사로 수리해야 했다. 승객들은 거센 바닷바람과 추위에 떨어야했고 배가 목선인지라 화재위험 때문에 주로 찬 음식만 먹어야 했다.

많은 승선자들이 앓았고 1명이 숨졌으며 남자아기 오셔너스(Oceanus)가 새로 태어나기도 했다. 11월10일 멀리 매사추세츠의 케이프코드만의 육지가 보이자 이들은 당초 회사로부터 정착허가를 받은 버지니아를 놓친 사실을 알았다. 당초 예정 목적지는 북버지니아의 허드슨 강변이었다. 그러나 이젠 다만 안전 상륙만이 목표였다.

대륙을 눈앞에 둔 11월21일(그레고리우스 달력으로 11일. 필그림은 율리우스 달력을 썼다), 긴 여정 동안 '성도들'과 '이방인들'간에 일었던 불화를 불식시키려는 뜻으로 양측의 평등성과 연합을 보장한 민주적인 '메이플라워 합의선언문'(Mayflower Compact)을 채택, 서명하고 존 카버를 첫 총독으로 뽑았다. 그후부터는 승선자 전원을 '필그림'으로 칭했다.

합의선언문은 실제로는 이행되지 못했다. 플리멑 정착촌 행정이 민주적이기보다 영적 지도자들이 다스리는 신정(神政·theocracy)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연방헌법 제정에 하나의 모델이 됐다.


도착과 정착

메이플라워는 그해 11월12일 케이프코드 곶(현 프로빈스타운 항)에 닻을 내렸다. 어느 월요일 아침, 일행중 일부가 군인출신인 마일즈 스탠디쉬(이듬해 지휘대장이 되어 총독을 돕는다)의 지시를 따라 샐렆(조각배)으로 연안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무장한 남자들이 노를 저어 해안으로 다가가 육지에 첫발을 내디뎠다. 몇몇 여자들도 묵은 빨래거리들을 챙겨 해안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 땅은 들짐승들과 원주민들만 가득할 뿐 별 자원이 없어 보였다. 다만 땅속에 인디언들이 저장해둔 알록달록한 곡물씨앗이 가득한 바구니들을 발견했다. 옥수수 알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콘힐'(Corn Hill)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오랜 항해로 밴, 배 갑판의 악취를 잠재울 곱향나무(주니퍼)를 찍어서 실었다.

며칠 후 본선으로 돌아간 탐사대원들은 화이트 부인이 건강한 남자아기 '피리그린'을 낳은 것을 보고 기뻐했다. 영국을 떠난 후 두번째 태어난 아기였다. 그후로도 용감한 남자들이 케이프연안을 탐사한 끝에 물 좋고 숲과 야생조류와 짐승, 물고기가 풍부한 플리멑 어귀를 발견했다.

플리멑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1월21일, 승객 전원이 상륙한 것은 12월11일이었다. 사실 플리멑이란 이름은 앞서 1614년, 제임스타운 정착촌의 우두머리 존 스미스 선장이 식민개척회사인 '플리멑캄퍼니'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이다. 물론 본래의 플리멑은 잉글랜드 남서부의 군항이다.

일동은 모두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12월16일 날씨가 겨울로 돌변했고, 22일에는 앨러톤 부인이 남아를 사산했다. 성탄절에는 정착촌 첫 건물인 공회당(the Common House)을 짓기 시작했다. 이어서 주택과 셀터도 짓게됐지만 심한 추위에 모두들 덜덜 떨어야 했다.

그 첫겨울, 주거지가 미처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진 한파로 다수가 감기와 폐렴, 폐병 등을 앓던 나머지 하루 1-3명씩 죽어가 이듬해 봄까지 약 절반이 세상을 떠났다. 공회당은 병원으로 쓰였다. 사람들은 깊은 슬픔과 충격 속에 시신들을 항구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묻었다.

살아남은 사람의 절반이상은 어린이들이었다. 지도자들은 환자와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며 주님께 간구했다. 1621년 3월에 재선된 카버 총독도 약 한달만인 4월5일에 숨지자 브랟퍼드를 제2대 총독으로 뽑았다. 브랟퍼드 자신도 앞서 상륙 때 아내가 실족해 익사하는 바람에 한살짜리 아들만 둔 홀아비가 됐다. 타고 온 메이플라워는 4월중 뱃사람들만 싣고 귀국했다. 메이플라워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후 동명의 배가 여러 번 신대륙을 오간다.

