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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경제난 극복의 비밀



독자는 요즘 먹고 살기 어려운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보자! 이 경제난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 신뢰의 법이다. 


하나님은 미쯔라임(애굽) 출국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간 먹고 입을 것을 제공하셨다. 옷과 신발이 닳지 않았고 특별한 범죄로 저주 받은 것 외에는 병자가 없었다! 

과연 예호봐(야웨) 하나님은..


    예호봐 이레: 미리 앞서 준비해 주신 공급자(Provider) 주님이셨고, 

    예호바 로페: 고쳐 주시는 치료자이셨으며, 

    예호봐 로이: 돌봐 주시는 목자이셨고, 

    예호봐 니씨: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게 하시는 용사 하나님! 

    예호봐 샬롬: 안팎에 평화를 주셨고, 

    예호봐 치케누: 그들(우리)을 의롭게 하시며, 

    예호봐 샤마: 거기/어디에도 계시고, 

    예호봐 메카데쉬: 우리를 늘 거룩하게 하시며

    예호봐 쩨바옽: 천군/천사들로 우리를 둘러싸 주시는 만군의 하나님

    엘 샤따이: 전능하신 풍요의 하나님이셨다. 


바로 이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면서 훗날의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이셨다! 선한 목자 예수님(요한복음서 10'1-18) 속에 구약 시편 제23편의 목자 개념을 비롯한 이 모든 개념이 뭉뚱그려져 있다.   



그러나 현대 교인들은 이런 하나님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자기 직장과 자기 생각, 돌아가는 세상 경제를 더 의지하고 있다. 그러니 걱정의 한숨만 늘어 간다. 어디에서도 크리스천들의 믿음을 보기가 어렵다. 또 이런 자신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우리 존재의 본체인 영을 통하여 가장 완전하고 진솔하게 아뢸 믿음의 방편인 영언(방언) 기도도 하지 않는다(로마서 8;26,27, 코린토A서=고전 14'2). 과연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옳다(루카복음서=눅 18'8b).


레빝서(레위기) 제25장에서 하나님은 고대 유대 절기의 하나였던 '희년'의 일환으로서 토지의 안식년(Sabbath Rest)을 계시하였다. 매 7년차로 경작을 쉬는 인간/토지의 안식년 관례였다. 이에 따라 7년마다 한 번씩 1년간 모든 농토가 "쉬게" 되면서 휴경(休耕)하는 한 해동안 농작물 생산도 멈추었다. 

이스라엘이 이 희년을 얼마나 준수했는지는 잘 알 길이 없다. 실질적이기보다 상징적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고 계신다. 하나님을 잊어버릴만 한 때, 인간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을 의존하라는 것이다. 6년간 열심히 일해서 소출을 얻되, 제7년에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 분을 전적으로 의존하라는 숨은 뜻이 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눈에 보이는 현실을 안 믿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분의 권능의 팔에 기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오늘날 하나님이 신자에게 희년법을 적용하여 매 7년 한 해 동안 수입을 거두기 위한 모든 세상 일을 쉬라 하신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도 현대 교인들의 대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맨날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도 사람인지라 하나님께 자주 반항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게 된다. 아브람은 갈 곳을 모른 채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붙들고 고국을 떠나 타향으로 나아갔다. 그런 아브람을 엘리욘(=천지의 주재/主宰) 하나님은 의로운 왕/사제인 멜키쩨뎈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를 주면서 축복하게 하셨고, 아브람은 그 엘리욘 사제(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그후 그는 엘리욘/엘샤따이이신 예호봐님의 도움으로 평생 풍요를 누리면서 살아갔다. 안 그런가? 하나님은 또 이짜크(이삭)-야콥-요셒-이스라엘 백성 등이 줄이어 풍요를 대물림하게 하시되, 때로는 환난도 허용하셨다.  


사람인지라, 이스라엘 백성은 희년의 제7년 '공백기'를 우려할 만 했다(레 25'20). 파종도 경작도 추수도 하지 않는데 도대체 뭘 먹고 살겠냐고 한숨 짓고 의심하며 물을 만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이것을 아시고 인간을 이해하시면서도 그 분을 의지하길 바라셨다. 여기 경제난 속 풍요의 비밀이 있다! 


   "혹시 (너희가) 말하길 '만약 제 7년에 심거나 추수하지 않으면 뭘 먹을 건가?' 하겠지만, 내가 제 6년에 나의 복을 너희 위에 명하여 3년치의 수확을 내도록 해 주마!" (20~21절, 사역)


