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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치르는 교회들




손님 치르는 교회들



요즘은 교회들 다수가 흡사 무슨 상업성 접대 장소 같다. 신자들의 하나님/이웃 섬김 공동체이기보다 '소비자' 고객들을 위한 맞춤형 일요 마케트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교회 스태프('유급직')는 마케팅 팀, 회중은 손님, 회중석은 객석인 셈이다. 

대다수 교인들이 '손님'으로서 교회를 오간다. 주중 내내 주일 낮 예배만 반짝 참석하여 예배만 "보고", '친교시간' 때 달랑 밥만 먹고는 훌쩍 가볍게 떠나는 발걸음이 태반이다. 어떤 가정은 온 식구가 단체로 그렇다. 되도록 번거로운 교회 업무에 깊이 개입되지 않기 위해서. 상당수가 그렇게들 길들여져 있다.  


시쳇말로 고객은 '왕'이다. 그래선지 "왕(또는 왕족) 같은 사제(제사장)들"인 신자들이 '왕' 대접을 받기를 좋아한다. 큰 교회건 작은 교회건 목회자와 사역자들은 이 '왕'들의 기분을 혹여 불편하게 해 드릴까 봐 맘 조리며 전전긍긍한다. 손님에게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목구멍까지 치밀렸다가 가라앉고 만다. 헌금을 많이 하는 교우인 경우, 혹시 한 마디라도 상대방이 불쾌해할까 봐 "고객님, 당..당황하셨어요?"라는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처럼 불콰한 얼굴로 스스로도 당황해 한다. 

과연 참 왕이 누구인지도 애매해진다. 


이 왕족들은 주일날이면 공연에 가까운 또는 공연이 곁들여진 일요 이벤트에 참석하여 오찬까지 거나하게 '접대' 받고는 남은 일요 타임을 즐기려고 뿔뿔이 흩어진다. 유렆 왕가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다. 말로는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겠다면서 누구를, 뭘 섬기겠다는 건지 아연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섬기는 신 가족 공동체이다. 따라서 공동체 참여자이고 섬김이, 청지기여야지, 손님으로 오가선 안된다. 왕 같은 사제들이지만 아직 섬김이들이지 스스로 왕 행세를 해선 안 된다. 


교회들은 어떡하면 믿음으로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히브리서 11'6) 보다는, 헌금보따리를 쥔 이 '손님'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신나고 흥겹게 해서 교회에 다시 오고 마음을 붙이게 할까 하고 볼거리, 들을거리의 맞춤형 엔터테인먼트를 최대화 한다. 중대형 교회일수록 고객들을 위하여 한껏 돈을 들여 멋진 인테리어와 아름다운 관상수 조경까지 잘 꾸며놓고, 화려한 음악과 춤과 비주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의 이벤트를 최대한 갖추고 수평이동을 부추긴다. 교회가 비대화를 위해 공연장화 하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언필칭 모든 것에다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라는 딱지를 붙이지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지 여부가 확실치 않다. 그런 모습들은 평화스럽기보다 웬지 불편한 마음이 든다.  


하나님께 뭔가를 바치고 드리려는 교회이기보다 인간에게 뭔가를 보여 주고 들려 주는 교회로 빨리 전락하고 있다. 


오늘날 이런 교회들이 대다수가 아닐까. 어차피 초기교회 예배 모습이 아니라면, 다들 피장파장이요 도토리 키 재기의 차이인 정도다. 한 교회가 딴 교회보다 좀 더 '낫다'고 한다면, 엔터테인먼트가 좀 더 세련되거나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잘 돌아가거나 동작이 통일되었거나 뿐일 것이다.  


거기서 교우들은 매주 잘 접대받는 손님으로 왔다가 그냥 기약 있는 손님으로서 되돌아가는 홀가분함을 맛보며 지내는 것이다. 다수가 그런 종교생활이 곧 신앙생활인 것으로 착각하며 지낸다. 섬김의 삶은 거의 배제된 것이다. 더구나 공동체 유지관리를 위한 셀 모임이나 소수의 정예 신자들이 하고 있는 새벽기도 모임 등도 하나님과 남을 위한 참 섬김보다는 개인의 경건과 자신의 유익을 위한 시간이 더 많기가 일쑤다. 


