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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전쟁? 우리의 자세!

 

 

대문 안에서 물어뜯을 불청객을 기다려온 맹견처럼, 북한이 한미 군사훈련을 사납게 비난하고 나서서 기존 조약도 일방적으로 깬 가운데 '위기'가 일보 심화된 상태로, 또 다시 국지전 내지 '제2의 한국전쟁' 가능성까지 회자되고 있다.

우리네 젊은 세대는 이래서 말로만 듣던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층 더 가슴을 조이고 조리면서 남북한의 움직임을 뜬눈으로 예의주시하고, 특히 크리스천들은 '한반도전쟁 예언'들이 이뤄질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모습들이다. 본 티엘티의 유입코드 흐름을 보니 독자들 다수의 주된 관심도 온통 전쟁, 전쟁, 전쟁에 쏠려 있는 것 같다. 과연 지난 수천년간 전쟁으로 얼룩져 온 한반도에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까?

한반도에서 언제라도 국지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현실은 북한의 수많은 도발로 입증된 바 있다. 북한은 노동당 당원들과 평양시민들, 군인들을 제외한 온 인민을 굶겨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무력은 증진해 왔고, 이런 무력을 바탕삼아 예로부터 '다 까부수갔어!' 식으로 큰 소리 쳐 온 호전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의 이런 무차별식 침범은 한도가 있다. 그들이 매년 군사행진을 하며 뽐내는 무기를 제외한 대다수의 무기는 낡은 모델인 반면(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11791 ), 한국군과 또 협력국인 미군의 무기는 월등히 현대화된 신무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군은 북한 전체를 단기간에 초토화할 신무기를 개발한 반면, 북한은 주로 화학무기나 핵개발에다 초점을 맞춰왔다.  

그런데 구석에 물리면 쥐도 고양이를 물 수 있다는 말처럼 북한이 특유한 신경질 차원에서라도 도발할 가능성은 언제라도 있다. 북한은 또 연료도 달리는 탓에 혹 전면전 개전시엔 '남조선 40일 조기점령'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낡은 모델 무기로 최신형 모델 무기를 휘어잡고 '조기점령'을 할 가능성이 있는지도 문제이고, 설령 조기점령을 한들 주변의 대국들이 가만 있을 성 싶은가? 분명히 탈환 반전이 또 벌어지고 결국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공산당 무리는 "영광스런 조국 적화통일"은 둘째치고 자멸의 절벽으로 몰리게 되어 영원히 저주받게 되며, 필경 슬픈 한민족의 피비린내 나는 자중지란 속에 온 겨레가 뼈아픈 희생과 아픔만 한 차례 더 겪고 끝날 것이다.
북한은 제발 '다 까부수갔어!' 식 성깔머리와 기분 중심의 오판과 부정적인 호연지기를 버리고, 이제라도 값비싼 선군정치와 무력축적 대신 인민들 먹여 살리기에 주력하기 바란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전쟁 가능성에 관한 담론이나 일각에서 남발돼온 한반도 전쟁 예언들이나 그 어떤 무엇보다 우리의 태도, 특히 크리스천의 마음 자세라고 생각된다.


우리, 한 번 진솔하게 자문자답해 보자:

크리스천이라는 나는 전쟁위기를 염려하면서 과연 그 위기와 우려만큼 새벽마다 국내외의 평화와 국토안보, 국민들 특히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아니면 친구나 동료, 주변 사람들과 맨날 전쟁 담론이나 하고 실제로는 전쟁 방지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가?

나는 주님과 사도들의 명령대로 박근혜 대통령..하다 못해 김정은을 위해서까지 기도하는가? 우리나라 정부와 국회, 법원과 국군, 도지사로부터 시장...통장까지 지방행정부를 위해서도 기도하는가? 성경이 신자들의 평온을 위해서라도 위의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는가?


