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은 비동조자들을 이런 식으로 다루기도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순결인가?
청교도 신앙은 이름처럼 순결한가?
김삼
미국은 물론, 한국 교계에도 신사도개혁운동(NAR) 등 문제 영성들이 판을 치면서, 그 대안 영성의 하나로 요즘 '청교도' 신앙/신학이 부쩍 강조되는 경향이다. 특히 번영신앙/신학 등을 불순하게 느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청(淸)'이라는 글자에서부터 미리 깨끗하고 좋은 인상을 받는 모양이다.
프랑스에 신교도 위그노들이 있었다면, 스코틀란드엔 초기 장로교인들이 있었으며, 영국엔 청교도들이 있었다.
청교도의 원어 '퓨리턴'(Puritan)은 순결주의자를 가리킨다. 복잡한 천주교/국교회(성공회)와 달리, 단순한 예배의식과 보다 엄격한 도덕률을 실천하려던 16-17세기 사람들이었다. 또 그들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을 청교도주의자, 그들의 신앙을 청교도 신앙, 그런 사상을 청교도 사상 또는 퓨리턴 신학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이름처럼 엄격히 순결하고 순수했을까? 역사 속에서 청교도였거나 그들의 전철을 밟아 청교도 신앙 내지 퓨리턴 신학, 또는 그 사상 및 실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과연 순결/순수하고 무구할까?
이에 대한 해답과 함께 청교도 사상에 대한 분별 의식을 본 시리즈에서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떤 특정 신앙이나 신학도 성도의 분별/검증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외'일 수 있다면, 아울러 이단일 수 있음을 가리킨다.
청교도 신학은 흔히 한국에서 칼뱅주의 개혁신학의 일환으로 다뤄지지만, 미국에서는 건국사와 직결되면서, 애국주의와 아울러, 전통적 주류 교파인 미국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장로교/개혁교 등의 배경과도 연관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중교회 교단들 대다수는 국내 최첨단 진보주의의 앞잡이가 돼 있다. 물론 미국엔 보다 보수적인 교단들도 있다. 바꿔 말하면, 청교도 신앙사상/신학은 진보주의나 보수주의 양쪽에서 모두 애호(?) 받고 있다는 뜻이다. 최소한 명칭만이라도.
미국에서의 청교도 신앙은 한 마디로, 건국 선조 일부와 그들을 이어 내려간, 흔히 'WASP'(백인/앵글로색슨계/신교도를 줄인 말)로 빗대어지는 백인 지배층이 초기에 지녔던 원초적 신앙 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정치계와 밀접하게 연계돼 있기 떄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사 속의 정객들이 모두 청교도 신앙을 가졌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알파벹 배열이 같은 영어 단어 'wasp'는 흥미롭게도 '말벌'이란 뜻이며, 벌과 벌집은 흔히 유렆의 왕실이나 지배층을 상징한다.
필자의 연구와 판단에 따르면, 청교도 신앙/신학이 표방하는 정신과는 달리, 순결하지 못한 비성경적인 요소도 상당량 섞여 있다. 오해 말라. 청교도 신학/신앙이 추구하는 바가 몽땅 다 불순하고 잘못이라는 얘기도, 청교도들이 이단이라는 단죄 의도도 아니다. 청교도들의, 성경에 기초했고 성경과 일치하는 부분들-기본적인 보수적 신앙 사상들은 장로교인인 필자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면서 하는 말이다. 또 이런 특유한 이름을 지닌 신학 사상이나 신앙들이 부분적 또는 대체로 나름의 성경적인 바탕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성경으로 검증해 볼 때 두드러져 보이는 불완전부터 우선적으로 완전을 지향하게 고쳐야 마땅하다. 따라서 생각과 실천을 바꾸자는 것이다. 비록 한편으로는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이긴 하지만.
청교도 사상의 개념을 먼저 쉽고 간단하게, 상식 차원에서 접근해 본다.
물론 크리스천들은, 청교도/순결주의자들이 추구하듯 하나님 앞에 되도록 순결하고 순수해야 한다. 흠과 티, 주름이 없을수록 바람직하고 좋다. 그런데 순결/순수라는 것은 인간 편에서보다는 하나님 편에서의 것이라야 한다. 인간 쪽에서 아무리 순결하다고 자임해도, 하나님 쪽에서 보실 때 순수가 아니면 아니다. 신본적인 순결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몇 가지로 나눠 논해 보자.
첫째로, 성경에서의 순결이란, 거룩하신 하나님의 표준과 잣대, 시각에서 정의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차원의 개념이 결코 아니다. 그 분은 "예호바 메카데쉬"-우리를 거룩하게, 성결케 하는 분이시다(미쯔라임출국기=출 31'13). 자신이든 어느 누구든 사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하시며 그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늘 순결하길 바라신다. 아울러 순결/성결케 하시는 그 분의 권능도, 사역도, 어제나 오늘, 영원히 한결 같으시다.
사실 사람에게 흠과 티, 주름이 없는 삶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은가? 오로지 성령님의 권능으로만 궁극적으로 가능하다! 영적인 아홉 열매 맺기(신약성경 갈라티아서=갈 5'22,23)도 인간 자생적/자연적인 노력으로써가 아니라 성령님의 초자연적 권능의 도움 안에서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윤리/도덕적 노력으로도 가능하다는 말이 돼 버린다.
이것은 순결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 모든 책임이 있고, 사람은 방임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 곧 성령님의 권능으로 그러기를 진정 바라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러느냐는 것이다.
