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중재와 초자연적 승리
- 히즈키야 왕의 간구와 예호바님의 응답
바탕본문: 왕들B서(열왕하) 19장, 연대기B(역대하) 32'16-21, 예샤야후(이사야)서 37장
앞서도 비쳤지만..성경은 유다-이스라엘 분열왕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왕(善王) 히즈키야에 관해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돼 있습니다. 왕들B서(열왕하), 연대기B(역대하), 예샤야후(이사야)서 등에 매우 상세히 기록돼 있지요.
물론, 히즈키야 왕 역시 말년에 문제가 있었고 완벽한 군주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특히 그의 겸허함을 귀히 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통회, 애통하고 겸허한 사람들을 참으로 귀히 보십니다! 오죽하면 북 왕국의, 가장 사악한 임금 아하브가 잠시나마 겸허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해 주셨을까요(왕들A=열왕상 21'27-29).
아슈르의 산헤립과 그의 신복 랍샤케 등은 그밖에도 여러 말로 예루샬렘 시민들을 회유하려 들 뿐더러 히즈키야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예호바(야웨)님을 거듭 거듭 폄훼/모독하고 조롱까지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다른 이교 신들과 다름 없는 하찮은 신이신 것처럼 함부로 입을 놀린 거죠. 이 같은 국신 모독 화법은 그들이 정벌전에서 써 먹는 상투적인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이미 유다의 주요 도시들에 이어, 제2의 도시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라키쉬가 함락된 후였기에 이들의 말은 매우 권위와 설득력 있게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시민들을 겁 주는 위협적이고 강력한 언변이었을 것입니다.
산헤립과 대표단의 말을 왕들B서, 연대기B, 예샤야후서 등이 한결같이/공히 상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뭘까요?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을 모독하고 조롱하고 폄하한 결과와 그 대가는 엄청나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어찌 보면 대비 효과라고 할 수 있지요.
산헤립 왕이 보낸 랍샤케 등 아슈르군 대표단이 라키쉬로 돌아가자, 그들과 회담을 한 유다의 3인 대표단-엘리야킴/셒나/요아 등이 모두 자기 옷을 찢은 채, 궁에 돌아와 왕에게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히즈키야 왕 역시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그 역시 그 자리에서 왕복을 찢고 대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흔히 장례 때 입는 굵은 베옷 역시 겸허, 스스로 낮춤, 애통/통회의 뜻을 상징하지요. 옷 찢기, 재 뒤집어쓰기와 함께.
아마도 여느 군주 같으면, 겁을 먹고 앞이 캄캄하여 허둥지둥 어떻게 비상 수도방어 전략을 짜 볼까, 왕실과 고관만 딴 곳으로 미리 달아날 수 있을까부터 궁리했을지 모릅니다. 더욱이 지금 국내의 거의 모든 도시가 골고루 침공을 당해 거의 수도권만 남은 상황이 아닙니까? 산헤립은 지금 최후의 보루인 수도를 대강 간단히 '접수'하겠다는 심보로 회유 시도 겸 경고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는 그런 인간적인 생각보다는 성전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엘리야킴, 셒나는 물론 성전의 고위급 사제들에게 굵은 베옷을 갖춰 입게 하고, 그들을 대언자 예샤야후에게 보내어 여차저차 정황을 알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굵은 베옷 차림의 고관들이 예샤야후를 찾아와 왕의 말을 전합니다:
"..오늘은 고통과 질책과 모욕의 날입니다. 아이(들)을 출산하려고 하나, 낳을 힘이 없듯 말입니다. 예호바 곧 그대의 하나님께서도 랍샤케가 한 말을 들으실 테지요. 그는 그의 주인인 왕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조롱하려고 보낸 사람입니다. 예호바 곧 그대의 하나님은 들으신 말 그대로 꾸짖으실 테니, 그대는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오."
