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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기타

야곱의 돌기둥은 우상?




야곱의 돌기둥은 우상?

-이영재님의 지론을 반박함



김삼



최근 독자의 귀띔으로 희한한 글 한 편을 읽었다. 야곱(이하 야콥)이 하룻밤 베개를 했다가 세운 벹엘(한글성경: 벧엘)의 돌기둥은 '우상'이라는 주장이었다. 우상이라.. 과연 그럴까? 


이런 주장은 성서학자인 이영재 박사의 '주석'(헐...)이라는 것에서 나왔는데, 전주 H모 교회 목사인 그는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 대학에서 히브리어성서학을 전공했고(Ph.D.), 현재 J성경학당 원장이면서 H신대학교와 J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한다. 저서로는 『광야에서 I, II』(2008); 『토라로 세상읽기』(2008) 등이 있다. 참고로 H신대는 한국교회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중 하나이다. 아울러 그의 이 글을 실린 뉴스앤조이는 비록 이단비평 등 일부 긍정적인 면모가 없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런 글들을 별 검증 없이 '승인'하여 실릴 정도로 아방가르드적 티를 내는 교계 언론의 하나이다.  


너무나 아전인수격인 이런 주장이 필자의 귀에는 아연실색할 수준의 "뚱딴지같이" 들린다. 성서학당 원장이 자신의 '주석'이라는 데서 이런 황당한 주장을 펼치다니, 그 제자들과 후학들을 통하여 미래의 한국교회가 어떻게 될지 참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이영재님의 일차적 문제는 너무나 단정적이라는 것. "야곱의 돌베개는 우상이다"라는 소제목부터가 그렇다. 단지 돌기둥이 우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실마리 하나만으로 [벹엘 돌기둥=우상]으로 찍어 단언하고 있다. 마른 하늘 날벼락 같은 효과를 노린 것일까? 

이 박사는 돌기둥의 히브리어 '마체바'가 흔히 '주상(柱像=기둥우상)'으로 번역된다며, 토라(모쉐5경)는 카나안의 모든 주상을 타파하라고 명하는데, 야콥은 카나안 풍습을 따라 벹엘에 '주상을 세운 셈'이라면서 그 행위는 정당한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여지없이 억지스럽다. 토라의 율법이 야콥보다 수 백 년 후에 생긴 것은 둘째치고, 단지 '마체바'가 주상으로 흔히 번역된다고 해서, 곧 야콥의 돌기둥이 우상으로 둔갑되는가??  

 


본문을 원문 중심으로 살펴 보면, 분명히 야콥은 그곳에 널린 돌들 중 하나를 '취(取)하여다가'(וַיִּקַּח֙/봐이카=와이카) 즉 "가져다가"라는 동작을 했다. 단순히 여러 돌들 가운데 적당한 하나를 골라 베갯감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영재님은 굳이 야콥이 이 돌을 베개 삼지 않고 '머리맡'에 두었다고 고집한다. 그럴 근거는 이 박사 자신이 몸소 돌을 베개로 베어 보니, 도저히 안되겠더란다. 그러면서 돌베개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있을 수 없다는 나름의 결론을 섣불리 내린다. 이 박사는 자신의 돌베개 실패 경험에 의하여 야콥의 돌기둥이 '우상'이었다는 단언을 그리도 쉽게 내릴 만큼 어지간히 논리나 통찰도 결핍된 듯(?)하다면, 단순히 필자의 망언이려나...?  

만약 이런 유의 실험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필자는 그 돌에다 여분의 겉옷(대체로 통옷)을 둘둘 말거나 겹겹이 접어 걸쳐 얹어서라도 충분히 베개로 쓸 수 있겠기 때문이다. 왜 이런 가능성까지도 여유있게 타진하지 못한/않은 채, 이 박사는 '우상'설 쪽으로만 짐짓 몰고 가는지 의문이다. 

