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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기타

존 스토트의 지옥관



존 스토트의 지옥관




일러두는 말


스토트에 관한 일반 정보의 다량은 위키피디어 내용을 빌렸다. 스토트의 지옥관은 J.I. 패커의 비평을 상당량 간추려 옮기면서, 버질 바두다의 견해도 참고했다. 패커나 바두다도 우리의 검증 대상인 요주의 인물이긴 하나, 스토트의 지옥관에 대해선 거의 정반대 입장이었다. 캐나다 출신의 언론인인 패커는 특히 같은 영국계 영어권의 스토트와 '친구' 사이였으나,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 참고: 본문에서 두문자로 생략된 외래어 서명/인명을 구체적으로 알기 원하는 독자는 비밀댓글로 연락처를 제공하기 바란다.]



스토트에 대한 세상/교계의 평가


고(故) 존 스토트(John Stott, 본명: 존 로버트 웜슬리 스토트, 1921-2011, CBE: 대영국 4등 훈위 지도자).


영국의 세계적인 교계 명사로 중도적 에큐메니즘 지도자였고, 국교회(=성공회) 사제로 만영혼성당(ASC) 사목자를 지낸 그는 세계 크리스천들에게 '복음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복음주의'란 국교회 테두리 안에서의 복음주의여서 한계가 또렷했고, 복음주의의 미명 아래 특이한 교설들을 주장해온 사람들이 하도 많기에, 스토트의 입장도 그냥 명목만 그런지 따져 봐야 옳다. 

빌리 그래엄과 함께 1974년 '로잔언약'(LC) 작성을 주도한 스토트는 또 그래엄의 언론으로 알려진 크리스채너티투데이 논설위원으로도 일했다. 따라서 그래엄과 별 다름없는, 이른 바 신복음주의자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타임' 매거진은 스토트를 세계최다 영향력 인사 100명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일루미나티의 주구인 주요 언론의 조명을 받는 최상급 명사임을 시사해 준다. 영국 BBC방송은 그를 "복잡한 신학을 평신도들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었던 인물"로 꼽았지만, 어디까지나 세속언론의 평가이다. 

거의 만 2년 전인 2011년 8월 초 스토트가 죽었을 때, 빌리 그래엄은 "복음주의 세계는 가장 위대한 대변인 한 분을 잃었고, 난 나의 가장 친근한 친구이자 조언자 한 명을 잃었다. 나는 천국에 갈 때 그를 다시 볼 것을 기대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복음주의권의 가장 위대한 대변인의 한 명..? 생각하기 나름일 것이다. 로원 윌리엄 캔터베리 대주교는 스토트가 "그의 굳건한 복음주의 신앙을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고 상찬했다는데 글쎄다..과연 그의 '복음주의' 신앙이 뭔지, 성경과 같은 지 다른 지를 독자들을 이 글을 통해 대강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크로마티(윤리공중정책센터 소장)는 "만약 복음주의자들이 교황을 뽑는다면, 아마도 스토트가 뽑힐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토트의 50여권 저서와 글 가운데 일부는 중국어/한국어/스페인어로만 되어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가장 명저로 꼽히는 책은 '기초적(Basic) 기독교'. 그가 지대한 영향을 받은 C.S. 루이스의 '단순(Mere) 기독교'를 연상시킨다. 그는 또 2008년 알렠 모타이어와 함께 '복음주의 국교회 영아세례 교리'를 써 낸 바 있다. (영아세례교리는 본래 성경이 아닌 카톨맄교에서 나온 것이다.) 



로이드 존스와의 불편한 관계


1966년 스토트가 의장으로 주재한 전국복음주의회외(NAE)는 영국 복음주의연맹(EA)이 주관한 모임으로, 마틴 로이드-존스가 예기치 않게 초청을 받아 향후는 더 '교파혼합'이 아닌, '복음주의자'들로 통합하는 데 앞장서야 했다. NAE는 참 기독교적 친교는 속죄/대속이나 성경의 영감 같은 핵심 토픽에 관한 복음주의적 견해가 요구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모임이었다. 당시 로이드-존스는 자유교회(FC)측, 스토트는 복음주의 국교도들의 주도 인사였다. 그러나 모임 당시 저녁집회 때 스토트는 연사가 아니었는데도 의장 직권을 남용, 로이드-존스의 견해는 "역사와 성경을 거스른다"고 공박했다. 