주일예배 인도와 설교는 브류스터가 맡았으나 목사안수자가 아니어서 성만찬을 갖지는 못했다. 모든 이들이 로빈슨을 고대했으나 네덜란드에서 숨졌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1주 3번씩 설교를 한 브류스터는 서재에 신학도서를 많이 갖고 있었다.

초기이주민(First Comers)들은 메이플라워호(1620년), '포천'(1621), '앤'과 '(리틀)제임즈'(1623) 4척의 배로 건너간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18세기 플리멑인들에게 '선조들'로 불렸다.


필그림의 첫 추수잔치

오늘날의 미국 추수감사절은 본시 영국에서 유래된 뉴잉글랜드의 두 전통-감사기도와 추수잔치-의 종합형태이다. 필그림들은 안식일(주일)과 금식일, 감사절 등 3개 절기를 지켰다. 금식일과 감사절은 달력에 기재된 공식휴일은 아니었고 특수상황 때 총독의 선포로 지켜졌다[금식일은 가뭄과 전쟁 때 실시됐다].

수확 때, 또는 (기도응답으로서의) 우기(rainfall)에 지켜진 감사절은 '신적 섭리'(the Divine Providence)가 실행된 상당기간 후 종교휴일로 부상했으므로 1621년의 첫 감사절은 공식 종교절기보다는 세속 추수잔치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필그림 자신들이 종교적이었기에 잔치 때 (기도문이 아닌) 즉흥기도를 드렸다.

그래서 대륙도착 약1년만인 1621년 가을(10월∼11월21일 사이 3일간)에 영국식 전통 추수잔치(Michaelmas)를 가졌다. 브랟퍼드 총독이 이 기간을 감사축제일로 선포했다.
이 들이 거둔 곡물은 필그림 도착 4년전 역병(그전에 도착한 딴 백인들에게서 옮은 것으로 보인다)으로 멸족된 파툭셑 족의 밭에 심은 것이었다. 밀과 보리농사는 별 실효를 못 거뒀지만 옥수수 농사만큼은 티스콴툼(스콴토)의 도움으로 매우 만족스러웠다. 스콴토는 물고기를 거름으로 써서 언덕에 옥수수 심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해서 일구고 심은 옥수수 밭이 약20에이커였다.

지휘대장 스탠디쉬는 스콴토와 그의 친구 사모t셑, 왐파노아그족 추장 마사소이트와 그들의 친척들을 초대했다. 잔치에 참례한 필그림 생존자는 약50명, 스콴토 일행이 데려온 마사소이트 추장을 비롯한 인디언 전사들은 자그마치 90명이었다! 인디언 방문단의 규모를 미처 예상 못한 필그림의 식량사정을 간파한 추장이 부하들에게 부식 조달을 명하자, 다섯 마리의 들사슴과 수많은 칠면조를 잡아와 식물로 보탰다.

잔치는 옥외의 큰 잔칫상에서 브류스터 장로의 기도로 시작돼, 온갖 음식을 즐기면서 양측이 씨름과 달리기 등 각종 경기와 행진, 북 치기, (인디언의) 활쏘기, (필그림의) 총쏘기 등 힘과 기량도 겨뤘다. 조용한 '감사절 예배'가 아니라 떠들썩한 추수잔치였다는 말이다.

인디언여성들은 남자들과 함께 한 상에서 나란히 먹었으나 필그림 부인들은 전통에 따라 뒤에 서서 지켜보다가 남자들이 다 먹은 뒤 식사를 했다. 이 기간 중 스탠디쉬 선장과 마사소이트 간에 파툭셑 옛터에 세워진 플리멑 개척지를 공식 인정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필그림들과 원주민들이 첫 감사절 때 먹은 요리

필그림과 인디언들이 첫 수확축제 때 즐겼을 만한 음식은 다음과 같다.
  

   육류: 삶은 고기(바다가재·대구·칠면조), 구운 고기(대구·오리·거위·사슴),
   토끼 프리카세(프랑스식). 낙농식품: 홀란드식 치즈.
   곡채류: 옥수수요리(죽·빵·콘밀푸딩·팝콘) 과일, 콩, 기타: 단풍시럽.
   당대의 인디언요리: 수코타시(옥수수·강낭콩·귀리·보리 등을 넣고 끓인 콩죽),
   파트리지(partridge), 야생과(berries, 특히 크랜베리), 흰살생선, 붉은육식, 물냉이, 해초, 다양한 콩 류, 푸른호박, 붉은호박. 고구마. 각종 당과 요리. 팝콘.