이영재님은 아마도 야콥이 급히 떠나느라 여분의 겉옷도 없이 달랑 작은 괴나리 봇짐 하나만 지고 갔다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아니면, 단지 성경이 그런 겉옷 얘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차가운 돌만 베고 잤다고 생각하는가? 하다 못해 야콥이 중동 사람들의 일반적인 터번 같은 모자를 썼을 가능성도 없었을까? 

아무튼 돌베개가 가능성도 개연성도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중동 사람들이 광야에서 돌을 베개 삼을 가능성을 일일이 타진해 보지 않고서야 그 누구도 야콥이 돌베개를 하지 "않았다"고 감히 단언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이 박사는 그래서 야콥의 이 돌은 베갯감이 아니라 한적하고 무서운 광야에서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지켜 줄 하나의 호신용 부적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부적? 우상은 뭐며, 부적은 또 뭔가? 기가 찰 노릇이다. 전제 하나가 잘못되면, 이 지경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박사는 야콥의 신앙을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야콥은 어떤 신앙인?


여기서 우리 한 번 야콥의 신앙과 삶의 배경을 되새겨보자.


히브리서 기자는 마치 신앙인들의 박물관과도 같은 11장에서, 분명히 야콥을 믿음의 선조들의 한 명으로 꼽고 있다(히브리서 11'20,21). 


야콥은 약40세까지 부모인 이짜크(이삭)/리브카 슬하에서 지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였는데, 100세에 아들 이짜크를 낳고 난 뒤에도 75년을 더 살았으니까 이짜크가 (40세에) 장가를 든 뒤 35년을 더 살았고, 이짜크가 60세에 쌍둥이 아들-에사후와 야콥-을 낳았으니까 에사후(에서)/야콥 형제가 십대 중반일 15세 때까지 아브라함이 생존해 있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아무리 늙었기로서니 무녀독남인 이짜크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에사후/야콥 형제의 청소년기 중반까지 아무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가 어렵다. 

 

아브라함이 누군가? 히브리 족의 선조인 그는 칼데아인의 우르의 우상 제작가였던(예슈아서=수 24'2) 자기 아버지 테라를 따라 그곳을 떠나 하란으로 왔다가, 그를 선민으로 택하신 예호봐(여호와/야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요르단강을 건너 카나안까지 더 들어왔다. 테라가 하란에서도 우상제작을 계속했는지는 모르나(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조카 롵(롯)과 함께 하란을 떠나면서 우상 및 우상종교와는 영영 결별하여 유일신 예호봐님만 섬긴 것이다. 거기 비해 아버지 테라가 205세가 되기까지 살았던 하란-바딴아람의 친척집에는 여전히 테라핌(teraphim) 같은 우상이 잔존해 있었다(참고: 창 31'19,30b~35). 

일종의 가신(家神)인 테라핌을 야콥의 외숙인 라반은 '나의 신'이라고 했으니만큼, 테라핌은 카나안의 우상이기보다 테라와 그 직계 후손들의 출신지인 우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테라핌은 당대의 일반적인 가신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와 이름도 비슷?하지만) 요르단 강 저편에 머물어 살았던 테라가 우르-바빌론 우상들을 본따 직접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참고: 예슈아서=수 24'2). 테라핌이 바벨론 지역 쪽 우상이었을 가능성은 성구 에제키엘 21'21의 원문을 봐도 높다.   



그러나 (외가인 나호르-라반 집안 출신이 아닌) 야콥의 친가엔 그런 우상의 흔적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야콥도 유일신 신앙을 가졌던 것이 명백하다. 아브라함과 이짜크로부터 신앙을 대물림한 그는 (이 박사의 지론 마냥) 이방 신상을 섬기고 세울 정도로 흐리마리한 사람이 아니었다. 

야콥은 더구나, 역시 믿음과 순종, 온유의 사람인 아버지 이짜크와도 오래 함께 살았다. 이짜크는 자신의 아버지인 아브라함보다 5년이 더 긴 180년의 향년을 누렸다. 야콥은 그래서 부모 곁을 떠났다가 가솔들을 거느리고 되돌아오고서도, 아버지와 약 60년을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성서학자라는 이영재님이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싶은 이유는 칼데아-우르에서 건너온 히브리족의 배경을 보면 대체로 유목민이었기에 주로 천막 생활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아브라함-이짜크-야콥 3대가 나란히 더불어 천막에서 공동생활을 했을 기간은 최소 15년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명시하고 있다(히 11'9). 

