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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코에 금고리



돼지코에 금고리


근래의 첨단 유행 패션의 바탕에 깔린 철학은 한 마디로 "짧을수록 좋다"인 것 같다. 치마도 바지도 아닌 형태인 하의의 아랫단은 "올라갈수록 좋다"는 환상 때문인지 급기야 "하의실종"이라는 유행어를 낳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상의 앞 부분은 "아래로 팰수록 좋다", 비키니 수영복의 경우 물론 '작을수록 좋다'이다. 극소형 천뙈기로 가릴 곳만 최소한 가리면 된다는 극한적 노출의식으로 발전해 왔다. 드레스의 하의 부분은 이상하게 앞섶이 헤벌어져 마치 나비를 손짓하는(꼬득이는?) 꽃잎 같은 디자인이어서 뭇 남성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또는 얼굴을 붉히고 침을 삼키게 만드는, 묘한 감흥(?)을 자아내곤 한다. 과연 누구의 무슨 만족을 위한 패션인지 의혹스럽다. 


여성 패션이 날로 과감해져가다보니, 소위 '씨스루' 곧 속이 훤히 내비칠수록 또는 그런 착각이 들수록 좋다는 식의 것도 나온 지가 퍽 오래다. 전위적 패션 쇼에서는 심지어 여성의 은밀한 몸 구석이 은근히 들여다뵈게끔 또는 대동소이한 착각이 일게 하는 아찔하고 아슬아슬, 어질어질한 디자인도 마다 하지 않는다. 혹 마음 약한 남성이 심장마비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이다. 

착시 효과인가, 스릴 효과인가, 리얼리즘 효과인가..아니면 이 모두인가? 과연 벗길수록, 더 보여줄수록 돈을 더 챙기게 된다는 심사가 옳은 걸까.


이런 패션들은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누비는 'K팦' 등 연예인들의 빼어난 미모/몸매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시각문화가 극도로 발달한 현대의 연예계는 노래 실력만으로는 진출이 어렵다. 웬만한 얼굴 및 몸매로는 나서기 힘들다. 깎아만든 그리스 남신/여신상 같은 이상형이어야 한다. 거기에다 의상도 완전 첨단 패턴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패션풍과 더불어, 날이 갈수록 남/여 공히 피트니스(몸 다듬기)에도 덩달아 주력하고들 있다. 남 보기에 썩 좋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심리적, 정서적 압박감 때문이다.   

과거엔 남성 독무대시피 했던 육체미 운동 내지 근육단련(바디빌딩) 따위가 이젠 여성들에게도 공동 선호 분야가 되었다. 팔다리, 허리 등의 늘씬 날씬함은 기본이고, 남녀 모두 '초컬맅'형 "식스퍀" 복근을 열망하고 추구한다. 

옛날엔 생각만 해도 냄새가 나(?) 언급을 삼가던 히프는 이제 '예쁜 엉덩이'로 부각되고 있다. 다부지고 질긴 근육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현대 문화인 대열에서 쉽게 낙오되는 느낌이다. 


물론 운동 자체야 나쁠 것이 없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체단련은 보다 더 과감한 노출을 위한 것이기가 십상이다. 자신의 유익과 건강, 성취감 내지 자기만족도 있겠지만, 남의 시각과 감관을 자극하기 위한 노력들이 주를 이루는 것이 오늘날의 성향이다. 


'노출의 계절'인 여름이 다가오면, 더군다나 남녀 모두 신경쓰이는 것이 몸매다. 시원하게 드러내려면 겨우내 또는 늦어도 여름휴가 전까지 보기좋게 애써 다듬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초조해 한다. 

"어글리"한 비만은 남의 시각의 평온을 위해 드러내지 말고 감추든지 수영장이나 비치 등 장소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예의처럼 되었다. 


비만은 자기 건강의 적신호이기도 하지만, 요즘 세태에서는 하나의 '어글리네스'로 자칫 남의 눈에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인식인 것 같다. 불건강의 표징임과 함께, 미의 정반대인 추(醜)의, 경각심을 자아내는 충격의 샘플/표본이 된다. 