휴전선 가까이 우리나라 최전방에서 거의 '전쟁 냄새'가 나는 대치 상황과 위기를 체감할 수 있듯, 우리 크리스천들의 영적 전쟁의 최전방이랄 수 있는 성도의 기도전선을 보면, 우리의 현재 무장 방비 상태와 자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알고 보면, 우리네 신자들의 기도는 언제나 모자라는 상황이지 넉넉하진 않다. 과연 하나님은 "오냐, 이젠 됐다! 너희들의 간절한 탄원과 기도에 질렸다. 당장 한꺼번에 다 이뤄 주마!" 하실 때도 있는가?
성도의 기도는 늘 모자란다. 넉넉치가 않다.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사도는 교훈했지만 우리는 늘 기도하지 않는다. 드라마 볼 시간은 넉넉히 잘 챙기지만 정작 우리의 기도 시간은 늘 부족하다. 그렇지 않은가? 

 

구약 성도들, 주님과 사도들이 새벽 기도의 본을 보였지만, 대체로 우리네 새벽 기도 모임은 거의 한산하고 '특새'가 아닌 평소엔 늘 전체가 아닌 극소수가 모인다. 잘 먹고 잘 살다 보니 잘 "퍼져" 잔다.

사실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을 바치지 않고 긴장된 삶이라 하기가 어렵다. 평소 현대생활에 스트레스에 하도 치인 우리는 긴장보다는 느슨함을 더 즐긴다. 그래서 전쟁위기를 느끼는 만큼 긴장하지를 않는다.
전쟁 위기를 느끼면 느낄수록 자연히 마음 자세도 전시체제로 가게 되고 당연히 더 긴장하게 되련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냥 "전쟁 나면 내 좋은 것들이 어떻게 되지?"라는 걱정 뿐이다. 

아이러닠하게도, 맨날 출격훈련 중인 공군 비행장이 가까운 교회, 이런저런 군 부대에 둘러싸여 맨날 사격훈련 총소리를 듣고 있는 교회의 새벽기도 모임이 오히려 긴장되지가 않고 더 허술할 수도 있다. '만성'과 '면역'이 되어서다.


더 나아가 지도자의 문제는 더 크다. 우리나라 새벽기도의 심각한 문제라면, 바로 인도자의 설교 길이이다. 설교가 너무 길어, 정작 교인들이 기도할 시간이 늘 모자란다. 설교 경청 모임인가, 새벽기도 모임인가?

성도들을 기도하러 불렀으면 기도를 시켜야지, 이른 시각부터 자기 능변 자랑이나 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나님께 안타깝게 부르짖으려면 그만큼 성도에게 더 시간 여유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설교 시간 탓에 기도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설교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새벽기도모임만큼은 설교보다는 기도에 더 주력하라는 얘기다.

 

이래서..평소 기도할 정리된 제목도 인내력도 없어 길게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은 자연히 "되도록 재미있고 긴 설교 들어주고 출근/등교를 핑계 삼은 '간단기도' 하기"가 루틴이 되어 있다. 설교자와 일부 회중 간에 일종의 타협이 이뤄지는 셈이다. 긴 기도를 하는 교우들은 자연히 설교자 눈치 보며 피곤한 설교자가 기도를 끝내고 문을 닫아야 할 시점에 앞서, 알아서 미리 일찌감치 눈치껏 기도를 끝내줘야 하는 상황일 경우가 많다. 안 그러면 미운 털이 박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장시간의 끈기 있는 간구(懇求)가 아니라  단시간 대강 해 버리는 간구(簡求)로 끝난다. 

 

이것이 어찌 전쟁 전 위기상황에 걸맞은 기도생활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냥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더 가깝다고 할 것이다.  
러시아 제국 말기에 공산당이 정교회를 비롯한 온 나라를 삼킬 때 정교 지도자들은 금빛 무늬의 호화로운 제의를 입고 축도할 때의 손 모양 따위의 하찮은 이슈를 갖고 논쟁을 벌이던 중 습격을 받아 다 망해버렸단다.
우리는 전쟁 위기를 느끼는 만큼 제대로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는 말로만, 뉴스로만 전쟁 위기를 느낄 뿐, 마음 자세가 '임전태세'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평안할 때 더 신중하고 근신하는 맘으로 궁극적으로 다가올 종말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사실상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고 살아가는가? 과연 우리가 종말을 의식하며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온갖 잡된 이상영성은 웬 말인가? 왜 비진리가 한국교회에 판 치는가?