결국 이듬해인 키일(Keele)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전국복음주의국교도회의(NEAC)가 결성되어, (로이드-존스가 제안했던) 분리주의 어프로치를 거부하고 그냥 국교회에 전폭 참여키로 결의했다. 두 단체의 상반되는 입장은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영국 왕실과의 관계


스토트는 1959년 엘리저벹2세 여왕의 궁목(궁정 채플린)으로 임명된 바 있고, 1991년 국교회 사제직을 은퇴한 뒤 재차 특별(엑스트라)궁목으로 임명됐다. 그후 2006년 신년 영예 수여식에서 '대영제국 4등훈위 지도자'(CBE)로 선임됐다. 즉 세상 시스템에 깊이 개입되어 세속과 짝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카톨맄 사제들처럼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조류관찰을 평생 휴식 때의 취미로 삼기도 했다. 



스토트의 지옥관


자신의 절친 그래엄과 마찬가지로, 스토트의 지옥관은 비성경적이다. (참고: 그래엄의 지옥관은 스토트와는 좀 다르다. 그래엄은 지옥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단절로만 정의한다. 물론 일부 옳은 개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추상적이고 비성경적이다.)


스토트는 소위 '영혼절멸설'(絶滅設, annihilationism)을 믿었다(참고: http://en.wikipedia.org/wiki/Annihilationism ). 영혼의 절멸설 또는 멸절론이란, 라틴어 '니힐로(nihilo=無)'가 시사하듯 믿지 않는 영혼은 최종적으로 영원히 끊겨 아주 사라진다는 주장이다. 이 개념에서 지옥은 존재를 없애는 소각로(燒却爐) 구실을 한다. 반면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지옥관은 의식적(意識的) 영고(永苦: 영원한 고통)를 겪는 곳이라는 견해다. 스토트는 자신의 지옥관을 교리화하려고 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합법적 복음주의 견해'로 받아들여지길 희구했다. "악인들의 궁극 멸절은 악인들의 의식적 영고를 대체할 적어도 하나의 합법적이고 성경적 바탕이 있는 대체안으로 받아져야 한다"고 그는 제언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지옥관은 비성경적이다. 


스토트는 말한다:


"정서적으로, 나는 그 [의식적 영고] 개념을 견딜 수 없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마비시키거나 중압감에 짓눌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개념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지 의아스럽다..."

 

이것은 영혼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비신자의 경우 영원한 불못에서 영고를 겪는다고 확언한 성경 말씀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분명히 영혼의 불멸과 지옥 불못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토트는 매거진('Essentials') 기사에서 잠시 이 주장을 폈다가 훗날 데이비드 에드워즈와 공저를 한, '복음주의 필수: 진보주의-복음주의 대화'(인터바시티, 1988)에서는 본격적으로 펼쳤다. 


[여기서 잠깐 스토트의 에큐메니즘적 편력 일부를 엿보면, 그가 제2차 전국복음주의국교도의회(NEAC 1977년 4월) 의장일 당시 발표된 노팅엄 성명서가 "우리 자신들과 로마 카톨맄들을 동료 크리스천들로 보면서 이 사실을 부인해온 듯한 태도를 우리는 회개한다"라고 하여, 일찍이 친 구교적 에큐메니즘을 드러냈다.] 



1980년대의 절멸설


복음주의권에서는 1987년 클라크 피노크가 2쪽 짜리 기사, '불 그리고 아무 것도 없음(FTN)'에서 악인 영혼절멸설을 제기했고, 이어서 기독교회(CoC)의 평교인인 에드워드 윌리엄 퍼지(EWF)가 1982년 '소멸하는 불(FTC)'을 써냈는데, 전자의 500쪽 짜리 해설서와도 같았다. 이어서 1988년 국교회 복음주의 진영의 존 스토트가 같은 견해의 2쪽 짜리 글을 낸 데 이어  필맆 에지컴 휴즈(PEH)가 '참 이미지(TTI)'에다 10쪽 짜리를 써 냈다.   