교회 일에 개입하여 좀 더 헌신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은 교우들도 대개는 결국 딴 '손님' 출석자들을 위한 효과적인 엔터테인먼트에 관여하여 우리 교회, 내 교회를 좀 더 '빠삭'하게 잘 보이려고 힘을 보태는 것 뿐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교회들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다가도 혹 뭔 사태라도 일어나는 날이면 난장판이 되곤 한다. 평소의 이 '손님'들은 여차하면-필요하다고 생각될 경우- "왔다구나" 하고 갑자기 주인 행세 하고 나선다. 특히 교회 내에 분규가 일어나면 그렇다. 교회의 깊은 일에 별 관심이 없어뵈던 사람들이 돌연 파와 당을 지어 팔을 걷어붙이며 여태껏 자신이 교회를 가장 사랑해온 체 하며 달려들어 한 바탕 또는 몇 바탕 싸움을 한다. 소 뼈다귀를 물고 양쪽에서 쌍끌이를 하며 으르렁대는 개들처럼. 실로 주객이 전도된 현장이다. 이래저래 섬김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초기 교회들도 이런 흔적이 전혀 없지는 않다. 심지어 오가는 세대의 모든 교회들의 모교회인 첫 교회, 예루샬렘 교회에서도 본토파인 유대파와 해외파인 헬라파 사람들이 자기네 과부들이 덜 접대받는다고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성령으로 채워지고 슬기를 갖춘 섬김이들이 뽑히고 나서면서 잘 수습되고 정돈되었다. 

그런가하면 대표적인 이방인 교회의 하나였던 코린토교회는 파울파/아폴로파/케파(페트로) 파 등으로 갈래를 지어 자신들이 가장 충실한 신자인 양 서로를 욱박지르기도 했다. 

사도 야코보는 그의 서신에서 교회를 출입하는 가난하고 헐벗은 교우들을 푸대접하고 잘 차려입은 부호형 교우들은 환대하는 당대의 외모차별형 교회를 질타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날 죽 끓듯 분규와 분란이 요란하여 흡사 아비규환을 연출하기 일쑤인 현대교회가 코린토교회를 비판하고 나설 자격이나 있는가? 소돔/고모라를 단죄할 자격조차도 없을 교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날아갈듯 반듯한 차림이 아니면 아예 출입하기가 불편한 '신사숙녀' 교회들이 얼마나 흔한가?  


현대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상을 찾고 되찾으려면, 예배 모습부터 변화돼야 한다. 예배의 주인공은 이끔이(인도자)나 '사제'/목회자/설교가가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예배의 대상은 성삼위 하나님, 예배의 참 주관자는 성령님이셔야 한다. 이끔이/목회자/설교자가 추호라도 영광을 받으려고 해선 안 된다. 그런데 '퍼포먼스'나 '엔터테인먼트'를 하는 동안 태연히 단상에서 얼굴을 높이고 되도록 모든 주시를 받으려고 하는 이끔이들, 설교가들, 목회자들이 많다.  


원래 이끔이/설교가/목회자는 온 성도와 함께 단상 아래서 하나님을 향해 경배하다가 자신의 역할만을 위해 부득이 단상에 올라야 옳다.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어야지 자기 얼굴과 주견을 드러내고 목청을 높여 청산유수처럼 유창한 달변과 배꼽 잡는 유머 실력을 한껏 과시하고 교인들을 위압하는 성격의 권위 행사를 하기 위한 '연단'으로 쓰여선 곤란하다.  

더욱이 현대의 첨단 패션풍에 민감한 세련된 차림인 설교가의 양복/양장 패션쇼 장소처럼 여겨져서는 곤란하다. 그 누구나 교회에서는 섬김이, 섬김이라는 이 '정신줄'을 놓쳐선 안된다. 


누가 교회를 이런 손님 치르기 장소로 만들어 놓았는가? 20세기 말에 특히 판 치던 '탐구자'(Seekers) 중심 스타일의 '교회'들이다. 빌 하이블즈나 맄 워런 등이 그 대표격인 바람잡이들. 교인들을 소비자, 고객, 왕으로 만들어 놓은 교회들이다. 홀가분한 캐주얼 차림으로 손님들을 한껏 맘 편하게 해 주고, 스태프와 코어 그뤂에게는 뭔가를 강요하는 스타일이다. 워런은 특히 뉴에이지 경제구루였던 페테르 드루커(피터 드러커)의 가르침을 20여년간 받아 교회를 그런 스타일로 '경영'해 왔다.  