위 히브리서 본문(11'8~21)의 문맥을 보면, 이 히브리족은 테라를 선조로 공유했던 하란-바딴아람 족과는 달리, 유일신인 예호봐 하나님 신앙으로만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카나안의 기둥우상 숭배라는 것인가? 

이들 3대가 함께 살면서 예호봐 유일신앙을 철저히 익혀 대대로 집안 전통으로 삼았고, 그것이 요셒 세대를 거쳐 450년 뒤 모쉐를 비롯한 미쯔라임(에귚트)출국 세대에 계속 전수된 것이다. 당대의 최대 제국이면서 최고 우상숭배국인 미쯔라임에 여러 세기를 살면서도 모쉐 집안처럼 이스라엘 백성 일부는 유일신 신앙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물론 요셒 때와 같은 신앙 수준을 지키진 못했지만 말이다. 


야콥은 살아가면서 늘 하나님을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짜크의 하나님이신 예호봐님"이라고 호칭하곤 했다(창 32'9).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28'13). 그는 심지어 실제 우상숭배자였던(31'19,30b) 라반 앞에서 함께 언약을 맺을 때도, 아버지 이짜크가 경외하는 분을 가리켜 맹세했다(31'53).  


만약 이스라엘의 선조인 야콥이, 예호봐님과 겸하여 카나안 이교 신들도 섬길 정도로 허술하고 "맹한" 신앙이었다면, 그 후손인 요셒/모쉐/예슈아(여호수아)와 같은 탁월한 신앙인이 나왔을 리가 거의 없다. 반면교사격으로, 40년 광야시대를 거쳐가며 하나님의 권능 사역을 보고서도 불신세대가 돼 버린 1세대와 더불어 약속의 땅 카나안에 들어간 2세들조차 다수가 불과 몇 세기만에 순식간에 우상숭배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야콥은 그런 흔적이 없다. 


만약 이영재님 주장처럼 야콥이 돌을 보자마자 대뜸 부적이나 우상을 염두에 둘 정도로 카나안 신상에 익어있었다면, 아브라함이나 또는 사라, 이짜크나 리브카에게서도 그런 것을 틈틈이 오래 배웠어야 했다. 그러나 야콥이 그렇게도 예뻐하고 죽도록 사랑했던 둘째 아내 라헬이 아버지 라반에게서 몰래 훔쳐간 테라핌조차도 야콥에게 아무 영향을 끼쳤다는 흔적이 없다. 

오히려 야콥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바딴아람 처가의 영향을 받은 자손의 가족들에게서 우상을 제거하기까지 했다(35'2,4).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야콥이 벹엘의 꿈 속에서 하늘의 하나님을 뵙고 복의 약속의 말씀을 들은 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자신이 베개 베었던) 돌을 기둥으로 세운 뒤 기름을 부은 것을 과연 하나님은 (이 박사 주장처럼) 발칙하고 혐오스런 우상숭배로 보셨겠는가, 아니면 (필자의 생각대로) 예호봐님 당신께 대한 순수 경배로 보셨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본문과 주변 및 컨텍스트로 되돌아가, 우리 이 점을 면밀히 살펴 보도록 하자.



벹엘=하나님의 집!


야콥은 밤새 돌베개를 한 채 잠을 자다 하늘이 열려 하늘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하나님이 그 위에 서서 하신 복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나자, 잠에서 깨어 두려워하면서 "예호봐님이 진정 여기 계시는데도 몰랐다"고 "오, 두려워라 이곳! 여기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 이곳이 하늘의 문이었다니!"라고 고백한다. 두려운 감탄사로 일관된 말이다. 

이어서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벹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하였다. 신들의 집, 우상의 집이 아닌 하나님의 집이었다는 말이다.  