늘어진 근육, 잔뜩 불어난 뱃살은 자칫 미움과 지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내 앞에서 좀 꺼져 줄래?", "눈 앞에서 좀 사라져 줬으면"이라는 희망사항의 대상물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늙은이 뱃가죽"형 체형은 현대의 젊은이들의 혐오물과 적이 되다시피 했다. 게으름의 표상이랄까. 괜히 겉모습 인상만 얼핏 좋았다가, 여름철이 다가와 몇 허물 내지 몇 꺼풀을 벗고 보니 대뜸 단박에, 한 순간에 환멸을 던져주는 외면과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리는 충격의 터닝포인트를 연출할 위험성이 없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유명을 달리했지만, '공포의 삼겹살'로 웃음의 악명(?)이 높았던 코미디언 K모 씨가 생각난다. 지금도 대동소이한 "고래? 나 뚱뚱하다!"고 내뱉듯 선언하여 폭소를 자아내는 K모씨, 그에 못지 않은 아무개 씨 등이 있다. 물론 나름 특징과 '끼'와 개성을 살리는 사람들이니, 그들로서는 그나마 큰 다행(?)이다. 그들은 웃기기라도 하니까 그렇지, 나머지 비만 대중은 환영받지 못하나보다. 끽연가들처럼, '비만인'들도 점점 퇴출되는 사회가 혹 되진 않을까? 그건 노출을 선호하고 증진하는 더 자유로운 사회인가, 아니면 비만과 비노출이 구속받아가는 더 무서운 사회인가?  


먹고 마시고 놀면서, K팦의 폭풍처럼 노래하고 춤추기를 유난히 즐기는 듯한 한국의 현대인들은 수영장이나 해변에서는 '공포의 삼겹살'들을 일껏 공포스러워 하고도, 정작 뒤안길과 바로 앞길의 '먹자골목'에서는 애호의 삼겹살을 한껏 맘껏 즐기며 '폭탄주' 등도 양껏 마셔 주는, 극적 대비의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젊은 여성들의 패션 감각과 몸매는 너무 야하다는 답답함보다는 왠지 눈에 '션함'과 즐거움을 끼쳐 주는 양상이다. 그런데 눈에 양약(良藥)도 될까?


한결같은 패턴의 훤하고 시원한 여성 노출 패션에 문화인 남성들은 충분히 면역과 마비가 되어왔겠지만, 하루종일 어두운 골방에서 인터넽 포르노 따위에 골몰하는 첨단 문화인(?) 내지 비문화인인 중독성 외골수 족들에게는 단지 '한 술감(one-spoonful)' 정도의 어두운 탐욕의 대상이 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한 외국인 여성은 좌담회(?)인가에서 "한국 여성들의 다리는 참 볼 만한데 가슴은.." 식으로 뒷말을 생략하여 폭소를 자아냈다고 한다. 마치 여성 스스로가 상품화하고 상품화되길 바라는 듯한 느낌이다. 

늘씬한 다리를 가진 여성일수록 더 시원하게 드러내는 성향이다. 아무래도 그만큼 자랑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본인은 시원해서 좋을지 몰라도, 노골성 패턴은 서로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눈으로 하는 간음"을 최소한 간접적으로나마 부추긴다. 물론 "나 좋으면 그만이지 알게 뭐야" 하는 여성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나 좋으면 그만일까? 입은 비뚤어도 말이야 바로 하랬다고, 남의 눈에 돋보여 최대한 또는 최소한의 성적 자극을 주려는 심사도 복합된 게 아닐까? 


여성들은 이런 남성 성향을 '저질들'로 renounce하기 쉽겠지만, 너무 야한 옷차림은 본인이 인정하든 말든 간에 약간 수준 낮은(?) 남성들의 낄낄대는 웃음과 눈요기 대상이 되기 쉽다. "노출할 자유를 달라. 동시에 이성(요즘은 동성도 포함된다!)의 음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달라"인가? 아니면 "실컷 쳐다봐도 나랑은 상관 없다. 나만 기분 좋으면 그만이다"인가? 


현대인이 선호하는 대표적인 형용사 하나가 '섹시'이다. 과거엔 입에 담기조차 거북했던 이 낱말이 언젠가부터 연령층을 막론하고 남녀의 이상형을 시사하는 근 표준 형용사의 하나가 되었다. 

