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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뷰

재조명해 본 링컨의 삶과 신앙(3)


                 링컨과 약혼녀 앤 러틀리지의 사랑에 관한 그림 (19세기 말)
  

시리즈는 링컨에 대한 거품과 전설을 걸러내고 그의 실체를 보자는 뜻에서 시작했다.

링컨은 온 생애에 걸쳐 성경을 믿음과 권능의 뿌리와 바탕임을 믿었다기 보다 인류를 위한 도덕 경전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지적하고픈 말은, 링컨이 대통령이고 위인이고 명사이고 노예해방주의자였고 '정직한 에이브'였기에 링컨이 특별한 신자라도 되는 양 착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링컨은 특별신자이기 이전에 특별교인도 아니었다.

단지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고 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참 신자인 양 표현하는 설교자들은 자신이 아무나 신자로 만들어 주고 있는 보편주의자 정도로 생각하면 맞다. 성경적인 대조 과정조차 없이 말이다. 결국 우리는 링컨을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한다는 얘기다.
   
앞서도 비쳤듯, 링컨은 어떤 기록상으로도 침례(세례)를 받은 적이 없고, 어떤 교회에 교인등록을 한 적도, 성만찬에 참여한 적도 없고, 예수님에 관해 말한 적도 없거나 극히 드물다고 많은 역사가들이 입을 모은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럴 수는 없다! 따라서 링컨은 여느 정치인들 못지 않게 예수님을 무시했거나 부끄러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 되려고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는 비겁한 사람보다는 예수님을 부끄럼 없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 귀하고 위대하다!
 
전에도 일부 인용했듯, 그 누구보다 링컨과 가장 가까웠을 사람인 아내 메리 타드는 링컨의 사후 이렇게 말했다. (메리 타드는 장로교인이었다.)

    "미스터 링컨의 처세훈과 철학은: '무엇일지, 무엇이 될지와 우리의 기도도 법령을 구속할 수는 없다.'였지요. 그이는 어떤 교회에도 조인(join)한 적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 그는 늘 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테크니컬한 크리스천은 아니었습니다."

    "미스터 링컨은 일반적인 어감 상의 소망도, 믿음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쉽게 푼다면, 링컨은 일종의 '나름 스타일' 종교인이었지 신자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설교가/저술가들과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이 역사적 진실은 적당히 덮어 든 채 링컨을 성경적이고 정상적인 거듭난 신자였던 양 인용하면서, 교인들을 적당히 기만하려 들지 말기를 바란다. 역지사지로, 그런 주장을 하는 설교가/저술가/보수주의자들 자신이 '적당한 교인'임을 자증하는, 우스운 모양새가 돼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정치 보수주의자들 다수는 그렇다.
링컨에 관한 '유식'을 자랑/과시하기 전, 성경과 역사관에 대한 자기 무식 내지 몰지각부터 드러내는 셈이다.

이런 정보를 알려 줘도 "그랬었나? 몰랐던 것이고, 앞으로도 모르는 것으로 해 두겠다"는 반응을 보인다면, 역사 뿐 아니라 성경 정보에 대해서도 그랬고 그러겠다는 얘기 밖에 안 된다.
설교가는 성경을 아는 만큼만 말할 뿐이다. 성경을 정도껏 말한다고 해서 성경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링컨 같은 사람을 참 신자라고 주장하는 설교가/저술가는 역사도 성경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계 미디어는 물론 소위 '신학자', 역사학 교수라는 사람들까지 그러고들 있다. 링컨을 구태여 교인/신자로 만들어 주고 싶거들랑 "무늬만"이라는 단서를 달기 바란다.  
 
위대한(?) 대통령/지도자 링컨을 "우리 편", "내 편", "기독교 편"으로 만들려는 발상도 버리자.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는다고 무조건 우리 편일 수 없다. 하나님과 참 교회 편에 서서 진정 싸탄과 그의 세상 시스템을 대적할 때, 진정 '우리 편'일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토는 마귀와 세상을 이기셨다!
따라서 독자의 뇌리엔 정체성 혼란 같은 게 없기를 바란다.

놀랍게도 역사적인 온갖 기독교 교파와 교단은 물론, 이단인 보편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 무신론자들, 심지어 유대교인들도 "링컨은 우리 편"이라고 주장한다. 조지 워싱턴도 비슷한 경우였다. 하지만 워싱턴이 종교적으로 진정 누구 편이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프리메이슨 편이었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워싱턴 역시 예수님을 사랑한 참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은..미 역대 대통령 대다수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내적으로 진정 섬기는 남모를 신인(神人)이 하나 있다면, 아마도 조지 워싱턴일 것이다.

독자에게 솔직히 묻고 싶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과연 어느 누가 진짜 거듭난 신자였는지를. 누가 과연 목숨 내 놓고 박해를 받아 가며 세상보다 예수님을, 그것도 끝까지 사랑한 사람이었는지. 필자의 짧은 연구 결과로는..슬프게도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 대다수는 진심으로 기독교를 존중해 주는 척 하면서 기독교를 적당히 이용한 인사들이었다.

링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을 적당히 유야무야 덮어버리고 링컨을 기독교인화 하려고 정계와 보수계와 교계에 아부하며 발버둥치는 이들-특히 그런 미국 교계 인사들은,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 슬기롭고 갸륵한 게 아니라..무식하고도 가증한 사람들일 수 있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하나님까지 속이려 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링컨을 그래도 참 신자로 보려는 독자는 자신이 참 신자인지부터 알아 보기 바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링컨이 성경을 책의 하나로 존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벤 프랭클린과 셰익스피어의 저작물도 그렇게 대했다.
조셒 루이스는 그의 '링컨, 자유사상가'에서 링컨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

    "성경은 나의 책이 아니며, 기독교도 나의 신앙은 아닙니다." (The Bible is not my book nor Christianity my profession.)

