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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눅 9:23] 여인을 통해 본 자기 부인(否認)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오."

(루카=누가복음서 9:23 사역)

관련 본문 마태 26:7-13, 마르코스('마가') 14:3-9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부인(否認)"이라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날마다 개인 몫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슷한 딴 구절도 그렇게 말합니다(마태복음 16:24, 마르코스복음 8:34). 아울러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엄숙히 선언하십니다(뤀 14:27).

그래서 우리는 과연 자기부인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참 제자가 돼 있는지 자신을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전통교회들은 요즘 '사순절'이라는 것을 지킵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까지 일요일을 뺀 40일을 지킨다는 사순절은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한, 카톨맄 기원의 종교 시즌입니다. 세계 지배 세력의 하나인 바티칸이 정한 기간 대로 지킵니다. 우리는 이런 제도 교회가 나름대로 정한 종교 절기에 묶일 필요가 없으나..다만 주님과 함께 나누는 고난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음미해 보렵니다.

자기부인(自己不認, self-denial)은 신자들이 혼동하는 개념의 하나입니다. 흔히들 금욕이나 또는 금식기간 정도로 생각합니다.
특히나 다수의 천주교인들은 사순절 기간동안의 '자기부인'에 앞서 준비한답시고, 사순절 직전에 술과 고기를 실컷 먹어두는 이른 바 사육제/카르니발, 또는 '마르디 그라스' 따위를 지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맹숭맹숭한 맛의 밀가루 빵/과자인 프렡젤을 먹기도 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 기간에 무교병(누룩없는 과자)을 먹듯.

수많은 서구인들은 그런 것 정도를 '자기부인'으로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은 한 씨즌의 금욕 정도로 이해하고 그칠 개념이 아니지요. 

신자들도 예수 크리스토님이 말씀하신 자기부인을 나름대로 이뤄 보려고 애들을 씁니다만..자기부인의 개념을, 우리는 주님께 향유를 부어 바친 베타니 여성을 통하여 통찰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성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서는 늘 기념되는 익명의 주인공입니다.
[ 참고: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의 비슷한 향유 부음과는 분명히 서로 독립된 다른 사건임. http://www.usaamen.net/bbs/zboard.php? id=ssq16&page=1&sn1=&divpage=1&sn=on&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0]

이 베타니 여인은 몇 가지 점에서 자기부인의 면모를 우리에게 내비쳐 줍니다.


첫째로, 자신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들고 나아 옵니다.

여인이 가져 온 이 향유는 나르드(Nard, 감송향)로 이 시대엔 매우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당대 시가 약300 데나리온(denarii) 정도.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했지요. [당대 12시간 노동임금이 1데나리우스. 마태 20:2].

자기부인의 지름길 하나는 가장 귀한 것을 내 것이기보다 주님의 것이라고 시인하는 것.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 뭡니까..아내입니까, 남편입니까? 자녀입니까? 집입니까? 돈입니까? 나의 명예입니까..기타 또 다른 무엇입니까? 
그것을 마음으로, 주님 앞에 들고 나아 오십시오.

"분명 내 것인데 왜 주님의 것이란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많이 혼동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엇을 "뺏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그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라는 것이지요.
주님의 왕권과 주권(=주인의 권한)과 권위를 시인하라는 겁니다. 

주님을 가장 최우위, 최고의 권위, 최선(最先) 그리고 최선(最善) 최상의 권위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Most High), 엘 엘리온이시니까요.

그럴 때 삶 속에 참 질서가 잡히게 됩니다.
비로소 제대로 체계와 가닥이 잡힌 삶이 이뤄집니다. 저의 멘토였던 목회자는 성도에게 "Put yout house in order"란 말을 자주 했습니다. 삶의 질서를 바로 잡아라..주님을 최우선순위에 놓아라는 뜻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부터 주님 앞에 들고 나올 수 있을 만큼 주님의 주권과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복잡한 삶 속에서 바른 질서와 순서와 체계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현재 내게 속한 모든 것들이 실상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패러독스이지요.
나의 영/혼/육은 물론 나의 가족, 소유물까지도 실은 본래부터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나 위에 더 높은 주인이 따로 계십니다. 

현대는 날이 갈수록 자기소유 의식과 이기심이 강해져 갑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일반 교우의 것, 목회자의 것이라고 서로 쟁탈전이라도 벌이는 듯한 양상의, 가치혼동의 싸움판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교회분쟁이 식지를 않습니다. 자기부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지요.

나보다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할 때 바른 질서가 잡힙니다.


또, 여인은 향수의 봉합(seal)을 깹니다.


고대의 향합(香盒) 또는 향수병은, 요즘처럼 실용적인 나선형 마개를 갖춘, 잘 제작된 유리용기가 아니었기에 다만 증발하지 않게 봉합했습니다. 사용 시 마개 부분을 깰 수 있는 얇은 설화석고(alabaster) 도기 등으로 포장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깨지 않고는 향유를 부을 수도 없고, 냄새도 퍼지지 않았지요.

우리에게는 주님 앞에 깨트려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 보다는 자존심, 내 뜻대로 하려는 자기의지나 고집, 성향일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존심과 내 뜻을 최고의 것으로 삼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빚어진 고귀한 기능의 하나입니다만, 이것을 잘못 사용할 때 무서운 범죄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자존심은 교만과 자기우상숭배의 지름길입니다.
또한 나의 고집이 주변 사람들에게 큰 해악이 되기도 하지요.
딴 건 다 꺾어도 개인의 고집은 안 꺾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의지를 주님의 뜻과 의지에 굴종시켜야 합니다.
삶 곳곳에서 내 의지를 주님의 의지 앞에 "깨야" 할 순간을 발견하고 느끼게 됩니다.

