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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영과 혼이 같다고요?

전에도 딴 글에서 몇 번 언급했지만, 시편 제 23편 3절 앞 부분을 보면, 원문 상으로 분명히 "내 혼을 회복시키시고"(나프쉬 예쇼벱)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쇼벱'의 원형동사 '슈브'는 되돌아오다, 되돌리다라는 뜻이 있지요. 기운/힘을 되찾다, 신선하게 하다 등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일회성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영 아닌 혼(원형: '네페쉬')이 새롭게 된다는 말을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 "혼"에 해당하는 원어낱말을 '영혼(영+혼)'으로 잘못(!) 옮긴 ] 한글 성경들을 제외한 모든 외국어 성경들, 예컨대 영문 성경은 한결같이 영(spirit)이 아닌 '혼'(soul)으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말한 것은 거듭남/중생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사람인 이 시편 기자(다뷔드)는 아직 거듭남의 개념도 잘 모릅니다(시 51편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음). 다만 양들이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면 새 힘이 나듯, 말씀으로 수시로 혼/정신/마음이 맑아지고 신선해진다는 뜻입니다.    


거기 비해 영은 평생에 단 한 번 새로워질 뿐입니다. 반복성이 아닌 단회성 사건입니다. 바로 하나님/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영접함으로써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날 때이지요. 그밖엔 두 번 다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두 번 반복되지 않습니다. 

반면 혼은 양떼를 위한 영적인 꼴과 물인 진리 말씀과 보혈로써 늘 회복되고, 신선해지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힘이 영적 전쟁 때 정신 차려 영의 싸움에 뒷받침됩니다. 양들이 매일 새 힘을 얻듯, 우리의 혼도 그래야만 합니다. 


이처럼 영과 혼의 중요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타 언어 성경과는 달리, 대다수의 한글 성경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등으로 풀어, 마치 이 시편기자가 중생을 말한 것처럼 오해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혼과 영은 차원이 다릅니다. 


혼과 영의 차이를 모르면,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가 그리 용이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않은가요?



혼과 영의 차이를 좀 더 묵상해 보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에 관하여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생동하는 힘이 있어, 어떤 양날검보다 날카로워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가르기까지 하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밝혀냅니다." (히 4'12. 이하 성구는 사역)


원문에 따르면, 분명히 혼과 영(메리스무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을 서로 가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 개혁신학에 따르면, 이 말씀이 도무지 이해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 파울(바울)님의 말씀을 보면, 간단히 이해됩니다. 


   "사실 영언(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합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 으로 비밀을 아뢰기 때문입니다." (코린토A서/고전 14'2)


여기서 분명히 파울은 영과 혼의 차이를 말해 줍니다.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데도 혼/정신/생각으로는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 성구에서 영으로 하나님께 아뢴다는 것은 분명히 영언기도를 말하지, 그 어느 다른 뜻도 없습니다. 


파울은 더 나아가 두 가지 기도와 찬양을 말합니다. 혼의 기도와 영의 기도, 그리고 혼의 찬양과 영의 찬양입니다. 각각 두 가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영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은 기도하여도 나의 마음은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떡하라는 말일까요?! 나는 내 으로도 기도하고, 또한 마음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내 으로도 노래하고, 내 마음으로도 노래할 터입니다."(코A 14'14,15)



파울은 여기서도 영과 마음의 차이를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로 영언과 일반 언어, 영적인('신령한') 노래 곧 영언송과 일반 노래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 전의 14'2와도, 또 그보다 앞서 언급한 히브리서 4'12와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개혁신학을 비롯한 정통신학은 구교 신학을 그대로 본받아 그리스 철학에서 온 '인간 2원설'을 믿고, 또한 영언을 거의 부정시하기에,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언자라면 누구나 쉽게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영보다 이성을 강조하는 신학의 약점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 곧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약속(맑 16'17a)대로 영언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안 되던데..." 하는 사람은 안 믿고 안 된다고 고백하니 안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고 혀를 (모국어가 아닌 다른 발음에) 맡기지 않아섭니다. 성령님이 혀를 좌우하시는 것을 믿지 않고 내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당장이라도 마음을 고쳐 먹고 믿음으로 하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상하게도 성경의 약속에 예/아멘으로 답하려는 사람 외에는 긍정보다는 부정으로 가득 차 가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지금 긍정철학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다음 말씀에 기초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아무리 많더라도, 그 분(예수님) 안에서는 '예!'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통하여 '아멘!'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코B 1'20)


모든 신자가 영언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인가요, 아닌가요? 다음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렇게 하면 성령님의 선물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여러분에게, 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주님,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먼뎃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 2:39).


하나님의 약속들은 아무리 많더라도('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오순절 곧 성령님 강림의 날인 여기서, 페트로(베드로)는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먼뎃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독자도 끼어 있나요, 아니면, 칼뱅주의/개혁주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택정한 (오순절에 가까운) 특권층(?) 사람만 영언을 할 수 있었나요? 우리는 신앙과 신학/주의/이즘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이 약속은 어떤 내용일까요?


   " .. 그 분(예수님)은 아버님으로부터 성령님의 약속을 받아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행전 2:33b)


'보고 듣는 이것'이란, 바로 행전 2'4에서 시작됐고 5-13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여 온 유대인 군중이 보고 들은 그것, 곧 성령을 받아 영언함을 가리킵니다! 

'보고 듣는' 이것은 또한 쇼므론(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역시 내렸던 것이고(8'15-19. 특히 18,19 참조), 

'보고 듣는' 이것은 샤울(훗날의 파울)이 아나니야에게 안수 받을 때 분명 내렸던 것이며(9'17 끝 부분. 이것은 훗날 파울이 그 누구보다 영언을 많이 한 것으로써 입증되고도 남는다) 

'보고 듣는' 이것은 또한 코르넬리우스 가정에 내렸던 것이기도 하며(10'45,46; 참고: 11'15-17), 

'보고 듣는' 이것은 에페소 교우들에게도 내렸던 것입니다(19'2-7). 

'보고 듣는' 이것은 물론, 코린토 교우들에게도 내렸던 것이고요(코A 12-14장 참조). 



이처럼 이것은 성경상으로 지극히 논리적으로 입증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학'이라는 색안경을 낀 신자들에게는 아무리 웬만큼 이 성구들을 들이대도 이 진리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희한하고 신기한 일입니다. 학설과 선입견과 편견이 그토록 억척같이 질기기 때문입니다. 

[ 실은 필자도 옛날 그랬었습니다! 당시 이 신학과 이성이라는 콩깍지를 떼니까 비로소 보이더군요. ㅠㅠ) 그렇다고 신학과 이성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고요! 꼭 필요하죠. 더구나 성경신학/주경신학은 특히 그렇습니다. 그런 신학 없이, 오늘날 우리가 성경책을 손에 쥘 수 있었을지요..? 제 말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는 일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이론과 이즘으로는 결코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 받는 믿음과 영언을 하는 믿음이 본질상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믿는 사람들에겐 이런 표징이 따를 테니"라고 하셨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믿어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밖의 것들도 믿음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믿음 없이 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 없는 사람은 영적인 시신에 불과합니다. 



이상에서 보듯 영과 혼은 확연히 차원이 다른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영언이 둘의 가름/구분에 기여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