자, 그런데 이영재님은 바로 야콥의 이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우상숭배일까? 이영재님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야콥의 이 행동에 대하여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반응을 살펴봄으로써 그런지 안 그런지를 판가름할 수 있다. 아니면, 하나님은 야콥을 너무나 어여삐 보신 나머지 그가 실수로(?) 한 우상숭배라도 개의치 않으시고 바른 경배로 몸소 풀이하여 받으셨다는 말일까.



야콥의 돌기둥은 죄다 우상?


첫째로, 돌을 기둥으로 세운다고 다 우상숭배이냐 하는 점이다. 그런 획일적인 사고는 학적인 것이 아니라 미련한 '짓'에 더 가깝다. 이 박사의 지론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곧 밝혀지게 된다. 


만약 돌기둥이 다 우상이라면, 야콥은 여러 차례 우상경배 행위를 저지른 상투적인 우상숭배자였던 셈이다! 왜 그런지를 보자. 


   야콥은...


   1. 벹엘에서 잠을 자다 하나님의 복의 약속의 꿈을 꾼 이튿날 아침, 돌베개를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 부었으며...(28'18)


   2. 야콥이 하란의 경계선에서 외숙 라반과 증거의 언약을 맺을 때, 돌기둥을 세우고 (31'45) 외사촌 형제들에게는 (언약의) 돌무더기(야콥은 '갈르엩' 또는 '미즈파'라고 명명함)를 이루라고 했고.(46절), 이 기둥은 훗날까지 증거가 되었으며(51절)...


   3. 야콥이 약 40여세에 하란으로 떠났다가 20년만인 60세에 가솔을 거느리고 다시 벹엘로 돌아와서 돌기둥을 세우고, 거기 전제물과 기름을 부은 뒤, '벹엘'이라고 재명명했다(35'14). 야콥이 세운 세 번째 돌기둥이다. 



이 교수에게 묻는다. 교수의 지론대로라면 위의 1, 2, 3건이 모두 다 우상숭배인가, 아니면 일부만 그런가? 일부라면 어느 것, 어느 것이 그런가? 단지 베개로 베었던 1만 그랬던 것인가? 그렇다면 공평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지만 첫 돌기둥을 세운 1의 경우조차도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나야말로 단언한다! 왜냐고? 하나님은 야콥의 이 돌기둥 건립 행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신앙 언약(covenant) 수립 행위로 수납하셨기 때문이다! 

나그네 야콥의 벹엘 야숙(夜宿)-현몽 사건은 그의 초기 생애에 굵은 획을 그은 일대 전기적 이벤트였다. 여태 주로 선조 아브라함-이짜크의 삶을 곁에서 지켜만 봐온 야콥이 직접 히브리족의 하나님 예호봐와 "부딪는" 체험이었다. 

그의 신앙은 우선 경외감으로 나타났다. 그는 꿈 속에서나마 하나님을 뵙자 우선 말로 다 못할 놀라움과 두려움에 싸였다. 경건한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이튿날 깨자마자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은 것이었다. 분명한 유일신 경배행위였다. 


동시에 돌기둥 세우기/기름붓기는 하나님과의 언약행위였다. 야콥은 앞서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고 하란에서 되돌아오기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몽중 언약을 상기하고, "이곳은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라고 중얼거리며 돌기둥을 세운 뒤, 하나님이 약속대로 해 주시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계속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신으로 모시겠다며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이 제게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의 1을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약조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벹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령했다. 성경 전체-특히 구약-에서 특정 장소의 지명은 중요한 언약적 의미를 띤다.  


독자는 봤는가? 그에게 돌기둥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야콥이 선조들을 모방한 경배/언약행위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런 진리를 깡그리 '개무시'하고 있다. 