히즈키야의 위 첫 마디는 하나의 "잠언적인" 비유입니다. 마치 산모가 쌍둥이를 낳으려 해도, 그럴 힘이 없어 엄청난 산고를 겪으면서 아이와 산모가 다 죽을지 모르는..그 같은 절박하고 거의 절망적인 위기에 나라가 처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위기를 극복할 궁극적인 길은 오직 하나님 밖엔 없다는 믿음의 호소가 깔려 있습니다.
한 가지 눈여겨 볼 점은, (모두 과거형으로 옮긴 한글 번역들과는 달리) 원문(플러스 영문번역들)에서는, 히즈키야가 "(랍샤케의 망언을) 예호바 곧 그대의 하나님도 들으실 테지요"라고 미래형을 썼다는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어 용법상 '예언적 과거'라는 것도 없진 않지만, 여기서 이 미래형은 '코너'에 몰린 듯한 히즈키야의 두려움과 당혹과 절박감을 미묘하게 암시해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 사실 이에 대한 응답(원문) 첫 부분에서 하나님은 '두려워 마라'고 하시지요. ]
그도 그럴 것이..지금 수도권에서 얼마 멀지 않은 라키쉬까지 유다 전국이 다 아슈르 군대의 발 아래 짓밟히고 예루샬렘의 자신과 시민들만 살아 남아 있는 막다른 상황이기에, 히즈키야는 두려움과 절체절명의 안타까움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도움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혹 이 예루샬렘마저 적국의 손에 넘기시진 않을까? 지난 번의 이스라엘처럼 나라를 온통 적국에 넘기시는 게 혹여 그 분의 뜻은 아닐까? 랍샤케의 모독적인 통보 발언을 과연 하나님은 듣기나 하실까?"라는 불안한 의혹이 내심 히즈키야에게 있었을 법 합니다.
이런 물음을 우리는 시편 기자들이나 하바쿸(하박국) 같은 대언자들에게서도 흔히 발견하곤 합니다. 주님마저도 십자가 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숨을 몰아 쉬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물음으로 절규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 속의 물음이 "하나님도 들으셨지만"이라는 확연한 과거형 쪽보다는 막연한 미래형으로 기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히즈키야는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독을 그냥 두실 리가 만무해! 바로 그 점에 대해 뭔가를 하실 거야"라는 소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산헤립이 랍샤케를 통해 지꺼린 망언이 왕 자신보다 하나님 당신께 대한 모독임을 새삼 상기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기도할 때, 우리를 박해하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사실을 기도 속에서 아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주님처럼 그들을 위한 용서도 빌어야겠지요.
하나님의 일차 응답
그러자, 예샤야후가 히즈키야 왕의 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전합니다.
"..예호바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네가 들은, 아슈르 왕의 신복들이 나를 모독한 말 때문에 두려워 마라. 보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위에 둘 테니, 그가 소문을 들은 뒤 자기 나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를 자기 나라에서 칼로 죽게 할 테다!"
이야 말로 큰 위로의 말씀이지요! 왜 그러냐고요? 다섯 가지로 그렇습니다.
1. 하나님은 히즈키야 왕의 기대 이상으로(!) 이미 적의 망언들을 귀담아 듣고 계셨습니다.
2. 히즈키야의 믿음대로 그 망언들을 예호바님 당신께 대한 모독으로 여기셨고..아울러 그런 망언 탓에
두려워 하지 말라고 위로/격려하십니다.
3. 적국 왕 산헤립을 처단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적군에 대한 모종의 조치도 곁들여..)
4. (결과적으로) 예루샬렘은 물론 기타 남은 도시들이 함락되지 않고 안전할 것을 약속하신 셈입니다.
5. 왕도 백성도 모두 살아 남게 되어, 나라를 회복할 기회가 주어진 셈입니다.
