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삼의 연구묵상/원어로 묵상하기

시 22:16, 뒤틀지 마라

 



시22:16은 십자가형을 예언했나?

김삼

시편 제22편 16절 끝 부분(이하 시 22:16c)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예언했나, 안 했나?
우선 이 구절을 한 번 들여다 보자.

     "개들이 날 둘러 쌌고 악한 무리가 날 에워싸 나의 [두] 손발을 찔렀습니다" (이하 한글 성구들은 필자의 사역).

끝 부분-'나의 손발을 찔렀습니다'는 예수 크리스토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중요한 예언적 단서다. 사실은 구약 전체에서 유일한 직접적 언급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유대교는 이 부분이 사실상 십자가 처형과 무관하며 따라서 22편 전체가 예수 크리스토의 수난과 관계가 "없다"고 단정해 왔다.

부인하는 근거를 추려 보면..

1. 대다수 마쏘라 사본(히브리어)에 '찔렀다'(히브리어 '카루')는 낱말이 없는 대신 '사자처럼'(카리)으로 돼 있다.
2. '카루'의 원 뜻은 '찔렀다'(pierced) 보다 '팠다'(dug)에 더 가깝다. 어색한 번역이며 따라서 잘못된 삽입이다.
3. 그러므로 '사자처럼'(like a lion)으로 번역돼야 한다.

라는 식의 주장이다.

본문 배경

시편 제22편은 다윋의 예언시다. 다윋의 시들 가운데는 삶의 편린과 직결/연관된 것이 많지만 예외도 없지 않다. 이 시는 그 예외 중 하나다. 본 시편 내용은 다윋의 개인 역사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시22편의 주인공=다윋]이란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본 시의 주인공은 적의 손에 완전히 넘겨져 한때 목숨을 잃지만, 다윋은 그런 적이 없다. 따라서 시22편은 다윋이 성령으로 미래를, 즉 천년 뒤에 있을 메시아의 수난/부활 사건을 통한 승리를 앞서 내어다 본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크리스토를 메시아로 받아 들이지 않는 유대교는 이 시가 예수님의 수난/부활을 예언했다는 사실을 절대 부인한다! 부인하다 못해 ‘메시아적 시편’(Messianic Psalms)중 하나라는 엄연한 사실마저 부정한다. '고난 받는 메시아' 개념을 거부하는 탓.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수난의 메시아가 아닌 '영광의 메시아'만을 마냥 기다려 왔다. [역사적으로 유대계 일각에서는 이 시를, 예수 크리스토가 아닌 또 다른 유대인 '메시아’들을 통해 성취됐다고 억지 적용한 사례도 없지 않지만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아울러 그들은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주님(야웨)의 종'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앞서 비쳤듯이, 시22편을 예수 크리스토의 수난에 적용해 온 기독교의 입장에 대해 유대인들이 특히 문제 삼는 구절은 이 16절(히브리어 원문은 17절)이다. 십자가 수난의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양측 간에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위 번역 후반절(c)의 '찔렀다'(pierced)란 개념은 모든 한글 성경은 물론 대다수 영문 성경과도 일치한다. 그래서 주님의 두 손발들을 십자가에다 못으로 박아 매단 사건의 예언인 것이다. 구약시대에 '개들'은 대체로 이방인을 뜻했다. 위 예언은 이방인인 로마 병사들과 '악한 무리'인 유대인들이 (십자가 주위에) 몰려 들어 예수 크리스토의 양 손발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역사적 사건으로 성취됐다는 암시다.

양측의 차이

반면, 똑같은 구절을 JSP 등 유대교 성경은 예컨대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았다.

     "개들이 날 둘러 쌌고, 악한 무리가 날 에워 싸, 사자처럼 나의 (두) 손발 앞에 있습니다."

즉 하반절의 ‘찔렀다’는 말을 ‘(한 마리) 사자처럼’(like a lion)으로 옮긴 것. 이같은 기독교/유대교 양측의 엄청난 번역의 갶은 어디서 온 것일까? 사본의 차이에서 왔다. 유대교가 유일한 원문으로 채택해 온 히브리어 ‘마쏘라’ 사본(Masoretic Manuscripts/MT)들은 일부(10개)를 제외하고는 이 구절의 하반절이 모두 원어 어구 ‘카리’(k’ari)로 돼있다. '처럼'에 해당하는 전치사 '크'(처럼)와 '아리'(사자)를 합친 것이다.

반면 한글 성경과 및 제임즈왕역(KJV)을 비롯한 대다수 영문성경은 "찔렀다"는 뜻의 원어 낱말 ‘카루’(karu)의 개념을 채택했다. '카루'는 히브리어 문법상 칼(Qal) 동사 '카라'의 3인칭 복수/완료형으로 원형은 파다(dig), 찌르다, 뚫다(관통), 파헤치다(발굴), 파내다, (귓속 따위를)후비다 등의 뜻이 있다.

