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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뷰

'피의 일요일' 그리고 자유와 권리



미국사상 '피의 일요일'이란 게 있었다.
[ 역사에 주목받은 '피의 일요일'이 몇 있었다. 1905년 1월 22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정부군이 노동자에 발포해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된 날,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민권운동자 27명이 데리의 복사이드에서 인권운동을 벌이다가 영국 낙하산부대의 발포로 절반이 숨진 사건도 있었다. ]

미국 흑인들이 잊을 수 없는, 뜻 깊은 날이다. 1965년 3월 앨러배머 주 셀머에서 일어난 아프리칸계 민권운동인 '셀머-먼까머리 행진'(Selma-Montgomery Marches, 이하 '셀-먼 행진'으로 표기) 때 이뤄진 3회 행진 중에 발발해 민권운동의 정치적/정서적 정점을 이뤘다.
그러다 보니, 1, 2, 3월은 연이어 미 아프리칸 계에게 중요한 계절인 셈이다. 1월 15일은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의 생일, 2월은 '흑인문화유산의 달', 3월은 '셀-먼 행진'의 달이기 때문이다. 

흑인들은 노예제를 종식시킨 19세기 남북전쟁이 있은 뒤로도, 20세기 중반까지 다양한 권리 제한을 받았다. 백인들의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차별과 박해, 심지어 폭력 피해를 입었다. 근래엔 다양한 아프리칸계 정치인과 대법관, 대통령까지도 등장했지만, 지금도 주일날이면 으레 전국에서 흑/백 교회들의 인종 구분 예배가 드려진다. 


셀머에서의 이 운동은 작가 어밀리어 보인튼 라빈슨 씨(현 쉴러연구소 이사)와 전남편 샘 보인튼이 당초 흑인 선거권 쟁취 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관리들과 백인시민단체,  KKK단[각주:1] 등의 조직적인 방해를 받았다. 백인들은 읽고쓰기테스트, 사회진출 제재, 경제 압력, 폭력 등을 흑인 제압 무기로 사용하다시피 했다.

위키피디어 자료에 따르면, 셀머는 앨러배머주 댈러스카운티의 주요도시로..그즈음 인구 57%가 아프리칸계였지만 투표권연령층 15,000명 중 130명만 유권자 등록이 돼 있었고, 흑인 인구 80%가 소작인/가정부/청소부/날품팔이들로서 평균 빈곤 수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밀리어는 이미 1934년에 당시 흑인에게 합법 부여되지 않던 유권자 등록을 했고, 수 년 후 기금모금을 위해 흑인영가의 배경에 관한 '그 긴 세월을'이라는 희곡을 쓰기도 했다. 1954년엔 앨라배마 먼가머리의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에서 마틴 루터 킹 부부와 만나기도 했다.  당시 댈러스카운티유권연맹(DCVL)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

1955년 12월엔 같은 주의 먼까머리에서 로저 팕스 여인이 백인에게 좌석양보를 거절, 체포/재판/벌금부과 후 발생한 뒤 연이어진, 이른 바 '먼까머리 버스 보이콭' 사건 결과, 버스 좌석 배정에 흑백 차별을 허용한 앨라배마/먼까머리 법령은 위헌이라는 연방법원의 판결도 내려졌다. 흑인계의 승리로 귀결된 이 사건은 아프리칸계에게 "우리도 뭔가를 얻어 낼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와 빛을 심었다.

1963년초엔 버너드 래피엩 교사부부가 학생비폭력협력위원회(SNCC) 중심으로 셀머 및 주변의 흑인지역('블랰벨트')에서 조직적인 아프리칸계 유권자등록운동에 나섰다.
그 해 5월 어밀리아의 남편 샘이 죽고 나서 자택이 셀머 민권운동 본부가 되어 킹 목사와 지지자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흑인유권자등록운동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백인들의 방해공작도 강화돼 갔다. 태버내클침례교회에서의 유권자등록 토론회는 짐 클라크 보안관(=쉐리프)이 교회를 포위하고 막으려 했어도, 결국 수 백 명이 참가했다.