1989년 일리노이 디어필드의 성삼위복음주의신학교(TEDS)에서 열린 복음주의필수(EE) 모임엔 J.I. 패커 등 350명의 지도자가 모였는데, 영혼절멸설을 놓고 양분되었으나 기록상으로 절멸설에 대한 공식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존 화이트 당시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 회장의 촉탁을 받은 좐 걸스너(JG)가 스토트/휴즈/퍼지에 대한 반론인 '회개하든가 망하든가'(ROP, 1990)라는 논설을 썼으며, 1992년 제4차 에든버러 기독교리 컨퍼런스(ECCD)에서 관련 논설들이 낭독된 뒤 '보편구원론과 지옥교리(U&DoH)'라는 제목으로 발행됐다. 내용엔 존 W. 웬햄의 '조건부 불멸설의 건'(tCfCI), 켄덜 하먼(KSH)의 '조건부설에 대한 반론건-에드워드 윌리엄 퍼지에 대한 반응(ACARtEWF)'  

그러자 지옥교리에 대한 책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쏟아져나왔다. 아지트 페르난도의 '지옥에 관한 중대 질문들'(CQaH, 1991), 에릴 데이비스의 '분노하시는 하나님?'(aAG 91), 래리 딕슨의 '굳뉴스의 이면(異面 tOSoGN, 92)', 윌리엄 크로킽, 존 월부어드, 재커리 헤이즈 (+클라크 피놐) 공저 '지옥에 관한 네 가지 견해'(FVoH 92), 데이비드 포슨(DP)의 '지옥으로의 길(tRtH 92)', 존 블랜처드(JB)의 '지옥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WHtH, 93), 데이비드 조지 무어의 '지옥전쟁-복음주의권의 점증하는 절멸설에 대한 조사평가'(95), 롸벑 피터슨의 '심판대에 선 지옥-영원형벌건(95)' 등이 그것이다. 이상의 책들은 모두 절멸설에 대한 반론이다. 


패커는 절멸설 담론이 신학적/목회학적 의미성도 포함하지만, "근본적으로 해석학적인 주제"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 때 '축출'(저주)된 사람들이 영벌에 처해진다"(마태복음서 25'46)고 하신 말씀이 1) 끝없는 형고(刑苦: 형벌로서의 고통)를 가리키심인지, 아니면 2) 의식적 존재의 최종적인 종식을 가리킴인지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후자 견해를 지닌 복음주의자들은 '예호봐(여호와)의증인들', 제7일재림안식일교와 일부 진보주의자들과 나란히 서게 된 셈이다. 


일각에서는 악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심판 때 선고를 받은 즉시 숨이 끊어져 부활 전 중간상태에서 (라자루스와 반대되는) 부자와 같은 형고를 받는다고 주장하며, 일부는 예수님 앞에서 축출된 사람은 개별적 공과(功過)에 따라 강도와 길이가 다른 형고에 처해진 뒤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절멸설자들은 응용인류학에 바탕을 두고, 끝없는 실존은 누구에게도 자연스럽지 않다며 오히려, 몸을 통해 살아가는 개인자아 곧 정신신체적 유닡으로 창조된 우리가 신체와 분리될 때 의식이 중단돼야 한다면서, 우리의 첫 탈육(脫肉) 곧 죽음 후에 중간상태가 없이 부활의 날에 다시 몸을 입기까지 무의식상태로 있다가 부활 후 악인들은 크리스토님으로부터 축출되어 최종적으로 종식(둘째 죽음)되어, 악인들의 부활체가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위의 모든 응용인류학적 견해는 '조건부 불멸설'(CI)이라고 불린다. 간추리면 영혼멸절은 인류 모두에게 해당되지만, 예수 크리스토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조건에 따라 계속 존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비성경적인 발상이다. 


앞서 비친대로 본래 이것은 19세기의 견해였다. 당시는 과거의 것에 대한 대담한 도전의 시기였다. 그래서 기존 지옥관에 대해서도 실용주의적/과정주의적 질문과 학설이 불거졌다. 응보의 원리만으로는 끝없는 형벌은 둘째치고, 그냥 형벌조차도 충분히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후영고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은 참 신이 아니시므로 전통적 영고교리는 내버려야 하며 해당 성경본문에 대한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는 식이 되어갔다. 


