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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미술

뒤러와 '기도하는 손'의 경건미?




뒤러와 '기도하는 손'의 경건미?



크리스천 기도 자세의 표준처럼 간주돼온 것 하나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그림, '기도하는 손'(Betende Hände, 영어 Praying Hands)이다. 뒤러는 독일이 자랑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판화가/장식가/미술이론가/수학자이다.  


아마 이처럼 교인/신자들 눈에 익은 그림도 드물 것이다. 수많은 교인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 꼭 작은 벽화나 조각에 있는 이 손 모습을 바라보거나 연상하며, 이 포즈 그대로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하도록 집안에서 교육 받으며 자랐다.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꼭 이렇게 해야만 제대로 하는 기도인 양 가르치곤 해 왔다. 그만큼 이 '기도하는 손' 자세는 유명하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소위 '합장'(合掌) 자세이다. 과연 이 그림대로의 모습이 성경적인 기도 자세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합장이 우리네 기도의 표준 자세라고 일러주는 구절이 성경에 전혀 없다! 더 나아가 성경은 기도를 위한 특정 자세-눈 감기, 두 손 모으기, 두 손 마주잡기나 깍지끼기 등-에 관한 아무런 지시도 암시조차도 하지 않았다. 구태여 성경 속 신앙인들의 기도 자세를 논하자면, 서서 기도하기, 엎드려 기도하기, 무릎 꿇고 하기, 두 손(팔) 들고 기도하기 정도이다. 또 예수님은 식전 축사('식기도')나 기도 때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그 자세가 오직 주님께만 허용된 기도자세인지는 모르지만.

 

그런데도 뒤러의 기도하는 손은 지금껏 거의 절대적인(?) 파워를 구사하면서 그 그림 및 포즈가 전 세계 신/구교 신자들에게 함께 널리 보급돼 왔다. 바람직한 현상일까? 아마도 어떤 독자는 "별 걸 다 따지네. 그냥 저렇게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걸 갖고 구태여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가 있는가?"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역지사지로, 더 따질 필요도 없이 우리가 구태여 이 기도 포즈를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화인 일화들


그런데 뒤러의 '기도하는 손'의 배후에는 좀 미심쩍은 내력들이 있다. 이를 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자.


우선, 1508년작인 이 그림 속 기도하는 손의 실제 모델이 누구였냐는 이야기.. 그러니까 화가가 누구의 손을 보고 이 그림을 그렸나에 관한 일화로, 감동적인 '진짜' 스토리로 굉장히 널리 유포되어 있다. 


이 손 모델 일화엔 서로 다른 두 버전이 있다. 간추려 본다. 


먼저, 뒤러와 그의 어릴 적 친구였다는 "프란츠 크닉슈타인"이 둘 다 아주 가난한 가운데 서로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한 쪽이 고향에서 일과 기도를 하면서 지원할 동안 다른 한 쪽은 먼저 학업을 닦고, 성공한 후 돌아온 뒤에는 서로 역할을 바꿔 교대하기로 굳게 약속했다는 내용이다. (한 버전에 따르면, 그러기 위해 '동전 던지기'를 했단다). 퍽 오랜 후, 과연 알브레히트가 대성하고 귀향하여 자신을 후원해온 친구 프란츠의 집을 찾아가 유리창을 들여다 보니 그 날도 프란츠가 노동으로 거칠어진 두 손을 모아 뒤러가 대성하기를 빌고 있더라는 것이다. 뭉클한 감동에 눈물이 솟구친 뒤러가 "자, 이젠 네가 공부하러 갈 차례야"라고 말했지만, 프란츠는 고개를 저으며 "그동안 노동 일을 하다 보니 그림 솜씨도 많이 줄고(?) 손도 거칠어졌다. 이제 와서 새삼 공부를 해선 뭘 하냐? 다만 네가 성공한 것으로 만족하련다"는 식으로 대답했단다. 친구의 이 말에 너무나 미안하고도 다시 감격한 뒤러는 눈물을 흘리며 그 충정에 일말이라도 보답하는 심정으로 프란츠의 기도하는 두 거친 손을 길이 기념하려고 이 그림을 제작했다는 줄거리다.  