6월엔, KKK에 피살 위기도 겪은 래피엩이 체포/구타/협박을 무릅쓰고 한 노력 끝에, 32명의 교사들이 유권자 등록울 했지만, 그 직후 모두 학군(위원 전원이 백인이었다!)에 해고 당했다. 9월 15일 버밍엄 교회 폭파 사건이 있은 뒤, 셀머의 흑인학생들은 백인들 차지인 간이식당 안에 앉아 있기를 시작해 공격/체포되기도 했고, 이에 항거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300명이 체포됐다. 

63년 10월 7일은, 시민 유권자등록 신청 차 법원에 가는 월2일 간의 하루였다. 그 날 SNCC/DCVL은 댈러스카운티 흑인들 300여명을 등록대열에 세워, '자유의 날'이라 불렸다. 당일 뙤약볕 아래 하루종일 기다렸지만 겨우 약간명만 신청이 허용됐고 그나마 신청자 대다수가 등록 거부됐다. 심지어 이들에게 식수를 날라 주거나 '투표하러 등록합시다'란 팻말을 든 SNCC 회원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1964년 7월 2일, 린든 B. 잔슨 대통령은 인종차별을 불법화하는 '민권령 1964'에 서명했지만, 모순스럽게도 '짐 크로우 법'[각주:2]은 여전히 유효했다. 유권자등록일인 7월 6일엔 잔 루이스가 50명의 흑인들을 데리고 법원에 가 신청을 시도했지만, 클라크 보안관에게 전원 체포돼다. 7월 9일, 제임즈 해어 판사는 (민권단체/지도자의 도움을 받는) 3명 이상 집합금지령을 내렸고, 향후 6개월간 심지어 2명 이상 대상의 대화도 '불법'으로 간주됐다.   

이듬 해인 1965년, 해어 판사 금지령으로 손발이 묶인 민권운동가들은 킹 목사와 그의 남부기독교지도자협회(SCLC)의 도움을 요청, SCLC 회원이자 다른 민권단체의 거물급인 제임즈 버벨, 다이앤 내쉬, 제임즈 아린지 등이 적극 나섰고, 1월 2일 브라운채플에서 킹이 연설을 했다. 그 다음 주로부터 SCLC/SNCC 등은 셀마와 블랰벨트 카운티에서의 유권자운동 및 시위 행진 등을 강화했다.

1965년 2월 18일, 매리언에서의 야간 민권시위 행진 도중 돌연 정전사태와 함께 앨러배머 주방위군에게 급습을 당하자, 가족을 보호하려고 인근 카페로 숨었던 지미 리 쟄슨에게 제임즈 파울러 방위군 중사가 총격을 가해, 8일 후 쟄슨이 총상 감염으로 숨졌다. 아프리칸계의 분노가 폭발했고, 버벨이 '셀-먼 행진'을 제안한다. 

그래서 버벨의 주도로 단행된 셀-먼 행진은 당초 조지 월리스 앨러배머 주지사가 정전사태 및 주방위군 발포령에 개입했는지 여부를 물으려고 계획됐다. 킹은 이에 찬동해, 주지사에게 "흑인 유권자 보호"를 요청하려는 목적을 추가했다. 물론 이전처럼 비폭력 행진이었다. 그러나 월리스 주지사는 이를 '공중 안전 위협 요인'이라며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행진을 제지하겠다고 다짐했다. 
 