무신론자들은 자기네 '편'인 링컨의 이 명언을 사랑한다.

링컨에게서는 당대 교회들 또는 사역자들과 결탁하는 성향도 강하면서 제도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 심지어 거부 정신도 본다.

그런데 링컨은 자신이 의문성 불가지론적 비신자인 이유를 교회 탓으로 돌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불신을 하나님 탓이나 교회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
설령 교회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내 영혼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내가 책임져야 한다.
성경 진리의 부름에 대한 응답을 내 자신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천국 문을 가로막는 사람 때문에 천국에 못 가는 나의 자신에게 책임이 전혀 없이 내가 다시 절로 천국 갈 수 있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링컨에 대해 실망할 독자는 일찌감치 실망하기를 바란다. 빠를수록 좋다.

아무튼 이 시리즈는 링컨의 말년까지 계속 다뤄 볼 생각이다. 그에 관한 모든 것을 되도록 더 알기 위해서다. 링컨이 무신론 편이든 기독교 편이든 필자는 별 관심이 없다. 어차피 그는 하늘이 아닌 세상 시스템의 일부였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무나 '기독교 신자'로 만들지 말자. 기독교 신앙을 아무나 적당히 지닐 수 있는, 호락호락하고 만만하고 우스운 것으로 만들지 말기를 바란다. 그 신앙은 때로 우리의 목숨을 요구한다!
링컨이 신자였다면.., 극장에서 암살되지 않고 교회당에서 순교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나 그는 당초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믿음이 누구나의 것은 아니라고.

이 두 가지 말씀을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혹여 온 세상이 "링컨은 기독교신자였다!"고 선언해도 우리만은 "그는 참 신자가 아니었다"고 바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링컨과 뉴세일럼 (1)

본 시리즈의 당초 목표는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삶과 신앙을 성경적으로 분별하자는 것이었지, 링컨의 또 다른 전기 같은 것을 쓰려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몰라도 너무 몰랐던 링컨의 면모를 새로 발굴/출토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런 점들을 가급적 부각시키는 쪽으로 다소 방향을 바꾸다 보니, 전기적 요소가 풍기게 됐다. 이 점을 독자가 양해하기 바라고, 이 글의 그런 약점이, 전에 몰랐던 흥미 부분들을 새로 알게 된 유익으로 상쇄/보충되길 기대한다.


1830년대가 주무대인 링컨의 20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은 뉴세일럼을 중심으로 한 시기, 그리고 법률가로서 스프링필드를 중심으로 지낸 후반부다.


링컨이 본격적인 대외적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에도 교회에 정기적으로 다니거나 신앙고백을 한 일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교회를 방문했다면 "단지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오히려 그의 20대는 생애 중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이신론적/무신론적/불가지(不可知)적/보편론적 성향을 나타내던 때였다. 

링컨은 7세 때부터 21세까지 14년간을 인디애나주에 이어 일리노이 주에서 살면서, 아버지/어머니 또는 계모 등을 도와 산과 들판에서 나무를 찍어가며 농장을 일구고 가정을 돌봤다. 친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갓 결혼한 누나까지 죽자, 깊은 정서적 상처와 공동(空洞)감에다 농장 생활에 싫증과 환멸을 느껴 결국 가족을 떠나게 된다.


앞서 링컨은 누나 새러가 죽은지 석달만인 1828년 4월, 뉴올리언즈 행 평저선(flatboat)을 타고 수상 여행을 하면서 카고(화물 싣고 부리기)일을 한 데 이어, 22세가 되던 1831년의 3월에 두 번 째 뉴올리언즈 행 뱃여행을 한 뒤 그 해 7월 집을 떠나 일리노이 주 뉴세일럼(New Salem)으로 향한다.

뉴세일럼은, 젊은 에이브로서는 비전이 없어 뵈는 시골 농장의 만년 단순노동을 탈피하기 위한 또 하나의 개척 모험이었다.

뉴세일럼에서도 날품팔이에 가까운 다양한 노동도 하지만, 사업에 손을 대기도 하고, 우체부/측량사/법률사 등을 거쳐 주의회 의원선거 출마까지 하면서 사회 체험 폭을 넓히게 된다. 현재 뉴세일럼에는  링컨이 한 손에 쥔 도끼를 내버리면서, 한 손에 법학 책을 쥔 상징적 제스처의 동상이 서 있다. 

이 기간 동안 삶 속에 반영된 링컨의 신앙이라고 할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어머니와 책으로부터 익히고 배운 기본 윤리/도덕 정신에 주로 지배 받았다.


2명의 동행자들과 함께 평저선에 올라 생어먼 강줄기를 타고 뉴올리언즈로 향하던 링컨은 4월 중순 뉴세일럼 근방에 도착했다. 뉴세일럼은 약 2년전 제임스 러틀리지와 잔 M. 캠런이 방앗간과 제재소 등을 지어 갓 창설한, 아담한 타운이었다. 러틀리지는 링컨의 장인이 될 뻔한 인물이었다. 링컨의 진지한 첫사랑 앤 러틀리지의 아버지였기에.

