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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성경역사-고고학

하나님은 왜 사울 왕가를 버리셨나?

오늘날의 기베앟(샤울 왕의 고향)


하나님은 왜 샤울 왕가를 버리셨나?
-왕 같은 신앙인들

 


이스라엘 민족의 군주제(왕정제)가 시작된 때는 히브리 족 선조 아브라함 족장시대로부터 무려 약 85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조를 허락하시지를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친히 대대로 도우신 족장들과 지도자들은 왕일 필요가, 또한 히브리 민족이 오래도록 왕국일 필요가 없었지요. 왜 그런지 한 번 살펴 보죠.


아브라함 이전부터 이미 미쯔라임(에귚트)의 파라오나, 또한 주변의 도시국가의 왕들이 흔했습니다(창세기 12'15). 쉬나르 왕 아므라펠 등 최소 4개 국(창 14'1), 아브라함의 조카 롵이 살았던 소돔 등 5개국 왕들, 아브라함을 축복한 샬렘의 선한 사제왕 멜키쩨뎈(14'18) 등이 그러했지요.
 
하나님은 선민의 선조로 택하신 아브라함을 당대의 왕들을 맞상대할 정도의 위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으로 왕들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었고, 아브라함 자신에게 문제가 없었던 이상 거의 조금도 굽힘이나 꿇림이 없었죠(예: 창14'22). 놀랍게도 그는 318명이라는 소수의 "가솔 군대"를 거느리고도 4개 국 연합군을 이길 수 있었고, 이는 하나님의 도움과 아브라함의 믿음 및 지도력 때문이었습니다(14'14~17a 참고).


하지만 아브라함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왕들 앞에서 비굴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왕권에 눌려 아내를 뺏겼다가 하나님의 중재로 되찾기도 합니다(12'11~15; 20'2). 이 점이 하나님 보시기에 마뜩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할 것이며, 왕들이 네게서 나올 것이다"(17'6,16. 이하 성구 사역). 


마치 왕들의 선조답게 이제부터 믿음을 지키고 처신을 잘 하라는 말씀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고도 하나님의 이 약속은 수 백년 후에나 이루어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은 구태여 왕이 될 필요도 없이 왕 같은 권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차크 역시 게라르의 아비멜렠 왕과 맞먹는 사이였습니다(창 26'26 이하 참조). 이차크의 아들 야콥(이스라엘)은 아들 요셒이 미쯔라임의 제2인자인 총리대신(국무총리)이 되는 통에 파라오를 축복하기까지 합니다(참고: 41'38~44; 47'7~10). 본디 축복은 (영적으로) 높은 사람에게 받는 법입니다(히브리서 7'7).


하나님이 고대에 믿음의 사람을 왕처럼 높이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요셒이었죠. 요셒은 형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여기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파라오에게 아버지로, 그 온 집에 주로, 미쯔라임(에귚트) 온 땅에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창45'8)    


하나님은 그 분만 의지하는 인내와 끈기의 젊은이인 요셒을 늘 형통하게 하셔서, 마침내 당대의 강대국인 미쯔라임의 왕 파라오의 꿈을 풀이하게 하신 뒤, 파라오로부터 나라 제 2 인자의 권위와 함께 격에 맞는 대우를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며, 그러기까지 요셒은 늘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대로, 바로 이 요셒을 통해 야콥의 70여 가솔들은 미쯔라임에 거주하면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되지요(46'3 비교: 미쯔라임출국기=출 1'7,9).

이처럼 하나님은 겉으로는 '보통사람'처럼 보이는 신앙인들을 왕들에게 대우받는, 왕들과 맞먹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미쯔라임 출국시대의 지도자 모쉐는 어떠했나요? 그는 히브리 족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역시 어릴 적부터 파라오 왕궁에서 살면서 40년간 지내더니, 파라오를 당당히 상대하는 민족의 지도자로 하나님이 키워 주십니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계속 지도자이기를 겸양하고 두려워하는 모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엘로힘(하나님) 같이 되게 하였다..' (출 7'1b.)