그 다음으로는, 내용은 위와 거의 같지만 손 모델은 친구가 아닌 뒤러의 동생이라는 설이다. 이 두 가지 설이 뒤러의 이 '기도의 손'의 중요한(?) 의미성을 풍선처럼 부풀려 주면서 동시에 이 기도 자세가 표준적인 것인 양 역시 풍선처럼 하늘 높이 띄워 주는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언뜻 경건하고 참되게 들리는 이런 스토리를 퍼뜨리는 사람들의 바람[願] 및 주장과는 달리, 이 두 가지 교대 학업/지원설은 전혀 근거 없이 조작된 허구에 불과하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지 이제부터 설명하련다. 


뒤러의 집안은 친구의 도움 없이는 공부를 못할 정도로 가난한 가정이 전혀 아니었다! 헝가리 귀율라 부근의 아이토스에서 독일 바이에른(즉 바바리아)의 뉘른베르크(Nürnberg또는 누렘베르그/Nuremberg누럼벍)로 옮겨온 이민자였던 아버지, 알브레히트 뒤러 1세는 성공적인 금세공인이었다. 뒤러 자신, 금세공 일을 배우는 것으로 장인 수업을 시작했다. 뒤러의 어머니 바르바라 홀퍼는 바로 뒤러 아버지의 스승이었던 당대 금세공 대가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부부가 뒤러의 미술 학업을 뒷바라지 하지 못하리만큼 '가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부부가 낳아서 길러낸 자녀가 모두 최소 14, 최다 18명이었고 알브레히트는 그 셋째이면서 차남이었다. 

뒤러의 대부인 안톤 코버거 역시 금세공업자였다가 출판업자가 되어, 독일 전국에 24개 인쇄소와 국내외의 수많은 오피스를 둘 정도의 대사업가였다. 따라서 뒤러가 재능은 뛰어나도 혹 돈이 없어 미술 수업을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면, 그를 가장 먼저 도울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간단한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가난한' 뒤러와 '프란츠 크닉슈타인' 사이, 또는 뒤러와 동생 사이의 아름답고 아픈 학업/후원 상호교대 맹약설은 빛을 잃고 만다. '기도하는 손'에 얽힌, 눈물을 자아내는 애틋한 배경의 에피소드가 '뻥'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검증되지 않은, 실화 아닌 실없는 이야기에다 선뜻 신뢰와 애정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인터넽에는 이 야화를 소개하는 수많은 사이트들이 자기네가 뭔 대단한 선행이라도 하는 양 이 우화로 혹세무민하고 있으니 참 개탄할 노릇이다. 



진짜 모델


그렇다면 과연 이 기도하는 손의 진짜 임자는 누구일까? 가장 손쉬운 추정은 뒤러 자신의 손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것은 뒤러가 여러 자화상을 그린 사실로도 간접 입증된다. 또한 매우 정교하게 묘사된 이 그림 속의 손가락들은 뒤러 자신의 긴 손가락들과 가장 닮아 있다. 


                       ▶ 뒤러의 자화상: (28세 때인 1500년에 제작)  


손 모양은 그렇더라도 이 '합장' 기도 자세 역시 본래 뒤러의 창의적 아이디어였을까? 그렇지 않다. 


일단 이 '기도하는 손'의 내력을 보면, 본래 이 그림은 천주교 성당 제대(祭臺) 장식화(altar piece)의 일부를 위한 밑그림이었다. 즉 야콥 헬러라는 부유한 상인의 후원으로 프랑크푸르트의 도미니칸 수도회 성당 앞면의 제대화로서 뒤러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제대화 링크: > 뒤러는 거기 들어갈 다양한 그림들 가운데서도 사도의 기도하는 자세를 특히 염두에 두고 궁리하기 시작했다.[각주:1]  