히즈키야 왕이 예샤야후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이 짧은 말씀은 이처럼 다섯 겹(5중) 위로가 된 셈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최우선적으로 하나님 당신을 모독한 아슈르 왕을 다루시겠다는 말씀을 하심을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어렴풋이, 하나님이 한 가지를 (간접적으로) 유보해 두셨음을 느낍니다. 그것은 위 말씀에서 당장 산헤립의 군대 곧 적군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직접적인 언질을 하시진 않은 점이지요. 왜 그러실까요? 추정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하나님은 히즈키야가 좀 더 하나님께 간곡히 매달리기를 바라셨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볼 만한 일들이 잠시 후 생깁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영'을 산헤립 위에(일부 번역은 '..속에'로 옮김) 두겠다고 하십니다. 산헤립이 '소문'을 듣고.. 결국 그 결과 귀국하게 만드는 이 영은 일종의 미혹의 영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그런 영을 부리시진 않지만, 악한 자들 위에서 영들이 역사하게끔, 싸탄이 부리도록 허용하십니다. 산헤립이 듣는 그 '소문'은 과연 뭘까요?
'소문'이란, 바로 또 다른 대국인 쿠쉬의 티르하카 왕이 산헤립과 싸우려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풍문이 아닐 것입니다. 티르하카는 쿠쉬가 미쯔라임까지 지배하던 누비아 전성기의 제25왕조의 왕이었습니다(본문 중간의 별도 셐션 참조).
리브나와 산헤립
한편 아슈르 대표단으로 예루샬렘으로 왔다가 라키쉬로 돌아가던 랍샤케 일행은 도중에 산헤립 왕이 라키쉬를 떠나 리브나로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리브나는 라키쉬와 예루샬렘 사이의 도시였지요. 아마도 산헤립은 라키쉬의 일행과 도중 합류할 것을 예상하고 이미 예루샬렘 공략을 위해 라키쉬를 떠나 오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랍샤케가 라키쉬 대신 리브나로 갔더니, 산헤립이 거기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리브나 곁 평원이 아슈르 전군의 '공동묘지'가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을까요?
리브나의 '예레미야'
리브나 성은 그때까지 정복되지 않고 있던 유다 주요 도시들 중 하나로, 약 54년 뒤 바벨론에 의해서야 비로소 점령 당합니다.
리브나는 고대 광야시대 후 카나안 정복 시대 당시, 예슈아 장군이 함락시킨 카나안 도시들의 하나로서, 유다 지족 몫이면서 사제(제사장)들에게 할당돼, 도피성(우발적 살인자의 합법적 피신처)의 하나로도 지정됐습니다. 이 성은 과거 우상숭배가 들끓던 예호람 왕 당시에, 에돔과 연합해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도시이기도 하지요.
리브나가 훗날 성경 기자들의 관심사를 끈 대목은, 바로 히즈키야의 증손자인 또 다른 선한 왕 요시야의 장인인, 예레미야(주의: 구약 '예레미야'서를 기록한 대언자 예레미야와는 동명이인. 성경 기자는 동시대의 대언자 예레미야와 구분하기 위해 '리브나의 예레미야'라고 의식적으로 씀)의 고향이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곧..요시야의 아내인 하무탈 왕비가 본디 리브나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하무탈은 유다 최후의 왕 예호야킴-제데키야 형제의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아울러, 요시아 왕때로부터 유다가 망하던 제데키야 왕대까지 약 54년간 활약한 주요 대언자/성경기자 예레미야(일명 '눈물의 선지자')가 동명이인인 '리브나의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아무튼, 산헤립이 리브나를 상대로 전투를 하고 있었다면, 리브나는 아직 항복하거나 패하지 않고 맹렬히 맞싸우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아울러 하나님은 예루샬렘은 물론 리브나 등 여러 도시들을 아직 보존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만약 리브나가 이때 항복하거나 점령됐다면, 아마도 '리브나의 예레미야'와 하물타 왕비는 태어나지 못했을지 모르지요.
더욱이 앞에서 비친 대로, 산헤립의 군대는 이 전투 즈음, 바로 리브나 부근에서 전멸 당해 버립니다.