그래서 지옥교리 수정론자들은 오리게네스(오리겐)의 방식을 따라 두 가지 설명을 일궈냈다. 하나는 보편주의(보편구원설)로, 모든 인류가 최종적으로 모두 천국에 가 있게 되지만, 비신자는 거기 가기 위해 고통스런 경험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혼멸절설로, 결국 인류를 천국에 가게 되지만 비신자들은 소멸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복음주의 절멸설은 19세기 멸절론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  


전문 문헌학자였지만 '별난 취향의 초심가'였던 버질 앹킨슨은 절멸설에 있어 웬햄과 스토트의 멘토 격인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어 형용사 '아이노오스'가 행위명사와 함께 쓰일 때, 그 행동의 과정이 아닌 결과에 관계된다. 따라서 '영원한 형벌'이라는 문구는 '영원한 구속' 및 '영원한 구원'에 견줘 질 수 있다...잃어진 영혼은 영원한 형벌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 한 번 형벌을 받고 영원한 결과에 처해질 뿐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법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형벌이 지속적이기보다 일시적이어야 한다는 법이 없지 않냐는 의문을 계속 불러 일으킨다. 


다음으로, 영혼의 본질적인 불멸성 개념은 2세기 해석학에 침투된 플라톤주의이므로, 비신자들의 운명으로서의 죽음/멸망, 불과 어둠 등의 이미저리는 단지 그들의 존재의 종식을 가리킨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유다서 6절, 마태복음 8'12; 22'13; 25'30 등의 '어둠'은 존재의 종식을 가리키지 않는다. 슬피 울고 이를 갊은 어둠 속으로 내쫓겨 존재하는 상태이다. 

성경 그 어디에도 죽음이 소멸/멸종/종식을 가리킨다는 말씀이 없다. 신체적 죽음은 쉐올/하데스 곧 또 다른 존재로의 별리(別離)이고, 은유적 죽음은 하나님이 없는 또는 은총에서 벗어난 존립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2'11; 20'14; 21'8 등도 존재의 종식을 의미/포함하지 않는다. 


루카복음서(눅) 16'22-24에서도, 불은 고통 속에 지속되는 존재를 의미하며, 요계 14'10; 19'20; 20;10 마태 13'42,50도 이를 뒷받침한다. 


사도 파울도 테살로니카B(살후) 1'9에서 영원한(아이오노스) 멸망의 형벌은 주님의 존재로부터의 고립/닫힘이라는 개념을 덧붙였다. 즉 배제됨이지, 멸절/종식/소멸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대상만이 배제될 수 있다. 그리스어에서 멸망을 가리키는 어휘들(명사 올레트로스, 동사 아폴루미)의 자연스런 의미는 불능적 파멸이지, 아예 형태와 잔재가 사라지는 멸절이 아니다. 


절멸론자들은 또 그런 지속적 고통은 잃어진 영혼들의 영멸에 앞서 '일시적 경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애당초 영원한 잃어짐 자체가 멸절을 의미한다고 한 주장과 모순된다. 


스토트는 이렇게 말한다:


"불 자체는 '영원'하며 '꺼지지 않는다'고 묘사됐는데, 그 속에 던져지는 대상물이 파괴되지 않는다면 상식밖이다. 우리의 전망은 그 반대다. 그것(대상물: 필자주)은 영원히 소멸되지, 영원히 고통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히 올라가는 것은 연기(불이 할 일을 다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피터슨의 지적과 같이, 불이 할 일을 다했다면, 연기는 사라진다! 절멸설은 언어학적으로도 입증이 되지 않는다. 


세 번째로, 잃어진 영혼들에 대한 끝없는 응보적 형벌은 사랑의 하나님께 불균형/부조화스럽고 따라서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스토트는 말한다: "'의식적 영고'가 신적 정의(正義)의 성경적인 계시로서 적합한지 여부는 아마도 잃어진 영혼들의 불참회(不懺回)도 영속적인가(에 달렸을 것이다: 필자주).."


이에 대하여 패커는 말한다:


"그러나 만약 잃어진 영혼들이 계속 고통을 겪게 하심이 하나님의 정의가 필히 요구하는 사항이 아니기에(?) 그분으로서 불필요한 잔혹행위라면, 여하한 사후 고통이라도 겪게 하신다는 절멸론자들의 주장은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어차피 정의가 절멸을 요하는 것이라면, 왜 죽을 때의 멸절로써 만족되지 않는 것인가? 

