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이슈/영언(방언)론

영언(방언)은 시대별/교회별로 다른가?


첫 교회와 이후 교회의 영언(방언)은 다른가?

- 부족한, 너무나 부족한 시대/교회별 영언 '상이론(相異論)' 비평
(영언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고 혼동하기 쉬운 것 하나가 '방언', 곧 영언(靈言) 이슈이죠.
하지만, 성경은 영언에 관해 긴가민가 막연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첫 교회의 교우들은 영언 이슈를 혼동하지 않고,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루카(누가)가 행전을 기록한 글투를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영언'이라는 옮김은 영적인 언어, 또는 성령의 언어란 뜻으로 이곳 티엘티 나름으로 쓰는 말입니다. 구태여 이렇게 옮긴 까닭은 '방언'(方言)이라는 한글성경 초기 번역은 영언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오역인 탓입니다. 영적 언어를 세상의 외국어, 지방 토속어, 사투리 정도로 오인할 수 있는 번역이지요. 고치지 않고 써 온 지가 오래 돼 이미 굳어졌지만, 한국교회와 성경학자/번역자/출판사/성서공회들은 '첫 단추'를 잘못 낀 이 낱말을 좀 더 적절한 딴 낱말로 바꾸는 과단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일부 현대 역들은 실행했습니다만. ]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령님이 내신 영언의 흐름은 교회마다 시대마다 여전히 늘 같습니다.
첫 교우들의 영언은 코린토 교우들의 영언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코린토 교회를 위한 영언론(코린토A=고전 14장 참조)에서는 다만 기자인 사도 파울이 주님께 은사론에 관한 계시를 따로 더 받아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부연한 것 뿐입니다.

"그래도 다르다"고 오해하는 사람들-특히 학자 연(然)하는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과 성령님의 변함 없고 한결 같으신 속성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독보적' 위치를 주장하면서 후기 교회와의 차별화를 시도하지만, 사실 원시 교회는 후대 교회의 초기적 모범, 전철적 모델이 아니면, 첫 교회로서의 의미성이 없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 내일 -늘 한결 같으시지 어느 때는 이렇게, 어느 때는 저렇게 식으로 혼동되고 상이하게 역사하시지 않거든요. 또 성령님은 교회와 시대에 따라 차별대우 또는 '특대' 하시지 않지요.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이시요, 그 분들 안에서는 (거듭난 사람들이) 다 같은 한 교회라는 사실에만 귀착해도 그런 오해는 피할 수 있습니다.
[ 또한 우리는, 학자들 나름의 뒤틂을 성령님 자신의 뒤틂으로 오해하면 안 되겠고요. ]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나 코린토(고린도) 교회나 영언의 양상은 알고 보면 똑 같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지 않겠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이지요!

만약 코린토 교회를 위한 영언이 예루살렘교회의 영언과 달랐다면, 은사론(코린토A서=고전 12장 참조)도 교회끼리 서로 달랐다는 얘기가 되니, 말이 안됩니다! 파울의 은사론을 보면, 분명히 예루살렘교회에도 똑 같이 적용되는 내용들입니다. 상이론자들은 이 점을 미처 간파하지 못합니다. 

또 만약, 예루살렘 교회와 코린토교회의 영언이 서로 달랐다면, 파울은 첫 교회의 영언을 몰랐을 뿐더러 그들과는 다른 영언을 가르치고 전수했다는 논리가 됩니다. 아울러, 시대와 교회마다 서로 영언이 다를 수 있다는 논리가 자동 성립돼 버립니다.
거듭 말하지만,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은 그렇게 교회별로 다르게 역사하시는 '기분파'가 아니시지요. 하나님은 또 첫 교회나 반대로 이방인 교회를 특대하시거나 차별대우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상이론은 엄청난 혼란과 혼동의 씨앗인 셈이지요. 혹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첫 교회로부터 몇 년 또는 몇 십 년 후인 언제까지가 '제1 영언 타잎 시기', 언제까지가 제2 영언 타잎기..etc..였다는 말일까요? 성립되지 않는 황당한 상상만의 논리입니다.