뉴세일럼 사람들이 링컨을 처음 본 것은 평저선이 강기슭 물방아나루(洑)에 좌초됐을 때였다. 키 크고 비쩍 마른 청년이 사내들 여러 명을 익숙하게 다루면서 배를 빼 보려고 이리저리 애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링컨은 재빨리 짐을 내리게 하고는, 인근 통 제조 공장/상점에서 나사송곳을 빌려 뱃머리 아래다 구멍을 뚫어서 물을 들여 배를 잠재웠다.  

링컨에게 평저선을 맡겼던 고용주인 덴튼 오펕은 이 때 에이브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자신의 오피스 서기 일을 맡겼다. 그러나 뉴올리언즈에 다녀오기까지도 오피스가 아직 열려있지 않아, 링컨은 기선 운전 등 다양한 일을 시도한다.

그즈음 링컨은 동네 씨름꾼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당시 최강자였던 잭 암스트롱과 한 판 승부를 겨룬 것. 안 그래도 오펕은 평소에 동료직원인 윌리엄 클래리에게 "내가 여태 알던 가장 힘센 사나이는 링컨"이라고 자랑했다. 당시 사람들에겐 주사위 던지기, 권투/씨름 등이 주된 오락이었다.

얘기와 내기가 오가다 드디어 둘이 만나 시합이 맞붙었는데, 기록상으로는 누가 이겼는지 승부가 확실치 않고 다만 사건과 장소 이름만으로 유명하다. 실력이 막상막하였던 모양이다.  


1831년 8월. 링컨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첫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선거가 느리게 진행될 동안, 구경꾼들 앞에서 간간히 연설을 했다. 하루종일 투표소에 눌러 있으면서 뉴세일럼 지역 남자들 대다수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후 그가 일리노이 주의원에 당선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1832년 4월, 미 원주민 소크/팍스 부족의 추장 블랰호크('검은매'란 뜻)가 옥수수 경작을 목적으로, 무장한 수 백 부하들을 거느리고 미시시피 강을 건너 일리노이로 진입한 사건이 벌어져 일리노이 개척사회를 공포에 몰아 넣었다. 주지사는 원주민들을 몰아낼 자원 방위병을 소집했다. 그 무렵 18-45세 백인 남성은 의무적으로 민병대에 입대하되 무기는 본인이 마련해야 했다.

링컨은 오펕의 가게 일이 별 전망이 안 보이자, 4월 21일 리칠랜드에서 주 방위대에 자원 입대해 30일간 복무한다. 소속부대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그를 부대장으로 선출했다. 본래는 5월 27일에 복무기간이 끝났지만 링컨은 두 번 더 자원해 모두 51일을 채웠다.
링컨의 소속부대에 전투 기회는 한 번도 없었지만 원주민에게 피살된 전우들의 매장을 도왔다. 7월 10일 위스칸신주 화잍리버에서 제대한 그는 걸어서 뉴세일럼으로 돌아왔다. 이 가벼운 복무 경험을 통해 그는 군인 생리에 관한 지식과 아이오와주의 작은 땅을 보상으로 받았다.

뉴세일럼으로 돌아왔을 당시는 그해(1832년) 8월 선거를 2주 앞둔 때여서 그는 즉각 선거운동에 들어갔지만, 블랰호크 전쟁 탓에 겨우 약간의 연설만 했다. 그러나 스프링필드 바로 서쪽의 퍂스빌 마을에서는 상당히 많은 군중 앞에서 할 수 있었다.

뉴세일럼 상인 A.Y. 엘리스에 따른, 링컨의 짧은 연설 내용은 이랬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제가 누군지 모두들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천한(humble)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많은 친구들로부터 주의원 후보가 돼 달라는 주문을 받아 응했지요. 저의 공약은 동네 아줌마의 댄스처럼 짧고 소박합니다. 저는 내셔널 은행과 (항구/운하/하천 등) 내지 개발의 제도화, 보호관세 등을 선호합니다..제가 당선되면 고맙겠지만, 낙선해도 고맙긴 마찬가집니다."


투표 결과 그는 두 번째 낙선했지만, 정치열은 나날이 더해 간다. 13명의 후보들이 받아낸 총 8,315표 중 그의 몫은 657표. 뉴세일럼의 300표 중 압도적인 277표가 링컨의 것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일거리가 없던 링컨은 1833년 1월 윌리엄 F. 베리와 함께 파트너십으로 작은 가게를 열어 첫 사업에 손을 댔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고 빚만 늘자 4월에 베리에게 경영권을 떠 맡긴다. 그러나 2년 후인 1835년 1월 10일 베리가 죽으면서 파트너십 빚을 넘겨 받아, 13년 후 연방하원의원으로 일하던 1848년에야 다 갚을 수 있었다. 링컨은 이것을 '내서널 부채'라고 불렀다.


우체국장/우편배달부 링컨

1833년 5월 7일엔 뉴세일럼 우체국장(포스트매스터) 일을 맡아, 우체국이 훗날 뉴세일럼을 누르고 카운티 수도가 된 피터즈버그로 이전할 때인 1836년 5월 30일까지 근무했다. 직책을 맡게 된 내력은 확실치 않으나, 일설에 따르면 전임자인 새뮤얼 힐이 동네 남자들과 술판을 벌이길 좋아하고 업무를 게을리한 데 대한 여성들의 불만 탓으로 추정된다.

물론 링컨은 이 직무에도 최선을 다했다. 중요한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여러 마일을 걸어 배달하기도 했고, 측량 일을 겸하여 할 때는 부근 동네 사람들의 편지를 모두 한꺼번에 배달했다. 우체국 일은 동네가 작은 데다 수입이 제대로 따르는 든든한 자리가 아니어서, 링컨은 그밖에도 울타리나무 쪼개기, 농장과 방앗간 돕기, 가게 봐 주기 등으로 부수입을 메워 나아갔다.