다만 영국의 NEB(New English Bible), 또 WEB(World English Bible) 등 진보적인 일부 극소수 영문판들만이 유대 역처럼 다수 마쏘라 사본을 따라 '사자처럼'으로 번역됐다. 예컨대 WEB는 "..Like a lion, they pin my hands and feet."(사자처럼 그들은 나의 손발들을 짓누릅니다.)로 처리했다. 위에서 'pin'이란 단어는 본래 맛소라 사본엔 없는 낱말인데 삽입했다. '사자처럼'을 전제로 하니까 자연스런 낱말을 매치시켜 갖다 붙인 것이다.

일부 마쏘라 본문(이 부분)의 황당성

대다수 마쏘라의 원문 대로 정확하게 옮긴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된다.

     "..사자처럼 나의 손발들."

말이 되는가? 동사가 없어 문장이 안 되니, 아무 의미가 없다. 넌센스다! 설령 도치법을 적용해 문장을 제대로 만든다 해도 "나의 손발들(이) 사자 같습니다" 가 된다. 손발들이 사자 같다니..무슨 뜻일까?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사자'가 원본에 있다 치더라도 고난 받는 사람은 사자가 아닌, 사자의 희생자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원본에 ‘카리’가 있었다고 해도 이를 뒷받침할 동사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 결과 유대계 번역들은 다음과 같이 산발적이고 다양한 번역을 ‘시도’했다.

     "..사자처럼 그들은 나의 손발(들) 앞에 있습니다."(..like a lion, they are at my hands and my feet.) (JPS 1917 & Soncino)

     "..사자처럼, 나의 손발(들)을 [그들이 해칩니다]"(..like lions [they maul] my hands and feet.) (JPS 타낙)

     "..나의 손발(들)은 사자 [먹이] 같습니다."(.. like [the prey of] a lion are my hands and my feet.)
(스톤 역)

위 구절들에서 '사자처럼'과 '나의 손발(들)'을 빼고는 모두 마쏘라 사본에는 없는 개념들인데 억지로 끼워 맞추느라 삽입한 것들이다. '카리'를 고집하려면 어디까지나 복수가 아닌 단수 즉 '(한 마리) 사자처럼'이 돼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22편의 전체 분위기와 영 조화가 안 된다. 주인공은 가해자를 모두 복수로 썼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6절), "모두", "그들"(7절), "들소들"(12절), "개”(16절), "사람들"(17절), "황소들"(20절) 등이다.
하필이면 이 부분(16절)에서만 다윋이 단수 '사자 한 마리'를 쓸 까닭이 뭐겠는가? 그런데도 원본도 아닌 마쏘라 사본의 말도 안 되는 흐릿한 구절을 갖고 굳이 '사자처럼'을 고집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카루'의 파워(!)

이 애매모호한 '카리'보다 더 나은 옵션이 없을까?
'카루'다. 사실 '카리'와 '카루'의 히브리어 알파벳의 차이는 그야말로 거의 "일점일획" 차이다. 그런데 그 일점일획 차의 비중이 천금과 같다! '카리'의 끝 글자인 알파벳 '요드'는 '카루'의 끝 자 알파벳 '와우'(또는 와브,바브)보다 약간 짧을 뿐 거의 모양이 같다. 그러므로 마쏘라 초기 사본에서 필사자들이 실수 또는 고의로 '와우'를 길게 내려 긋지 않아 '요드'가 됐을 가능성이 많다.

아무튼 끝 자가 요드 아닌 와우인 '카루'의 옵션을 취하면 전혀 문제가 없는 문장이 되며, 바로 몇 세기 전의 70인경(Septuagint=LXX)도 '카루'를 썼던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교 측은 완전히 뜻이 통하는 이 옵션을 취하지 않고 굳이 '카리'를 쓰겠다고 부득부득 우겨댄다. 성경의 다른 구절에선 자기네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옵션을 갖다 쓰면서 왜 여기선 딴 옵션을 쓰지 않겠다고 고집불통일까?
'고난 받는 메시아' 개념과 예수 크리스토가 메시아이심을 악착같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그들의 숨은 음모/어젠다 때문이 아닐까. 충분히 그랬을 만한 이유가 있다.