그 정도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높여 주시니, 구태여 사람이 왕이 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 후에도 모쉐의 후계자인 예슈아(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카나안까지 이끄셨고, 유다 지족의 후손인 칼레브(갈렙)의 조카이자 사위인 옽니엘을 카나안 정주시대의 첫 판관(判官=사사/師士/judge)으로 삼으십니다(판관기=삿 1'12). 옽니엘 이후 수많은 판관들이 대대로 민족을 다스리지요(2'16). 

판관들 가운데는 옛 지도자 모쉐나 예슈아의 신앙을 이어받은 사람들도 없지 않았으나, 쉼숀(삼손)처럼 도덕성이 다소 결핍된 사람들이 있긴 했어도 그런 대로 나라를 유지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왕이 없는데도 하나님을 더욱 참 군주로 섬기지 않는 이스라엘은 뭔가 무질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판17'6; 21'25).

사실 하나님은 이미 미쯔라임 출국 후 광야시대 때 이미 장차 이스라엘에 왕이 생길 것을 내다보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고하셨더랬습니다(신명기 17'14). 이는 경고 차원에서 언급하신 말씀이었습니다(17'15~19).

그러다가 마지막 판관인 슈무엘(사무엘) 때에 와서 비로소 이스라엘 민족의 강력한 탄원에 따라 불가불 군주제를 개설하게 되지요(슈무엘A서=삼상 8'4,9,22).

참 아이러니하게도, 판관시대 말기인 슈무엘 시대는 (바로 전대인 엘리와도 대조적으로) 수 백 년간의 판관시대 가운데서도 가장 판관의 영력과 지도력이 두드러진 때였습니다. 슈무엘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한 지도자가 드물었지요. 
그런데 그가 늙자, 백성이 전에 없이 더 왕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웃나라 펠레쉩의 위협이 점점 더 커져가자 영적으로보다 군사적/세속적으로 더 강력한 지도자를 바랐던 것이지요. 나라도 다스리고 전쟁 때는 앞장서서 싸워 줄 그런 용사인 왕을 바랐던 것입니다.
   
슈무엘도 백성의 그 점이 자못 난감하고 의심쩍었습니다. 처음엔 "여태 잘 해 오다 이제 와서 판관인 나를 버리려 하다니.." 라고 자못 불쾌하게 생각했더랬습니다(슘A 8'6,7). 그래서 샤울을 첫 왕으로 추대한 뒤에도 슈무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호봐님께서 예룹바알(기데온)과 베단(바랔)과 예프타(입다)와 나, 슈무엘을 보내셔서 여러분을 여러분의 온 주변 적들의 수중에서 건져내어 여러분을 안전히 살게 하셨는데도.."(12'11,12)


과거 분명히 왕조 시대가 올 것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간 하나님이 군주제를 쉽사리 허용하시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슈무엘에게 계시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 심경이 잘 나타납니다(참고: 슘A 8'5~22):


   "..그들이 너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나를 거부하여 자기네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란다."(8'7).
     
이것은 하나님의 "속 아픔"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고대의 모쉐나 판관, 슈무엘 같은 영적인 지도자를 통해 당신께서 몸소 왕으로서 계속 다스리기를 바라셨지만, 때가 차니까 이스라엘이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몸소 택하시고 갖은 사랑을 베풀어 오신 당신의 백성에게서 이런 대우를 받으시다니요.. 사람이라면 그 슬픔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 이런 때가 올 것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슈무엘은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을 모든 재난과 고통 가운데서 몸소 구하여 내신 여러분의 하나님을 오늘날 거부하면서 말하기를 '이젠 우리 위에 왕을 세워 달라' 하는군요.."(10'19)