흘러간 이야기 속의 어떤 미군은 '섹시'와 '색씨'를 혼동하고 있거나 아니면 일부러 섞어 쓰길 즐겼다. '색씨'는 흔히 쓰는 순수용은 두고라도 기지촌 주변에서 회자되는 '양공주'라는 말과 혼용어이기도 했다. 무슨 말인가. 섹시는 은연중 섹스와 간접 연계된다. 노출과 눈요기와 음란은 상호관계라는 말이다. 


오늘날 여성의 노출욕과 남성의 눈요기 욕구는 패션은 물론 모든 영상/극 문화의 문화계에서 예술/외설의 경계선을 허물고 있다. 인터넽에서도 연극가에서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란 의식이 은연중 통하고 있다. 


한국은 과거의 헐벗고 굶주리던 시대에서 이젠 "잘 벗고 잘 먹는" 시대로 '개혁'된 지가 오래인 듯하다. 언제, 어디까지 더 벗어야 하는가? 이젠 더 벗을 게 없으리만큼 벗고 벗기고 꿰벗는 현대의 과노출 성향은 바람직한 현상인가? 아니면 도덕과 시대에 역행하는, 절제 또는 통제되어야 할 현상인가?


근래에 필리핀계 미국인으로 카톨맄 신자이자 '파워레인저' 시리즈의 여배우인 제시카 레이가 자신이 개발한 복고풍 수영복 라인을 개발/판매하고 있다. ( http://www.reyswimwear.com ) 최근 보수계 'Q'라는 클럽에 연사로 나서서 '수영복의 진화'-단정함의 컴뱈이 가능한가?'라는 주제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물론 레이의 주장이나 그녀 나름의 복고풍 수영복라인이 다 옳거나 이상적일 수는 없다. 표면상 '단정 회귀'를 내세운 그녀의 내심이 어쩌면 신/구 교계의 보수적인 여성들의 환심을 사서 떼돈을 벌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이가 인용한 프린스턴대학교 교수의 관련 연구 기록의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비키니 같은 것을 걸친 여성에 대한 남성의 뇌파는 여성을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한 대상물로 여기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비참성이 있다. 



사람은 "옷이 날개"라는 속담처럼 걸친 옷에 따라 졸지에 '상품화' 되기 쉽다. 그래선 안되지만 말이다. 여성은 남성과 다름없는 신성한 존엄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눈요기 상품이나 단순히 성욕 발산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다리를 위에까지 멀거니 내놓고 다님으로써 자신이 상품화되거나 이성 성욕발출의 미끼가 된다는 엄연한 현실을 의식한다면, 계속 그러고 싶을는지 모르겠다. 의식 나름인가? 어디까지나 단순히 멋있게 봐 주든지, 그렇게 볼 수가 없다면 못 본 체, 모르는 체 해 주는 현대 문화인들의 고상한 평균 양식(良識)에 맡겨 두는 것으로 끝날 일인가? 언제나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책임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단정치 못한 여성의 책임도 큰 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매가 그럴싸하고 자신있다고 해서 늘 유난히 표 내길 즐기고 몸매를 최대한-맥시멈으로-드러내고 노출하는 패션을 따른다면, 이것은 자기우상화(self-idolzation)나 다름없다. 자신을 '아이덜'로 만들기 위한 한 지름길이다. 자기 몸매의 육체적/'상품적' 가치를 지나치게 높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더라도, 교회에서는 어떤가? 오늘날 세속 패션과 유행이 교회에서도 아무 여과없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현실이다. 검소와 검약, 단정함과 조신(操身) 등을 강조한 사도들의 교훈을 거의 무의미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세속 여성은 둘째치고라도 크리스천 여성들마저 적어도 겉보기/외양에 있어서 기독교적 미덕과 예의품절을 별로 추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 풍속을 거의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남 앞에서 조신하고 삼가는 것보다 한껏 드러내어 눈을 시원하게 해 주고 맘을 들뜨게 해 주는 것이 덕성이 되어버린 셈인가.  