이 경우 절멸론자들은 신자들의 부활과 함께 비신자들의 최후부활과 심판 후-그리고 '멸절' 전-의 고통에 대한 성경의 기대를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정의가 멸절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이것(위의 '만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형벌은 불필요한 잔혹이 되며, 하나님은, 그들이 비난을 면케, 무죄하시게 해 드리고 기독교 주류계를 단죄하려던, 바로 그 혐의를 뒤집어쓰시게 된다. 한편 하나님의 정의가 멸절에 이어 모종의 형벌을 요하고, 하나님을 향한 비신자들의 적대, 반항과 불참회가 사후에 지속된다면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충분한 형벌이 부과되어 이젠 더 합당하지 않다든가 부당하다든가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패커는 이러한 셋째 견해가 절멸론자들을 불가피한 딜레머에 빠뜨리는 '부메랑'이라고 묘사했는데, 걸맞은 표현이다. 


네 번째 견해는, 딴 영혼들이 응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하늘에서 성도들의 기쁨이 감소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런 발상은 마치 응보를 통한 하나님의 거룩의 표현이 적대자보다 하나님께 더 상처를 입힌다는 주장과도 같다. 

더욱이 천국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같은 속성을 갖기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을 기뻐하게 되며, 그분의 정의를 함께 만족스러워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기쁨이 손상되리라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다. 


롸벑 A. 피터슨이 절멸론을 뒷받침하는 최고의 도서로 꼽은 책들 가운데 3권-해럴드 길레보드의 '의로운 심판관'(1964), 버질 앹킨슨의 '삶과 불멸'(1968), 에드워드 윌리엄 퍼지의 '소멸하는 불'-등은 복음주의 주류 출판사들에게 거부당했다. 


절멸론자들중 마이클 그린은 지옥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야만'으로 , J.W. 웬햄은 '새디즘'으로, 클라크 피놐은 '무자비'와 '앙심' 등으로 각각 표현했다. 이것은 절멸론자들이 인본주의적 표현으로써 하나님을 사실상 모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끽연가인 데다 계시록 성취완료설을 믿는 완료주의자인 버질 바두다는 일부 지옥론자들은 비신자들의 정서를 고려/감안하지 않는 '냉담한' 입장인 반면, 절멸설자들은 주로 감정에 호소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나님은 혐오의 신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또 악인의 괴로움을 즐기시는 '새디스팈'한 신이 아니시지만, 죄와 악을 징벌하셔야 하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스토트는 문제의 책 수많은 쪽에 걸쳐 신약 성경의 해당 그리스어 낱말이 악인들의 멸절을 '시사'(indicate)한다고 주장한다. 해당 언어들은 '파멸/멸망/파괴' 또는 기타 유사한 개념을 뜻하므로 악인들의 존재의 멸절과 종식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런 스토트의 논리를 바두다는 "순전히 연역적이며, 따라서 건실하지가 않다"고 비판했다. 


바두다는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독일군은 세계2차대전에서 망했고 전쟁 끝에 파멸됐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말은 전쟁 끝에 독일 군대의 존재가 중단됐다는 것이 아니라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끝내 해산됐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군인들은 여전히 있지만, 패하고 무장해제 되어 방어력이 없으며 연합군에게 전적으로 항복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스토트는 "영혼의 불멸성 곧 비파멸성은 그리스적 개념이지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티모테A서(딤전) 6'16은 오직 하나님만이 불멸의 존재이심을 입증해 준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스토트가 오해한 해당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이 불멸성을 주실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앞의 12절을 보면 파울은 티모테에게 영생을 취하라고, 13절에서는 하나님이 만물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16절에서는 하나님은 불멸성을 지니고 계시면서 이 속성을 "그것을 취하는 사람들"(12절)에게 거저 주신다고 가르쳤다. 스토트는 자신이 혼동한 것을 독자들에게도 나눠주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인간영혼의 불멸성이 그리스적 개념이라는 그의 주장 역시 오류이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이 마련하신 처소에 갈 영혼들 모두가 불멸이 아닌 필사인데도 영원한 곳에 가 있다는 정면 모순된 말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 밖에서 만물은 살아있지 못하니 죽은 것이다. 