청교도 신학 또는 그에 준한 사상을 표방하는 개혁주의권의 중대한 특징 하나는, 주지하다시피 대체로 소위 '중단론'(cessationism/종식론/단절론..) 쪽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 초기교회에서 전능하고 막강한 권능으로 일하시던 성령님은 계시가 완성된 오늘날은 그렇게 사역하시지 않는다는 식의 발상이다.
바꿔 말하면, 과거에 초자연적 이적/기사/신유/은사/영언(방언)으로 일하셨던 성령님이, 계시가 완성되고 나서는 그런 역사는 쉬시거나 중단하셨고, 지금은 다만 성경만을 갖고 추상적으로 일하시고 비둘기처럼(?) 조용히, 잠잠히 계신다는 주장이 된다.
청교도 사상을 받아 들인 개혁주의권 일각에서는 이와 비슷하거나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현실/체험들을 감안해 일부 절충적인 주장도 하면서 이견이 분분한 인상이다.
논리적으로, 이것은 외람되게도 '성령변질론'과도 다름 없고,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는 이원론적 신관과도 대동소이하다. 아울러 초기교회의 권능(신약/행전 1'8)은 오늘날의 교회의 권능과는 다르다는, 아니 달라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더 나아가, 성령님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순결하지 않아도 되고, 할 수도 없다는 말이 돼 버린다.
성령님의 권능의 개념 자체도 주된 초자연적 요소들은 배제되고 단지 성경 말씀의 감동과 선포만 "달랑" 남은 것으로 이해돼 버린다. 주님께 권능과 말씀의 사도와 전도자들로 파송(파견) 받아, 신유로써 병약자들을 고치고, 악령들을 내쫓으며 복음을 전하던 12/70 제자 시절과 같이, 오순절 이후엔 치병과 악령축출에다 오히려 영언과 영적인 9은사까지 보태어져 더 강화된 권능으로 복음전파에 힘쓴 초기교회의 삶이었다.
그랬던 것이..구/신약 성경전서가 완성되면서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갑자기 바뀌어, 신유도 이적도, 은사도, 영언도 이제 더는 불필요한, 추상적 권능 개념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게 청교도적 개혁주의의 믿음이다.
필자가 사뭇 궁금한 점은, 청교도가 그리도 간절히 지향하는 영적 순결에 필수적이어야 할, 성령충만이나 영적인 9 열매 맺기, 여덟가지 신적 성품(페트로=벧전 1'4-7) 지니기가 그들이 주장하는 '중단' 내지 '종식' 이전과 이후가 같냐, 다르냐는 것이다.
중단/종식 이후의 지금은 완간된 신구약 성경이 있으니, 9 열매, 8 성품 갖기가 더 쉬워졌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이것은 계시가 완성되어 사람이 집대성하고 구/신약 전권으로 출판한 시점부터의 권능이 성령님의 권능보다 크다는 주장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청교도 역사나 개혁 이후 신앙 역사를 살펴 보면, 오순절 당시와 같은 유의 역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그런 초자연적 권능이 나타났다면 '이단'시 됐을 것은 뻔하다. 하물며 조너턴 에드워즈 당시의 부흥 때도 오순절적 역사가 일어났다,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다' 식으로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이 아니던가.
이런 식의, 성령님 자신의 '변질'과 그 분 사역의 '패러다임 변화', 그 분 권능의 축소/추상화 개념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그냥, 청교도들이나 개혁신학자들의 상상과 입맛대로 그들 자신의 경험에 맞게, 적당히 배제하고 짜깁기 하여 재구성한 성령론/권능론/순결론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성령론은 추상성이 강하다. 그럴수록 성령충만도 인위적 노력으로 이해하려는 성향이 짙다는 암시가 아니고 뭐랴.
청교도/개혁교도들에 의해 이렇게 표현된 모습이 어찌 한 분이신 성령님의 초지일관된 모습이며,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이신 한 하나님, 기독교의 창시자/교주/완성자이신 한 주님, 그 분의 몸인 한 교회의 모습일 수 있는가!
한 가지, 필자가 덧보태고 싶은 말은 권능이 넘치시면서도 비둘기처럼 온유하신 성령님은 사람들의 믿음만큼만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적과 기사(奇事), 신유와 악령축출, 은사와 영언 등은 그런 것이 현대에도 가능하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주로 일어난다. 전능하신 성령님께서 왜 그렇게 편향적으로(?) 일하시냐고 묻는다면, 마르코스복음서(맑) 16'17,18을 참고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 성구 앞머리에 '믿는 사람들에게는..'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믿음 없이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분의 현존(계심)과 그 분이 '미스타포도테스'(보상자/報償者)이심을 믿어야 한다(신약 히브리서 11'6).
그런데 많은 개혁신앙인들은 믿지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주권적/초자연적으로 일해 주시길 바란다. 소위 '절대주권주의'에 의해서다. 알고 보면, 그런 막연한 신앙(?)은 더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이며 인본적인 발상이다. 겉 포장은 '신본주의'인데, 뚜껑을 열어 보면 인본주의라는 말이다.
되뇌지만, 예수 크리스토님은 어제나 오늘, 영원히 한결 같으시다(히브리 13'8).
'중단/종식론' 유의 주장에 대해선 그동안 본 블로그에서 다양한 논박이 있었기에, 이것으로 대강 줄인다.