[ 이 교수가 자기의 나름 진리와 나름 신학에 충실하려면, 그는 찬송가 338장-특히 2절의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와 4절 '야콥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기둥 세운 것(가사의 이 부분은 옳지 않다. 이 때는 아직 돌단을 쌓기 전이다. 돌단을 쌓은 때는 20년 후이다. 창 35'1,3,7a) 본받아서..'-도 부르지 말아야 옳다. 부르면, 자신도 야콥의 우상숭배 행위에 동조 내지 동참하는 것이 될 테니 말이다. 혹 그가 (남 눈치를 보며?) 이 찬송가를 부른다면, 부를 때마다 속으로 떨떠름할 거 같다. "내가 왜 야곱의 우상을 찬송하는가?"라면서. ] 



성경의 돌기둥들 사례


이영재님의 주된 문제점 한 가지는 성경에 나타난 돌기둥 사례들을 우상인지 아닌지 영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다/못한다(?)는 데 있다.  


성경에 나타난 돌기둥들을 우상인지 아닌지 우리가 직접 한 번 구분해 보도록 하자.

(참고: 여기서 기둥/주상이 돌기둥인지 나무기둥인지 확실치 않은 경우도 있음)


   창 28'18 : 우상 아님

   창 31'52 : 우상 아님 

   창 35'14 : 우상 아님

   출 23'24 : 우상

   출 24'4 : 우상 아님 

   출 34'13 : 우상

   레빝서(레위기) 26'1 : 우상

   신 16'22 : 우상

   왕들A서(왕상) 14'23 : 우상

   왕들B서(왕하) 17'10 : 우상

   왕B 18'4 : 우상

   연대기B(역대하) 14'3 : 우상 

   예샤야후=이사야 19'19,20 (일부 번역성경에 '돌기둥'): 우상 아님

   호세아 10'1,2 : 우상

   제파니야(스바냐) 2'14 : 확실치 않음



위와 같이 돌기둥(또는 나무기둥)이 우상인지 아닌지 문맥상 거의 확연히 구분된다. 만약 이영재님과 같은 식의 획일주의로 나간다면,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묻고 싶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돌)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출 24'4)


여기서의 돌기둥도 역시 우상인가? 천만에다! 

그러나 같은 미쯔라임출국기의 바로 앞 장인 23'24의 주상은 명백히 우상이다.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다음은 어떤가?


   "그 날에 미쯔라임 땅 한 가운데 예호봐님을 향한 한 제단이, 그 국경(지대)에는 예호봐님을 위하여 (돌)기둥이 (서) 있을 것이라." (예샤야후=이사야 19'19 필자 사역)


이것도 우상인가? 누가 감히 우상이라고 하겠는가?! 이처럼 돌기둥이라고 해서 모두 다 우상은 아니다는 것이다. 바로 웃절처럼 심지어 우상들이 가득한 미쯔라임에서조차도 돌기둥도 우상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이 교수는 굳이 야콥의 이 돌베개를 우상이라고 버티는가? 야콥이 그렇게 만만해 뵈는 탓일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야콥의 돌베개-돌기둥


야콥의 이 행위를 하나님은 추후에 어떻게 보셨을까? 우상숭배 행위로? 

다음을 똑똑히 읽어 보도록 하자.


   "..'나는 벹엘의 하나님이다. 네가 거기서 (돌)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했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창 31'13 사역)


이것은 야콥이 하란-바딴아람 외가에 머물던 시절 말엽에, 그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야콥이 추후 외삼촌 앞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은 야콥이 명명한 대로 벹엘이라는 명명을 승인하셔서, 자신을 '벹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고, 돌기둥과 기름부음 및 서원을 경배언약으로 인정하셨음이 틀림없다.  


아마도 이 교수는 (그에 따르면 '우상숭배자'인) 야콥의 이 말이 외삼촌을 속이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외삼촌 앞에서 사뭇 엄정한 야콥의 태도를 봐서도 필자는 야콥의 이 말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으며, 혹여 그가 과장했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시인해 주셨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꾸지람도 하지 않으셨고, 야콥의 [ 벹엘>엘벹엘>벹엘 ]이라는 반복된 명명 과정도 모두 인정해 주셨기 때문이다(28'19; 35'7;15). 