잔 캘훈과 토지측량

링컨은 블랙호크 전쟁 당시 두 주요 인물을 만나 교분과 인연을 맺는다. 상관인 잔 스튜어트 소령(개업 변호사)과 뉴세일럼 카운티 측량관 잔 캘훈(남부 출신에다 같은 노예제 지지자인 제7대 부통령 '잔 캘훈'은 동명이인)이었다.
 
캘훈은 스프링필드에 살던 1833년, 링컨에게 카운티 부측량관직을 맡겼다. 링컨은 당초 싫었지만 정치와 무관하다는 약속 아래 수락했다.  (사실 동네 학교 교장 멘토어 그래엄도 링컨에게 측량 일을 가르치고 돌 봐 주었다.)

그후 이러구러 링컨은 캘훈과 평생 친구로 지낸다. 캘훈은 훗날 캔저스/네브래스카 주 국유지 측량관이 됐고 지역 최초의 언론인 주간지 '시카고 민주당원'을 창간하기도 했다. 노예제 지지자였던 그는 연이은 경선 실패와 선거부정 혐의 등으로 말년을 불운하게 보냈다. 


링컨의 평생 은인/사돈 스튜어트

링컨의 학력은 매우 제한됐으나 독학으로 법률가가 됐다. 앞서 인디애나 거주 당시 인디내아 개정헌법을 빌려 읽었고, 1833년 제반 법률서류 양식을 구입해 연구한 뒤 친구나 지인들의 모기지(저당)/신탁, 기타 법률 문서 작성 제출, 사소한 소송 등을 무료 대행해 줬다.

그러다 전장에서 (훗날의 사촌처남인) 잔 타드 스튜어트(1807-1885)를 만나 본격적인 지원을 받는다. 링컨의 삶을 도운 여러 은인들이 있지만, 스튜어트는 없어선 안 됐을 가장 중요한 사람의 한 명이다. 변호사인 스튜어트는 켄터키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21세 나이로 공식 법률가가 됐고, 1832년 주의원에 당선됐다.

스튜어트는 같은 해의 블랰호크 전쟁 당시 소령으로서 링컨을 만나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없었다면 링컨은 법률가가 될 생각도, 대통령직을 향한 지름길도 쉽게 찾지 못했을 것이다. 링컨은 스튜어트의 변호사 오피스가 있는 스프링필드까지 20마일 길을 여행해 법학서적을 빌렸다.

그 보람이 있어 1836년 9월9일 법률사 라이선스를 따 냈고, 이듬해 3월 1일 일리노이 대법원으로부터 공식 변호사 자격을 받았다. 링컨은 자신의 말마따나 이제야 비로소 '물에 뜬 나뭇조각'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스튜어트는 링컨의 사돈까지 된다. 링컨의 아내 메리 타드와 스튜어트와는 서로를 가장 아끼는 사촌지간이었다. 나중, 스튜어트는 비록 대통령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발표를 반대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둘 사이의 우정은 변함 없었다.


셰익스피어 탐독

뉴세일럼 시절, 링컨의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데 일조한 한 사람이 쟄 켈소였다. 링컨은 그에게서 셰익스피어와 시인 로버트 번즈의 작품들을 익혔다. 이때부터 희곡과 연극을 즐기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문화예술적인 볼 거리, 읽을거리가 오늘날보다 훨씬 제한됐던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던 문학이기도 했다.

링컨이 마지막 순간에도 연극 관람을 즐기다 하필 연극 배우에게 암살된 것은 퍽 아이러닉하게 여겨진다. 당시 관람 중이던 희극의 타이틀이 '우리의 미국 사촌'이었는데 결국 제목이 링컨을 가리키는 격이 됐다.


앤 러틀리지와의 슬픈 사랑 이야기

링컨의 뉴세일럼 거주기간을 주름잡은 사건들 중에 앤 러틀리지와의 사랑과 '약혼'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당초엔 전설과도 같던 링컨의 이 슬픈 러브 스토리가 널리 알려진 것은 그다지 오래지 않다. 역사적 자료의 신뢰성 여부 탓이었다. 그러나 근래 많은 실제 사실들이 기록과 대조/확인되면서 다양한 전기에도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배경을 아는 것은 링컨의 삶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 일부 도움될 것으로 사료돼 다루련다.


뉴세일럼 타운에 입성한 에이브러햄 링컨은 1832-33년 사이 겨울에 4개월간 이 여관에 머물었다.

여관집 딸 러틀리지는 뉴세일럼 전체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영리하고 가장 명랑하기로 소문난 아가씨였다. 당년 19세. 링컨이 이 여성을 갓 알게 됐을 무렵, 앤은 '맼네일'(일명 '맼네이머')이란 사내와 이미 약혼한 사이였는데 상대는 영 돌아올 줄 몰랐다.

뉴세일럼의 바로 곁 타운인 피터즈버그에 거주하던 친척, 재스퍼 러틀리지(메너드 카운티 회계, 농장주)에 따르면, 사실 앤은 약혼 당시 맼네일에게 일말의 의문을 가졌다. 평소 이름과는 달리, 약혼증서엔 '맼네이머'라고 서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1834-35년에 링컨은 앤을 다시 만나러 찾아갔고, 결혼을 전제로 둘이 약혼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링컨은 26세, 앤은 22세였다.
앤의 사촌이며 링컨과 같은 침대에서 잔 적도 있는 맼그래디 러틀리지는 링컨이 변호사가 되기까지 결혼을 기다리기로 합의한 앤이 불과 1년 안에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 사랑스런 앤이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것이다. 링컨은 앤의 중환 말기에 다시 찾아와 그녀의 임종과 매장을 지켰다.