둘째로, 위/첫째 셐션과도 직결되지만, 청교도 사상이 추구하는 순결/순수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만큼 방법론에 있어 신본주의적이지는 못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역사 속의 청교도들과 그 후예들이 내세우던 엄격한 도덕률 실천은 구약적이며, 율법적/금욕적 요소가 더 강하다. 미 건국 선조들의 초기사를 살펴 보면, 실감이 난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신대륙에서 맘껏 구가하고 자신들의 노력으로 땅 위의 '하나님 왕국'을 구현하려던 나머지, "언덕 위 (빛) 동네" 건설을 위해 신자에게든 비신자에게든 대체로 세속사회의 삶 속에다 교회처럼 성경 규율을 그대로 적용하길 바랐는데, 신약적이기보다 구약적이었다. 그래서 세상 쪽에서는 상당한 부작용을 감수해야 했다. 그 점에서 신본적이기보다 인본주의적이었다고 짚어진다. 1
되뇐다면, 청교도 신앙은 일편 노력에 있어 순수해 뵈는 점이 있지만, 칼뱅주의/개혁주의와 연관된 만큼은 신본성(神本性)보다 인간노력적 성향이 강하다.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하려던 점이 그렇다. 그리고 오늘날은 아무리 청교도 신앙/신학을 적용하려는 사람들도 과거의 선조들을 따르진 못한다. 날이 갈수록 노력과 결과가 퇴색된다.
그렇다면 뭔가? 인간 노력은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현재를 과거로 돌이킬 수도, 초기 청교도 신앙을 오늘날에 재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 율법적 엄격성이 곧 성경적 순수성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 본위적, 인간중심적 성향이 강하다. 구약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날마다 체험하던 신정시대(!)였는데도, 그들의 율법 준수 현황은 날마다 엉망이었다. 그런데 더군다나 현대의 토양에서 어떻게 인본적인 엄격 도덕률 적용이 가능하겠는가?
구약의 참 대언자/사제들/지도자들을 살펴 보면, 오순절 이후나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초자연적 권능 아래 사역하던 권능의 사람들이었다. 다만 내용 상 좀 더 '그림자'적, 예언적 요소가 성취적 요소가 더 많았다.
사제들은 본질적으로 예호바 메카데쉬님의 권능과 말씀으로 온전히 성결/순결케 될 수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법적 언약인 율법에 따라 주로 물두멍(훗날의 '놋바다')에서 물로 씻는 정결례와 짐승들의 피, 태워지는 불로써 성결케 됐다. 백성들은 사제들이 대신 바치는 제사와 예물로써 속죄를 받았다. 요약하면, 말씀과 권능, 물과 피로써 순결해졌다.
신약 시대에는, 모든 율법과 제사를 완성하신 어린양과 하늘 대사제(대제사장)이신 예수 크리스토님의 피, 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말씀, 불로 상징되는 성령님의 권능으로써 (왕족/사제들인) 신자들 모두가 순결해진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빠져선 안된다.
특히 보혈과 말씀이라는 매개체를 적용시키고 역동화시키는 분이 바로 하나님, 예수 크리스토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다!
그런데 현대교회 대다수는, 위의 요소들 중 유독 성령님의 권능을 축소시킨다. 그래서 권능이 믿는 만큼만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성령님 자신이나 그 분의 패러다임의 변화/변질이 아니라, 현대 교인들의 믿음의 한계성 내지 불신을 반증하고 반영해 준다.
순결의 필수요건인 성령충만도 오직(!) 성령님의 권능으로써만 가능하다. 그것은 세상에서도 볼 수 있는 고상한 덕성 함양의 차원이 아니다. 단적으로, 9 영적 열매 중 첫째인 아가페 사랑이 인위적으로 가능한가? NEVER! 인간애/인류애가 곧 아가페인가? NO!
알버트 슈바이처나 헬렌 켈러, 테레사 수녀, 헨리 나웬 등의 인류애는 하나님과 참 신자의 아가페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성령충만의 어원과 개념을 성경에서 살펴 보면, 충만=채우심/채워짐(filling-in, infilling)이다. 형용사적 개념이기보다는 우선적으로 동사적 개념이다. 비록 채워진 상태가 형용사적이긴 하지만, 그보다 채움 동작이 앞서 있다. 성령님의 초자연적 채움 역사가 없는, 덕성/미덕 함양이 성령 충만이 아니다.
행전/서신서들에 나타난 초기교회사를 보면, 성령충만은 반드시 영언(靈言='방언')으로 시작됐다. 예외가 없다! 첫 교회, 사마리아교회, 코르넬리우스 가정교회, 샤울(파울), 에페소교회, 코린토교회..그리고, 물론 여타 교회들도 모두 그랬다. 언제나 초기교회 패턴 그대로였다. 다만 상세한 기록이 생략됐을 뿐이다.
그러나 청교도사상권을 비롯한 개혁주의권에서는 컨텍스트/문맥보다는 텍스트/문자적인 성구 해석에 따라 그렇지 않다는 반론을 펴 왔다. 성령님의 권능의 나타남이 때와 곳에 따라 달랐고, 초자연적 이적이 나타난 양상과 범위가 달랐다는 다원론적인 제설을 편다.
한 분이신 성령님이 때와 장소를 가리는 기분파이시라는 말인가? 때와 장소, 개인과 교회마다 차별 대우하셨다는 뜻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신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역사의 차이가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주로 믿으면 믿는 만큼, 안 믿으면 안 믿는 만큼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청교도-개혁주의권이 주장하는 '절대주권론'과는 사뭇 차이가 크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는 일방적/주권적으로 역사하시기도 한다. 다메쉨(다마스쿠스) 도상에서의 샤울/파울의 변화(개종/회심) 케이스가 그랬다. 하지만 드문 케이스다. '항상 절대주권' 쪽은 아니다. 하나님은 물론 지고의 절대자이시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늘 무시하는 절대주권자는 아니시다는 뜻이다. 그런 개념은 비성경적이다.
