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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으로 승리

바로 이거구나! (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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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거구나!"

혼잣말이다.
예수님의 영화롭고 찬란한 햇빛이 내 영혼에 쏟아져 들어온 바로 그 날, 했던 말이다.

누군가 말해 주길 그렇게 바라고 기다렸다.

"어떡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까?"
"하나님은 어떻게 믿는 걸까?"

그런 궁금증으로 얽히고 설킨 오랜 의문의 실타래가 술술 풀리던 날이다.

생전 처음 듣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듣는 순간 그냥 저절로 온통 다 믿어지던 내 마음을 그 누가 말릴 수 있었으랴!
천하장사인들, 그 어느 세력인들, 권위인들, 그 누구인들..나의 들리는 귀와 보이는 눈, 믿어지는 마음을 닫을 수 있었겠나. 

마치 댐이 터지면서 쏟아져 나오는 거센 물살을 못 막듯 나의 가슴 문을 박차고 내 가슴 속에 쏟아 부어지는 그 무엇을 나 자신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의 뇌리를 스쳐 가는 깨달아짐에 "바로 이거야!" 하면서 손에 쥐어진 듯한 그 무엇을 놓칠 수 없었다. 

구원을 받는 믿음이다.
나의 ‘바로 이것’인 예수님이 이렇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선물로 들고 나를 찾아 오신 것이다. 

어떻게 알았지, 오늘 내가 성경공부 시간에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누군가가 넌지시 일러 주었나 보다.
마음 속에 어마어마한 갈증과 궁금증이 가득한 한 여자아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그래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만나 주셨나 보다.

2.
나는 겨우 열 네 살 소녀였다.
교회라곤 아주 어릴 적 크리스마스 때 특별 학예회에 참석해 본 것이 전부였다.
한국도 아닌 타국에서 교회의 학생 성경공부 시간에 앉아 있다는 것은 순전히 우연일 수 있다.

그 목사님은 내 친구의 아버지이셨다. 우연히 같은 중학교 친구를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교회 가는 것이라면 펄쩍 뛰시던 엄마도 "윤 목사님은 얼굴에서 빛이 나셔!" 할 정도로 너도나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목사님이셨다. 

이렇게 교회에 첫 발걸음을 내딛은 나는 친구 따라 강남 간 셈이었다.
이미 잘 짜인 각본의 기막힌 우연일 수 밖에 없는 이 상황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엄청난 우연이 나의 삶 전체를 뒤바꾸고, 나의 신분이 달라지고,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까지 흑에서 백으로 180도 전환시켜 마치 세상 안에서 세상 밖으로 던지는 듯한 변화의 회리바람 속으로 온통 몰고 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날 영원히 떠나지 않고 내 속에 계시려고 찾아 오신 주님과의 첫 만남은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임을 그 후 많은 세월을 통해 알아 갔다.

겨우 중학생이지만, 버스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느며 통학하던 시절, "누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가르쳐만 준다면…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하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 오는 갈증을 이루 주체하지 못했다.

왜 이런 생각과 마음이 드는지 난 알 길이 없었다.
사춘기 소녀가 겪는 감정의 기복 탓만은 아니었을 텐데…

3.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웃집 친구가 성경 이야기를 재미나게 이야기해 주던 기억이 있다. 너무나도 재미있어 더 듣고 싶어 했지만, 초등학교 3학년 짜리에게는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경 지식이었을 것이다.

주일 날 아침이면 우리 집 앞 큰 길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성경을 옆구리에 끼신 아저씨, 대부분 깨끗하게 차려 입은 할머니나 아줌마들, 그 외에 젊은 남녀들 그리고 아이들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곤 했다.
한 겨울날의 빙판도, 호되게 비바람 치는 날씨도 교회를 향한 이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해 보였다.

그래선지는 모르나, 그들을 그렇게 강하게 끌어 당기는 모종의 자석 같은 힘에 대한 궁금증이 내 어린 마음에도 한 구석 남아 있게 되었나 보다. 

주일날만 되면 물끄러미 바라보던 교회 가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삶이 너무나 궁금했다. 어떻게 다른지 알고팠다. 막연히 우리 엄마 아빠도 기독교인이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곤 했다. 잘은 모르지만 무엇인가 다를 거라는 확신마저 생겼다.

정확하게 무엇이 부러운지 모른 채로 부러워하면서도 선뜻 교회를 찾아 나서진 못했다. 아마도 그래서 강남 따라 갈 친구가 필요했나 보다.

밤송이 만한 흰 눈덩이가 펑펑 쏟아지는 겨울날, 머리에 고깔모자만 쓰고 한 손엔 성경 가방을 든 나이 많은 우리 대고모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주일마다 우리 집 앞을 거쳐 교회를 다니신 그 할머니는 "교회 갔다 오마" 하곤 하셨다. 예배가 끝나면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고 우리를 귀여워해 주시던 할머니였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여러 차례 교회 갈 것을 권하셨다고 한다.

