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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요 12:35,36] 빛이 있을 동안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은 얼마 더 빛이 그대들 가운데 있을 텐데, 빛이 있을 동안 걸어 다녀요, 어둠이 그대들을 (갑자기) 덮치기 전에. 어둠 속에 다니는 사람은 제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오. 그대들에게 빛이 아직 있을 동안 빛을 믿어요. 그러면 빛의 아들들이 될 테니."
(요복 12:35,36 사역)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빛이 있을 동안'이란, 우선적으로 주님이 땅에 계실 때를 뜻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앞 부분에서 주님을 '빛'이라고 명시했지요(요복 1:4-10).

당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을 맞아 들일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간은 고작 3년간..참으로 짧았습니다. 이 기간동안 주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빛의 아들들"이 된 사람은 극소수였지요. 적다면 120명, 많다면 500명 정도였습니다.
그후 성령께서 오신 뒤 많은 유대인들이 새로 믿었지만 그들의 남은 기간은 AD 70년까지 정도였습니다.

성령께서 계속 머물어 계신 지금, 사람들이 빛의 아들들이 될 기회는 아직 넓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빛의 기회도 언제까지나 늘 있다곤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이후 영원히 지상에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원', '항상', '늘'은 단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만입니다.

우리가 느끼듯 세상에서 빛이 비추던 많은 부분들이 이미 어둠에 싸여 갑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본받아, 세상의 빛, 빛의 아들들인 우리들이 비추는 빛이 점점 흐릿해져 간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빛을 제대로 반사하려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스로 빛인 양 행세하는 명사들이 더 활개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낼 순 없고 빛을 반사하여 되비추는 존재입니다. 주님이 광원 내지 항성 또는 태양 같은 분이라고 비유한다면, 우리는 유성이나 달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침례 요한도 그랬다고 앞서 (사도) 요한이 시사한 바 있지요(요복 1:6-8).

주님은 비록,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나 주님 같은 근원적인 빛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지요. 그러나 많은 명사들이 자신을 광원으로, 또는 항성 같은 빛을 낼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하고 살아 갑니다.

주님 당대의 유대인들 대부분은 주님의 빛을 일시 받아 즐기긴 했지만 늘 빛 속에 살아 가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빛을 거부했고 급기야는 그 빛을 꺼트리길 원했습니다. 물론 그 빛은 꺼지긴커녕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빛의 아들들인 우리를 통해서도 그 분의 빛이 반사되길 원하십니다. 등잔은 됫박 아래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듯 말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 속담도 있습니다만, 빛을 거부한 유대인들은 정말 그러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네 땅으로 스스로 찾아 오신 참 빛-메시아를 거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단지 빛을 멀리하고 거부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카리옽 유다는 표면상 주님을 반기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 가까이 따라다니고, 그분의 권능을 체험하고 활용했고 심지어 주님과 12제자의 은행과 같은 재무/회계 역을 맡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깊은 양심은 궁극적으로 빛과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둠과 가까이 지내고 결국 어둠과 야합하여 어둠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이것은 비단, 유다만의 얘기는 아닙니다.
유다 같은 사람들이 교계엔 흔하며..우리 자신들에게도 유다 같은 성품이 종종 발견됩니다.
페트로는 위대한 사도였지만 그도 한때나마 유다 같았음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여러 번 한 그는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했건만, 한 여종 앞에서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다만 유다와 달랐던 점은 닭 울음소리에 뉘우치고 주님 안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가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처럼 안 되기를.." 하고 우리는 노래까지 부르지만 우린 정말 어둠의 자식인 유다처럼 되지 않기를 날마다 순간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감히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의 빛을 일시나마 즐기고 그 빛 속에 거하길 원하지만 결국 어둠을 더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위 본문 몇 절 뒤인 요한복음 12:43을 보면 관원 중에서도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을 미워하는 파리세인 탓에 출교/파문을 당할까 겁을 내어, 드러나게는 말을 못하고 몰래 혼자만 믿었으며,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을 믿되,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교인들이 우리 가운데 있거나 우리 주변에 많다는 것입니다. 웹에 흔한 한인 교인들의 뉴스와 글 가운데서도 우리는 그것을 느낍니다.
세상 언론의 종교난이나 교계 언론을 보십시오! 미디어가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신 일이 있는지요? 이렇게 장담하는 게 미안하지만..저는 거의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거의 예외 없이 그리고 한결같이, 그들은 인간의 영광과 돈의 영광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교계 주요 인사들과 명사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한다고 믿어집니까?
Hopefully..정말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만..그렇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주님이 오신 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이젠 더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 하심입니다(12:46).
그러나 많은 신자들-우리조차도 상황과 경우에 따라 빛 보다는 어둠 쪽을 더 선호합니다. 더 큰 불행은, 그것을 느끼거나 깨닫지조차 못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불감증'이라고나 할까요. 이것은 위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햇빛이 강렬한 한여름 대낮에 운전하면서 자주 느끼지만, 선글라스/선쉐이드까지 끼고 나면, 너무나 서로 대조적인 그늘 속과 빛 속을 드나들면서 '어둠불감증' 같은 츠러블이 일어나곤 합니다. 어둠이 눈에 익기까지는 잠자코 머물며 빛을 거부하게 되는 상황이지요.

이같은 상황이 오늘날 신자의 삶 속에 일어납니다.
빛을 그리워 하고 좋아하면서도, 어둠에 더 익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 대다수가 그랬습니다.
주님보다 목숨을 아끼고 명예와 영광과 돈을 더 아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어둠에 더 익숙하길 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 영성가라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칭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서도 봅니다. 특히 아무런 성경적인 검증도 하지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새 미국 대통령 버랔 오바마에 대해 긍정 일색, 아니 은근히 부정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느낍니다. 친낙태주의로 철저히 일관해온 오바마를 거듭났다는 둥 정말 엉터리 같은 호평이 그렇습니다.

제가 완전하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저도 약점이 있는 사람이며..세상에 누군들 약점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나 약점이 있다고 해서 누구든 할 말 없이 지내야 한다면..누가 검증을 하며 누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겠나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전혀 빛 없이 칠흑 같은 흑암을 맞이하고 그 속에서 지내야 할 겁니다.

빛이 괴롭다고, 눈이 따갑다고 어둠을 선호하시렵니까?
빛이 너무 밝다고 해서 어둠에 더 익기를 원하십니까?
빛이 좋다고 고백은 하시면서 어둠을 더 즐기시렵니까?

그렇더라도 제발..
어둠의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찬탄하는 발언은 삼가야 합니다.
어둠의 자식들은 싸탄의 노예들입니다.
그들에 대한 검증의 필요성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둠과 사귀길 좋아 하고 마치 빛 보다는 어둠에 더 희망이 있는 듯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우리는 두려워 말고 그들의 숨은 비밀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독자 여러분.

우리는 빛이 있을 동안 빛의 아들들이 돼야 합니다.
유일한 메시앟,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 크리스토의 에이전트인 성령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어야 합니다.

어둠과 결탁하고 어둠과 타협하는 이상은 빛의 아들, 빛의 자녀일 수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빛의 자녀로 자임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실은 비밀리에 어둠과 야합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정치권과 가까운 교계 명사들을 보면 느끼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그들이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곤 하나 숨은 행동이 뒷받침돼 주질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면 명사가 되길 포기해야 합니다.
파울도 페트로도 명사가 되길 포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빛의 자녀로 빛의 열매를 맺어 빛의 상급을 받읍시다(참고: 에페소 5:8-14).

티엘티 독자들은
늘 이 빛 가운데 머물고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