3면작으로 되어 있는 이 제대 그림에는 파울로 보이는 대머리 사도의 기도자세를 포함, 3명이 비슷한 합장 자세를 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이 사도의 포즈가 '기도하는 손'과 같다.( > ) 그러나 이마저도 뒤러의 비슷한 기도 포즈의 첫 작품이 아니었고, 그가 앞서 그린 '드레스덴 제대화'에도 비슷한 포즈가 나타나 있다( > ) 역시 3면작인 드레스덴 제대화의 가운뎃그림은 1497년 완성되었으나 양쪽 옆 그림은 1504년쯤 추가되었으며. 거기서 오른쪽의 '성 제바스티안'[각주:2]의 손 모습은 4년 후에 그린 '기도하는 손'과 거의 같다. 뒤러는 그밖에도 이 포즈와 비슷한 그림들을 앞서 그린 바 있다. 

그러므로 더더구나 친구 '프란츠 크닉슈타인'의 손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도하는 형태는 뒤러의 오리지널일까? 호주의 문화비평가 윌리엄 올베리 박사가 밝힌 대로, 사실 뒤러는 이 손 자세를 이탈리아에서 모방했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뒤러는 이탈리아로 최소 2회 견학 나들이를 했고, 그 도중에 당대 대가들의 작품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다음 두 그림을 비교해 보자. 왼쪽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안드레와 성 롱기누스 사이에 계신 부활하신 크리스토님'(1472년작)에서 오른쪽에 서 있는 롱기누스[각주:3]가 합장한 손 모습이다. 뒤러의 손 모양과 거의 똑 같다.  




만테냐의 원 그림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  


따라서 뒤러의 '기도하는 손'은 만테냐의 그림 속 롱기누스의 손 모습을 본 떠 큰 틀로 삼고, 뒤러 자신의 손을 보고 상세히 그려 넣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합장 자세가 이 때 시작됐다고 할 수는 없고, 이전부터 있어 온 천주교도들의 거의 공통된 기도 자세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한편 올베리의 관찰에 따르면, 뒤러의 기도 손은 비록 일부 관절은 좀 휜 것으로 보이지만[각주:4], 손톱은 노동자가 아닌 일반 사회인처럼 잘 다듬어져 있고, '값비싼' 종류의 옷소매를 곁들였다. 그렇다면, 더군다나 가난한 사람의 기도하는 손 모양이 아니라는 결론이 자연스레 나는 것이다. 적어도 노동자 청년이 미술학도인 뒤러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릴 적부터 최소 십 수 년간 온갖 잡일을 하느라 거칠어지고 험해진 손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 기도하는 손이 뒤러의 친구 또는 동생 아무개의 것이었다는 낭만적인(?) 설화는 순전히 누군가 꾸며낸 이솦 식의 우화임이 분명하다. 



뒤러는 경건한 신자? 


이 글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뒤러가 얼핏 간절하고 경건해 뵈는(?) 이 '기도하는 손'에 걸맞을 만큼의 기도자요 "경건한" 신자였는가 라는 의문을 이어서 다루어 보려고 한다. 


뒤러는 주로 당대의 다양한 천주교 성당 장식화 등 카톨맄 관련 그림들을 그렸지만, 세속 작품도 흔하다. 그 가운데 '멜랑콜리아 I'(Melencolia I', 1514년작)이라는 동판화가 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다 수많은 물체들을 미세하고 정교하게 새긴 이 판화는 '기도하는 손'과 맞먹을 만큼 뒤러의 대표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그림 안에는 두 날개의 '천사'로 보이는 여성 캐맄터와 '아기 천사'[각주:5] 또는 쿠피드[각주:6]로 보이는 캐맄터가 등장해 있고, 곁에는 잠을 자는 듯 웅크린 깡마른 종의 개가 있다. 


이 그림 속에는 또 여러 상징물들이 마치 무대 위의 빼곡한 소도구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다. 심각한 명상적 얼굴의 여성 캐맄터가 손에 쥐고 있는 컴퍼스 외에도 아기'천사'가 무슨 의자처럼 천을 깔고 올라타 있는 수레바퀴, 톱, 대패, 망치, 못, 직선자 등 당대의 장인들이 쓰던 다양한 도구가 바닥과 주변에 널려 있고, 곁에는 돌공(石球)과 역시 돌을 다듬어 만든 5각 다면체(희미하게 해골이 새겨져 있음!), 그리고 구석에는 연금술사들이 쓰는 소형 화로도 놓여 있다. 여성 '천사'의 허릿춤엔 열쇠 꾸러미와 자루 모양의 지갑이 달려 있다. 