바두다는 "그럼 불못에 던져지지 않은 영혼들은 언제 죽느냐?"고 묻는다. 스토트의 논리에 따라 영혼이 불멸이 아니라면 필사라는 이야기이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뜻이 된다. 신자 영혼들과 악인의 영혼들이 다 심판 받기 전에 동일한 상태라면, 그래서 악인의 영혼들을 멸망시킬 불못이 필요하다면, 신자들의 영혼이 불멸성 또는 죽음을 얻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계시록 어디에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 영혼의 불멸성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시사된 부분이 없다. 

그들은 이미 불멸성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불못과는 반대되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지낼 것이다. 


계시록 전반에 걸쳐 분명 물리물질계와도 같은 상징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 상징들을 통해 신자는 하나님이 전달하시려는 메시지의 컨텍스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영혼절멸설은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악인들을 멸망/멸절시키고 의인들만 불멸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고 주장한다. 안식일교의 경우 멸절하기까지만 불못에 있게 된다고 주장하나 이 역시 비성경적이다. 지옥은 영원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호봐(여호와)의증인들은 지옥을 "이교적 교리"라고 주장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지옥교리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교도이셨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영혼절멸은 또 '조건부 불멸' 교리와 관계된다. 즉 인간 영혼은 영생이 주어지기 전에는 불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절멸설은 기독교 역사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1800년 이래 지옥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서 심지어 보수주의자들 가운데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20세기초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버질 앹킨슨 등이 이를 지지했고 20세기엔 찰스 고어, 윌리엄 템플(제98대 캔터베리 대주교), 올리버 체이스 큌(캔터베리 대주교의 채플린), 울리히 언스트 사이먼, G.B. 케어드 등 영국 학자들이 이에 천착했다. 그러던 80년대에 와서 존 스토트를 포함한 유명 신학자들에 의하여 재흥했다.  


영국 국교회 교리위원회조차도 1995년, "지옥은 영고가 아닌 무존재이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밖에도 일부 신교 또는 성공회 필자들이 영혼멸절설을 주장했다. 



역사적 흐름 


영혼절멸설은 후초기교회 저작물들, 지옥교리에 대한 역사적 비판물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 교리들은 한결같이 사랑의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을 괴롭히실 리가 없다는 발상에서다. 이들은 지옥교리가 유다(유대)의 중간기(즉 구약과 신약 사이에 계시가 끊겼던 기간)에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 중세의 상상과 그림/시 등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영혼절멸설 주장자들은 주로 악인들의 "몸과 혼"을 함께 멸하신다(마태복음서 10'28), 영혼과 죄가 함께 멸하리라(에제키엘=에스겔 18'4)는 말씀 등을 인용한다. 

신약에서는 "우리의 친구 라자루스가 잠을 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요한복음서 11'11)과 "우리는 잠자는 사람들을 앞서지 못하리"(테살로니카A서 4'15)라는 성구 등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래서 인간은 불멸이 아닌 필사의 존재로, 몸이 죽을 때 영혼은 시간경과 개념이 없는 휴면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크리스토(그리스도)님 안에 죽은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코린토A서=고전 15장 참조). 


일부 현대학자들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는 영원한 영혼의 개념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내세는 단지 쉐올(한글성경 '스올')일 뿐, '음부' 곧 그리스어하데스(Hades)와 비슷한 무존재의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반면 영혼절멸설을 부인하고 전통적 지옥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신약에서 특히 라자루스와 부자의 이야기를 기초로 삼는다. 예수님 당대에 유대인들은 대체로 죽은 사람의 미래부활을 믿었다. 


이런 성경구절에 대하여 일부 절멸론자들은 단지 멸절될 자들이 일시 고통을 당할 것을 가리킨다고 에둘러 말한다.    


주님의 라자루스와 부자의 이야기중, 부자는 음부('하데스')의 불못 속에서 고통을 겪다가 아브라함 및 라자루스를 볼 수 있었고, 아브라함과 대화까지 나누었다. 일부 학자들은 부자가 "눈을 들었다"는 부분을 하데스에서 이미 '부활'했지만 불못을 직면하게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조금씩 왜곡시킨 시각과 주장들이다. 성경은 분명 부자가 불못 속에서 고통했기에 한 방울의 물이라도 갈망했던 것이며, 아브라함과 라자루스가 있는 낙원과 그가 있는 어둠의 심연 사이에는 깊은 구릉이 있다고 표현되었다. 