여기저기 인터넷의 관련 게시판을 보면, 유대계 누리꾼들은 "너희 기독교는 왜 이 구절을 맘대로 조작했냐? 왜 있지도 않은 '찔렀다'를 삽입했냐?"고 자주 어이 없는 질타를 해 댄다. 시22편을 가짜 메시아(?)인 예수 크리스토의 수난에 억지로 때려 맞추려고 십자가 형을 암시하는 그럴 듯한 낱말 '찔렀다'를 슬쩍 찔러 넣었다는 게 그들의 억지주장이다.

고대사본들의 입맞춤

그러나 알고 보면 천만의 말씀이다! 우선 '찔렀다'는 낱말은 기독교가 조작한 게 아니라 전술한 대로 70인경등 사본을 따른 것이다. 70인경은 유대 마쏘라 사본이 나오기 약6~7세기 전인 기원전(AD) 285년부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학자 72명(=약70명)이 구약 성경을 모세5경(토라)부터 시작해서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다. 토라를 제외한 나머지도 신약시대 훨씬 이전에 번역돼 나왔다. 말하자면, 마쏘라 사본을 만든 유대인들의 한참 선조 격인 유대인들이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를 옹호한 역본"이라고 트집 잡아 70인경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그들의 작태는 제 얼굴에 침 뱉기 격이다. 선조의 얼굴은 물론이고.

70인경은 여러 세기동안 그리스어가 세계 공용어이던 당대에 예수님에게도 공공연한 정본의 하나로 취급 인용됐고 모든 신약 기자들도 LXX를 따랐다. 신약 성경에 인용된 모든 구약 원문들은 70인경과 일치한다. 유감스럽게도 현재까지 보존된 모든 히브리어 원문 텍스트는 사본일 뿐 원본은 단 하나도 없다. 마쏘라도 물론 사본이다.

마쏘라는 사실상 예수 크리스토 사역/수난/부활의 역사적 사건과 기독교 진리를 말살하려는 목적 아래 탈무드 학파와 에돔계 유대인(Edomite Jews)들의 음모로 2세기 경부터 다양한 기획/시도를 거쳐 실제로는 주로 주후(AD) 6-11세기 사이에 성경 원문을 뒤틀어 가며 번역한 것이다. 편집자들은 모음과 발음기호 등도 본문에 삽입했다. 그러므로 그런 과정에서도 '카루'가 '카리'가 됐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시22:16c를 말도 안 되게 고친 것이 혹 음모가 아니었더라도 최소한 실수로 인한 오기였을 것이다.

마쏘라 사본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구약 예언들 중 '동정녀'(virgin, 히브리어 '베투라')란 낱말도 모두 단순히 '소녀'(young girl, '알마')로 죄다 뜯어 고쳤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부정할 목적으로 마리아가 메시아의 어머니임도 부정하려는 의도다. 동정녀를 소녀로 대체해 버리면 마리아가 동정녀임을 부인함과 동시에 요셉이 성숙한 처녀가 아닌 어린 소녀에게 장가 들었다는 엉뚱한 뜻도 돼 버린다.

그러므로 70인경이 어느 모로든 마쏘라 사본보다 우월하고 원본에 나타났던 진리에 더 가깝다. 70인경 외에도 2~3세기에 편집된 시리아어 역본 '페쉬타'(Peshitta), 3-4세기에 번역된 히에로니무스(=제롬)의 라틴어 역본 '불가타'(Vulgate), 아랍사본, 에티오피아 등 여러 사본들이 '찔렀다'로 돼 있다.
더욱이 근래 발견된 사해사본의 이 부분도 '찔렀다'는 뜻으로 나타나 있다. 키르벹 쿰란에서 발견된 4QPsf, 나할 헤베르에서 발견된 5/6HevPs이 그것인데, 두 사본 모두 '카루'(karu) 또는 카아루(ka'aru)로 돼 있다. 사해사본들 중 시22편은 역사상 가장 오랜 사본이다. '카아루'는 아람어 식 표기법이다.

심지어 유대교측이 그처럼 최고의 정경으로 내세우는 바로 그들의 마쏘라 사본들조차도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10개는 '찔렀다'로 돼있다. 즉 3개는 '카루'(karu)로, 7개는 '카아루'(ka’aru)로 필사했다. 그러므로 유대인 자신들의 선조가 필사한 이 모든 고대 사본들이 지지하고 있는 '카루'는 원본대로의 것이지, 유대계 말대로 크리스천들이 조작해 낸 것이 아니다.

누가 찔렸나

그건 그렇고, 과연 이 찔린 사람이 누굴까? 일부 유대계는 예레미야나 아하슈베로쉬(아하수에로)의 왕비 에스테르(에스더)로 추정했지만, 과연 두 사람이 시22편에 나타난 고난이나 죽음을 당한 적이 있는가.