제1차 행진

1965년 3월 7일. 약 600명이 참가해 셀마에서 동쪽으로 향발한 첫 행진은 잔 루이스(SNCC)와 호시아 윌리엄즈 목사(SCLC)가 앞장을 서고, 밥 맨츠, 앨버트 터너 등이 뒤따랐다. 일행이 에드먼드 페터스 브리지를 건넜을 무렵, 주 방위군이 건너편에서 방벽을 이룬 채 대기하고 있었다.
방위군 지휘관은 일행에게 "즉각 해산하라"고 경고했고, 윌리엄즈는 지휘관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거부 당했다. 그 수 초 후 시위대는 방위군의 공격을 받아 땅에 쓰러지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난타 당했다. 여기저기 최류탄도 터졌고, 기마대가 일행 앞을 막았다.
다수가 부상 당해 유혈이 낭자한 현장을 포착한 텔레비전 방영물은 전국의 민권운동을 부채질 했다. 어밀리어 보인튼도 구타 당한 사진이 신문과 세계 뉴스에 실렸다. 17명이 입원한 이 사건은 '피의 일요일'로 불렸다. 


2차 행진

킹 목사는 연이어, 이틀 후인 3월 9일 둘째 행진을 갖기로 계획을 세웠다. 전국의 목회자들과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해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내 당일 행진에는 2,500명이 참가했고, 짧은 기도회 후 해산함으로써 법원의 금지령을 준수했다. 
그 날 행진에 참여했던 3명의 백인 목회자들은 백인분리주의자들의 근거지인 '실버 문 카페' 앞에서 곤봉으로 얻어 맞아 그중 제임즈 리브 목사는 입원이 필요했는데도 인근 병원들의 진료 거부로 2시간 떨어진 버밍엄 시의 유니버시티 병원으로 이송돼야 했다. 리브는 이틀 뒤인 11일 병원에서 아내가 지켜 보는 가운데 숨졌다. 

지역의 아프리칸계는 리브 목사의 희생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면서도, 미디어와 정치 지도자들이 단지 백인이 죽었다는 이유로만 관심을 기울이는 데 대해 운동가들은 깊은 유감을 느꼈다. 


3차 행진

일주일 후 연방지법 프랭크 미니스 잔슨 판사가 제1개정헌법에 따라 흑인들의 행진 권리에 대한 지지 판시를 하자, 행진이 본격 재개된다.  21일 제3차 행진에 앞서 브라운 채플에서 거행된 기념예배엔 8,000명이 모였는데, 대다수는 흑인이었지만, 백인/아시안/라티노들도 상당수 참석했다.

이 날부터 이틀간의 행진은 당초 법정명령으로 2일간 '국도 80번'(제퍼슨 데이비스 하이웨이) 중 이차선 구간에 300명으로 국한됐기에, 대다수는 당일 귀가하고 300명만 남았다. 이들은 도합 4박5일간 하루 평균 16km씩 먼까머리까지 54마일(87km)을 걸었다. 주변에서는 2천명의 미 육군 병력과 연방 앨라배머 국립방위군, FBI, 연방 마셜 등이 이들을 '호위'했다.

22, 23일엔 라운즈 카운티를 가로질러 우중충한 빗속을 걸어야 했고, 밤엔 진흙 땅 위에서 캠핑을 했다. 그즈음 라운즈 카운티는 흑인 인구가 81%, 백인이 19%인데도 불구, 흑인 유권자가 단 1명도 없는 반면, 백인은 118% 등록돼 있었다[각주:3].
 
24일 아침. 드디어 먼까머리 카운티에 다다르자, 도로가 다시 4차선으로 넓어져 추가로 버스와 자동차로 온 사람들이 행진에 가세했다. 저녁엔 수 천 명으로 불어나 먼까머리 교외의 천주교 도시인 세인트 주드(=성 유다) 시의 최종 캠프장에 도착했다.
당일 저녁, 임시무대 위에서 '자유를 위한 스타들' 행사의 일환으로 '바나나 보트 송'으로 유명한 '칼맆소의 왕', 해리 벨러폰트와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니너 시몬 등 아프리칸계 명가수들과 함께 토니 베넽, 프랭키 레인, 피터-폴-메리(3인조) 등 백인가수들도 가세하는 지지공연이 펼쳐졌다.
 