앤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팔티너 낸스와 앤에게 두 번째로 구혼했던 남성인 샘 힐 사이의 아들인 잔 힐은 이렇게 썼다:

    "그는 사랑스럽고 천사 같고, 완전한 높이의 숙녀와 우연히 만날 기회를 얻었다..둘 사이엔 이내 희열의 교감이 이뤄져 갔다. 이것은 그에겐 완전한 행복을 의미했고, 둘이 한 몸을 이룰 날까지 참기 어려운 조바심을 의미했다."

앤이 죽은 이듬 해 링컨의 법률 사무소 파트너였던 윌리엄 H. 헌던은 한 강연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링컨은 앤 러틀리지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온 혼과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했고 그녀 역시 그를 진정 사랑했다..천생연분인 거 같았다."

참고로, 헌던은 무신론자였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는 슬퍼하고 고뇌하며 언덕과 숲을 밤낮 두루 헤매고 다녔다..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아무런 기쁨도 보이질 않았다. 지칠 대로 지쳐 몸과 맘이 소잔할 때까지 그랬다. 당시 미스터 링컨은 완전히 넋이 나간 것으로 보였다고 전해진다."

앤의 죽음은 링컨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헌던은 "이 소녀의 사랑과 죽음은 링컨의 목표와 성향을 조각내어 버렸다"며 "그는 끝없는 슬픔을 정치의 장에 와일드하게 투신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앤이 살아 있었다면, 링컨은 대통령이 아닌 변호사로 만족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머니-누이-약혼녀의 삶과 죽음 선분은 링컨의 초기 삶에 굵은 획을 그어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헌던의 과장된 성향을 느껴 그의 말글의 신빙성에 의혹을 품곤 했으나, 앤의 맏오빠인 잔 M. 러틀리지는 훗날 1866년 헌던의 링컨 관련 강연에 대해 "아무 오류도 찾을 수 없었다..퍽 만족스럽다."고 뒷받침해 줬다. 

그후 링컨은 어떤 여인도 앤처럼 사랑할 수 없는 불감증에 걸린다. 결혼 전까지 다른 여성도 찾아들고 최소한 2회의 구애가 있었지만 모두 거부했다.
 
이러한 링컨에게 훗날 귀족층인 메리 타드와의 억지(?) 결혼은 난파선의 좌초 같은 사건으로 다가왔다. 헌던은 "죽음처럼 끔직하고 무덤처럼 음울한, 불타는 호된 지옥이었다"고 표현했다. 극단적인 과장은 아닌 것 같다. 
링컨의 전기작가의 한 명인 다널드 윙클러(저널리스트/사가/정치학자)는 링컨-메리 타드와의 난삽한 23년간 결혼생활은 스프링필드와 워싱턴DC의 끝없는 가십의 분수대였다고 비유했다. 


우리는 앞서 링컨의 유년/청소년기에 어머니/누나의 이른 죽음이 링컨의 삶에 큰 부정적 영향을 미쳤던 점을 기억한다. 링컨 자신 내/외적 죽음의 위기를 거치기도 했다. 앤 러틀리지의 죽음은 그런 선분의 연장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링컨에게 결혼 생활은 적어도 사랑에 있어 이미 무덤 같은 것이었다.

링컨의 '앤'은..실로 트리스탄의 이졸데, 로미오의 줄리엩, ('러브 스토리'의) 올리버의 제니퍼, 포우의 애너벨 리였다. 슬프게도 둘 다 거듭난 흔적조차 없어 둘의 사랑은 천국에서도 이뤄질 수 없었을 거 같다. 물론 천국엔 남녀 간의 사랑도 결혼도 없고 영원하고 완전한 아가페만 존재할 뿐이다.

링컨은 말년에 신앙으로 이 사랑 결핍증을 초월할 수 있었을까?
그의 신앙이 성경과 성령님에 의한 참된 것이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참고: 앤 러틀리지의 삶과 배경

앤 러틀리지는 청년기 링컨의 삶에 가장 중요한 여성이었다. 그래서 이 자료를 덧붙인다.
 

앞서 언급한 대로, 뉴세일럼 창건자인 제임즈 러틀리지의 가문은 본래 조지아 주에 살던 스코틀란드-아일랜드 계 이민자로 켄터키를 거쳐 새로 일리노이 주 화잍 카운티의 '세븐마일 프레리'로 이주해 왔다. 그들 대다수는 지성적/산업적이고 종교적이었다. 

앤은 집안 배경이 장로교였지만, 삶 주변을 볼 때 그녀에게 신앙이 있었다면 링컨과 대동소이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켄터키에서 러틀리지 가문 등을 목회했던 제임스 맼그리디 목사는 훗날 이곳 세븐마일 프레리로 이주해 이곳에다 일리노이주 최초의 장로교회를 개척했다. 건물은 통나무집 형태였다. 초대 장로들은 제임즈 러틀리지, 제임즈 메이즈, 앤의 외숙부 피터 밀러-3명이었다. 모두 친척 간이었다.

