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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언(방언)론

빠져버린 알맹이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신학 스승들과 사역자들은 영언(성경의 '방언')을 거부한다. 거의 전혀 가르치지도 않는다. 필요성도 거의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냥 은근한 호기심이랄까를 갖고 시도하다가 그만 둘 뿐이다. 신학적으로 그렇게 속아서 배워왔기 때문이다. 성경과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학은 유용하나, 숱한 신학 이론들이 잘못되어 있다. 


이런 상황과는 너무나도 달리, 우리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기록인 행전 2장부터 읽어 나가보면 초기 성도들은 처음부터 영언을 했고 이 영언은 예수님의 예언(참고: 맑 16'17a)의 성취임을 발견한다. 영언은 상령강림 당일날 120 성도들 전원뿐 아니라 사마리아 교우들, 코르넬리우스 가정교회 교우들, 샤울(훗날의 파울), 에페소 교우들, 코린토 교우들, 기타 초기교회 교우들이 다들 했다. '신학자'(신학이론이 아닌 성경대로의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들이 뭐라고 해도, 궁극적으로 이 초기 성도들 모두가 영언을 했다는 것-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너무나 빤한 얘기다. 성령님의 일정한 패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거의 20세기 동안 신학자들/지도자들은 워낙 영언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보니 정작 치명적으로 중요한 이 알맹이 하나를 빼 놓고 구구히 딴 소리들만 해 왔다. 그래서 대다수의 성도들이 평생 해소되지 않는 의문과 괴리감 속에 살아간다. "왜 성경엔 영언이 있는데, 우리 교회엔 없을까?"라는 등의 물음이다. 나 자신 지난 날 수십 년간 그런 의문 속에 살았었다. 

  

이 글이 그 물음을 끝내는 데 도움되길 바란다. 



아무튼 그래서 수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이 원하시는 알맹이 한 가지를 빠뜨린 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또는 그냥 긴가민가 하면서 살아간다. 아무도 이렇다 할 해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린토A서 14'2에 따르면, 영언은 성도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 또한 주님은 믿는 사람들의 표징들의 하나라고 하셨다(맑 16'17a-이 구절에 대해서도 온갖 부정적인 이론들이 있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성구의 진리만 붙들면 된다). 신학이론들은 성경 말씀을 받들어 더욱 밝혀 주는 내용이어야 하건만, 이처럼 성경이 명시해 주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일부 신학 이론들 탓에 성도들은 혼동과 의문 속에 살아가게 된다. 내가 그랬다.  


우리가 (16세기까지 대부분 천주교 중심이었던) 교회사라는 것을 보아도, 영언의 흔적은 드물다. 역사 속의 몇몇 사람이 행여 자신이 했더라도 이상하게 또는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한 두 번 하고는 영원히 되풀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을 성령께선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신다. 그렇게 근 20세기를 지내왔다. 


영언이라는 알맹이 하나가 빠져버린 것-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영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온갖 이유를 붙여 자기가 영언을 '못'/안 하는 이유와 다른 모든 교우들의 영언이 '가짜'라는 설명을 하려 드는데, 알고 보면 죄다 구차하고 비성경적이다!  


나 역시 태어난 뒤 32년간 영언이란 것의 필요성을 모르고 살았으며, 성령님의 크신 은총으로 33년째에야 비로소 영언을 시작했다. 그전에도-중학교 때부터 이미 퍽 가까운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영언하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몰라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알았다. 


우리 집안은 이제 4대째 기독교인 가정이지만..우리 가문에서 맨 처음 영언을 시작한 사람은 내 아내였고, 그 다음은 나, 그리곤 우리 아이들이었다. 한국이 아니라 유학생활을 하던 미국에서였다. 지금도 우리 가문 사람 대다수가 영언을 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 일부는 내가 언급하거나 권고하면 기분 나빠 하거나 그런 나를 별로 곱게, "정상스럽게" 보질 않는다. 영언 얘기가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 알 수 있다. 


딴 글에서도 비쳤지만, 신학교 다닐 동안 교수로부터 영언에 관한 부정적/비판적인 강의나 언질만 들었지, 단 한 번도 영언을 권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가끔 이상스레 열정적인 동료들의 '순복음적 체험'을 간접적으로만 전해 들을 따름이었는데, 학교 기숙사 옥상에서 원하는 동료에게 할렐루야로 '영언연습'을 시켰다는 그런 얘기가 바람결에 들리곤 했다. 

내가 가장 존중한 대학교 은사는 내가 영언을 시작하게 됐다는 말을 멀리서 전해 듣고, 한밤에 나를 만나자고 하여 "제발 관두라"며 나를 말릴 정도였다. 물론 나를 사랑해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한때 영언을 했다"는 그 아들은 영언을 "다 귀신 장난"이라고도 했다.   