또 다른 대고모 할머니는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시면 우리랑 함께 주무셨다.

자다 보면, 으레 앉아 계신 할머니.
난 그런 모습에 익숙치 않아서인지 왜 안 주무시는지도 몰랐다.
기도하시는 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그러고도, 누구를 위해...무엇을 위해...하시는 기도일까...? 
항상 궁금했다.

우리 아버지의 사촌 형수님이 "내가 예수님 안 믿었으면 자살이라도 했을 거야"라는 말씀을 엄마에게 하시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당시 사람들이 알아 주는 지위와 부가 있어 보이는 분들에게도 삶의 고달픈 면이 있었나 보다.

아직 어린 나이 탓이었는지는 모르나 그분들의 삶의 역경보다는 '예수님'이라는 말이 내 귀에 더 솔깃했다. 

"예수님은 누구이실까?" 
"누구이시기에 자살하고 싶은 고통에서도 소망과 희망을 품게 되었나?"

점점 더 궁금해졌다!
누군가가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신 것만 가르쳐 준다면 너무나 하나님을 믿고 싶은 아이였다. 

4.
그랬던 내가, 어쩌다 바다 건너 다른 하늘 아래 살게 되면서 친구 덕분에 자연스럽게 교회로 발걸음을 내딛고 성경공부 시간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고…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를 용서 받고 천국에 간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전구에 불 켜지듯 내 머리 속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아…,이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내 가슴을 후벼 파며 큰 파문을 일으킨다. 

동시에, 어렸을 적에 듣던 막연한 천국과 지옥의 실체가 이렇게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줄 처음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잘못 알던 것이 있다. 어른들이 소위 선량한 사람을 가르켜 흔히 하던 말-"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

"아…,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구나" 하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사람마다 달리 적용되는 불분명한 기준이나 법칙이 아니다.
이 세상 사람 모두에게 똑 같이 적용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하나 뿐인 천국 길이 아주 맘에 들었다.

내가 혼자 애써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누구의 손만 붙잡으면 된다는 사실이 이치에 맞았다. 예수님과 천국의 비밀은 14세 소녀의 어린 마음도 알아 들을 수 있다는 데 맘이 놓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죽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구나." 

아무도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진 않았지만 자연히 생각이 그렇게 돌아갔다.

"아…이거구나. 예수님이 답이구나!" 하는 깨달음과 동시에 이젠 더 죽음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어졌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런 마음이 내 속에 자리잡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듣는 천국 복음은 내게 이런 편한 생각을 가져다 주었다. 

수도 없이 들은 천국과 지옥 이야기. 염라대왕 이야기까지… 다 섞여 판타지를 이룬 불분명한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어디가 내가 가고 있는 곳인지 모르는 답답함과 어쩌면 천국에 갈 자신이 없는 마음이 섞여 두려움으로 자리잡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이런 데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디서 온 것일까?

천국에 관한 잘못된 정보에서 해방된 기쁨보다 더 큰 희열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만나 뵙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너무나 간단하고 너무나 쉽게 믿어지는, 나만 모르고 지낸 것 같은 진리를 알게 되자, 이젠 더 하나님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5.
얼마 후 목사님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에게 질문을 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 속에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지를.

다른 친구들은 모두 하나처럼 똑 같은 대답이다. 마음이 기뻐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내게 일어난 변화만 다르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없어진 것이 내게 일어난 큰 변화인데…기쁨이라기 보다는 드디어 "휴우" 하고 깊이 숨을 내쉬고 마실 수 있는 안도감이 내게는 큰 변화였다.

그러나...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선생님들 사이에 "쟤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아이"로 통하던 나는 목사님 앞에서 감히 사실대로 실토할 용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긴 이제 겨우 중학생인 나. 그것도 여자아이가 죽음이 어떻고 저떻고 한다고 생각하니 이건 아니다 싶어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게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 그날을 돌아보면 참 후회스럽다.
왜 사실대로 말을 못했는지. 목사님은 내 속에 일어난 변화를 직감하셨을 텐데….

아무튼 교회 가는 즐거움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성경책과 찬송가 사이에 주보를 끼어넣는 일이 나의 일이었다. 아무도 시키는 사람은 없는데도 열심히 한 것 같다. 목사님이 미국에 잠시 다니러 가신 사이 사모님은 나를 구역예배에도 데리고 가셨다. 진작 딸인 내 친구는 안 데리고 오셔도 나를 데리고 가신 이유를 난 아직도 잘 모른다. 