오래 전 뉴욬시 맨해튼의 어느 중대형교회의 주일 아침예배에, 지인인 담임목회자의 일일 대타로 설교하러 갔다. 오피스에서 예배실로 향한 교회 내 계단을 오르려고 눈을 쳐 든 순간 아찔한 광경을 목도했다. 1월이라 꽤 추운 날이었는데도, 당시 갓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X꼬 치마'를 맨살에다 입은 웬 아가씨가 바로 내 눈앞에서 올라가고 있었던 것. 이내 눈길을 피하긴 했지만 그 충격적인 잔상이 설교준비로 '엎'된 기분을 잠깐이나마 방해했다. 여간만 마음을 다스리지 않았다면, 딸 같은 나이의 자매를 속으로 순간 간음하기에 충분한 기회와 소지였다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 무심결에 쳐다본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을까? 


잠언 31장은 현숙한 여인의 이상형 표본을 말하면서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예호봐(여호와/야웨)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이 잠31장 의식을 지난 크리스천 여성이 몇이나 될까. 성경의 진리는 지난 시대의 유물인가? 


성경은 여성들이 항상 단정할 것을 부지런히 촉구하고 있다(예: 티모테A=딤전 3'11). 전도서 9'8은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너는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하여라"(현대인의성경)고 훈계한다. '깨끗한 옷'이란 단지 세탁한 옷만을 의미하지 않을 터이다. 


잠언 기자는 아름다운 여인의 단정치 못함을 돼지코에 금고리로, 유머러스하고도 극적으로 비유하고 있다(잠언 11'22). 

옳거니! 역시 진리의 말씀이다. 아무리 '얼짱' '몸짱'이라도 삼가거나 단정치 못하면, 돼지코에 황금고리를 건 격이다. 돼지코에다 꿴 빛나는 금고리가 잘 상상되지 않으면, 얼굴과 몸매는 예쁘지만 차림과 행실이 방정치 못한 여성을 상상하라. 주변 사회에서 그런 여성이 쉽게 발견된다. 그런 아름다움은 비록 세상에서는 환영받을지 모르지만, 냄새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뒹굴며 먹기만 탐하는 돼지 수준으로밖엔 쓸모없는 아름다움이라는 얘기인 것이다. 


크리스천의 패션 감각은 분명 세속과는 달라야 한다고 본다. 굳이 패션이란 말이 필요할까 싶다. 세속과 다름없다면, 크리스천이라고 할 이유가 없겠기 때문이다. 회교나 몰몬교 여성들처럼 "답답한" 극단적인 시대역행적(?) 옷차림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네 가치관과 세계관이 세상과 다르다면 패션 감각도 세상과는 뭔가 좀 달라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광야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각별히 유의하지 않을 경우 방만하기가 일쑤였다. 아론이 만든 황금송아지 앞에서 뛰놀고 춤추며 섬긴 광란의 예가 그렇고, 이스라엘이 카나안의 요단강가 모아브 평원의 쉬팀(싯딤)에 머물러 있을 당시, 미디안 족 대언자(선견자) 발람의 간계로 페오르의 우상인 바알(바알브올)과 어울려,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민수기 25장 참조). 이교의 우상숭배는 거의 반드시 혼성 난교(orgy)와 연관이 있다. 그래서 현지 미디안족 여성들과 어울린 이스라엘 남성들이 대대적인 집단 음행에 들어간 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 무려 24,000명이 역병으로 숨졌다. 우상숭배와 음행이 상호결부된 대표적 사례였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방만 역시 위험하다. 우상숭배는 비단 구약 당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대적 형태의 우상숭배도 얼마든지 있으며, 가장 흔한 유형의 하나가 자타의 몸 숭배, 패션 숭배이다. 

오해 말라. 필자는 몸과 패션 자체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교훈말씀을 잊을 정도로 지나치게 몸과 패션을 위하고 치심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우상숭배에까지 빠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단정하고 소박함을 추구하면, 이런 우상숭배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여인들은 소박함과 정숙함으로 단정하게 차려입고, 땋은 머리나 금붙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꾸미는 대신, 하나님을 섬긴다 하는 사람으로 걸맞게 선행으로 치장해야 마땅하다." 

-파울이 젊은 사역자인 믿음의 아들 티모테에게 보낸 편지인 티모테A서(딤전)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