참고셐션: 파라오 티르하카
formerthings.com/tirhakah.htm
일명 '타하르콰', '타라코스'.
미쯔라임(에짚트) 제 25대 왕조(누비아)의 제3대 왕. 이 왕조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졌다. 대략 주전 690-664년이 통치기로 추정되는 그는 미쯔라임을 정복한 누비아 나파타의 왕 '피예'의 아들이었다. 티르하카는 (현재의) 수단 지역에서 태어나 멤피스에서 즉위해 약 50년간 다스렸다.
그가 미쯔라임/누비아 등 2개 제국을 통치했다는 사실은 그의 것으로 입증된 조각상의 이마에 있는 두 마리 '이아렡'(iaret, 똬리를 트는 코브라를 가리킨 당대 미쯔라임 용어로 파라오의 왕관 앞머리 등에 붙어 있고 왕권을 상징)으로 알 수 있다. 그의 혁대엔 "완전한 신, 영원히 살아있는 타하르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또한 카르낰의 아문 신전 등 다양한 건축물을 개조하면서 곳곳에다 자기 이름을 남겼다.
옆그림: 티르하카의 스핑ㅋ스
티르하카 관련 조각상들을 보면, 티르하콰는 다른 미쯔라임 군주들에 비해 얼굴이 동그란 편이다. 미국 고고학자, 제임스 프리처드 박사의 근동사 연구/번역에 따르면, 에사르하똔 왕으로부터의 다음과 같은 관련 비문도 남겨져 있다.
"튀로(히브리어 '쪼르', 한글성경의 '두로') 왕 발루는 그의 벗인 누비아의 왕 티르하카를 신임했다. 그래서 나의 주 아슈르의 멍에를 내던져 버렸다."
"나는 미쯔라임과 쿠쉬의 왕 티르하카를 상대로 쉬지 않고 날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다..이쉬후프리 마을로부터, 거기서 15일 행진 거리인 그의 왕도(王都) 멤피스까지 그랬다."
위 기록들은 훗날의..티르하카 왕과 에사르하똔과의 대전 내용에 관한 것이고, 성경(왕들B=왕하 19'9, 예샤야후=이사야 37'9)에서는 티르하카와 산헤립 왕과의 대전을 시사해 준다.
티르하카는 유다를 도와(?) 산헤립을 친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엔 산헤립의 후손 에사르하똔 왕에게 여러 번 공격 당하다가 결국 왕조가 망하여, 제 26왕조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티하르카의 다양한 유품이 남아 있는데, 매(새) 신에게 포도주를 바치는 조각상, 그의 화강암 '샤브티'(장례의전용 소형 돌모형) 등이다.
'소문'과 산헤립의 협박 편지
산헤립은 리브나 공략을 위해 자신의 아슈르 대군을 리브나 부근에 주둔시키고 있으면서, 티르하카의 미쯔라임 대군이 자신과 맞싸우러 오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긴장합니다. 이 뉴스는 그에게 예의 '소문'의 역할을 하여, 그와 군대의 사기를 앗고 김 빼는 역할을 했을 터입니다.
아슈르 대군은, 현재 유다의 여러 도시와 특히 함께 유다 제2의 강성인 라키쉬에서의 열전을 치렀기에, 비록 당대 최강의 군대라곤 하지만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는 내심 사뭇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산헤립은 속으로, 티르하카의 미쯔라임 군대와 히즈키야의 유다 군대가 연합해 자신의 군대를 앞뒤로 협공할지도 모른다고 지레 짐작 합니다. 당시 산헤립을 '배신'하고 있던 히즈키야는 미쯔라임과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녕 유다와 미쯔라임 군대가 협공하기라도 하면, 당연히 아슈르 군은 포위를 당해 양방전을 치러야 하는 큰 부담을 갖게 되지요.