25일 행진엔 25,000명이 참가, 세인트주드에서 출발해 앨라배마 주의회 청사 앞까지 다다랐다. 청사 계단에서 킹은 '얼마나 오래, 얼마 안 가'라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 날 밤, 민권운동을 지지하러 일리노이주 디트로이트에서 온 백인인 (5자녀의) 어머니 '비올라 리우조'씨가 행진 참가자들을 태우고 셀마로 가던 중 KKK단에 암살되는 비극이 발발한다.
총을 쏜 KKK단의 자동차에 탔던 한 명은 FBI 정보통인 게리 로우. 이에 따라 FBI 산하기구인 코인텔프로는 리우조가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거짓 루머를 퍼뜨렸다.  

3차에 걸친 셀-먼 행진은 아프리칸계의 권리신장 계기로선 대성공이었다. 전국에 보도된 행진 광경 특히 '피의 일요일'날 방위군이 잔인한 제재/구타를 가한 장면들은 분리주의 운동이 기존 인식 대로 남부의 "사회질서 보존"용이기보다 비백인들 상대의 테러 지원을 위한 주정부 시스템 정도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에 따라 잔슨 대통령은 급히 월레스 앨러배머 주지사를 만나 민권운동 상황에 관한 대담을 나누면서 시위자들에 대한 주정부의 훼방을 중지하라고 설득했다. 이틀 후인 15일, 잔슨은 연방 상/하 양원 공동의회에다 훗날 '투표권법령'이 된 법안을 상정했다. 이날 연설 끝에 잔슨은 흑인민권운동의 최고 구호인 '우리는 극복하리'(We shall overcome)를 인용하기도 했다. 이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지켜 본 킹 목사의 뺨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흑인들의 자유 투표를 보장한 이 법은 그해 8월 6일 발효됐고, 그 날 기념식엔 어밀리어 보인튼을 비롯한 수많은 민권운동가들이 참석했다. 이 법이 발효된 뒤, 셀마의 아프리칸계 7,000명이 추가로 유권자 등록을 했고, 그 결과 이듬해인 1966년, 셀마의 쉐리프 짐 클라크는 재선에 패했다(클라크는 후에 마약밀매 혐의로 징역을 살았다). 

1960년 당시, 앨러배머 전 지역의 흑인 유권자는 53,336명이었으나 30년 뒤 약10배인 537,285명으로 증가했다.

셀머-먼까머리 구간은 현재 기념도로로 지정돼 있다. 


우리의 자유와 권리는?    

자, 이제부터는 정작 필자가 하고픈 얘기다.

성경에도 노예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 스토리가 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일찍이 미쯔라임(에짚트)에서 거의 400년간의 종살이 끝에 해방됐고, 훗날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도 일부가 풀려난다. 그 중간에도 판관(사사) 시대 때 가끔 남의 나라의 지배 아래 종살이를 했으나, 하나님이 때마다 구원하셨다.   

우리 대한민국도 비슷한 광복 스토리가 있다. 그러기 위해 안중근, 유관순 등 숱한 순국 의사/열사들이 목숨을 바쳤고, 신앙을 지키려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피를 흘려 가며 자유와 권리를 쟁취했다. 되찾을 것을 되찾고, 꼭 챙겨야 할 것을 챙겼다. 인간다움, 인간다운, 신앙인다운 삶을 위해 그들은 '올인'한 셈이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과연, 우리의 영적 자유와 권리를 얼마나 챙기고 되찾는가? 이를 위해 얼마나 '올인'하는가? 라는 물음에 부딪게 된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충분히 누리고 사는가?
그 진상을 바로 알고 느끼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에 대조시켜 우리 자신을 곰곰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영원한 해방과 자유와 행복을 완성하셨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해방과 자유, 행복을 맘껏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두려움에 쉽게 사로잡힌다. 상황에 따라 충분히 담대하지 못하고 쉽게 겁에 질리기도 한다. 아주 위험한 위기 상황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승리할 성경 말씀 고백/선언/선포의 권리를 거의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되레 "그런 게 있었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흔히 걱정/근심의 고리에 얽매여 산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덜어 주시려고 그 분의 가벼운 짐을 지고 가벼운 멍에를 매라고 하시며, 사도 페트로는 그런 것들을 다 주님께 맡기라고 하는데도, 우리는 좀체 그러지를 않는다.  "주님, 이건 제 몫이어요"라는 듯 혼자 고민하고 고심하고 혼자서 낑낑대며 풀려고 한다. 빠져 나갈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터널 속만 감상(?)하며 두루 거닌다.