원주민 왐파노아그 족(Wampanoags)

대륙 원주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필그림의 생존은 실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이들과의 초기의 평화는 곧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필 그림을 환영하고 도운 왐파노아그 족은 뉴잉글랜드 남동부 일대인 네폰셑 어귀(현 보스턴 남부)로부터 나라간셑 베이 동쪽연안(현 케이프코드 및 주변 섬들)까지 분포돼 수백년 내지 수천년 살던 미 원주민의 일파였다. 우들랜드 문화권, '델라웨어 연맹'으로 널리 알려진 알곤킨 어족(語族)의 일부였다.

'왐파노아그'의 뜻은 알곤킨어로 '새벽의 사람들'. 이들은 매사추세츠와 로드아일랜드 연안 마을의 둥근 지붕 오막집(wigwams)에 살면서, 주기적으로 이 지역을 돌며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와 사냥을 했다.

남자들은 주로 활쏘기와 고기잡이에 열중했고 여자들은 옥수수심기와 수확 등 식량과 음식장만, 가사 일을 돌봤다. 젊은이들은 노년층을 공경했다. 추장은 '사쳄'(sachem)으로 불렸다.

개척자들이 오기 전 왐파노아그 왕국은 67개 부족 및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나 다수가 질병과 전쟁, 백인 개척자들과의 싸움 끝에 분산 또는 멸족됐다. 1615-1617년에 걸쳐 백인 노예상인들이 옮겨와 북동부 연안에 나돈 염병으로 모두 약10만명의 인디언들이 죽고 5천명만 해안에 살아남았다.
필그림을 도운 왐파노아그 일족은 마사소이트 추장이 이끄는 파카노켙 족이었다. 현재는 4개의 왐파노아그 공동체가 매사추세츠 남동부, 1개가 로드아일랜드에 남아있다. 이들과 에스키모, 중남미의 잉카, 마야를 비롯한 남-북미 원주민들은 혈통이 거의 몽골계열이며 아득한 옛날 아시아대륙에서 건너온 인종들로 추정된다.


스콴토와 사모셑은 누구?

플리멑 정착촌의 은인인 원주민 스콴토(원명: 티스콴툼). 그와 와바나케 족 사모셑(Samoset)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필그림들은 왐파노아그 족과의 평화유지와 협력을 얻기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스콴토는 전염병으로 멸족된 파툭셑 족 출신으로 훗날 파카노켙 왐파노아그 왕국의 일원이 됐다.

그는 필그림 도착 15년 전인 1605년, 친구인 영국탐험가 존 웨이멑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많은 경험을 얻고 영어를 배운 끝에 1614년 다시 뉴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국 노예상 토머스 헌트 선장에게 27명의 원주민과 함께 사로잡혀 스페인(일설에는 카리브제도 스페인계)에 팔렸다가 수도사들과 사귀면서 기독교신앙에 접하고 도움받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귀향하게 된다.

두번째 영국 체류당시 그는 사모셑을 만나 1620년 둘이 함께 파툭셑으로 돌아왔다(사모셑은 과거 신대륙 연안에서 고기잡이하던 영국어선 선장들에게 영어를 배웠었다). 그러나 고향에 와 보니 전염병으로 동족이 전멸하고 해골만이 온통 나뒹굴었다. 기가 막힌 둘은 왐파나오그 족 이웃 마을에 머물면서 일족으로 가입한다.

이듬해 봄철, 둘이서 파툭셑 인근 해안에 사냥을 나갔다가 황폐한 파툭셑 마을에 정착한 영국인들을 보고 놀라 며칠간 경계하며 지내다 마침내 접근하기로 결심했다. 3월16일에 먼저 사모셑이 필그림에게 다가가 영어로 '웰컴'이라고 말을 건네자 그의 출현에 긴장하던 정착민들이 깜짝 놀라며 이내 안심했다.

서로 대화를 나누며 하룻밤을 보낸 사모셑은 며칠 후 스콴토를 데리고 나타났다. 필그림들은 스콴토의 유창한 영어실력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당대 북미 원주민중 가장 영어회화에 능란했던 것으로 알려진 스콴토는 이후 몇달간 필그림 마을에 머물며 필수적인 생존기술을 가르친다.

손수 사냥한 사슴의 고기와 비버 털가죽을 갖다주거나 옥수수와 야채재배법, 사냥과 고기잡이, 인디언식 집짓기도 가르쳤다. 특히 그가 필그림들에게 무두질(가죽다루기)을 가르친 비버가죽은 당대 유럽에서 한창 인기절정이었다.