하나님은 여기서 정말 놀라운 신비의 말씀을 하고 계신다. " '나의 복'(=원어: 비르카티. 복이라는 뜻인 베라카에서 왔다)을 명령한다"고 표현하셨다. 물론 히브리 어법이긴 하지만. 누구에게 명하신다고? "나의 복"!(NASB는 드물게 대문자 My blessing을 썼다) 그 분의 복/은총을 '의신화(擬神化)'하셔서 그에게 명령하여 엄청난 소출을 한 해 앞서 미리 내려보내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나의 복" 곧 하나님의 복을 함부로 일컫는가? 근래 일부 교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복을 의심하고 혐오하다 못해 심지어 저주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교회의 자원이 고갈되어 간다. 번영을 오용하고 치부(致富)/독식하는 사람들 탓에 성경의 모든 복과 형통, 번영의 법칙에까지 몽땅 '번영신학'이란 딱지를 붙여 단죄하는 현상이 현대교회에 일고 있다. 구약의 복조차도 율법으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번영의 오용과 성경이 말하는 번영의 법칙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튼 하나님의 약속은 안식년 한 해 전인 제6년에 그 분의 복을 한꺼번에 세 곱빼기로 내리셔서 그 한 해의 소출만 3년 분량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8년에 농작/추수를 재개하고서도 전 해(제7년)에 모자랄 만 한 것을 제9년까지 다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넉넉히 주시겠다는 것이다. 헉~! 얼마나 관대하고도 넉넉하신 말씀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에게 그토록 복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나의 복"-하나님의 복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은밀한 콧방귀나 날리고 있는 셈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에 일하시지 않는 것으로 아는 이원론적 신앙을 가진 교인들이 요즘 흔하다. 그렇다면 아부라함이 믿던 하나님은 구약시대로 '종결'됐다는 뜻인가? 요즘 웬만한 것들을 구약 때의 율법으로 치부하는 말들은 신약시대인 지금 별로 믿을 것이 없다는 불신의 핑계거리가 되어 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변함 없으시다. 그 분은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시다. 어제나 오늘, 내일, 영원히 한결 같으시다. 아브람을 복 주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들을 복 주신다! 그 분은 인간의 생각과 조건, 주변 환경을 초월하여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이시다! 엘리욘, 엘 샤따이가 그런 뜻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약하고도 약고 간사하여 그 분의 전능성을 좀체 믿어드리지 않는다는 데 우리의 문제가 있다. 이건 우리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삶은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에 불과하다. 믿음 없는 인간은 아무리 겉으로는 잘 나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시신에 가깝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두 가지- 1) 그 분이 살아계심과 2) 그 분에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미스타포도테스(믿음의 대가를 주시는 분)이심-를 믿어야 한다(히브리서 11'6). 이것을 안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의 불쌍한 영적 시체에나 진 배 없다는 말이다. 

 

요즘 소위 '기독교 국가'라는 영국이나 미국은 점점 돈의 씨가 말라가는데, 중국이나 인도 같은 무신론/이교 국가들이 점점 더 잘 먹고 잘 산다. 왜 그런가? 우리는 세상 세태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만 바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기독교 국가'를 내세우면서 정작 '기독교인' 곧 '믿는다'는 이름만 가진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서구 크리스천들의 십일조는 거의 바닥 수준이다. 과거와는 달리 하나님의 풍요의 법칙을 안 믿기 때문이다.  


다들 어렵고 딱한 경제난 시대에 하나님을 안 믿고 누굴 믿겠는가? 그 분의 풍요의 약속을 안 믿고 뭘 믿겠는가? 세상의 약속? 그분의 바위의 든든함을 믿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자! 그 분을 의지하자! 그 분을 의존하자! 그 분의 풍요의 약속과 말씀을 믿자!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말씀에 입각하여 씨를 심고 온전한 십일조를 내고 그 약속을 믿어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셔서, 사람이 무엇을 심든 믿음으로 심은 만큼 거두게 되어 있다(갈라티아서 6'7. 문맥상으로만 따지지 말고 이 구절 자체도 따져야 한다). 우리가 믿든 말든. 이것이 믿음의 심기의 법칙이다. 번영신앙 혐오 신학자들과 그 아류들은 이 법칙까지 미워하는데, 과연 그들이 의심과 혐오만 심어서 얻을 게 뭔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믿음 없이 하나님께 받을 것이라곤 그냥 태초에 창조하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총 밖에 없다. 열심히 일해 번다고는 하나 그런 이익은 이래저래 흩어지고 손해 본다. 우리 곁에서 마귀가 늘 방해공작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도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자동으로 지켜 주시진 않는다. 믿음 없음이 바로 죄악이다.  

수확에 앞서 파종이 있듯, 풍요에 앞서 믿음의 씨 심기가 전제돼야 한다. 십일조도 안 하면서 십일조의 복에 해당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없다. 십일조가 구약입네, 율법입네 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다른 모든 약속들도 믿기 어려운, 또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신유 곧 치유의 은총도 믿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세상엔 거부들도 있고 졸부도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풍요를 위해 믿음으로 그 분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마음이 아닌 몸이 가난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가난을 자초하는 사람이니 가난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심는 대로 거둔다. 

이왕이면 믿음의 씨를 심고, 그 열매를 얻어 맛 보며, 누리고 살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으로 거둔 풍요로 혼자만 배불리지 말고 가난한 신자들에게 나눠 주고 잘 쓰자! 

거부든 졸부든 부자는 천국 가기가 너무나 어렵다. 저주 받는 부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