제자들이 예루샬렘의 웅대하고 찬란한 '헤로드 성전'의 위용에 턱을 내린 채 찬탄하고 있을 때, 주님은 바로 그 건물이 돌 하나도 겹쳐 놓이지 않고 무너지고 타버릴 것이라는 끔찍한 멸망의 예언을 하셨고, 이것은 바로 주후 70년에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우리도 당시의 "맹한" 제자들 같은 모습은 아닌지?

 


우리는 제멋대로 '로토'성 한반도전쟁 예언이라는 것을 마구 뿌리는 소위 '신사도'들의 요란한 거짓 예언에 동요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항상 준(準) 전시체제 같은 상황 아래 근신해야 마땅하다.

사실 우리는 늘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할 존재들이다! 우리 자신의 자세가 전시 체제에 걸맞지 않음을 되레 신기하게 여기고 통탄할 정도여야 한다. 왜 크리스천이라는 우리가 마음 자세가 느슨한가? 결국 영적 싸움을 싸우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그 때에 닥칠 여러 위험 상황에 늘 대처해야 할 텐데도 우리는 마냥 "퍼져" 있기가 일쑤다. 이 말은 아무리 위기상황이라도 우리 속에 내재한 흔들림 없는 깊은 평화의 물결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그 평화가 아니라 정신상의 안온한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교계에 날로 만연해 가는 이상 영성과 이상한 방식의 기도는 이런 영적 싸움을 위한 무장을 돕기는커녕 해제시킨다. 안타깝게 부르짖고 울부짖는 기도가 사라져 간다. 그냥 조용히 시작해서 "비우고", "내려놓고" 몇 마디 말만 되풀이하고 조용히 끝난다. 이게 무슨 비상시기의 기도인가?! 겉으로는 중얼거렸지만 속으로는 울부짖던 한나 같은 기도도 아니다! 한국교회가 올바른 기도를 드리지 않고 계속 이런 잘못되고 거짓된 헛 영성을 추구하는 이상,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다. 과거와 같이 전쟁을 허용하실 지도.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 지 여부에 대한 책임이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없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도무지 예전과 같지 않은" 교계 전반의 총체적 타락도 충분히 그럴 소지가 된다. 이 역시 (분별없이 무차별 수용한 교인들의 책임도 있지만) 주로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지도자들은 멋대로 살면서 성도에게 기도만 강요하면, 땀 흘리고 애를 쓴 성도의 기도마저도 헛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아울러..전시체제는 물론 준 전시에도 국민 모두가 모든 것을 절약하고 검약하며 살아야 당연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전시 또는 준전시처럼 검소하고 겸허히 사는가? 물론 그런 목자들도 없진 않겠지만, 요즘은 웬걸, 'W' 호텔 레스토랑 따위에서 최고급 음식을 먹으면서 하지 않으면 교계 '거물급' 인사들과의 회동이 제대로 안 된다는 교계 인사들의 스캔들 비슷한 말들이 회자된다. 아무리 그동안 한국경제가 제고되고 고소득층이 많기로서니 국내외적으로 여전히 경제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이건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유난히 맛을 찾고 외식을 즐기는 한국은 사치낭비성 식습문화로 명성 내지 악명이 높다. 웬만하면 그냥 버리는 음식 쓰레기만 해도 엄청나다. 아무리 그래도 전시나 준 전시라면,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시엔 배를 주리기가 일쑤이고 "쓰레기라도 먹자" 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현실이 이런 식이라면 교계라고 별 예외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남은 떡 광주리도 버리지 않고 챙겨 모으게 하신 주님이 아니신가? 우리는 남은 떡 광주리를 제대로 챙기는가? 혹 우리는 단지 맨날 광주리 대신 '조둥아리'로만 주님을 본 받는 건 아닌지?