아무튼 가름하고, 초기 성도들의 성령충만은 언제나 영언에서부터 출발했다. 첫 교회의 유대인들도(행 2'1-4), 사마리인들도(행 8'14-18 특히 18절 참조), 이방인들도(행 10'44-46) 그랬다! 믿거나 말거나 오늘날도 여전히 그렇다. 한 분이신 성령님의 한결같은 패턴이요, 사역 방식이다.
혀로써 하는 영언은 성령님을 통하여 입술과 혀를 다스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의 언어 생활(참고: 구약 잠언 4'24; 10'19-21; 11'9; 12'6,13,14,18,25; 15'23,28; 16'10,24; 17'27,28; 18'7,20,21; 21'23; 신약 야코보서=약 3'2-12)을 절제시킨다.
따라서, 영언으로 시작되지 않는 '성령충만'은 인간덕성 충만일 뿐이다. 그것은 신본적이 아니라 인본적이다.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혀 절제 없이 사람의 힘으로만 절제하여 성령충만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가 넌센스이며, 그지없이 인본적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주의는 단지 우리가 구약 율법을 거부하고 복음서 이하 신약의 도덕률만 삶에 적용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령의 권능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엄격한 절제/금욕.. 등 덕성 함양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율법주의이고 수도원주의다.
초기교회 신자들처럼 성령의 권능과 도움은 여전하다. 성령님의 권능에 맡기며 의존하는 것-그것이 진정한 신본주의다.
그런데, 성령의 도움을 바라면서도 오늘날의 성령의 권능 역사의 채널인 이적과 은사 등을 사실 상 거부함은 청교도 사상가들의 자기모순이여 일대 딜레머다.
셋째로, 청교도적 방법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 내지 어젠다 자체도 이름만큼 순수하지 못하며, 따라서 잘못이다.
청교도 사상가들은 대뜸 반발할 테지만, 필자의 말이 그리 틀린 게 아닌 것이, 17세기 미국 필그림/청교도들부터 후예들까지 '언덕 위 빛 동네'(마태복음서 5'14)를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세상 속에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후예들 대다수도 그렇다.
17세기 후반엔 청교도 군인/정치인인 올리버 크롬웰이 왕정을 뒤엎고 청교도적 이상을 추구하는 공화국을 세웠지만 단명했고, 이어서 왕정 복고가 이뤄졌다.
레이건에서 부쉬 부자에 이르는 공화당 보수파 전성기의 이상인 소위 '언덕 위 빛 동네'는 미국 초기 건국선조 청교도의 이 성구 해석에서 나온 것이며, 물론 미국을 암시한다. 과연 미국은 언덕 위 빛의 도시일까? 비단 보수파뿐 아니라 잔 F. 케네디 같은 진보/중도파도 미국을 그렇게 생각해 왔다.
건국선조들인 청교도들을 본받아 그들은 미국 시스템 속에 '언덕 위 빛 동네' 구현을 추구하려 했고 미국 보수파의 이상도 여전히 그렇다. 현재 얼마나 구현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룩한 개념이기보다 매우 세속적이다. 아니, 성(聖)과 속(俗)의 일대 혼동이다!
그것이 청교도 후예들의 현 주소이다.
이것은 오늘날 '주권주의'(dominionism) 운동가들이나 '신사도개혁'(NAR) 운동가들, 바티칸 종교정부, 유대교 찌온주의(시오니즘), 비밀집단 등이 공통되게 추구하는 지상(地上) 신국(神國) 내지 하나님의 왕국 개념과 거의 전혀 다를 바 없다. 물론 이들이 다 공통되게 참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를 그 중심에 모실 리도 없다. 따라서 인위적인 유토피아이며, 사실상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하다.
성경은 그런 유토피아를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필그림들은 신대륙으로 건너오면서, 네덜란드 레이던에서의 윌리엄 브랟퍼드(훗날의 뉴잉글랜드 정착촌 초대 총독)의 발상처럼 자신들을 영적 순례자로도 자임하려 했지만, 성경이 말하는 순례자/필그림이란, 하늘 본향을 궁극적인 최종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다(히 11'13-16).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땅 위의 나그네'로 정체성을 늘 확인하며 살았다.
땅 위에 빛의 도시를 건설하려던 미국 청교도들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땅의 나그네들이지, 땅의 주인들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 아닌 하늘에 속해 있다(신약 요한복음서 15'19). 세상과 동시에 하늘에 속해 있을 수가 없다.
청교도 사상가, 청교도신앙 따르미들은 미국 청교도 사상의 이런 배경과 뿌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순결론: 세상으로부터의 성별
청교도적 목적론 상의 모순은 이것 뿐 아니다.
하나님 관점에서의 궁극적인 성결/순결 개념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참된 순결/순수란 세상으로부터 성별/분리/구분이라고 분명히 밝히셨다(코린토B서=고후 6'14-18). 이 개념은 이미 구약 때부터 밝혀져 있다(구약 예샤야후서=이사야 52'11). 구/신약에 공통되다는 말이다.