   "..여러분의 하나님 예호봐(여호와/야웨)님께서 여러분의 왕이신데도, 여러분은 저에게 '아니오,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12'12b)  


아무튼 슈무엘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나님이 미리 골라 뽑으신 베냐민 지족 키쉬의 아들인 샤울을 왕으로 기름 붓고 백성 앞에서 공식 선임합니다. 샤울은 온 백성 가운데서 키가 가장 크고 허우대도 좋거니와, 애당초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백성의 이 요구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선으로 여기시지 않고 죄악으로 보셨습니다(12'17)! 그래서 슈무엘의 예언대로 제 철(우기)도 아닌데 우레와 소나기를 보내셔서 백성이 왕을 구한 일이 하나님 앞에 큰 죄악임을 명증하셨지요(12'18). 우레와 소나기를 본 백성은 두려워서 이렇게 말합니다:


   "..님의 하나님 예호봐님께 기도하셔서 우리가 죽지 않게 해 주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다 왕을 요구하는 악을 더하였습니다."(12'20)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크신 이름과 아브라함과의 언약 때문에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되 조건을 다십니다. 즉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돌아서지 말고 그 분만을 마음을 다하여 섬기고, 우상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슈무엘은 이렇게 토를 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전히 악을 저지르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왕이 다 함께 일소되어 버릴 것입니다!"(12'25)


그런데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첫 왕인 샤울 왕이 거구인 덩치값도 못한 채 적군에게 겁을 먹고 상상 밖에 너무나도 빨리 월권과 교만의 죄악을 저지릅니다(13'8~12).
너무나도 실망하여 허탈해진 슈무엘이 샤울에게 말합니다:


   "님은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님은 님의 하나님 예호봐님께서 님께 하신 명령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셨더라면) 지금 예호봐님께서는 님의 왕국을 이스라엘 위에 길이 길이 세우셨을 텐데 말입니다. 이제는 님의 왕국이 더 지탱하지 못할 터입니다. 예호봐님께서는 (이미) 그 분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 예호봐님이 그 분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님께서 예호봐님이 명하신 것을 지키시지 않은 탓입니다."(13'13,14)


그런데도 하나님은 몸소 기름부으셨던 샤울 왕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즉 고대로부터 숙적인 아말렠 족을 전멸시키라고 하신 것입니다(15'1~3). 그러나 샤울은 기다렸다는 듯 "보기좋게" 다시 한 번 명령대로 이행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릅니다(15'9).

이래서 하나님은 샤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십니다(15'11,35b). 그 때문에 슈무엘은 근심하면서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고는 왕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제사보다, 숫양의 기름보다 더 낫다고 하면서 그 분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점 치는 죄와도 같고, 완고함은 사신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다고 하면서 왕이 말씀을 버렸기에 하나님도 왕을 버려 이젠 더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15'22,23).

슈무엘은 그 후 죽는 날까지 두 번 다시 샤울 왕을 만나지 않습니다.

한편 슈무엘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일개 목동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 다뷔드를 다음 왕으로 기름 붓습니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샤울은 부드득 이를 갈다시피 다뷔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범죄까지 더하지요. 급기야 나중엔 나랏일은 제쳐놓고 다뷔드를 잡아 죽이려는 일에만 광적으로 몰두하여, 제 풀에 지치기까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추적하기에 이르릅니다.


여기엔 중요한 가변변수 한 가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샤울 왕의 아들 요나탄 건이죠. 왕자 요나탄은 아버지와 달리 매우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믿음도 훌륭한 그는 정말 차기 왕으로 흠잡을 데가 없는 후보자였죠!
게다가 그는 실상 차기 왕위의 경쟁자인 다뷔드를 전혀 질시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다뷔드가 그런 '다크 호스'라는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진실하고 놀라운 우정을 드러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속담을 정말 무색하게 만드는, 남다른 사람이었죠.