이해가 간다. 왜냐 하면 초기교회 이후 거의 20세기 동안 영언은 '잊혀진 아트', '상실된 (영적) 테크'였기 때문이다. 다 "해 보니 안되더라"라는 부정적 생각에다 초점을 맞춰 신학을 정립했는데, 그것이 소위 (이적/표징/은사 등 초자연적 기적의) '종식론/중단론'(cessationism)이란 것이다. 그것이 세계 교계와 교회사 대부분을 잠식해 왔다. 그러나 교계 한 구석에서는 "해 보니 되더라"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꾸준히 있어왔다고 생각된다. 비단 20세기의 '오순절교 운동'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영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들을 몰랐을 뿐이다. 

  

영언을 하려고 소나무 뿌리께나 뽑아도 안되더라는 부정적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애꿎은 나무뿌리를 또 다시 뽑기 전, 왜 '안' 되는지 이해를 해야 한다. 강력하시고도 비둘기처럼 온유하고 부드러운 성령께서는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관건은 나의 믿음과 의지다. '절대주권'론으로는 영언에 대한 물음이 해결될 길이 없다.   


나의 딴 글에서도 언급한 친구 선교사는 영언을 처음 시도했을 무렵 같이 시도했던 여러 친구들이 다 영언을 못했고 모두 지금까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모두의 결론이 현재의 영언은 모두 "사특한 (거짓) 현상" 아니면-현재의 교우 영언자들에게 미안하니까-이도 저도 아닌 그 무엇이라는 것이었다. 



대다수 신자들이 지독하게 어려운 것으로 아는 그 영언은 알고 보면 쉽다. 무지 쉽다! 이것을 중년에서야 뒤늦게 깨달은 나는 성령님께 너무나 감사해왔다. 그래서 '영언 전도사'로 나선지가 오래다. 

한 마디로, 영언은 그야말로 독자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냉큼 혀를 굴려 그냥 시작하면 된다. 그럼 왜 대다수가 '못'해왔을까? 왜 영 '안'될까?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국어가 아니라 개인에게 주어진 독특한 발음으로 혀를 굴려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국어가 아니고 외국어도 아니니, 당연히 이상한 발음이다. 다다다 럴럴러 바바바바..로 나오든지 또는 세상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유창한" 듯한 발음으로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안되지?"하고 머릿속으로 아연해 하며 절로 터지길 바라지, 정작 이것을 믿음의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도 그랬다.. 


또 그 발음을 시작하고 나서도 하도 이상하게 들리다 보니, "이거 영언 맞아?" "혹..마귀 것 아닌가..?" - 꼭 요런 식으로 나간다. 그래서 한동안 의심하거나 혼자 속앓이 한다. 필자도 그랬었다.

아니면 첫 발음을 시작해 놓고도 영원히 "이건 아니다"며 살아간다. 그러면 정말 영원히 안하게 된다. 계속 그러다보면, 두 번 다시는 해 볼 기회가 없게 된다. 내세에서는 영언이 더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만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소중한 기회인가! 


나의 부친은 병석에서 나의 강압적인 권고에 따라 영언을 시작한지 불과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좀 더 일찍 권고해 드리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어머니 역시 영언을 시작하신지 겨우 몇 년만에 소천되셨다. 그런가 하면 내가 아는 수많은 성도들이 평생 영언 한 번 못해 보고 거부만 하다가 떠나갔다. 그러니 어쩌 통탄스럽지 않은가?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심정을 모르다니! 이러니 내가 어찌 사람들에게 강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언젠가 그들이 고마운 정도가 아니라 지극히 다행스럽게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하나 기억해 둘 것은 영언은 누구나 다르다는 것이다. 지문처럼 다르다. 비슷하게는 들려도 똑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기에 성경을 단단히 오해한 일부 '신학자',주석가들 및 그 후학들의 주장과는 달리, 절대로 그 어떤 지상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다!!!!! 

  

영언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사람마다 은사가 다른데 어떻게 누구나 한다느냐 묻는 교우들이 있다. 물론 은사로서의 영언은 성구 그대로(코린토A서=고전 12장 참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일반 영언은 누구나 하게 되어 있다. 마르코스(마가)복음서 16'17a를 유심히 살펴 보길 바란다. 영언은 누구나의 것이 '아니다'는 지론을 펴는 일부 인사들이 있는데, 맑 16'17,18을 오해한 주장이니, 귀를 기울이지 마라. 신자마다 영언과 더불어 악령 축출, 독극물이나 뱀으부터의 보호, 신유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 관건은 오직 믿음이다. 기억하라. 맑 16'17,18에서 주님이 하신 예언의 혜택은 오로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중 일부라도 안 믿으면, 혜택이 따르지 않는다. 

구원도 믿음으로 받고, 영언도 믿음으로 한다. 다른 표징들이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