그런 '교회별 영언 상이론'을 펴는 사람들은 주로, 자신들의 영적 체험이 결핍/부족돼 잘못 이해한 것이지, 자가 주장처럼 학적으로 뛰어나고 탁월하여 원문을 바로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원문을 오해 내지 곡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요모조모로 기분 내키시는 대로 양상을 달리 하여 주시는 분이라는 인상이 곧 잘못된 신학, 오착된 신관이요 "부족한"(!) 성경관/계시관에서 옵니다. 상이론자들은, 모름지기 하나님은 늘 한결 같으시고 주님은 한 주님, 성령님도 한 성령님, 교회도 한 교회라는 성경 원리부터 다시 배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자..그럼 우리, 행전 10'44-46; 11'15-17장에 나타난 코르넬리우스(고넬료) 가정 모임의 영언 사례를 중점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영언 상이론을 반박해 보렵니다(참고: 행 10장; 11'1-18).


먼저, 행전 10장과 11장 앞 부분에 있는 코르넬리우스 가정 모임이 어떤 의의를 갖는지부터 좀 살펴 보죠.
이 사건은 이방인들을 상대로 한 최초의 전도모임이었습니다. 물론 이보다 앞서 초기교회의 전도자 필맆(빌립)이 이방인인 쿠쉬(=에티오피아) 칸다케(=여왕)의 내관에게 개인 전도를 한 일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로마 제국군 '이탈리아 부대' 소속 장교(백부장: 약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군관)로, 당시 유대(유다) 내 로마군 주둔기지가 있던 카이사리아(가이사랴)에서 살고 있던 코르넬리우스는, 유대를 진정 사랑하고 자기 백성처럼 아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한, 이방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의 사도 페트로(베드로)를 통해 그 가정을 구원하고 성령 선물을 내려 주시려고 코르넬리우스와 페트로에게 각각 환상을 보여 주셔서 서로 만나게 하십니다(환상 내용은 행전 10장 관련 본문 참조). 페트로는 교회사상 이방인들 상대의 첫 전도인 이 모임에 참석하는 데 있어 상당한 도전이 있었습니다. 할례교우(포피를 잘라낸 유대계 신자들)들은 이방인들인 무할례자와 사귀지 않던 유대 전통이 잠시 과도기적으로나마 잔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상을 보고 성령님의 뜻을 확신한 코르넬리우스는 생애에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이 모임을 위해 온 가족은 물론, 친척/친지들까지 자신이 부를 수 있는 껏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임은 코르넬리우스 가정교회, 또는 카이사리아 교회의 시작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선 편의상 코르넬리우스 가정 모임으로 부르렵니다.  


이제, 기자 루카의 실제 사건기록을 추후 페트로의 증언 내용과 대조/비교해 보죠.

    "페트로가 이런 말들을 아직 하고 있을 동안, 성령께서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 위에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페트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유대인) 신자들이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지시는 데 대해 모두 놀랐습니다. 그들이 영언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 때 페트로가 말했습니다: '이렇다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을 받아 모신 이 분들이 물침례(세례)를 받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내가 말하기 시작했을 때 성령님이 그들에게 내리셨는데, 처음에 우리에게 하셨던, 바로 그대로였지요. 그래서 나는, 주님께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그대들은 성령으로 침례 받을 것이오'라시던 말씀이 생각났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주 예수 크리스토님을 믿은 후 우리에게 주신, 똑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다면, 내가 누구라고 감히 하나님을 막을 수 있었겠나요?" (이상 사역)


본문의 1. 코르넬리우스 가정모임 영언 사건 2. 페트로의 추후 증언을 통해 성령님께서는 영언의 개념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첫째로, 행전의 기자인 루카의 기록은, 첫 교회에서 오순절에 시작했던 그 영언과 페트로가 이끈 코르넬리우스 가정 모임 사람들이 시작한 최근의 영언은 동일함을 명증(明證)해 줍니다! 모임을 이끌고 직접 현장을 목격한 페트로와 6명의 할례자들의 (간접) 증언에 따르면, 양쪽 간에 근본적인 차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는 말이지요.