그 후 앤이 일곱 살일 때, 좀 더 큰 타운 출신의 순회목회자 형인 젊은 목회자를 모셨다. 추운 날씨엔 "목회자의 뼈를 덥혀 주고 감기를 막아 줄" 한 잔의 타디(알코올 농도가 높은 위스키/브랜디 등)를 준비해 대접하곤 했다. 한 번은 어린 앤이 사촌여동생 미너바와 몰래 이 술을 맛 봤다가 앓아 눕기도 했다. 앤은 두 번 다시는 독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엄마한테 약속했다.

이곳 최초의 학교는 1818년 앤의 숙부 토머스 러틀리지가 시작했다. 러틀리지 가문은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토머스는 매질을 교육에 적용했으나 한 소년이 언젠가는 사람이 날 수 있고 대양 너머로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자 매로 때렸다. 아이러닉하게도 소년의 '예언'은 불과 다음 세기에 비행기와 전화로 달성됐다.

앤은 1820년 입학했다. 문중 사람들 가운데도 가장 영리했던 앤은 열 살쯤엔 온갖 교양을 익힐 뿐더러, 뛰어난 의상 디자이너로 온 가족을 위한 옷을 만들어 낼 뿐더러 다른 개척시대 여성들처럼 온갖 가사 일을 돕고 동생들도 도왔다. 손위의 둘, 손 아래 넷 등 모두 7남매였다.    


당시, 러틀리지의 이웃인 테네시 출신의 윌리엄 데이비슨은 좋은 장로교인 사위를 얻기 위해 딸에게 일등 급 젖소와 깃털침대 등을 지참금으로 약속했으나 딸은 다른 교파의 목회자를 사귀었다. 지참금은 그래서 작고 야윈 송아지와 거위 알 한 바구니로 대체했다.  

그 후 가문 사람 일부는 계절병을 탈피해 북서쪽으로 160마일을 여행해 생어먼 카운티 서부로 이주한다. 한동안 남아 있던 앤의 가족은 생어먼 거주자들의 설득에 못 이겨 1826년, 랔 크맄에 도착했다. 당초 제임즈와 메리 앤 부부는 13세이던 앤을 할머니 곁에 남겨 둘까 진지하게 고려하다가 결국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만약 이때 앤이 남았다면, 링컨과의 인연도 없었을지 모른다.

랔 크맄의 지역사회엔 장로교 목사 잔 베리와 그의 동생 새뮤얼도 있었는데, 이 새뮤얼의 아들 제임즈가 앤의 맏언니 진에게 즉시 반해 2년 후 결혼했다. 베리 목사의 아들은 앤에게 빙상 스케이팅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즈음 아이들은 앤의 아버지의 제안으로 셰잌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 등 희곡 장면들을 극화하기도 했다.

러틀리지네와 사돈 집안인 캠런은 함께 1828년 스프링필드 북서쪽 20마일의 생어먼 강변에 방앗간 자리를 마련했고 사업이 성공하자, 이듬해 마을을 측량하고 건설을 해 나아가면서 '뉴세일럼'이라고 명명한다. 1830년 10월 20일엔 집안의 열째이자 앤의 막내동생인 새러가 태어났는데 이 새러는 93세의 수를 누린다.


뉴세일럼은 순식간에 발전해 수많은 상점들이 생겨났다. 29년 성탄절엔 우체국이 세워져 새뮤얼 힐이 초대국장으로 일했다. 훗날 링컨이 물려받은 자리다.

마을이 더욱 번창해지자 러틀리지는 자신의 통나무집을 개조해 여관(inn)으로 만들었다. 이름은 '러틀리지 태번'(Rutledge Tavern). 하루 숙박비가 37.5센트였다. 그즈음 시카고 인구가 150명. 시카고와 뉴세일럼 사이에 여관은 드물고 원시적이었으나 이 여관은 가히 호화급이었다.

1830년 1월 7일에 앤은 17회 생일을 맞았다. 몇몇 남자친구를 거쳤으나 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주부감이자 지성인이었던 앤이 즐겨 읽던 책은 아버지 서재의 로벝 번즈, 토머스 페인, 콘스탄틴 드 볼니 등. (링컨도 즐겨 읽은 이들은 모두 기독교적으로는 문제 작가들이었다.) 앤은 자연히 철학자들에 관한 얘기를 좋아했고 어느 교회도 마음을 정하여 다니지 않았다. 이 점에서 링컨과 실로 일맥상통했으니 서로가 기막힌 짝이었다.

당시 개척사회는 조혼이 관행이어서 소녀들은 보통 13, 14세에 짝을 찾아 15-16세엔 결혼했다. 일단 결혼하고 나면 가정 꾸리기에 바빠 공부를 계속하는 예가 드물었다. 

이즈음 멘토어(퍼스트네임이다) 그래엄 교사가 마을 남서부 반마일 지점의 침례교회당을 임차해 학교를 열었다. 6-18세 학생들 30-40명이 다녔지만 나이든 소녀들은 적었다. 학생당 월정 학비는 30-85센트. 꽤 비쌌다. 당시 계란 1더즌이 3-4센트, 옥수수 한 부쉘이 20센트, 정육된 돼지고기 100파운드가 1.25달러였다.