교인은 고객이고 왕이라는 이런 스타일의 절정을 우리는 긍정과 미소의 초청자, 조울 오스틴의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소가 나쁠 거야 없지만,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치열을 드러낸 환한 미소와 그의 상투적인 초청 자세인 자주 활짝 펴는 두 팔 벌림 동작은 진정한 섬김이보다는 고객을 맞는 엔터테이너를 더 연상시킨다. 그의 미소띤 얼굴이 빠지지 않는 그의 책 뚜껑들도 '쇼맨슆' 기질을 한껏 쇼오프하고 있다. 


이런 퍼포머와 엔터테이너들은 고객을 자칫 기분 나쁘게 할 지옥교리나 엄히 죄를 꾸짖고 이단을 단죄하는 따위의 아슬아슬한(?) 메시지를 좀체 설파할 수가 없다. "고객님, 당..당황하셨어요?"라는 위험한 씬을 일부러 연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미소로 잘 에둘러 가고 피하여 가기만 하면 되며, 그럼 만사 오케이인 것이다. 


매주 '손님'들만 잘 치르면 되고, 헌금을 잘 챙겨 예산에 맞게 잘 꾸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도전이란, 오직 어떻게 이 고객님들을 잘 대우하여 큰 덩치의 교회당과 함께 대양 위를 미끌어지듯 유유히 항해하는 크루즈(호화유람선)처럼 잘 플로잉하면서 잘 유지해 갈까라는 것 뿐이다. 웹이나 텔레비전상의 클럽 멤버들과 자신의 고객 리스트를 잘 관리하고 다독거리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다.   


문제는 한국 교회 다수가 그런 교회상을 모범적 교회로 알고 답습한다는 데 있다. 한국은 정체성을 잃은 교회가 돼 가고 있다. 

죄를 꾸짖어 뉘우치게 하고 스스로를 낮춰 이웃을 섬기는 섬김이형 교회에서 '고객님'들의 눈치를 보며 "당..당황하셨어요?"라고 여쭙는 손님 치르기 교회로 빨리 전환해가고 있다. 


더욱이 '손님'의 심리를 자극하여 그 반응에 미묘하게 응대/관리해 주는 관상/수도원 영성, 떠오름(이머징) 영성, 에네아그람(에니어그램)영성, 내적치유, '목적'중심영성, 리더쉽 영성, 미래영성, '신사도' 영성, 현세왕국('킹덤나우') 사상 등 주권주의, 뉴에이지 영성..등등 미국을 중심으로 외국에서 몰수히 무차별 도입된 온갖 이상영성들이 백화점 상품처럼 한국 교회를 깊이 침식해 가고 있다.  


바야흐로 '백화점 영성 교회'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설교가/목회자/사역자들은 "자 자 자, 골라잡아 보세요. 품질도 좋고 값도 싸요"라는 식으로 교인들에게 온갖 영성을 팔고 있다. 


더구나 '동성혼'이란 것을 허용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는 추세이니, 이른 바 LGBT(동성애자/양성애자/변성애자=성전환자)들을 위한 세계 교회들도 나날이 증가할 것임은 시간문제일 테고, 그러다 보니 급기야 아동성애자/혼전동거자/공개간음자/일부다처가.. 등 다양한 소비자들의 눈치를 보는 [고객=왕짱!]형 교회들도 조만간 우후죽순처럼 부지기수로 늘어날지 모른다. 



과연 이런 것이 교회의 머리이신 크리스토님이 바라시던 이상적인 교회상일까..? 아니면 타락한 바벨론 음녀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일까. 


잃어진 영혼을 되찾는 교회가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평화로 하든 다툼으로 하든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겠지만, '손님 치르기'에 급급하다 보면, 마냥 손님으로 왔다 가며 평생손님으로 지내는 교인들만 길러주기 십상이다. 

그들의 영혼 문제 해결보다 심리적 만족과 기분 해소에 치심하는 '교회'들이 되지 말자.


요란한 흔들림의 물결 속에서도 반석이시고 영원한 닻이신 예수님께 닻줄을 준 교회들을 주님은 찾고 계신다. '고객' 접대에 몰두하면서 정함 없이 물결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크루즈이기보다 참 진리에 말뚝을 박고 꿋꿋이 버티며 견디는, 그러면서도 잃어진 영들을 진리로 이끄는 데 헌신하는 노아 방주 같은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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