두 캐맄터의 뒷 건물 모서리에는 사다리가 걸쳐져 있고, 건물 벽의 한 쪽면에는 천칭(저울), 한 쪽 면에는 모래시계와 종이 걸려 있으며, 종 바로 아래에는 숫자판이 조각되어 있다. 이 숫자판은 가로와 세로, 양방 사선 등 전방위로 각 수열의 합산이 34씩인, 소위 '마방진'(magic square, 마술정방형)이다. 이런 숫자판이 중세에 공적으로 소개되기는 이 작품이 처음이다.  


그런가 하면 하늘에는 뱀 꼬리를 달고 비상하는 모습의 박쥐 같은 새의 날개에 작품 제목이 새겨져 있고, 그 배후의 어떤 혹성(?)인가로부터 하늘을 꽉 채우는 광선이 비취는데, 박쥐가 날면 밤일 텐데도 모순되게도 하늘 위에는 아취 모양의 무지개가 걸려 있다. 그 아래 쪽은 해변처럼 보인다. 


뒤러는 도대체 이런 소도구들, 그리고 전체 그림을 통해 뭘 나타내려 한 것일까? 의혹이 일지 않을 수가 없다. 



흥미롭게도 이런 상징물들은 프리메이슨들이 매우 선호하는 것들이다! 컴퍼스와 (여기엔 없는) 대각자는 더군다나 메이슨 로고를 이루는 대표적인 두 심벌일 정도이다. 그래서 메이슨들은 그랜드 라지[각주:7] 이전시대 인물인 뒤러가 중세의 모종의 비밀집단에 개입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왔다. 개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들로서는 당연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열하면, 추가적인 석공/목공용 도구, 석구와 해골이 새겨진 돌 다면체, 소위 '야콥 사다리', 연금 화로, 천칭, 모래시계 등이 죄다 메이슨들이 반겨 "환장하는" 요소들이다. 사면에 뿌려지는 빛살, 울리기를 기다리는 종 등도 마찬가지. 특히 거의 예외 없이, 모든 메이슨 라지에는 잘 다듬은 매끈한 마름돌과 거친 마름돌이 놓여 있는 것과도 뭔가 통한다는 게 비평가들의 주장이다. 그래서 메이슨 자체 평론가들 치고 뒤러의 이 작품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더욱이 이 모든 것 위에 뒤러는 금세공인의 아들인 금세공인 출신의 수공/회화 예술 장인이었다. 메이슨들이 볼 때는 더 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메이슨 후보감인 것이다.   


과연 뒤러는 '그랜드라지 전 시대'의 메이슨이었을까? 뒤러의 생애를 볼 때 "구린"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등이 참여했다는) 중세의 모종의 비밀조합에 개입됐다는 기록이 현재까지는 전무하므로 확인하기가 불가능하다. 추정만 난무할 뿐. 



호사가들, 비평가들은 뒤러가 고대 그리스 때부터 내려오는 소위 '4대 담즙질'의 하나인 멜랑콜리아가 현대의 우울증이 아니라 일종의 '천재정신'이라고 주장한다. 즉 외로운 천재일 수 밖에 없는 명장 뒤러의 내적 고심과 장인 정신 또는 다른 고차원의 담즙질로 승화될 수 없는(?) 문제 해소의 벽에 부닥친 좌절감(?) 등을 소도구 집합들을 통해 나타내는 일종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여성 천사 캐맄터가 뚫어져라고 허공(?)인가를 바라보는 형형한 시선이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곁에서 뭘 열심히 쓰고 있는 아기천사/쿠피드 캐맄터는 일종의 정서적 도우미 격인 '유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른 개는 아마도 피로와 휴식을 위한 태만욕구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러는 실상 천재인 동시에 우울증 환자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의 몇몇 자화상에 그려진 커다란 두 동공은 안정된 행복감과 미소보다는 불안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해 준다는 분석이 있어왔다(예: > ). 실제로 그는 자신의 고향 뉘른베르크를 비롯한 유렆 도처에 창궐한 역병으로 인한 죽음과 저주를 무서워했고, 1494, 1505-1507년의 이탈리아 여행도 역병으로부터의 피신 차원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시구(詩句) 하나는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내일 매장돼 있을지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이 기간중(1498년) 그는 또 요한계시록에 근거한 종말론 시리즈 목판화를 만들기도 했다. 