그밖에도 독성 식물 구분법과 약재 활용, 조개 채취와 조리법, 단풍 액즙(메이플시럽) 채취, 물고기 비료 활용법 등을 정성껏 가르쳤다. 이런 스콴토의 도움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해 농사가 성공을 거둘 뿐더러 추수잔치 당일에는 필그림 지도자와 마사소이트 사이에 통역을 한 결과 약50년간 인디언과의 평화를 누리게 했다.

스콴토는 훗날 정착자들과의 유착 관계로 한때 원주민 사회에서 따돌림 받기도 했으나 말년에 숨질 때 자신의 신앙고백을 재확인했다. 그는 신자였고 '하나님의 사자'로 필그림들에게 두고두고 존경을 받았다.
스콴토처럼 유럽에서 신자가 된 사람으로는 포와탄 추장의 공주로, 아버지에게 피살될 뻔 한 존 스밑 선장을 살려주고 훗날 백인 담배지주 존 롤프와 결혼한 포카혼타스(영명 '러베카')가 있었다. 포카혼타스는 영국 방문도 한다.


미화된 필그림 후기사

미 건국사를 필그림의 관점에서만 보아 그들의 공로로만 돌리고, 원주민들을 도외시한다면 편협한 시각이다. 아울러 필그림의 신앙생활을 훌륭한 것으로만 보는 것도 오해다. 그들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필그림과 원주민족 왐파노아그 족 사이를 연결시켜 준 원주민 스콴토와 사모셑이 없었더라면, 필그림은 다른 정착촌처럼 멸종 위기를 면치 못했을지 모른다.

불행히도 필그림과 원주민 사이의 평화는 오래지 못했다. 계속된 항해로 정착민이 늘면서 필그림들이 원주민의 도움이 필요치 않게 되자, 정착초기 인디언들의 도움을 잊어갔다. 상호불신감이 커지고 우정이 약화됐다.

필그림들은 스콴토를 '하나님의 사자'로 여긴 것과는 달리 기타 원주민을 이방인 내지 '사탄의 종자들'로 여겼으며 원주민들이 염병으로 죽자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으로 믿었다. 또 인디언들의 토속종교와 관습을 적대적으로 비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초기 정착민과 인디언들의 후손은 '필맆 왕' 전쟁 때부터 서로 죽이는 사이가 되고 오랜 적대 관계가 지속된다. 평화협정 후 불과50년 안에 왐파노아그 족의 대부분은 멸족됐다.

오늘날처럼 국내에 큰 고난을 겪는 미국이, 과거 원주민들에게 행한 모든 잘못과 범죄를 하나님께 진정 회개하고 인디언들의 위치를 제고시켜주면서 전체적인 인종차별도 줄인다면, 미국의 영적 회복과 부흥에 큰 유익이 될 것은 자명하다.


필그림 이전에도 감사축제는 있었다

신대륙에서의 첫 감사제는 필그림 이전에도 있었다.
한 예로, 1619년 12월4일 버지니아의 버클리 정착촌(현 찰스시티)에서 38명의 영국인들이 매우 경건한 감사의 날을 지켰다. 그들의 생활헌장에 신대륙 도착일을 연례감사절로 지키기로 명시돼 있었다. 감사예배를 주관한 이는 존 우들리프 선장이었다.

버클리 정착촌 감사절 선언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버지니아 정착촌으로 지정된 이곳에 우리 선박이 도착한 날을 해마다 그리고 영구히,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성일로 지킨다." 


이들은 이듬해인 1620년, 1621년에도 계속 감사절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1622년 인디언에게 전멸됐다. 그밖에도 앞서 언급한 인디언 공주/소녀 '포카혼타스'의 설화로 유명한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정착촌에서도 영국식 수확축제가 지켜졌을 것이다. 또 원주민들도 자기 신들에 대한 나름의 추수잔치 전통을 수천년간 지켜왔었다.


두 번째 기적의 추수감사잔치

필그림들의 두번째 감사제는 1623년에 지켜졌다(1622년에는 옥수수 추수에 아직 채 익숙지 않아 수확량이 충분치 못한 데다 곳간곡식을 새 정착민들과 나눠먹느라 식량이 부족했다).

23년에는 더 넓은 땅을 경작하고 주택수도 늘렸으며 인디언과의 교역을 위한 잉여농산물(옥수수 등 곡물)도 재배했으나 봄여름에 심한 가뭄피해를 입었다. 여러 주간 비가 오지 않아 인디언들조차 과거 그런 가뭄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옥수수 줄기가 햇볕에 시들어가고 밭 지면은 굵은 금이 가 평소같은 비는 쓸모가 없었다.