유대인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 개념을 부인하지만 구약에서의 '찔림'은 비단 본 시편만이 아니라 저 유명한 이사야의 메시아 고난 예언과 예언자 제카리아(스가랴)의 다음 예언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러나 그가 상함(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이사야 53:5).
     "..그들이 찔렀던 나를 바라볼 것이라" (제카리아 12:10. 비교: 요복 19:37).

위 구절 모두 시22편과 동일하게 고난 받는 메시아 개념을 부각시켰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더욱 더 예수 크리스토의 메시아 되심은 극명해지는 셈이다. 할렐루야!

문맥과의 '비 조화'


일이 이쯤 되면 답변이 궁색해질 만한 유대계는 동사원형 '카라'의 의미가 본래 '파다', '파헤치다'의 의미이므로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고 박박 우긴다. '찌르다'는 개념의 딴 히브리어 낱말이 얼마든지 있는데 구태여 '카루'를 쓸 이유가 없다는 것.

그러나 예로부터 상식적으로 '파다'는 의미엔 '후벼 파다', '파 들다'는 의미도 늘 곁들여진다. 단적인 예로..영어사전에서 'dig'란 단어를 찾아 보라. '찌르다'를 포함한 다양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카라'가 땅을 파헤치다 라는 뜻 밖에 다른 뜻이 전혀 없다는 주장은 뻔히 속 들여다 뵈는 좀된 억지다.

문학적, 수사적으로 '파다'는 얼마든지 '찌르다'로 비유될 수 있다. 바로 그래서 LXX 번역자들이 '카루'를 못 박는 개념으로 채택한 것이다. 더욱이 단순히 (바늘, 송곳 등으로) '찌르다'(관통하다)는 개념보다는 손목을 파 헤치고 후벼 파는 듯 극도의 격통을 낳는 굵은 대못의 뉘앙스와 더 잘 통하지 않는가! 오히려 십자가 형에 걸맞은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굵은 대못이 (얇은) 손바닥을 파 헤친다면 좀 어색할지 모르지만 (두꺼운) 손목을 파 헤친다고 생각해 보라. 두꺼운 발바닥을 파 헤친다고 생각해 보라. 뭐가 어색하다는 말인가? 되레 더 실감이 가지 않는가. 그래서 필자는 웬지 시22:16c가 메시아의 손바닥이 아닌 손목에 못이 박혔다는 고고학적 증거와 더 조화된다고도 생각해 본다.

문맥: 시22의 전체 분위기가 십자가형을 웅변

그리고, 이 구절에 관한 유대인들의 주장이 다 맞다고 들어 준다 해도 본 시편의 전체 분위기로 볼 때 어김 없이 십자가형의 성취란 사실은 자명하다. 본 시편 6~8, 15~18절 등에 그려진 그래픽적인 고난의 정황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자신과 주위를 내려다 보신 광경과 너무도 어울린다.

또 주인공이 외친 말 '엘리 엘리 라마 아잡타니'(히브리어. 아람어는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벡타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날 버리셨습니까?'는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부르짖은 말씀임을 마태, 마르쿠스 둘이 다 증언했다(마 27:46, 맑 15:34).

특히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퍼부은 조롱의 언사(마 27:39,43.뤀 23:35)나 로마 병사들이 주님의 겉옷(들)을 잘라 나눠 갖고, (통옷으로 짠 것이므로 잘라 나눌 수가 없는) 속옷을 한 명이 차지하려고 도박판을 벌인 것(마 27:35) 등은 두렵게도 본 시편 대로 정확하게 예수님 앞에서 이뤄졌다! 그런 장면들도 기독교 측에서 예언 성취로 꾸미려고 즉석에서 연출할 수 있었던 상황인가?

더 나아가 본 시22:16은 물론, 대언자 이사야, 제카리아가 예언한 대로 그들이 메시야의 손발을 찌른 것은 루카스와 요한의 기록으로 증언돼 있다(뤀 24:40. 요복 20:25).
아울러 시22편 후반부에 나타난 메시아의 (고난 후) 영광/승리/부활은 예수 크리스토의 부활/승천 사건의 패러다임과 틀 밖에서는 결코 그 누구에게서도 구현될 수 없는 내용이다. 특히 시22:22의 '내 형제들'이란 호칭은 부활 후 성취됐음을 예수님 자신이 선언하셨고(요복 20:17) 히브리서가 뒷받침했다(히 2:12).

이처럼 시22편을 비롯한 성경 곳곳에서 고난 받는 메시아 상이 예수 크리스토에게서 완전 성취된 극명한 사실들을 유대인들이 전면 거부하고 있음은 곧 눈 가리고 아옹 하기,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같은 소치다.
아직도 캄캄한 어둠 속에 기어 다니는 그들에게 밝은 빛과 복음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도 구원의 은총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