페트로는 전형적인 유대인, 코르넬리우스와 그 가족/친척/친지들은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쪽 다 경건했고, 양쪽 다 하나님의 은총과 내방(來訪)을 받았으며, 코르넬리우스 일동은 다만 페트로보다 좀 더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되어, 성령님을 받아 모셔, 영언을 하게 된 것 뿐입니다. 특히 코르넬리우스 일동의 이 영언은 유대계 아닌 이방인으로서는 첫 영언 사건입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첫 교회와 이방인 첫 교우들의 영언이 똑 같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루살렘 교회와 코린토 교회의 영언이 "달랐다"면, 코르넬리우스는 코린토 교우들과 다름 없는 이방인이요 같은 로마 제국 사람들인데도 하나님이 영언만은 차별 적용하셨다는 말 밖에 안되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현대의 한국인들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둘째로, 시기적으로 이 때는 분명히 첫 교회가 세워진지 상당 기간 후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첫 교회와 양상이 똑 같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영언만 외국어이고, 코르넬리우스 가정교회의 영언은 아니었다"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이보다 더 후기의 코린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로, 페트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와서 할례교우들에게 (무할례자 가정 방문에 대한 해명 삼아서 한) 추후 증언 내용(행 11'15-17) 역시 이를 뒷받침합니다. 코르넬리우스 가정 교회의 양상이 초기 교회 양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밖에 루카의 기록과 페트로의 증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1. 페트로는 자신의 증언에서, 영언을 예수님이 몸소 하시는 성령침례(딴 표기: '성령세례')와 거의 동일시했음을 봅니다(마태복음서 3'11과 행전 11'15-17 부분을 비교/정독해 볼 것).

[ 이 점 역시 많은 독자들이 혼동스러워 하는 부분이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 필자는 그저 공감할 따름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침례'란 개인의 첫 성령충만(=성령으로 채워짐) 사건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시편 23'5에 예표된 대로 성령에 의한 동사적/객관적/초자연적/피동적 채워짐과 그 지속상태이지, 한국 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형용사적/주관적/자연적/인위적 '인격/도덕성 충만' 같은 것이 아님. 후자는 비성경적인 성령충만관임. -신본주의를 강조한다는 사람들이 왜 그런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

사실 이런 사건은 첫 교회 뿐 아니라 이미 사마리아 교회에서도 있었던 일입니다(참고: 행 8'14-19). 당시 마술사 시몬은, 페트로/요한이 안수하면서 사람들이 성령님을 받아모시자 영언을 하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했기에 그런 권능을 탐했던 것입니다.

    2. 아울러 이 일련의 영언 사건들은..주님께서 그 분의 최후대명에서, 성령님이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그 분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성령님은 예루살렘 교회와 주변, 사마리아 교회, 코르넬리우스 가정 모임..그후 이방인 교회인 에페소 교회 등으로 고루 내리시면서 아울러 이들이 영언도 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믿는 모든 사람들이 고루 영언을 하게 됨은 당연한 이치지요!  


그렇다면, 코린토 교회도 마땅히, 마찬가지로 적용돼야 합니다. 코린토교회는 도덕성이 둔하고 덜 떨어진(?) 교회라서, 예루살렘교회나 코르넬리우스 가정교회가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침례로서의 영언을 받지 않았다는 식의 '코린토 교회/교우 열등론' 발상은..일관성 결여입니다.


    3. 바탕본문에 명기된 페트로의 증언은 영언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인 오해를 풀어 줍니다.

페트로의 이 말들에 따르면, 신자는 누구나 영언을 할 수 있고, 마땅히 하도록 기대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첫 교우들과 다름 없이 코르넬리우스네 사람들도 가족/친척/친지들 전원이 영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 '시작했다'는 말은 영언은 평생 지속용이지, 일회 체험용이 아니라는 뜻에섭니다. 애써 땀을 뻘뻘 흘려 가며 드디어 영언을 한 번 했다고 팔을 번쩍 들어 흔들고 춤추다시피 놓고선, 바로 다음 날, "나도 (이미 구원 받았고) 영언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니 이젠 됐어! 이 구질구질한 걸 내가 왜 해야 해?" 하면서 그대로 '장롱' 속에 내동댕이 치듯 처박아 두는 교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언은 '반짝' 경험이 아닌, '느긋이' 이어갈 영구적 행동입니다. ]