우리는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가난을 벗어나게 돼 있다. 주님께서도 지상에서 '면걸' 수준의 생활을 하신 게 결코 아니었다. 수도주의자/'청빈'주의자들이 하는 말들처럼 "가난이 미덕"이고 주님께서도 그 미덕을 발휘하셔야 했다면, 주님은 구걸 생활을 하시며 사역하셔야 했건만, 사도들조차 그랬던 사람은 없다.

주님이 하늘 차원에서 가난하게 내려 오신 것은..우리를 풍요롭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시고도 더 풍요롭게 얻도록 하시려고 오셨다.

주님은 또 분명히 (믿음 있는) 유대인들의 모든 병을 낫게 하셨다.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었고. 믿음 없이 그 분을 기쁘게 할 길이 없다.

주님은 죄 문제와 함께 이 모든 것에서 신자를 영원히 해방시키셨다.
죄의 결과로 온 율법의 저주로부터 참 자유를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율법의 저주 증상인 두려움과 공포와 질병과 근심과 가난 속에서도 별 문제의식도 없이, 만족(?)하며 살아 간다. 악령들에게 짓눌리고 수시로 침해를 당하면서도 별 증상을 느끼지 않는다.

이건 마귀에게 속고 있음이지, 제대로 해방다운 해방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자유다운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다.

왜 그런가?

성경 말씀이 이미 선언하고 약속해 놓고 있는 것에 관해 무관심해서다. 일부는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우선 별 관심도 없다. 적당히 '종교 생활' 같은 것을 하고 살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과거 미국 아프리칸계와 같은 해방과 자유 의식, 승리와 극복을 향한 절규 같은 것이 우리 크리스천에겐 결여돼 있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자유를 쟁취했지만,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악과 싸우진 않으며, 마땅히 대적해야 할 마귀, 극복해야 할 율법의 저주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는다. 그냥, 적당히, 뭉기뭉기..뭉기작거리며 지낸다.

그들과 같은 절실한 감각이 결여된 탓인가? 불감증? 무감각 상태?
영적 자유, 영적 해방과 그 결과에 대한 갈망이 부족한 탓이다. "맛이 간" 것인가?
우리의 자유와 권한, 권리를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린 탓이다. 몰각 내지 무지각과 건망증인가?
우리는 왜 성경 말씀대로 그것들을 되찾지 못하는가?
예수 이름 안에 담긴 무한한 자원과 권리를 왜 활용하지 못하는가?


흑인들에겐 '피의 일요일'이 있었지만, 우리에겐 주님이 피 흘리고 되살아나신 피의 금요일, 부활의 주일이 있다!

흑인들은 노래한다: "우리는 극복하리"(We shall overcome)라고.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이겼노라(WE HAVE OVERCOME-(AND) OVERCAME- THE WORLD)고! 


 

  1. 쿠 클럭스 클랜: 주로 남부 출신 백인 과격 신교도들로 구성된 인종 혐오단체. 1865년 첫 창설. 흑인/유대계 등 소수인종 상대로 테러/폭력/린치/살인 등을 자행해 왔고 천주교/노동조합 등을 반대함. [본문으로]
  2. 공공장소에서의 인종차별을 사실상 합법화한 법령, 1876년 발효, 1965년 폐지됨 [본문으로]
  3. 100%가 넘는 이유는 남부의 여러 카운티에서 사망/이사 후에도 해당지역 유권자로 남겨두는 관습 탓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