그런데..청교도/개혁주의자들처럼 세상 시스템과 세상 메이트릭스 속에 신국, 하나님의 왕국(딴 표기: 하나님의 나라)을 건설/구현하려는 발상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속으로부터의 성별이고 분리인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해서, 물에 녹는 소금이나 어둠을 파고 드는 빛처럼 세상 시스템 속에 젖어들고 용해되고 뿌리를 내려 '변화'시키는 그런 종류의 자체 분리/구분이 아니다. 성령님의 권능과 뱀 같은 슬기, 비둘기 같은 순결을 통해 선한 영향을 주면서도,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그러나 청교도 후예들은 이 점을 지속적으로 혼동/착각하고 있다.
단적으로, 미국 청교도들이 신대륙에서 추구했던 그런 '언덕 위 빛 동네' 식 하나님의 왕국은 불가능한 개념이요, 잘못된 발상이다. 그런 성속(聖俗) 혼합적 개념은 막말로, 순수 세속적인 '달동네'보다 순수하지 못하다.
까닭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 성도의 영혼들 속에 인간의 노력/기여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을 통해 이뤄지며, 예수 크리스토의 평화 재림 이후 이뤄지는 지상 천년왕국,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늘나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그 분의 왕좌는 성도의 심령 속에 있지, 세상 통치권 속에 있지 않다. 세상 통치권은 온갖 죄와 사악의 총집합체이다(참고: 에페소 6'12; 요한A서=요일 2'15-17)! 현재 세상의 신/왕은 싸탄 마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미국 청교도식 '하나님의 왕국'이란, 거듭난 영혼에 하나님의 왕국이 이뤄진 성도와 교회를 이용하여 세상 정치권 속에다 하나님의 왕국을 이뤄 보겠다는 발상과 다름 없다.
청교도 사상의 뿌리부터 그렇다는 얘기이고, 뿌리마저 그렇다면 심각한 얘기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독자는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더욱 수긍이 가게 될 터이다.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짚어 보자.
전술했듯, 청교도 신앙은 흔히들 아다시피, 미국 건국사와 직결된다. 1620년 100여 명의 남녀가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절반 이상이 죽는 혹독한 첫 겨울을 지낸 후, 미 원주민들과 첫 추수제를 치른 것으로 널리 알려진 건국 선조 '필그림'들은, 영국에서의 첫 출발은 청교도였으나 영국 청교도들과는 입장과 뜻, 노선을 달리 하는 분리파'(Separatists)였다.
한국 교계에서 흔히 알듯 그런 정통 청교도들은 아니었다.
필그림들은 국내에 머문 청교도들과는 달리, 영국 정부나 국교회 제도와의 타협을 거부하여, 다름 아닌 KJV(제임즈왕역성경)의 번역을 명령한 제임즈 1세의 박해를 피하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레이던에 상당기간 거주하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는 본국인 영국 청교도들보다 더 순수를 추구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이 신대륙에 상륙하고 난 수 년 뒤 청교도들도 건너오기 시작, 그들 나름의 정착촌을 형성했고, 후에는 서로 뒤섞여 초기의 분리파보다는 청교도들이 주도하게 된다. 이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을 경계하다 못해 '싸탄의 자식들'이라며 학살을 일삼기도 했다. 물론 자기방어도 위했겠지만, 과격한 발상과 행동의 사상적 배후가 뭣인지 독자는 곧 알게 된다. 본래 신대륙의 주인이면서 초기에 필그림/청교도들을 돕기도 했던 원주민들은 그렇게 해서 언저리로 밀려나고, WASP가 주인이 됐다.
전술했듯, 17세기 후반에는 영국에서 크롬웰이 이끄는 청교도 세력이 왕정을 뒤엎고 공화정을 시작했다가 도로 전복됐다. 이를 전후해 청교도들 다수가 신대륙에 건너왔다. 주로, 그들의 이상을 신대륙에서 구현해 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미국 정치사의 배후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청교도 신앙이 끼친 영향은 다대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미국 청교도주의의 대부라고 할 만한 조너턴 에드워즈가 초대총장을 역임한 예일대학교는 청교도주의를 한편으로 견지한다곤 하나 역사박물관 속 신앙에 불과하며, 신학적으로는 회중교회처럼 첨단 노선을 걸어 왔다. 한편, 이 대학교에서 자생한 비밀집단의 단원들이 지난 수 십 년간 세계사 배후와 미국 정계를 휘둘러 오는 등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예컨대 미국의 수많은 명 가문들과 직결돼 있고, 정계/재계 명사들이 사실 상의 평생단원으로 있는 '해골단'(S&B)의 신전/본부 격인 '무덤'이 현재 이 대학교 구내에 있으며, 해마다 새 단원들이 배출된다.
또한, 한국 교계도 그토록 존중하는 다름 아닌 이 조너턴 에드워즈의 아들은 놀랍게도 비밀집단인 프리메이슨리의 고위급 인사였다. 참고로, 에드워즈 가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명문가의 하나이다. 미국 명문가들 대다수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해골단 등 비밀집단과 연계돼 있다.
제 아무리 청교도적이고 불과 유황의 심판 메시지로 대갈한 그였다곤 하나, 이런 주변 정황들의 그림은 그리 청결하고 깨끗해 뵈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대시되는 점은, 미국의 현대 청교도신학은 현 정치 배경을 주 무대로 삼는 주권주의(dominionism)와 직결돼 있다는 사실. 주권주의란, 땅 위에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구현한다는 사상으로서 소급해 보면, 사실상 바티칸 종교정부의 근간을 이룬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그의 사상을 대물림한 개혁가 장 칼뱅의 제네바 통치의 배후에도 작용했다. 영국 왕정-국교회 결탁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의 칼뱅주의 정치가이자 기독교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사상의 도이베르트 등은 이 주권주의를 기조로 했고, 1960년대에 미국의 소위 '기독교 재편주의'(Christian Reconstruction)의 발흥에 이바지한 루서스 잔 러쉬두니의 사상도 같은 흐름이었다.