사실 죽음은 일찍이 그를 좌절시킨 주된 요인이기도 했다. 지옥과 연옥도 무서워 한 뒤러는 1502년에 죽은 부친 뒤러 1세의 구원 여부를 안타까워 했고, 1514년 어머니의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을 임종하면서도 공포에 치를 떨었다. 같은 해 제작된 이 작품 멜랑콜리아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념비'라는 설도 있다. 뒤러는 또 2년 뒤인 1516년엔 신화적인 그림인 '페르세포네의 피랍'도 그렸다. 

청년 시절인 1490년대에 당대 북 유렆의 지도적 예술인인 마르틴 숀가워의 문하생이 되려고(?) 떠난 듯 하나, 정작 숀가워는 뒤러가 도착한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뒤러는 그후 모두가 금세공업자이거나 화가였던 고인의 아들 형제들을 두루 만나고 다니기도 했다. 1494년 7월 7일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23세의 나이로 구리세공인의 딸이자 아마추어 하프 연주자인 약혼녀, 아그네스 프라와 결혼하지만, 뒤러는 결혼 불과 3개월 후 홀로 알프스로 떠나 산맥을 넘으며 동식물 등 자연을 묘사한 그림들을 그려냈다. 물론 계속 같이 살긴 살았으나 둘 사이에 끝내 자녀는 없었다. 


그러나 뒤러가 메이슨이든 아니든(고심하는 멜랑콜맄 천재였든), 우리로서 중시되는 점은 그가 그다지 성경적이거나 우리가 대단히 존경할 만큼 경건한 신앙인은 분명 아니었다는 점이다. 성경에서는 부정한 동물의 하나인 박쥐의 펼쳐진 두 날개에다 자신의 명제를 내건 점이나, 한밤의 광선 위에 내걸린 모순된 무지개 형상, 사다리, 석구, 돌 다면체 위의 해골, 모래시계와 마방진, 연금 화로 등은 중세 명장들에게 거의 예외없이 발견되는 복잡한 신화적 요소 또는 헤르메틱스나 오컬티즘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성 천사, 아기 천사라는 영물은 존재하지도 않고 개념조차 있을 수 없다.   


카톨맄 교회에 대한 개혁 지향 정신도 그렇다. 메이슨들은 그들의 횃불/광선 상징이나 '일루미나티(광명파)'라는 호칭에서도 그렇듯 소위 계몽(enlightenment) 정신을 강조한다. 


뒤러는 종교개혁이 막 시작되던 무렵, 이를테면 과도기를 살던 사람이었다. 뒤러가 살던 당시의 뉘른베르크는 마르틴 루터의 개혁 중심지의 하나였다. 이탈리아를 중심한 문예부흥과 인문주의 등을 적극 지지하고 답습한 뒤러가 루터의 개혁 정신에 호응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또 루터의 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인문주의자/성경원문학자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와 친구였고, 두 번에 걸쳐 에라스무스의 초상화(1520/1526년)를 그려 주기도 했다[각주:8]. (예: > ) 