그러나 당대 최강의 대군을 거느린 그는, 예루샬렘에 미리 엄포를 놓기로 합니다. 히즈키야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어 예루샬렘 군대가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티르하카의 미쯔라임 군대만 상대하여 부담을 덜어 보려는 심산이었지요. 그러나 산헤립은 이 편지에서 '소문'을 들은 자신의 이런 불안을 일말도 표시하지 않습니다.
산헤립이 사신을 통해 예루샬렘의 히즈키야에게 보낸 협박 편지는 이랬습니다:
"네가 믿는 너의 신이 '예루샬렘은 아슈르 왕의 손에 넘겨지지 않으리라'고 하는 말에 속지 마라. 봐라, 아슈르의 (역대) 왕들이 모든 나라에 행한 일들 곧 그들을 진멸한 일을 너도 들었을 터. 그런데 너라고 구출되겠냐?! 내 조상들이 멸망시킨 고잔과 하란과 레쳅 그리고 텔라싸르의 에덴 사람들을 그들의 신들이 구해 냈냐? 하맡 왕과 아르팓 왕과 세파르바임 성의 왕과 헤나와 이바(=아바)의 왕들이 다 어디 있냐?"
히즈키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2차 응답/예언
산헤립 왕의 편지를 받아 읽어 본 히즈키야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산헤립의 공갈 협박에 기가 차고 치가 떨렸지만, 곧장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 앞에 편지를 펼쳐 놓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혼자 고민하거나 대신들과 상의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직접 아뢴 것입니다.
연대기B서(역대하)에 따르면, 이때 히즈키야는 대언자 예샤야후(이사야)와 함께 하늘을 향해 부르짖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연대B 32'20).
"케루빔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호바(야웨)님! 님은, 온 땅 모든 나라들 위에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지으셨습니다. 예호바님, 귀를 기울이사 들어주소서! 예호바님, 눈을 여시사 보소서! 산헤립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려고 보낸 말을 들으소서! 예호바님, 사실 아슈르 왕들이 나라들과 그 땅들을 멸하고, 또 그 신들을 불 속에 던졌습니다.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 단지 나무와 돌로 된, 사람들의 작품이었기에, 그들이 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호바 우리 하나님, 간구합니다. 지금 우리를 그의 손에서 건져 내소서! 그래서 땅의 모든 왕국들이 님 곧 예호바님만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소서!"
히즈키야는 몇 마디 안 되는 이 짧은 기도에서 예호바님을 무려 6번, 하나님을 5번 부르고 찾습니다. 그의 용어들은 매우 강력합니다! 그는 아슈르 왕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독한 데 대한 분노를 기도로 하나님께 털어 놓습니다. 그는 산헤립이 하나님을 모독한 편지 내용을 하나님이 직접 분명히 듣고 보시기를 호소했고, 하나님은 과연 그러셨습니다!
특히 히즈키야는 살아계신 유일한 하나님 이외의 모든 신들은 사람들이 만든 하찮은 나무조각과 돌덩이에 불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의 하나님 이외에, 모든 종교의 신들이 다 그와 같습니다. 불교건 힌두교건 사람의 눈에 띄라고 나무나 돌에다 요란한 색을 칠해 만든 작품에 불과한 허수아비 신상들을 섬기고 있습니다(천주교 역시 그런 성향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성경의 참 하나님을 비웃고 있다는 점은 산헤립과 대동소이한 점입니다.
히즈키야의 기도를 우리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히즈키야처럼, 때로는 우리 앞에 부닥친 현실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펼쳐 놓고 숨김 없이 아뢰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실상을 '이실직고'하되..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비신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겠지요.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간구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히즈키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대언자 예샤야후를 통해 응답하신 내용이 왕들B서(왕하) 19'20-32에 상당히 길게 기재돼 있습니다. 히즈키야의 기도는 비교적 짧았지만, 길이와 상관 없이 하나님은 더 긴 말씀으로 답하셨습니다.
격려와 승리의 예언 등이 포함된 이 응답 말씀은 다음 부분으로 구성돼 있지요:
1. 머릿말: 기도와 진상을 이미 보고 들으셨다고 확신시키심.