일년에 몇 억씩을 사역비 내지 '봉급'으로 받고 고급 자동차를 타고 고급 식당만 드나드는 교계 지도자들은 평균적인 성도가 땀 흘려 애써서 헌금을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라도 두는가? 자기 점심 도시락인 보리떡과 물고기를 바친 갈릴리 소년처럼 주일학교 학생들이 고사리 손으로 바치는 헌금은 어떤가?

 

오늘도 우리 교우들이 모두 무사 평안하고 범사가 잘 되기를 진정 간구하는 목자다운 목자들은 얼마나 될까? 허울만 좋은 삯꾼 목자들이 훨씬 더 많은 게 아닐까.

 

필자가 과거에 모범으로 삼고 섬겼던 미국인 목회자는 교회개척 때나 교우 1천명을 넘는 중대형교회가 됐을 때나 그야말로 목자로서 변함 없이 교우들을 섬겼기에 필자도 그를 본 받기를 바랐다. 

그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주님의 기도 모범과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 관습을 본받기 원했던 그는 미국 목회자로서는 드물게(!) 매일 빠짐없이 새벽 4시부터 혼자 새벽기도를 드리곤 했다. 온 교우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기도했기에 최소 3시간 넘게 꿇어앉아 기도하곤 했다. 주일을 시작할 때는 꼭 혼자 떡과 잔으로 성찬을 갖곤 했다. 
목자다운 그의 희생적이고 열성적인 기도 덕분에 온 교회가 풍성해졌고, 교우마다 과거보다 더욱 영적/혼적/육적/물적-4차원적인 복을 받았다. 그래서 아담한 새 교회당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형화는 결국 주님의 뜻이 아니어서, 결국엔 교회가 분화되어 여러 목회자들이 나눠서 목회를 하게끔 됐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목회자가 되기 전 경제학자이기도 했던 그 목회자가 다가올 대 경제난을 여러 번 예견했던 사실이다. 교회와 교우들이 늘 풍성하기를 바랐던 그였지만, 교회 스태프 모임 때 먹고 난 나머지 베이글도 버리지 말고 챙겨 모으게 했다. 모든 것이 알차게 운영되었다. 적어도 낭비벽이란, 그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날 설령 각 부서마다 낭비벽이 없는 교회라도 지도자가 혼자 낭비적 습벽이 있다면 문제가 크다. 사면이 다 잘 막힌 저수지라도 구멍 하나면 뚫려도 아까운 물이 계속 새기 마련이다. 그 지도자가 낭비벽을 고치지 않는 이상 만회가 힘들다. 이것은 비단 물질 차원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그렇다.

마귀는 교회와 성도를 가난하게 만드는 소질이 탁월하다. 어딘가에라도 알게 모르게 구멍을 뚫어 놓으려 한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도 늘 깨어 있어야 과소비와 허비를 막을 수 있다. 굳게 믿었던 재정부원이 몰래 헌금을 전용하는 사건이 교회에 드물지 않다. 경제난 이래 미국 교계에는 그런 일이 다반사가 됐다.

서로를 의심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굳게 신뢰했던 교우가 마귀의 유혹을 받아들이면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가 된다.

 

 

이래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전쟁 담론을 하기 앞서 우리 자신의 자세부터 가다듬어야 순서가 맞다.


전쟁위기를 느낀다면, 하나님께 날마다 보호를 요청하고 그분의 도움을 호소해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부터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
우리는 비단 외적인 전쟁이 아니더라도 늘 임전태세로, 영적 전사로서 살아야 한다.

필자 자신부터 그러기를 바란다.

어쩌면, 하나님은 한국 교회가 늘 깨어 있기를 바라셔서 호전적인 북한의 존재를 여태 허용하고 계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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