30세의 멋쟁이 신사였던 그래엄 교장은 주로 농산물로 학비를 받았지만, 엄격한 금주가여서 술이 들어오면 설탕/커피/옷 등과 교환했다. 그는 노예제 반대자이기도 했다. 그가 학부모들과의 약조에서 제안하는 과목은 읽기/쓰기/기하학/지리학/문법 등이었는데 다수의 부모들은 지리학/문법을 "불필요하다"고 반대하자, 그래엄은 '문법'이란 과목명을 달지 않은 채 학생 전원에게 가르쳤다. 학생들의 생각 표현에 주력한 그의 교육법은 퍽 앞서 있었다. 그 역시 엄한 매질을 했다.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4세때부터 다닌 앤은 그래엄학교의 우수생의 하나였고 과목마다 고루 성적이 우수했다. "예리한 지성인"으로 불린 앤은 맡은 임무에도 늘 충실했다. 여관 건너편 힐-맼네일 가게에서 자주 집안을 위한 장을 보곤 했다.

18세가 된 그녀의 모습은 "골짜기의 백합처럼" 동네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예쁘고 날씬했고, 크고 푸른 두 눈망울이 호수 같았으며, 입술은 잘 익은 체리 그대로였고 치열이 고왔다. 긴 곱슬머리는 약간 불그레한 금발이었다. 키는 5피트4인치, 몸무게 125파운드였다.

성격도 늘 쾌활하고 사랑스럽고 친절하고 온정이 넘친 데다 화술에 밝아 온 마을에 긍정적인 인상을 심었다. 사촌 맼그래디에 따르면, 앤은 단 한 번도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베리 목사의 아들 윌리엄 F. '빌' 베리는 앤에게 구애해온 첫 남성이었다. 함께 학교에 다니고 스케이팅을 한 사이다. 둘은 비앤 캠런의 16회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비앤의 아버지인 장로교 목사 잔 밀러 캠런은 축하만찬 후 식객들에게 성경을 한 절씩 나누게 했다. 앤은 시 24편 앞 부분을 택해 읽었다. 파티가 끝나고 귀가하는 앤을 빌이 자진해 바래다 줬다. 
그러나 빌은 위스키를 즐겨 절제를 강조하는 아버지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 역시 철저한 금주가였던 앤은 어느 저녁 자신을 불러낸 빌의 취한 모습을 보고 당일로 절교했다.

빌 다음으로 앤에게 접근해 청혼을 한 사람은 한창 번창하는 힐-맼네일의 공동업자, 새뮤얼 힐이었다. 당시 28세였던 그는 돈만 아는 동네의 인색한 '스크루지'로 소문났고, 동네 주당 내지 '술 권하는 사회'를 일궈내 주류를 짭짤하게 팔았다. 빌 같은 주객청년을 만들어내는 셈이었다. 힐은 다혈질에다 성마른 타입이었다.

그는 특히 목청이 큰 피터 카트라잍 같은 설교자를 싫어해 면전에서 면박을 주곤 했다. 감리교 순회사역자 겸 정치인이었던 카트라잍은 훗날 링컨과 한 판 경선을 벌인다.

힐의 가게는 자연히 동네 가십꾼/수다쟁이/건달들의 놀이터가 됐다. 카트라잍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나타나 일장 설교를 하면서 돈만 좋아하는 힐을 "동전을 입에 물기까지는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고 넌지시 조롱했다. 힐은 건달들을 매수해 카트라잍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맷집 좋은 카트라잍의 상대가 될 사내가 없었다. 

힐은 동네 여성들에겐 정중한 신사였다. 그래서 앤을 불러내어 교제했으나 정작 구혼했을 때 딱지를 맞았다. 앤은 그 대신 힐의 파트너였던 뉴욕 출신의 잔 맥네일을 좋아했고, 맥네일도 이내 응하게 된다.


1831년 4월 19일. 뉴세일럼 동네 사람들은 강가에서 보기 드문 광경을 지켜 봤다. 4명의 사내들이 탄 커다란 평저선이 방앗간 댐에 좌초된 모습이었다. 바로 링컨이 탄 배였다. 링컨은 6피트4의 큰 키에 비해 작은 머리통과 광대뼈가 두드러진 청년이었다. 그가 순식간에 문제 해결을 하자 동네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이 구경꾼들 가운데는 소녀 앤 러틀리지도 끼여 있었다.

그러나 링컨이 바지 가랑이를 짧게 걷고 다니는 모습은 "세상에 보기 드문 볼꼴 사나운 구경거리"였다. 그래도 세련되고 지성적인 그의 태도와 능력은 인정받았다. 당시 앤은 링컨의 외모에 아무 호감이 갖지 못했으나, 그의 탁월한 리더십엔 관심이 갔다.
 
그즈음 링컨이 새로 사귄 뉴세일럼 사람들 앞에 타래를 푼 얘기들 중 하나는 인디애나에서 있었던 대강 이런 내용의 실화(?)였다.

    한 순회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나는 그리스도라, 오늘 내가 대표할 그다"라는 말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기 시작했다. 초록색 도마뱀 한 마리가 그의 헐렁한 바짓가랑이 속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자 설교자는 한 손으로는 강조 제스처를 하면서 한 손으로는 가랑이 위를 기는 도마뱀을 막았다. 그러나 결국엔 바지단추를 풀고 한 방에 놈을 털어버리면서 태연히 설교를 계속했다. 

그러자 도마뱀이 이번엔 등 속을 타고 기어올랐다. 결국 그는 설교는 한 마디도 빼 놓지 않고 셔츠 단추를 풀고 도마뱀을 내쫓았다. 이 광경을 지켜 본 회중이 놀라서 입을 벌렸고, 한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면서 버럭 고함 질렀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면, 성경과 작별하고 말렵니다!"

링컨에겐 결국 교회와 설교자가 모두 풍자감이었다. 링컨은 동네 사람들과 곧잘 어울렸으나 술자리는 극력 피했고 담배도 전혀 피우지 않았다. 링컨이 가끔 술을 마시긴 했으나 그의 절제력을 위협했다.