다들 한국에 돌아가서 나서도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안 믿는 나의 부모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던 목사님. 허름한 집일 망정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내 친구의 가정이 난 많이 부러웠다. 우리 가정, 우리 부모님의 사랑과는 다른 그 무엇이 거기 더 있었다. 

나의 어리고 짧은 생각으로는 형용할 수 없이 그분들의 사랑은 어딘지 달랐다. 내가 아는 대다수 가정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아이들과의 거리감 없는 푸근함이 거기 자꾸 가고 싶게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당시는 오직, 엄마 아빠가 예수님을 안 믿으면 지옥행이라는 일념 밖엔 없었다. 기도가 무엇인지도, 어떻게 하는 지도 몰랐던 나에게 유일한 기도는 엄마 아빠가 교회 가고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안타까워, 밥상에서 예수님 믿어야 한다는 말이 부모님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 아닌 딴 사람, 아버지 친구의 전도로 부모님도 교회에 나아가게 되고 믿음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6.
한국도 아닌 먼 타국에서 일어난 이런 삶의 변화는 마치 나의 장래에 일어날 변화무쌍한 나의 삶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렇게 나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국서 중학교 2학년을 겨우 마치고 아는 영어라고는 알파벳과 쉬운 단어가 전부인 나는 영국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보수적인 기독교 계통의 학교라 한국만큼은 아니어도, 벌 받을 만한 짓을 한 남자 학생들의 종아리를 때리는 덩치가 크고 무섭고 엄한 여자분이 교장 선생님이셨다. 그분의 풍채가 말 한 마디 못하는 나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마다 밀려 오는, 학교 가기 싫은 마음과의 투쟁이 계속된다. 말을 알아 들을 수도 할 수도 없는 답답함에 가기 싫은 거다. 설상가상으로, 책을 읽히면서 미국식 발음에 익숙해진 나의 발음을 모조리 고쳐 주는 선생님. 받아쓰기를 하면 빨간 색연필로 매겨진 숫자 옆에 붙어 있던 마이너스 표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숙제를 겨우 하긴 했지만 아버지의 한숨마저도 나를 힘들게 했다.  친구들의 관심사였던 비틀즈와 그때 유행하던 어떤 음악도, 너풀대는 통바지도 친구들의 그 어느 파티도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요소들은 아니었다. 

여름방학이 지나자, 점점 쉬워져 가는 학교 공부, 점점 귀에 들어오는 영국식 영어, 서서히 떨어지는 입술…좀 살 만 해졌다. 

학년이 끝나 갈 무렵, "Are you going to teach us again?’ 하고 묻는 나에게 "Maybe, maybe not" 하며 환하게 웃으시던 영어 선생님의 모습은 나의 변화에 기뻐하는 뿌듯한 모습이 분명했다. 

7.
한국의 중학교 일학년 시절, 영어 교과서의 겉표지를 들치면 나오던 흑백 사진이 기억난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더불어 수많은 높은 빌딩들의 숲인 맨해튼 미드타운의 모습.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어 신기해 하면서도 무섭게 느껴지던 그 사진에서 눈을 못 떼곤 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데서 살까 궁금해 하던 나의 호기심이 현실이 될 줄은 전혀 짐작도 상상도 못 해 보았다.

한참 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는 길 선상을 정작 내 집처럼 드나들며 같은 하늘 아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믿음이 확확 자라지는 못해도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천국 가는 복음 때문에 낯선 뉴욕 땅이 두렵지가 않았다. 부모님이 믿음 생활을 하게 돼서인지 아니면 외국에서의 또 다른 삶의 도전 때문인지 신앙생활에 무척 열심을 내던 시기다.

그러던 훗날, 교회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오래 전 처음 예수님을 만난 곳에서의 내 삶이 오늘의 나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었을까?

아직은 이민 초기라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주일학교 교사가 그리 많지 않았을 때라 교사직은 으레 내 차지였다. 타국행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던 시절, 왜 내가 그렇게 혹독하게 영어를 배우는 고생과 마음 고생을 했는지 그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러자 그렇게 힘들었던 기억이 이제 오히려 감사로 바뀌어 자리잡힌다. 

무엇보다도, 열 네 살 소녀에게 그때 다가오신, 우연 아닌 경륜이었던 하나님의 초자연적 구원과 권능의 손길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지난 세월 동안 내게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차고도 넘치지만, 유난히 밝은 햇살이 내가 앉아 있던 방 안과 내 영혼 속을 환히 비추던 날의 기억.
"바로 이거구나.." 하고 영의 눈이 열리던 감격은 아직도 마음에 새롭다. 

예수님이 찾아 나서신 한 마리 어린양이 되어 아무 주저없이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냥 주님의 품 안에 안겨 버린 열 네 살의 나.
그후 강산도 여러 차례 변하는 세월이 지나갔겄만 아직도 주님은 나를 기르시는 목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