이런 과정에서 하나님은 계속 야콥을 복 주신다는 약속만 하셨지, 그가 돌기둥 경배, 부적화 같은 우상숭배를 한다고 해서 경고/진노/저주하신 적이 눈 씻고 봐도 단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훗날 모쉐를 통하여 다른 우상들과 함께 "자신을 위하여 주상(柱像=기둥우상)을 세우지 말라"며 "네 하나님 예호봐께서 미워하신다"(신명기 16'22)고 경고하셨는데, 야콥이 돌기둥을 주상으로 세웠다면 하나님이 왜 미워하시거나 경고하시지 않고 되레 복을 주셨는가? 하나님의 모순 아닌가?   


이 교수에 따르면, 야콥이 우상숭배를 하는데도 하나님이 적당히 봐 주시면서 복을 주셨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문제는 더 크다. 하나님이 돌기둥 같은 우상에 대한 숭배는 적당히 봐 주시고 복을 계속 주셨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런 심각한 모순과 과실을 이 교수는 느끼는지 모르겠다. 이 교수는 과연 믿고 행동하는 신앙인인가? 생각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아는 지식만 갖고 요리조리 뒤틀어 가르치는 경박한 학술인인가?



북왕국의 우상종교는 야콥 탓?


다음으로 이 교수는 벹엘이 훗날 북 이스라엘 왕국의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된 것을 지적하며, 이것이 야콥의 돌기둥 우상숭배에 뿌리가 있는 것처럼 지적한다. 한 마디로 넌센스다!

그것이 일리가 있으려면.. 우선 야콥의 '돌기둥'이 정녕 이 교수 주장대로 우상인 지가 증명돼야 하며, 둘째로 야콥의 돌기둥 우상종교가 북 이스라엘까지 대물림됐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증명이 다 불가능하다. 위에서 봐온 대로 야콥의 돌기둥은 우상이 아니었다는 정반대의 진상이 충분히 입증되며, 설령 [돌기둥=우상] 공식이 혹 맞는다손 치더라도 야콥의 충실한 아들 중 또는 가장 악한 아들 중 돌기둥 숭배교에 빠진 아들은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훗날 우상종교에 빠진 것은 그들이 예속됐던 국가나 거쳐온 주변 국가들의 우상에 미혹됐기 때문이지, 아브라함/이짜크/야콥 같은 선조들 탓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교수는 자꾸만 야콥 탓을 하니, 이 교수는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사실, 북 이스라엘 왕국 벹엘이 중심지가 된 (돌기둥이 아닌) 금송아지 우상 종교는 야콥이 아니라, 슐로모(솔로몬)의 아들인 레호보암 왕에게서 북쪽 지파들을 쪼개어 나눠 가진 야로브암(여로보암) 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교수는 돌기둥과 금송아지조차 서로 구분하지 못하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교수 주장대로라면, 비단 벹엘 뿐 아니라 (남)유다의 일부 우상숭배 관례도 슐로모 왕에게서 왔으니, 이 역시 선조인 야콥의 돌기둥 숭배에서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단지 벹엘이라는 지명 때문에 이 교수는 이렇게 편향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수 입장으로 보면..야콥이 '벹엘'이라고 명명한 것 자체가 잘못이고, 야로브암이 하필이면 벹엘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도 잘못인 셈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한다면, 야로브암 왕이 벹엘과 단(Dan), 두 곳에다 금송아지를 각각 세운 것은 야로브암이 북왕국의 첫 왕이 되면서 자기 백성들이 남 유다의 예루샬렘 성전이 가지 못하게 막기 위하여 꾸민 불신적이고 얄팍한 음모의 일환으로, 벹엘이 북왕국의 남쪽 끝이었고 단은 북쪽 끝이었기에 양쪽 끝에 세운 것이지, 벹엘에 세운 야콥의 돌기둥 때문이 아닌 것이다(참고: 왕들A=왕상 12'25~33). 