뒤러는, 루터의 최대 후원자로 그를 봐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주었던 작센 선제후, 현주(the Wise) 프리드리히 3세에게서 선사 받은 것을 비롯, 최소 16권의 루터 저서를 갖고 있었고, 루터의 개혁관에 심취해 있었다. 그랬던 주된 이유는 루터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정신적 스승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지도자 요한 폰 슈타우피츠를 존중한 데다(루터 역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 출신이었다) 슈타우피츠의 설교를 두 번 들었고, 직접 함께 식사를 하며 자신의 작품 사본도 증정했기 때문이다. 또 슈타우피츠의 이름을 딴 일종의 종교연구단체인 '소달리타스 슈타우피치아나(SS)'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뒤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히 고통 당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두려움을 달래려고, 해골을 곁에 두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금욕적 고행을 추구하는 히에로니무스(=제롬, 라틴어 성경 불가타 역자), 제대 앞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화상, 도리깨를 든 예수로 자신을 풍유하는 등 고행적 주제를 선호하여 작품을 그려냈다. 또 슈타우피츠의 영향으로 예정론, 인간의 철저한 죄성과 부패와 무가치함, 육체를 "죽이는" 고행 등의 효력을 믿었다. 


뒤러는 또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는 바람과 끊임 없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근로 정신도 강조했다. 그래선지 부단히 작품을 양산해 냈고, 죽기 얼마 전에는 자신의 수학 연구를 집대성한 수학 이론서를 써 내기도 했다. 그는 "미술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므로 유용하다"는 지론을 편 바 있다. '멜랑콜리아'와 같은 해에 제작됐으면서 대조적인 인상의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는 평온해 뵈는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연구/묵상하면서 지내고 싶어하는 작가 자신의 바람이 시사된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에도 모래 시계와 해골 등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한 해 전 작품인 '기사, 죽음과 마귀'(1513)에서는 길곁에서 악령들이 조롱하든 유혹하든 상관없이 꿋꿋이 말을 타고 가는 기사의 말 아래로 충직스런 개가 따르는 모습을 통해 어떤 정신적/근로적 그리고 영적(?) 승리 개념을 표출하려 했다. 이 판화는 그가 선호하던 당대의 문예부흥 후원자 귀족(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정치성을 띠고 있다는 일설도 있다. 뒤러는 "참 신앙의 첫 표지는 악령들에 대한 싸움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뒤러의 신앙 개념은 중세에서 개혁기로 넘어가는 문예부흥적, 과도기적 미성숙성을 엿보여 준다. 


뉘른베르크 출신의 뒤러를 익히 알았던 마르틴 루터는 1528년 4월 6일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말을 남겼단다: 

"그런 탁월한 인사를 위한 애곡은 마땅하고 바르다...크리스토님께서 그 분의 지혜의 충만(즉 천국) 가운데로 받아들여 주셔서, 가장 난국인 시대에, 그리고 다가올 더 많은 난국의 시대(미리 벗어나)에 행복한 죽음을 맞은 그를 우리는 복 받은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평안히 안식하기를. 아멘."


과연 루터의 바람대로 뒤러는 천국에 가 있을까..?






  1. 이 제대화는 그후 바바리아 왕국의 다른 귀족이 입수하여 뮌헨으로 옮겨갔지만, 거기서 소실됐다. 그런데 화가 욥스트 하리히가 이 제대 그림을 그대로 베낀 사본이 현재 뮌헨 역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본문으로]
  2. 세바스찬, 세바스티엔, 서베스천.. [본문으로]
  3. 크리스토님의 옆구리에 창을 찌른 로마 군인으로 훗날 신자가 되었다는 카톨맄 야화가 있어 왔으나 물론 전설에 불과하다. 천주교에는 성경 인물에 대한 이런 야화가 매우 흔하다. [본문으로]
  4. 뒤러는 손발 등의 신경통/관절염 등을 앓고 있었다. [본문으로]
  5. 중세 카톨맄교에서 '케룹'이라고 부른 대상. 그러나 성경의 천사 케룹은 전혀 딴 존재이다. [본문으로]
  6.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 [본문으로]
  7. Grand lodge 즉 프리메이슨리나 기타 비밀집단들의 총 지부. 1717년 런던에 세워진 영국연합그랜드라지(UGLE)가 최초의 것이다. [본문으로]
  8. 뒤러가 그린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는 몇 점이 더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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