그해 7월, 브랟퍼드 총독이 지도자 비상회의를 소집, 금식일을 선포하고 모든 정착민들에게 회개와 겸손을 곁들인 기도를 요청했다. 정착자들은 통나무교회당에 모여 영적 교만과 질투, 복수심, 탐욕, 깨어진 대인관계 등을 자복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성령의 평화가 그들에게 가득 임했다. 금식 당일 아침에 쨍쨍하던 날씨는 그날 오후 교회당을 나설 때, 구름이 뒤덮였다. 이튿날 아침 부드러운 비가 내리기 시작, 14일간 줄곧 내렸다(중간에 가끔 멈추기도 함). 비를 본 인디언의 추장 호보목은 필그림의 하나님을 참 신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해 가을 수확은 대 풍작이었다. 곡물을 제대로 재배하지 못한 북부 인디언들까지 큰 혜택을 입었다. 총독은 11월29일 하루를 감사절로 제정하고 재차 마사소이트 추장과 용사들을 불러 대접했다.
1676 년 6월29일, 다른 정착촌에서 또 한 번의 감사절이 선포됐다. 매서추세츠주 찰스타운 행정의회가 대(對) 원주민 전쟁의 승리와 안전 정착을 자축하려고 의회서기 에드워드 로슨이 선언문을 읽었다. 그러나 이때 인디언들의 패배와 멸망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이었기에 과거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국경일 발전 단계

그로부터 100년 후 독립전쟁 당시인 1777년 10월, 대륙의회의 의결을 거쳐 13개 식민주가 최초로 공동감사절로 8일간을 지켰다. 대(對) 영국전쟁인 사라토가 전투의 승전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그 12년 후인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11월26일을 기도와 감사의 날로 요청, 모든 교파가 공동으로 지켰으나 일부 식민주들의 견해차로 연합국경일로는 지켜지지 못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특정일 하루를 감사절로 지키는 정신을 왕정시대의 유물로 보고 비웃었다.

감사절이 오늘날 같은 공식국경일로 발전하게 된 데는 19세기 잡지 편집인이며 미국의 첫 여기자인 새러 조세파 헤일 부인의 공로가 컸다. 헤일은 1840년부터 20년간 추수감사절을 연례행사로 지키기 운동을 펼치면서 '보스턴레이디매거진', '고디스레이디북' 등에 관련논설을 실었다가 해고당하기도 했다.

헤일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 1830년 뉴욕주가 최초로 공식 '감사절'을 선포하자 다른 주도 덩달아 뒤따랐고, 계속된 캠페인 결과 1852년 29개주가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절로 지키는데 동참했다.

헤일의 40년간의 끈질긴 장기캠페인 끝에 드디어 1863년,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은혜로우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전국 국경일'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링컨 이후의 역대대통령도 한번씩 국경일로 선포했다. 캐나다도 1879년 11월 최초로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채택, 이후 매년 10월 둘째 월요일로 제정해 지키고 있다.

1939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성탄절 쇼핑기간을 앞당겨 연장할 목적으로 11월 셋째 목요일로 옮겼으나 국민들이 계속 이의를 제기하자 1941년, 연방의회가 넷째 목요일로 영구 고정시켰다. 추수감사절은 미 건국 선조와의 불가분의 연관 속에서 미국기독교의 한 상징과 전통으로 유지되고 있다.


링컨의 1863년 감사절 선언문

이 감사절 선언문은 미 합중국의 교만에 대한 회개의 기도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최고로 정선된 하늘의 혜택을 받은 민족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보전되고 평화와 번영을 누려왔다. 인구와 부, 국력 면에서도 여느 나라보다 앞섰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우리를 평화로써 지키시고 번영과 풍요, 힘을 베푸신 그 은혜의 손을 망각한 채, 이 모든 복이 우리 자신의 탁월한 지혜와 덕목 때문인 줄 착각하는 헛된 망상과 속임수로 지내왔다.
우리는 쉽사리 깨어지지 않는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구속과 보호의 은총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자만하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하기에는 너무나 교만해졌다. 따라서 이제 의무적으로, 우리가 거슬린 그 능하신 분의 존전에 겸손히 꿇어 나라의 죄를 자백하여 자비와 용서를 빌고자 하는 바이다.
-[1863년 4월30일 발표된 '전국 금식과 겸손, 기도의 날'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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