오래 전에 필자는,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한인 교계 거물급 인사로부터 이 재편주의 운동에 미디어 분야에서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재편주의 캠페인 보급용 캘린더까지 보내왔다. 당시는 그럴 듯 하게 들려 흥미를 갖고 멋 모르고 응락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러쉬두니가 이 사상을 주도했고, 흐름의 내용 상 비성경적이라는 사실도 발견하게 됐다.
러쉬두니의 과격한 주권주의 사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교계에 깊은 영향을 끼쳐, 애국주의와 신앙을 연계시켜 가며 현세 속의 신정 이상을 추구하는 미국 보수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도덕적 다수' 운동에 연계된 미국 남침례교의 제리 폴웰, 보수 장로교의 D. 제임즈 케네디, 퍁 라버슨, 제임즈 답슨 등이 미국 보수계 흐름을 주도해 오면서 공화당의 이상을 주도하기도 했다.
다수가 청교도였던 건국 선조들은 신앙 문제로 박해 받아 신대륙으로 건너와서 이곳에다 순수 신앙의 이상(理想)으로 자유롭게 새 나라를 건설하기 원했다. 그래서 초기부터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그런 생각과는 무관했고, 다만 백인들이 지배하고 주관하는 나라로서 영원히 지속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버랔 오바마의 등장으로 순수 WASP 지배시대가 끝나 감을 예고해 주고 있다. 하지만 WASP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청교도 사상은 반드시 미국 보수주의와만 연계되는 것은 아니다. 회중교회처럼 진보주의/중도주의 등 모든 정치노선에 연계돼 있다. 그렇다면 노선이 다르면서도 같은 사상을 나누는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뭘까..생각해 보면, 아렴풋한 답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권주의다.
청교도 사상과 맞물린 보수적 주권주의는 방법론에서 미국의 세계적인 패러처치들을 낳기도 했다. 국제대학생선교회(CCCI)의 창설자 빌 브라잍, 와이웸(YWAM=예수전도단)의 창설자 로렌 커닝엄 등은 세계를 7대 영역으로 나눠 그 정상들을 기독교가 정복한다는 야심 찬 이상을 꿈꿨고, 이들의 이상을 그대로 물려 받은 사람이 바로 오늘날 신사도개혁운동의 대부 격인 C.P. 왜그너였다.
주권주의 이상은 단순히 보수파가 아닌 중도파/진보파와도 무관하지 않으며, 데이빋 라커펠러(딴 표기 '록펠러')가 세운 CFR(해외관계위원회)과, CFR과 맞먹기 위해 팀 러헤이 목사가 창설한 보수적인 CNP(전국정책협의회) 등 정체미상의 단체들과도 연계돼 있고, CNP의 배후엔, ('재림주', '참 부모'로 자처하면서 통일교 원리에 의한 가정 중심의 '가정교회'에 바탕을 둔) 나름의 '보수'사상을 추구해 온 문선명 세력의 입김도 도사려 있다. 예컨대 CNP 주요 인사였던 러헤이, 폴웰 목사 등이 문의 거금 지원을 받은 흔적이 있다.
특히 보수주의도 진보주의도 아닌 중도적 입장을 취해 온, 미 교계의 거물 맄 워런은 버랔 오바마의 신 행정부에 추파를 던지며 접근한 바 있다. 뉴에이지 경제구루 피터 드러커의 아이디어와 사상을 20년간 사사한 워런은 CFR, 라커펠러형제재단 등 다양한 세속 단체들과 내적으로 연계돼 있기도 하다.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자신의 숨은 목적에 내몰린 사회복음주의자인 워런 역시 나름의 주권주의를 지향하며, 자신의 소위 '목적에 이끌림' 영성은 물론, 관상영성, 떠오름영성, 더 나아가 뉴에이지 영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도 한국의 일부 '보수' 교단 사람들은 교계명사인 워런과 손을 잡고 있다. 이게 어찌 순결인가! 대단한 자기모순이며 착각이다.
워런의 제스처나 몸짓은 노벨평화상이나 '템플턴 상'이라도 받으려고 안달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짐짓 '복음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근본주의 신앙을 배격해, 같은 교단의 신학자인 앨 몰러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다. 사실 상 껍데기만의 복음주의자요 이중인간이라는 뜻이다. 그와 대동소이한 노선의 대형교회 목회자로, 빌 하이블즈도 있다.
그러므로 미국 청교도 신앙은 주권주의, 미국 주류 정치계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따라서 청교도신학/신앙은 필연적/필수적으로 정치성을 띤다. 구약 시대와 같은 지상(地上) 신권/신국/신정주의 통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러 점에서 볼 때, 적어도 미국의 청교도신학은 실천적인 면에서 그들의 이상과는 달리, 이름처럼 순결하거나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낀다.