성경은 요나탄에 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인품과 행적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만큼 기념할 만한 인물이었죠. 한 피를 나눈 부자간인데도 어쩌면 그리도 서로 대조되는지요! 아버지는 길이 경종 삼아야 할 악인, 아들은 길이 기릴 만한 선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착한 모범 왕자인 요나탄을 하나님은 차기 왕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다뷔드의 후임자로조차 내정하시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샤울 왕가를 버리셨기 때문이죠.
샤울의 죄 탓에 집안 전체가 몰락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그토록 몸소 왕이시기를 바라셨지만 백성이 거부하고 인간군주를 세울 때부터 샤울과 같은 미래사태를 경고하셨더랬고, 샤울은 하나님의 이 예상을 깨지 않고 "알뜰하게" 불순종과 범죄를 거듭하자 하나님은 전혀 다른 가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새 가문의 선택은 의외나 예외가 아니라 오래 전 예언대로였습니다. 이미 고대의 야콥 예언 때부터 유다 족은 왕의 가문으로 내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중대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왜 진작 고대로부터 미래의 왕가로 내정된 유다 가문에서 첫 왕을 내시지 않고 에둘러(?), 벤야민 가문에서 왕을 내셨다가 이런 내홍 끝에야 비로소 유다 가문 사람을 택하실까요?
군주제의 '임상실험' 케이스로 앞서 벤야민 가문을 고르신 것일까요?

 

알고 보면, 이 역시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인애 때문이었습니다.
전술했듯이, 이스라엘 당대인들이 왕을 구한 무렵은 마지막 판관인 슈무엘이 늙고 그아들들은 아버지와 달리 부패상을 보이는가 하면, 외부적으로는 숙적이자 강적인 펠레쉩 족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던 때였습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의 조카 롵의 후예인 암몬 족 역시 수시로 범접해 오며 괴롭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나라에는 이렇다 할 군사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왕에 백성의 요구에 응해 주시면서 동시에 이 특별한 때에 이스라엘을 펠레쉩의 손에서 건지시려고 누구보다 적절한 40대 나이의 기골이 장대한 샤울을 택하셨던 것입니다(슘A 9'16b).

물론 하나님은 위대하고 전능하시므로 판관 슈무엘만으로도 얼마든지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예: 7'10~14). 그러나 슈무엘은 현저히 늙어가고 그의 아들들은 후계자로서는 자격미달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용기를 줄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무렵 유다 지파의 다뷔드는 시골의 어린 목동에 불과해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까지는 아직은 더 많이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리고..훗날 이 다뷔드가 샤울의 박해를 극복하고 무난히 또는 가까스로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바로 다름 아닌 원수의 아들인 요나탄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탄은 비록 훌륭한 신앙인이었지만, 다뷔드가 새 왕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요나탄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요나탄은 자신도 언젠가 군주의 위에 오를 꿈을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슘A 23'17b)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더욱 위급하게 되자 그는 끝내 조국과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고 맙니다(31'1,2).

왜 하나님은 전쟁터에서라도 다뷔드의 '절친'인 요나탄 왕자의 목숨을 보존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아버지 샤울 스스로가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하여, 무당에게 점을 치러 가는 등 끝까지 자기 갈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참고: 28'7-25).

 

이렇게 될 샤울 왕가를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 내다보시고 버리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탄과 다뷔드 사이의 우정과 진정, 맹약을 기억하셔서 다뷔드를 통하여 그 후손을 친구의 아들과 왕족으로 대우하게 만드십니다(슈무엘B서=삼하 9'1~13).

 


하나님은 과거 한 때 그 분의 나라에 군주제를 허용하셨고, 지금도 세상 일부에서는 군주제가 통용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성도들 자신이 왕 같은 사제들이죠(페트로A=벧전 2'9). 우리는 앞으로 최소한 1천년간 왕들의 왕님과 함께 왕들처럼 다스릴 사람들이랍니다(티모테B서=딤후 2'12, 요한계시록 5'10;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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