북왕국 우상종교가 야콥 탓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 교수의 주장이 좀 더 먹히려면(?), 단의 금송아지도 야콥의 돌기둥 때문이라는 지론을 어떻게든 도출했어야 한다. 물론 이 역시 어불성설이지만 말이다. 왜 벹엘만인가? 야콥의 돌기둥 탓이 아니라, 이름과 장소의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여러 모로 그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하나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야로브암의 두 금송아지는 야콥의 돌기둥에서 비롯되긴커녕 미쯔라임 출국 후 광야시대 때 이스라엘의 초대사제(제사장)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더 연상시킨다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인가(출 32'1~6). 따라서 벹엘의 금송아지의 granddaddy 격인 아론의 금송아지가 야콥의 돌기둥에서 비롯되었음을 입증했어야 더 설득력이 있었을 법하다.  아론의 금송아지는 물론 미쯔라임(에귚트)의 신상을 본 뜬 것이다. 


이 교수가 이런 점들을 스스로 솔직히 언급하지 않은 점도 수상쩍기만 하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이 교수는 이스라엘의 선조이자 믿음의 선조의 한 명인 야콥을 여러 모로 희생물로 삼고 있다고 봐진다. 야콥과 무슨 원수가 졌는지는 모르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드냐 하면, 그는 야콥의 십일조 서원도 의혹하고 사실상 불법화하여 단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일조 서원은 우상종교의 발로?


이 교수는 야콥의 십일조 서원이 마치 우상종교와 은근히 유관한 듯(밀착한 듯?) 밀어가고 있다. 이런 발상은 인터넽이 발달해온 1990년대 이후 근래에 복과 십일조를 단죄해온 한국 교계의 이상현상과도 유관한 듯 하다. 

이 교수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야콥의 돌기둥을 부적/우상인 양 단죄하고, 야콥의 십일조 서원까지 우상종교와 유관한 양 단죄한 것은..어쩌면 근래에 한국이 잘 먹고 잘 살면서 덩달아 배부른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복과 십일조를 멀리하는 성향과 일맥상통하는 듯하여 시대적 풍세에 편승한 발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 교수는 다음 주일부터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에서 교인들을 축복하거나 축도도 하지 말아야 자신의 주장에 더 충실해질 터. 또 교우들에게서 십일조를 기대하지도 말아야 하고, 복을 기대하고 바치는 소위 '일천번제'나 작정헌금 따위는 둘째치고라도, 십일조마저도 금지해야 이 교수로서는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도 십일조를 부득부득 하는 교우들은 (이 교수 보기에) 야콥과 돌기둥 우상숭배자들과 다름없으니, 복과 십일조를 받아들이는 딴 교회로 내보내기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이 교수는 위선자에 불과하다. 꼭 실천하기 바란다. 그래서 우상종교가 없는 순수교회를 지탱하기 바란다. 

그리고..마지막날, 주님 앞에서 십일조를 강조하고 야콥처럼 복을 기원한 성도들과 과연 어느 쪽이진정 순수했는지를 올바로 평가 받기 바란다. 



결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짜크의 하나님과 더불어 '야콥의 하나님'으로 불려지심도 부끄러워 아니 하셨다. 이 3대 족장 및 신앙 선조들이 우상숭배를 한 흔적은 딴 데는 몰라도 우리의 성경에는 전혀 없다! 오히려 히브리족의 하나님이신 예호봐 유일신에 대한 경배사상을 후손들에게 대대로 심어 주기만 했을 뿐이다.    


야콥의 돌기둥이 '우상'이었다는 이영재 교수의 주장은 성경적 근원과 뿌리가 없는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이 점을 독자들은 철저히 이해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야로브암 왕이 세운 금송아지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올무가 된 것도 야콥이나 그의 돌기둥 탓이 아니다. 야로브암 자신의 탓일 뿐이다. 


이 교수 식의 아전인수격 성서해석과 주석이 그의 제자들과 후학들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는 몰라도,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 점에 대하여 이 교수의 진솔한 뉘우침과 고침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이런 엉터리 해석과 '주석'을 미디어를 통해 아무 검증 없이 멋진 학설처럼 은연중 소개하고 보급하는 뉴스앤조이에 대해 우려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센세이셔널리즘을 통해 대중의 인기만 탐하지 말고 성경적인 정론을 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