청교도 신학/신앙은 신약 복음의 알맹이를 갖고 있지만, 이스라엘-유다처럼 하나님의 왕국을 현세에서 구현하려는 목적 때문에 구약적이라는, 근본적인 자기모순 체제를 갖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제2메시아를 오래 꿈꿔온 유대인들의 찌온주의 이상과 별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유대계 출신인 잔 헤이기 목사 같은 미국의 과격파 문제인사는 청교도신앙/애국주의와 찌온주의를 결합시키기도 한다.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과 이후 청교도신앙, 현대 청교도 신학이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오해했고, 오해해 왔고, 지금도 계속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 왕국은 믿는/거듭난 사람들의 심령 속에 이뤄지는 것이지, 결코 세상 구조나 체제 속에 이뤄지지 않는다! 세상에서의 하나님 왕국 주권 통치는 다만 예수님의 평화 재림 후 천년 간 완전 지상통치가 이뤄질 때나 가능한 얘기다.
이 점을 청교도들은 혼동하고 오해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처럼 현재 세상의 임금/신은 마귀 그 자다. 그런데 어떻게 그 자의 시스템/메이트릭스라는 여건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수 있는가?! 어불성설이다.
바로 여기서 주권주의/카톨맄교/패러처치/'중보기도'운동/성시화운동/대언자운동/신사도운동/기타영성운동/뉴에이지운동/비밀집단/기사단 등의 총체적인 불순한 야합과 결탁을 본다.
미국 현대 청교도 사상가들은 현대의 온갖 잡다한 외래영성과 무관하지 않다.
순결을 추구하는 그들의 역설적인 불순을 보는가?
오늘날은 미국 영성 물을 먹은 한국 교계도 마찬가지다.
청교도 신앙을 추구한다는 한국의 교파/교단들이 관상영성/'목적주도론'영성/떠오름(이머징)영성/신사도영성, 더 나아가 근(近) 뉴에이지 영성 등 온갖 잡다한 영성에 탐닉해 있다. 더구나 평소 신앙적/신학적인 '근본', '보수'와 '순결'을 목청껏 외쳐 온 모모 교단들도 그렇다.
이게 무슨 순결이며 성결이고, 세상으로부터의 성별이란 말인가!
이 어찌 철저한 자기 모순이 아니겠나?
이상 내용을 간추려 본다.
청교도 신학의 근본적인 오류는 바로, 지상의 신국을 추구하는 그 정치성에 있다.
주권주의는 칼뱅주의/개혁신학이 주장하는 소위 하나님의 '절대주권' 이론처럼 신본적인가? 그보다는 인본적/인위적인 신본주의다. 하나의 옥시모런(자체반어)처럼.
기독교인들의 세상 통치 추구가 잘못됐다는 단적인 예를 든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란 것을 강조한 장 칼뱅은 구약 신정시대도 아닌 신약시대에 제네바 순결/순수 통치를 추구하면서 이단자를 잡아다 화형시키기까지 했다. 고대 로마 황제들처럼. 박해 받던 기독교인들이 당했던 그 순교를 이단아인 남에게 "갚아 준" 것이다. 칼뱅주의자들이야 뭐라고 해명을 하든, 실상 천주교를 흉내낸 살인극에 불과하다.
구약적 신정시대도 아닌 신약시대에 우리가 그럴 수나 있는 것인가? 그런 칼뱅의 발상이 옳다면, 초기교회 사도들도 당대의 이단자들을 모조리 잡아다 화형했어야 옳고, 곳곳의 광장마다 맨날 피투성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로마 황제들의 잔인한 처형법을 카피한 카톨맄교에나 어울리는 것이다.
인간의 뜻에다 하나님을 내리모셔다 통치하려 했던 제네바 '신정' 통치는 결국 칼뱅과 그 따르미들의 "위대한 착각"이며..바티칸의 행보와 대동소이한 셈이 됐다. 제네바 통치가 성공했다면, 신교의 바티칸이 될 법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칼뱅이 신정을 추구한 현재의 제네바는 세계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기독교의 온상이 되어 있다. 마치 네덜란드 개혁주의의 이상을 추구했던 암스테르담이 최악의 섹스 온상의 하나로 화해 버린 것처럼. 네덜란드 개혁주의 통치를 추구했던 남아프리카가 오랫동안 백인 '아파르트헤이드' 정신을 낳았고 그 결과 오늘날 흑인들의 범죄의 온상이 돼 버렸듯.
왜 그럴까..? 이런 것은 명백히 신 절대주권주의가 아니라 인본적인 주권주의인 탓이다. 그런데 청교도 신학에서도 이와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성도는 이런 모순점을 꺠닫고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앞서 비쳤듯, 윌리엄 브랟퍼드, '언덕 위 빛 동네' 이론의 잔 윈트롶, 올리버 크롬웰 등은 기독교에 의한 세상 통치를 추구했다.
그들의 '주권주의'는 실상 하나님의 신본적 주권이 아니라 자기네 스스로가 추구하는 인본적 주권주의였다. 이건 바티칸도, 제네바도 마찬가지다. 즉 청교도 신앙의 내적인 어젠다는 전제와는 달리 신본주의보다 인본주의에 더 가깝다는 뜻이다.
이래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1. 성경 자체 것 이외에 성경을 엇비슷이 원용한 특색 있는 사상/철학/신학 등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실망하게 된다.
2. 현대의 퓨리턴들은 순결/순수한 것을 찾느라 신사도운동이나 번영신앙과 반대되는 것들을 추구할 테지만, 결국은 뒷선이 서로 맞닿아 있다! 다 주권주의라는 말이다.
거기가 거기, 오십 보 백 보인 것이다.