2. 아슈르 왕 산헤립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 (아마도 아슈르 사신이 여태 기다리다가 이 메시지를 듣고 갔을 것임) 아슈르 왕이 모든 승리와 정복을 순전히 자신의 공적인 양 자만하고 떠드는 말들을 예로 드시고,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가 이루신 일임을 밝히심. 즉 아슈르 왕은 하나님의 심판 도구에 불과함!
3. 히즈키야와 유다 백성의 구원과 나라의 회복 선언과 메시아적 예언: 특히 '남은 무리' 개념이 두드러짐(이에 대해 아래서 추가로 다루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현재까지 다양한 도시가 정복/포위 당함으로써 아슈르 군에게 식량을 뺏기거나 밭을 불태우고 짓밟아 피폐해진 유다 경제를 고려하셔서, 향후 3년간 식량조달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예언해 주십니다(19'29).
4. 아슈르 군대에 대한 예언: 예루샬렘 성에 들어오거나 화살 한 발도 못 날릴 것이다. 큰 방패를 들고 성에 접근조차 하지 못할 것이며, (라키쉬에서와는 달리) 솔렐라(돌과 흙으로 쌓는 공성용 경사언덕, 한글성경의 '토성')도 쌓아 보지 못한 채, (산헤립만) 되돌아가되 (그는) 이 성에 두 번 다시 근접하지 못한다.
5. 하나님의 구원의 근거와 확약-하나님과 다빋을 위하여!
"내가 나와 내 종 다빋을 위하여 이 성을 방어하고 구할 것이다."
여기서 '내 종 다빋'은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다빋도 물론 그 후손인 메시아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다빋으로부터 예수 크리스토에 이르는 메시아 계보, 그를 통해 이뤄질 만인 구원을 위해 예루샬렘을 방어/보호하시겠다고 확약/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특히 이 아슈르 관련 특별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산헤립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향한 너의 역정과 너의 소란이 내 귀에까지 미쳤다. 그러니,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다 꿰고 재갈을 네 입에다 물려 너를 네가 온 길로 돌려 보내 주마."
하나님의 이 말씀은 산헤립을 짐승과 같이 비유하시기도 했지만, 사실,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아슈르 사람들이 피정복자들에게 저질러온 모습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최후의 적장인 싸탄 마귀도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폐기처리될 날이 옵니다(요한계시록 20'1-3,10).
이 응답 말씀을 들은 히즈키야는 "오, 그럼 그렇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가만 두실 리 없지."라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반면, 산헤립의 사신은 속으로 "웃기시네. 너희 신이 너희를 살려? 우리가 누군데 그래? 너희는 이제 우리 손에 몽땅 다 죽었다! 산헤립 대왕께서 리브나를 쳐 부순 뒤 반드시 너희도 함락시키러 오실 거다. 그 때까지 기다려라"고 거만을 떨며 떠났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이 메시지를 아슈르 사신이 들고 리브나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는 하나님의 승리의 확약을 들었기에, 안심하며 조용히 하나님이 "손 보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체가 돼 버린 아슈르 군대와 산헤립 왕의 최후
하나님은 지체하시지 않고 즉각 적군에게 손을 드십니다.
(아슈르의 사신이 돌아가 산헤립 왕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을) 바로 그 날 밤(!),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리브나 들에 진치고 있던 아슈르 군사 185,000명을 한꺼번에 죽여 버리니 아침이 되자 모두 송장으로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연대B 32'21에 따르면, 힘께나 쓰고 싸움께나 잘하는 용사들, 사령관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을 골라(?) 죽인 것으로 돼 있어, 아슈르 군대는 이보다 훨씬 많았던(?) 모양이고, 전군이 전멸하진 않은 듯 합니다. 그렇다면 예루샬렘 성 밖에 와서 하나님과 히즈키야 왕, 시민들을 모독하고 협박한 랍샤케를 비롯한 타르탄/랍사리스 등 대표단도 죽었을 것입니다.