링컨은 오펕이 연 가게와 캠런-러틀리지에서 임차한 방앗간을 오가며 곡식 관련 일거리를 성실히 했다. 링컨은 캠런 일가와 식사를 나누면서 주당 1달러씩 지불했다. 캠런네는 8공주와 1 아들 등 9남매를 두었기에 링컨과 어울렸으나, 성숙한 몇몇은 그를 무시하거나 놀려댔다. 유머를 즐기는 링컨도 질 세라 그들을 갖고 적당히 화술로 장난질을 쳐 댔다. 

이런 티격태격도 있었다.
캠런 집안의 맏딸 벹지는 폴란드 왕가 혈통인 엄마를 닮아 귀족적인 예의범절을 갖춘 짙은 머릿빛의 18살 미인이었다. 링컨은 그녀를 '이사벨라 여왕'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링컨에게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고 사전 경고해 두었다.

링컨이 찾아온 한 날, 평소 벹지에게 구애를 해온 빌리 그린이 집 입구로 다가오는 것을 봤다. 벹지는 '빤질이' 그린을 싫어 했다. 링컨은 "니가 좋아하는 남친이 오고 있어"라고 능청을 떨었지만 곧 알아챈 벹지는 '빤질이'를 피해 방 한 구석 흔들의자 속에 몸을 파묻었다.

우연인지, 벹지의 진짜 애인인 백스터 베리도 다가와 문을 두드린 순간, 링컨은 그린을 짐짓 벹지의 무릎 위로 밀쳤고, 그린은 베리가 들어오는 순간 벹지에게 키스하려 했다. 벹지는 그러나 그의 머리통에다 잽싸게 어퍼컷을 한 방 먹여 의자 아래 쓰러뜨린 뒤, 일어나서 링컨의 뺨을 후려갈겼다. 링컨은 뺨을 쓸며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러자 베리는 벹지의 팔을 붙잡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1년 뒤 벹지는 베리랑 결혼했는데 링컨이 들러리의 하나로 섰다.

하루에 두 차례 식사 후엔 가장인 캠런이 경건회를 이끌었다.
딸들 몇이 시편이나 서신서에서 읽고 나면, 15-20여분 길이의 기도를 했다. 이런 집안 의식을 몰랐던 링컨은 첫날 밥을 먹고는 벽난로 곁에 다리를 뻗은 채 쉬려 했다. 캠런은 재빨리 그에게 무릎 꿇고 참여하길 권했고, 링컨은 사과한 뒤 그 자세를 취했지만, 캠런이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비앤에게서 방석을 가로채 무릎 아래 깔았다가 기도가 끝나면 다시 내밀었다. 맨날 그랬다.

링컨에겐 유머러스하고도 정확한 화술이 곧 상술이었다.
한 번은 농부 고객에게 개가죽 장갑을 권했다. 상대방이 "난 개가죽 장갑이란 걸 들어본 일이 없어"라고 퉁명스레 답하자 "이 장갑을 좀 알고나 그러세요?"라고 묻고 재빨리 말을 이어 나갔다.

  "자, 이게 어떻게 돼 나온 물건인지 유래를 말씀드리지요. 잭 클래리네 개가 탐 왓킨즈네 양을 물어 죽였답니다. 그러자 왓킨즈네 집 아이가 그 개를 죽여 버렸고, 잔 마운트씨가 그 개가죽을 무두질을 하자, 그 가죽으로 샐리 스피어즈가 장갑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농부는 두 말 않고 75센트에 그 장갑을 샀다.
한 번은 정가보다 6센트 1/4센트를 더 받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6마일 길을 걸어 고객에게 되돌려 줬다. 링컨은 이 일로 뉴세일럼에서 '정직한 에이브'로 소문났다.


링컨은 동네 숙녀들에게 각별히 정중한 데다 정의파였다.
찰리 리비스라는 사나이가 여성 고객들 곁에서 욕질을 해 대자, 링컨은 "우리 가게 숙녀 고객들 앞에서 그런 폭언은 묵과할 수 없다"며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리비스가 계속 욕질을 하자, "댁의 폭언을 여러 번 경고했지만 막무가내군요. 자, 두 번 다시 잊지 않게 본때를 보여 드려야겠네요." 하고는 팔을 잡고 바깥으로 나가서 길거리 쐐기풀 위에 던져 눕히고 가슴 위에다 발을 얹었다.

그리고는 따끔거리는 쐐기풀을 한 줌 뜯어다 리비스의 얼굴과 입, 눈 등을 부벼대자 리비스는 두 번 다시는 행패를 부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링컨은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욕질을 완전히 끊으라고 촉구했고 리비스는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링컨은 온정도 많았다.
동네 과부집 앞에서는 으레 멈추고 혹시 땔 장작을 패 드릴까고 묻고 필요시 무료로 해 주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맨발로 장작을 패는 소년을 발견하고 얼마 받느냐고 묻자, "1달러를 받아 구두 한 켤레를 살 거다"는 답을 듣고는 집안에 들여 보내 몸을 덥히게 한 동안 대신 장작을 패 주었다.

여행자의 마차가 진흙탕에 처박힐 때 가장 먼저 돕는 사람도 으레 링컨이었다. 한 상인은 "남 돕는 일은 뭐든 에이브가 해 내지요"라고 칭찬했다. 마을학교의 그래엄 교장도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귐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즐기던 독서를 멈추고 아이들과 구슬놀이를 해 줄 정도로 마음이 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