코르넬리우스와 그 주변 사람들은 우리 한국인과도 같은 이방인입니다. 코르넬리우스의 가족/친척/친지는 다 했는데, 다른 시대의 다른 나라 교우들은 할 수 없게 돼 있다느니, 안 해도 된다느니 하는 것은 다 억지입니다. 신학적 지식이나 선입견 탓에 영언을 오해했거나, 일종의 영언 혐오 신드롬이 있거나 영언이 꽁꽁 숨어서(?) 잘 "안 나온다", 또는 "좀체 시작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경우에 대한 일종의 핑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겐 이런 표징들이 따를 테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새로운 언변(영언)을 말할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겐'이라는 말은 원문 상으로나 어의 상으로나 믿지 않는 사람들만 예외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런데 왜,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 표징이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을 슬쩍 바꿔 가며 고집을 피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산 뒤에 산"이라고, 그 다음은 마르코스복음서 16장의 뒤쪽 일부는 본래 성경에 "없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현역(現譯) 성경도 현재 이 구절들을 고의로 빠뜨린 성경은 없습니다. 일부 사본에 없다고 해서 빼기는, 성령님 앞에 두렵다는 뜻이지요. 바꿔 말하면, 이 부분도 엄연히 성경의 일부임을 다름 아닌 성경학자들이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이론자들은 왜 옛 시대 사람만 영언을 했고, 현대 사람들은 하지 못한다는 중단론/중지론/종식론 내지 현대불가능론을 주장하는지 참 불가지(不可知)적입니다. 그야말로 영언을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신화화(神話化) 하는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이론자들은 하나님은 영원/불변/동일하신 분이라는 신관부터 새로 다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을 성경 속에서, 성경과 성령님에 의하여, 신자를 위하여 다시 배워야 합니다! 


아무튼, 페트로는 그의 증언 속에서, 첫 교우들 속 자신의 성령침례와 코르넬리우스 가정 교회의 성령침례 사건을 동일시 내지 동질화, 더 나아가 균등화/균일화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파(욥바)에서 카이사리아로 그를 따라 함께 간 6명의 다른 유대인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증언할 수 있던 사실입니다.


코르넬리우스의 가족/친척/친지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이탈리아나 로마에 가서 이 '영언 복음'(영언은 기도처럼, 복음의 일부입니다. 독자가 믿든 말든.)을 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 후예들은 대대로 영언을 하고 은사를 활용하는 교회를 이어 나갔을 것입니다. '중단론'/종식론이 무색하게 말입니다. 


    상이론의 뿌리는?

상이론의 뿌리는 주로, 첫 교회의 영언은 '외국어'였고, 코린토교회는 그렇지 않고 질종(質種)이 다른 영언을 했다는 기발한(?) 착상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이것은 영언의 본질과 파울 계시에 대한 전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영언=외국어 설은 본 블로그의 다양한 영언 관련 글들에서 반박된 바 있으니, 참고 바람. ] 

코린토A 12장에 기술된 파울의 은사론을 보면, 영언은 여타 은사와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공통점은..본질은 같으나, 용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언 자체의 본질 '상이론'과는 다릅니다.
이 은사론을 바로 이해하면, 서로 다른 영언으로 보이는 영언의 단순한 용도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믿음도 특정 은사자만의 유난히 큰 믿음이 있고, 모든 신자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상 같은 믿음입니다.
    - 신유도 특정 은사자가 실행하는 신유가 있고, 모든 신자에게 약속된 믿음에 의한 치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상 다 같은 신유입니다.
    - 영언 해석(통역)도 그러합니다. 개인의 경건을 위한 영언 기도시간에 필요한 해석이 있고, 공동체인 교회/모임을 위한 해석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상 같은 영언 해석입니다. 
    - 영언해석처럼 영언도 그러합니다. 바로 이 점을 상이론자들은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부족한 영언상이론 주창자들은 코린토A 12, 14장에 해설된, 분명히 서로 다른 이 용도차이론은 좌시하고, 영언의 본질적 상이론은 주장하다니, 참 아이러니입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고, 같은 것은 같아도 다른 것일 수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뿌리 깊은 영언 천시 관행

첫 교회의 영언이 "달랐다"며 '첫교회영언 유일독자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심 현대 교계의 영언을 천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른 바 '사랑의 은사' 등 고상한 은사들을 주로 강조하면서 영언을 두드러지게 천시합니다. '꼴찌은사'라는 말도 함부로 내뱉습니다. '꼴찌'라니, 아니 성령님과 영언은 도대체 누가 내려 주시는 선물입니까? 그 '꼴찌'를 왜 예루살렘 사도들과 첫 교우들, 사마리아 교회와 코르넬리우스 가정교회, 코린토, 에페소 교우들, 사도 파울이 모두들 했나요?