옆 사진: 아슈르 군과 산헤립을 전혀 구원해 주지 못한 아슈르 신 '니스롴'의 벽 부조.
이로써 하나님의 예언이 어김 없이 성취됐습니다.
당대의 초강대국 아슈르 대군이 작은 나라 유다의 수도 예루샬렘에
단 한 발도 들여 놓지 못하고, 화살 한 발 쏘지 못하고, 방패 하나도 들고 접근 해보지 못하고, 경사언덕도 쌓아 보기도 전, 모두 시체가 돼 버린 것입니다!
지상의 어떤 군대도 영의 세력을 당할 길이 없지요.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은 이렇듯 무섭습니다. 뉘우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들은 이렇게 돼 버립니다.
산헤립 왕은 유달리 대국이라는 자신감에 넘쳐 여러 번 하나님을 욕보이려고 시도했지만, 유다를 지키시기로 결심하신 예호바님 앞에 쪽도 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산헤립 왕(플러스 측근?)만 증인으로 살려 두신 것으로 보입니다. 산헤립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호바가 과연 어떤 신인지를 그제서야 단단히 알아 봤습니다.
신의 경지에 다다른듯(?) 위엄이 혁혁한 정복왕으로 자처해온 산헤립은 울분과 창피로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 하릴없이 귀국합니다.
그후 대망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꿈 꿀 생각도 못한 채, 한동안 수도 니네베의 궁에만 처박혀 있던 그는 이 끔찍한 패배를 다 숨기고 자기의 공적을 과장하고 속이는 돌비만 여기저기 만들어 세우며 생애 말기를 전전긍긍하며 보냅니다. 정복왕답지 못한 이런 모습을 왕실에서는 한심하게 봤을 터입니다.
유다 리브나에서의 초자연적 대패는 두고두고 산헤립을 괴롭힌 악몽이었고, 아슈르 신들에 대한 실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산헤립은 회한을 씹으며, 작은 나라 유다의 신 예호바를 섬기기보다 자존심과 거부감에서 어리석게도, 대국인 자기 나라의 우상 신을 계속 섬겼습니다. 아니 그는 여전히 자신을 신격화한 자기신화에 잠겨 살았습니다.
옆 그림: (산헤립의 아들) 에사르하똔 왕에게 포로가 되어 선처를 호소하는 것으로 묘사된 파라오 티르하카(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음)와 쪼르(튀로)왕 발루.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니스롴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 (왕자로 추정되는) 아드람멜렠/샤레제르가 그를 암살한 뒤 아라랕 땅(훗날의 아르메니아)으로 도주해 버립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신전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산헤립이 섬겨온 아슈르의 신이 무력무능하여 산헤립을 전혀 보호해 주지 못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 셈이지요!
과연 예호바님만 참 신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자 산헤립의 아들 에사르하똔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합니다. 에사르하똔은 당시까지 바벨론 분봉왕으로 있었습니다. 이 에사르하똔은 티르하카의 미쯔라임-누비아 군대를 멸하고 파라오를 포로로 잡습니다.
하나님의 대 히즈키야 메시지에 나타난 메시아적 예언
다시 한 번 유다의 집에서 살아 남은 무리가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열매를 맺으리.
예루샬렘에서 남은 무리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찌온 산에서 나올 테니, 예호바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리!" (19'30,31)
예샤야후(이사야)서의 전반적인 메시아적 메시지를 감안할 때 위의 이 말씀은..단지 히즈키야 왕대에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장차 신약시대에 유다의 남은 무리인 성도가 메시아를 통해 초기교회를 이루실 것을 예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만군의 주님, 예호바의 열심이 무엇보다 성취하실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무리'에 관한 예언은 여러 대언서, 특히 예샤야후 서에 더 나타납니다(예샤 10'20, 11'16,미카 4'7, ).
유다의 이 남은 무리가 오순절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초기교회가 서게 되고, 마침내 이방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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