조건부 불멸 교리의 성향은 2세기 안티옼의 이그나티우스, 순교자 유스티누스, 이레니우스 등의 저작물에서 이미 나타난다.  그러나 아르노비우스는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영혼절멸설을 변증하고 나선 사람이다.   


개혁가들의 입장은 다소간 다르고, 루터는 '영혼의 잠', 칼뱅은 불멸의 영혼의 지속적 의식상태인데, 영국 국교회도 대체로 칼뱅 쪽으로 기울어져 왔지만, 크리스토님의 재림 후 심판의 날 이후의 악인들의 영혼멸절 교리는 국교회 일각에서 꾸준히 대물림해 왔다. 


1945년 캔터베리 대주교의 전도위원회 보고서 '영국의 개종을 향하여'는 "심판은 선으로부터 악의 궁극적인 분리로,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거스르는 모든 것들의 결과적 파멸"이라고 한 부분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안식일교와 영혼절멸


영혼절멸설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계 교파로는 정통계열 교회로부터 이단시돼온 안식일교 계열이 있다. 안식일교의 전신 격인 19세기 중엽의 윌리엄 밀러 파와 재림교 운동이었다. 그밖에도 제7일 안식일교, 바이블 스튜던트, 크리스타델피아교 등이 이에 속한다. 


19세기 중엽의 윌리엄 밀러 파의 영향을 받은 재림교/안식일교 계열인 제7일안식일교, 제7일하나님의교회, 세일렘 컨퍼런스, 바이블 스튜던츠, 예호봐의증인들(JW), 크리스타델피언, 세계하나님의교회의 허버트 암스트롱 추종자들 등은 모두 영혼멸절을 주장한다 .


이러한 밀러 파의 영혼절멸설은 조지 스토어스(GS)에게서 왔다. 감리교 사역자로 노예폐지주의자였던 그는 1837년 헨리 그루의 책자에서 이 설을 읽고 감화를 받아, 1841, 42년에 조건부설과 멸절을 지지하는 책자를 발행했다. 결국 그는 밀러 파가 되어 '바이블 이그재미너'라는 신문을 통해 이 견해를 보급했지만 지도자 대다수는 반발했고, 찰시 피취는 조건부설을 받아들였다.  


1844년 밀러의 예수 재림 예언이 빗나간 '대환멸' 사건 이듬해 만난 교도들은 조건부설 및 절멸설을 놓고  견해가 엇갈려 주도세력은 영혼불멸설을 채택, 미국복음주의재림교(AEAC)를 결성했다. 나머지는 조건부설을 채택, 재림기독교회(ACC)를 이뤘다. 스토어스는 악인들이 결코 부활할 수 없다고 믿었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어드벤트유니언(AU)을 결성했다(1863년).


토요안식일을 지키는 제7일 재림안식일교(SDA)는 밀러 파의 소수를 차지했으나 현재는 최대 안식일교파가 됐다. 엘렌 G. 화이트 여인은 1843년 불멸설을 거부했다. SDA의 영혼절멸설은 1850년대 중엽 확고히 자리잡았다. 

조건부설과 영혼절멸설이 더 넓게 기독교계에 영향을 미친 것은 리 로이 프룸이 역사 속의 해당 설을 총망라한 '우리 선조들의 조건부 신앙'(CFOA, 2권)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피노크는 이 책을 "조건부설의 고전적 방어"라고 호평했다. '안식일에서 주일로'를 쓴 사무엘 배키오키조차도 절멸설을 지지했다. 

SDA의 입장은 지금도 악인들은 지옥에서 형벌 받다가 영원히 '멸절'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대로, 스토트의 지옥관인 '영혼절멸론'은 제7일재림안식일교의 입장과도 같으며, 비성경적이다. 그가 뒷받침으로 내세운 성구들도 모두 잘못 적용되었다. 만 2년 전 죽은 그가 혹여라도 영원히 행복한 처소에 가지 못했다(?)면, 그는 절멸론이 현실이 아님을 느낄 터이다.    


모든 독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의 지옥을 면하고 궁극적으로 천국에 가기 위해 성경 말씀대로 살기를 희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