대언자/사도들을 마냥 존중하는 것처럼 말은 하면서, 이런 태도 자체가 모순됨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첫교회유일주의'적 신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언하는 광경이 "추해" 보인다는 둥, 영언자의 평소 삶과 언행이 성령 받은 사람 답지가 않다는 둥,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둥 나름의 비난을 쏟아댑니다. 그런 말 자체가 하나님의 전능성, 성령님을 통한 미래적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불신적인 언행임을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저는 교회 내 영언자들을 거의 원수시하는 신자나 사역자들, 신학교수들이 있다는 것에 매우 놀라곤 합니다. 그들은 왜 초기 영언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존중할까요? 차별적인 태도가 아닙니까? 그때만 참 영언이고, 지금은 다 아니어서라고요..? 그런 태도가 바로 늘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않는 불신입니다! 가짜 영언이 많아서라고요? 지금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중입니까?

거듭남은 새로운 시작에 불과하며, 영언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우리 속담에 "첫 술에 배 부르랴?"는 말도 있듯, 영언을 갓 시작한 순간부터 성령의 열매를 펑펑 맺어내는 건 아니지요. 솔직히,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 자신은 성령의 어떤 열매를 얼마나 어떻게, 빨리 맺는지 궁금해집니다. 그야말로 자기 눈에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티만 보는 상황이 아닐까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영언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야 영언자는 어느 모로 보나 진일보한 것이지, '퇴일보'한 것이겠습니까? 마라톤 선수들은 처음부터 일등이 되는 게 아니라, 주로 꼴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꼴찌' 은사도 안 체험해 보고 어떻게 최고의 은사를 받는다는 것인지요? 믿은 지 오랜데도 영언을 안 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련다면,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나중이던 사람이 먼저 된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죠. 


그밖에 또..상이론자/중단론자들 가운데는 소위 '개혁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개혁신학이라는 것은, 카톨맄교와 그 신학의 오류를 고치는 선에 머물러야지, 성경 자체를 변개시키거나 뒤트는 해석의 우를 범해선 안 되죠. 그건 그들도 강조하는 그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입니다. 가장 개혁에 투철하다는 사람들이 자기 말글로써 신자가 영언할 길을 앞장서서 막는다면, 그건 유대종교인들, 파리새(바리새)들이나 다름 없는 과오입니다. "그래도 죄가 없다"고 주님이 선언하시기가 쉽지 않을 터입니다.


중년이 돼서야 영언을 시작한 필자로서는, 독자에게 뒤늦게 후회 말고 되도록 빨리 시작하라는 도움말을 주고 싶습니다. 신자로서 꼭 필요한 자기 것은 자신이 알아서 챙기라는 말이지요. 그래도 "영언이 꼭 필요치는 않다"는 분들은 그냥 알아서 살아가시다 뒤늦게, 꼭 필요치 않던 후회일랑 마시고요. 


그리고 책은 바로 골라서 바로 읽어야 합니다. 그냥 엇비슷한 제목이 붙었다고 아무 책이나 마구 읽고 억지 '소화'시키다간 이왕 간직해 온 신앙마저 자칫 소화(燒化)시키기가 십상이니까요.
영언 및 은사 '중단론'/'상이론'을 펼친 책들은 웬만한 성경지식 갖고선 속아 넘어가기가 쉽지요.  여태 해 온 영언도 하찮게 여겨, "이게 다 뭐야~" 하고 마음의 뒤안길 쓰레기통에 쳐 넣게 되기가 쉬울 터입니다.
그러게, 신자는 마땅히 자기 믿음에 도움될 책과 해가 될 책을 가려보는 분별의 눈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성경 진리를 충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요.

영언이 외국어라는 둥, 첫 교회와 여타 교회의 영언이 달랐다는 둥, 요즘의 영언은 모두 다 가짜라는 둥의 발언은 모두 성경과 성경 저자이신 성령님의 본의를 변개시키는, 터무니 없는 인본주의적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자가주장하는 그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

늘 되뇌지만, 상상은 자유라도 착각은 막아야 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이 모든 도전들이, 각 신자가 영언을 할 이유를 막는 핑계거리는 전혀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영언은 오늘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하면 됩니다. 독자가 거듭난 신자라면.


티엘티 독자들은 한결같은 성령님의 뜻에 따라
누구나 슬기롭게 영언을 시작하여,
주님 오시기까지 평생 활용하기를~!
주 예수님의 전능한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