지상 국가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만들어 기독교 이상으로 다스려 보겠다는 청교도적 발상은 이미 로마 바티칸에서 실험돼 온 주권주의 발상이며,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제국주의요 식민지주의다.
3. 이러한 청교도 신학적, 필그림적 주권주의 패러다임 아래서는 사실상 성경이 명시한 성도의 필연적인 박해/순교의 의미도 사라져 버린다. 박해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의 의미성도 없어져 버린다. 세상 속에 세울 '하나님의 왕국'을 통해 지배계급이 되길 원하는데, 어떻게 동시에 피(被) 박해가 가능한가?
청교도주의가 추구해 온 주권주의, 세상 속의 '하나님 왕국', 신정주의(theocracy), 신법치주의(theomony) 등은 지나간 구약시대에나 적합했던 적합한 이즘들이다. 기독교로 세상 사회를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톨맄적 '십자군' 정신 내지 기독교 식민주의, 기독교적 제국주의(imperialism)나 다름 없다.
지상에서의 온전한 하나님 왕국은 거듭난 사람들의 심령 속이 아니면 예수님의 평화 재림 이후 천년시대에나 가능한 일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나그네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 시스템 속에 이뤄지지 않는다.
이 땅은 현재 한시적으로 싸탄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등 족장들은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하늘 본향을 찾는 나그네로 살았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발한 카톨맄교회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사상
카톨맄적 주권주의에 반발한 개혁가(플러스 개혁신앙/후기 개혁신학)
카톨맄적 주권주의에 반발한 영국 교회
영국교회의 주권주의에 반발한 청교도
영국교회와 청교도에 반발한 필그림(분리파, 미국 회중교회) 등..
이들이 모두 나름 역설적인 주권주의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가는 곳에서마다 식민지적 세상 개혁/지배 통치 사상을 갖고 있었다. 뉴에이지 사상도 궁극적으로 주권주의적인 바탕을 갖고 있다.
윌리엄 브랟퍼드는 필그림(=나그네/순례자)들로 자임했지만, 신대륙에서 엄격한 청교도식 신정을 구사하려 했다. 조너턴 에드워즈의 사상도 대동소이했다. 그는 '불과 유황' 메시지로 사람들의 심령들보다는 사회를 부흥/개혁하려 했다. 제네바의 칼뱅처럼.
미국의 청교도 개혁 정신은 알고 보면 인간 심령보다는 사회 지배에 더 관심이 있다. 이러한 주권주의가 곧 패러처치들을 낳기도 했다. 더 나아가, 오늘날 미국 진보/보수계의 청교도 신학이나 주권주의 사상을 표방하는 교계 명사들과 인사들 다수는 다양한 영성운동 어젠다와 뒤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는 알기 바란다.
한국 교계에서 청교도 신앙과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같은 청교도주의를 표방하는 많은 교계 명사들이 관상 영성이나 떠오름 영성, 목적 영성이나 신사도영성에 개입된 사람들이 서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예컨대 자신이 관상영성가인 맄 워런은 신사도 운동의 대부 피터 왜그너나 근 뉴에이지성 인사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진실을.
이런 것이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순결이고, 세상으로부터의 성별인가?
'언덕 위 빛 동네' 사상은 프리메이슨 사상과도 야합해 미국의 정부를 유지해 왔다. 청교도 사상에 비교적 투철했던 미국의 10여 초기 건국 대통령들의 역사는 역사에서 사라진 야사가 돼 버린다. 대신, 사실 상 성경 신앙과 거리가 먼 프리메이슨 고위인사가 된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삼는다. 워싱턴은 미국의 '수호신'이다.
워싱턴은 자신의 취임식은 물론, 연방의사당 정초식 등을 모두 프리메이슨 의식으로 치를 정도로, 철저하고 충실한 메이슨이었다. 워싱턴DC 자체가 메이슨 이상을 구현한 설계도 위에 건립된 도시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미국 청교도신앙을 대표하는 한 인물일 수 있겠는가?
이제, 맺음말이다.
잘 모르고 단지 인상이 좋아 청교도 신앙/신학을 추구하면서 성경이 아닌 영국/미국식 신앙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내막을 대강이라도 알고서, 분별과 검증을 하기 바란다.
왜 구태여 흘러간 역사 속의 제3자들인 청교도의 사상을 빌리려는가?
우리에겐, 성경 말씀과 성경적 신앙으로 충분하다.
우리에겐 아브라함주의, 이짜크주의, 야콥주의, 요셒주의, 모쉐주의, 예슈아주의, 판관(사사)주의, 슈무엘주의, 다빋주의..페트로주의, 요한주의, 파울주의, 아폴로주의..등이 구태여 따로 필요하지 않듯..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청교도주의도 필수적이지가 않다. 과거에 초등학교 문턱도 못 드나든 거듭난 할아버지/할머니들은 그런 이즘들을 몰라도 성경 말씀만으로 하나님의 왕국의 멤버들이다.
남들의 주관적 해석과 사상 시스템에 노예처럼 묶이지 말자.
오직 성경 -그것 뿐이다! 그것만이 성도의 필수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모든 영들, 모든 소리들, 모든 사상들에 대한 영적인 판단과 검증, 분별이 필수적이다(요한A서 4'1; 코린토A 2'12-16; 14'7-11).
깨어 분별하자!
- 'City upon a hill'이라는 이 사상은 마태복음서 5'14을 미국 건국선조의 한 명인 잔 윈트롶(존 윈드롭)이 적당히 아전인수 격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언덕 위 빛 동네'는 세상 속의 하나님 왕국일 수가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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