깬다는 말은 자기파괴 개념이 아닙니다.
오늘날 흔해 빠진 자살도 아니지요.
주님 앞에 내 놓고 주님 앞에서는 교만하게 내 의지를 강조하며 설 수 없다는 생각 아래 주님께 맡기는 삶을 가리킵니다.


셋째로, 이 여성은 주님만 바라 봅니다. 세상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 의지할 때는 세상이나 주변을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예리코의 소경 바디매오도 그랬지요. 사람들이 막고, 제자들이 막아도 그는 개의치 않고 소리소리 질러 주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자기부인이 그런 용기와 결단을 낫습니다. 자기부인이란 금욕적으로, 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이날 예수님을 초청한 베타니의 나환자 시몬은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귀족 계급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환자인데도 정상적 사회인으로 취급 받을 수 있었음도 그런 연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관련 성구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이 여성은 평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초청 받아 북적대는 그런 장소에 이 여성이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말이 많았습니다.
웅성대기 시작합니다. "음..저 여자는 누구기에 이런 자리에..?"

그래도 말없이 방에 들어 선 이 여인이 향합을 깨트려 주님의 머리 위에 붓자, 참석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으와...아니, 저..저런! 저렇게 값비싸고 귀한 것을 저렇게 허비하다니~!" 하고 놀라 마지 않았습니다.
혀를 차면서 여인의 '낭비근성'내지 '사치근성'을 비방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 일부는 놀라다 못해 분통을 터뜨리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다짜고짜 대어 듭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귀중품을 이렇게 허비하시오, 엉? 고가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을 텐데..원 참!"

그러나 여인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습니다.
당장 밖에 뛰쳐 나가 흑흑 흐느껴 울지도 않습니다.
복받치는 서러움에 땅바닥에 주저 앉아 동네가 떠나가도록 엉엉 통곡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용히, 온전히 주님만을 절대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의 한 모습입니다.

이 여인인들 나름의 자존심이 왜 없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 대답거리가 전혀 없을까요?
세상에서 죄인이라고 온갖 천대를 받아 온, 갈갈이 찢긴 상한 심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왜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 와 이런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아야 하나?"라는 한탄과 억울함이 솟구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 모두를 극복합니다. 환경과 상황에 복종하지 않고 묵묵히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오직 주님 때문에(!), 오직 예수님 때문에(!)..그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자기부인의 면모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뭐라고 해도, 온 세상과 주변, 환경과 상황이 손가락질을 해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붙들 수 있을 때, 온전히 자기부인을 하는 제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고대 페르시아 시대인 주전 6세기로부터 로마시대인 4세기까지 지속돼 온 잔인한 극형이었습니다. 그러다 서기 337년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 안에서 금지시켰지요. 
고대의 십자가 행열은 사형수 또는 중범자들이 어깨에다 십자가의 윗 형틀(가로대/파티불룸)만 지고 가곤 했습니다. 예루샬렘의 경우, 성에서 골고타 형장까지 긴 거리(현대의 추정구간인 '비아 돌로로사'로는 약 650m)를 그래야만 했습니다. 십자가 전체는 약 135 kg(300 파운드)이나 됐기에 웬만한 레슬러 급 장사가 아니곤 지고 가기 힘들었지요. 따라서 다만 35-60kg(75-125 파운드) 무게의 가로대를 지고 가서, 형장에서 땅에 박혀 세워지는 십자가의 기둥 부분인 세로대(스티페스) 꼭대기에다 조립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메고 간다는 의미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최악급 사형수는 형 선고를 받은 뒤 예루샬렘 안토니우스 요새 안의 로마 총독 관저에 가까운 프레토리움에서 으레 채찍형(플라겔룸, flagellum)을 받곤 했습니다. 채찍형 역시 사형에 준한 극형이었죠. 채찍을 맞던 도중 숨지는 죄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경우 최고형인 '이중 극형'을 받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채찍형을 받은 등과 어깨 등은 피부가 갈갈이 찢겨 가로대를 지기가 더욱 극난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극형을 받으시고도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행진해 가셔야 했고, 만인들이 바라보는 곳에서 매달려 최대한의 수치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치욕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우리를 위해 감내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면서 그분께 집중할 때, 우리도 주님처럼 자신의 수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그분께 집중할 때 이 여인처럼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자기부인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대가가 있습니다.

잔치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저마다 이 여성을 조소/조롱/비방하고 있을 때, 여인이 깬 그 향합으로부터 향유가 흘러 머리 위에 온통 부어진 채 방안을 가득 채운 그윽한 향기를 음미하시는 듯, 취하신 듯 계시던 주님은 이윽고 엄숙히 입을 여십니다.

"그대들은 어찌 이 여인을 괴롭히오?..그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오..이 여인이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한 것이오."

자기부인의 참된 가치는 어떤 금욕적 효과가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나를 알아 주신다는 결과입니다.
바로 다름 아닌 나의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자기부인은 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 그 가치는 그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그대는 역시 내 제자야!"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과 드높은 것을 주님 앞에 내 놓을 때 더 큰 것과 더 소중한 것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자기 부인은 주님께 향기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별 의미없이 강한 자존심, 잘못 사용된 자유의지, 남이 쉽게 꺾지 못하는 나의 고집불통과 악습 등은 주님 앞에 악취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향기를 바쳐야 할까요?
악취를 풍겨야 할까요?


티엘티 독자들 모두는
자기부인으로 주님께 향기를 드리고
그 분의 제자로 인정 받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