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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메시아계보 대 장정

라키쉬와 흥미로운 발견들(메시아계보대장정 부록)




라키쉬(לכיש 그리스어 '라ㅋ히스'/Λαχις. 영어 Lachish)는 헤브론산과 필레쉩 땅 사이의 평원인 쉐펠라의 비교적 높은 언덕(해발 약 260m)에 세워진 도시로 지중해 쪽에 가깝다(예슈아=수 10'3,5, 12'11). 예루샬렘 남서쪽 40km 지점에 현재도 유적이 남아 있다. 주변엔 가자와 에글론 등 필레쉩(현 팔레스타인)의 도시국가들도 있었다.

고대에는 '텔 엘-헤시'로 불렸다는 근거가 있다. 현대엔 '텔 엗(ed)-데웨이르' 유적지로 발굴됐다. 도시 면적은 약 31 에이커. 철기 시대의 대형 텔(tel, 주로 '언덕도시'를 뜻함. 텔아빕은 그 하나)의 하나다.

사면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라키쉬에서는 단단하고 높은 2중 돌성벽과 돌집들, 바깥 성문과 안 성문(3중 구조), 경사진입로 등의 유적들이 발견됐다. 라키쉬 성 구조는 히즈키야 왕대에 최강화됐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히즈키야 때에 라키 의존도가 여러 모로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바로 그 히즈키야 왕대인 701(BC)년경. 산헤립 왕이 이끄는 아슈르(아씨리아) 대군은 라키쉬 함락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아슈르 부조 벽화나 일부 점토 문서에 따르면 그렇다. 

라키쉬 즉 텔 엘-헤시(일명 '텔 아마르나')의 발굴은 19세기에 시작된다. 우선 1892년 미국의 F. 조운즈 블리스 박사가 아람어에 가까운 쐐기문자로 기록된 소형 점토판을 발견했다. 청동기 시대에 '파아푸'라는 미쯔라임(에짚트) 관리가 텔-엘헤시 도시국가 시장(또는 총독/왕) '짐레따'에게 보낸, 소위 '아마르나 서신'이었다.

성경과 직접은 무관하나, 텔 엘-헤시는 미쯔라임(에짚트)과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 이 공문의 내용은 주변 도시 아팀(에탐 연대기A=역대상 4'23), 삼히(또는 '사마')를 약탈자들이 괴롭히고 있는 정황에 대한 지적이었다.

1897년엔 C.R. 콘더 중령이 고대의 텔 엘-헤시가 라키쉬라고 주장했고, 대체로 지지 받는 듯 하더니 블리스가 발견한 점토판 서신이 라키쉬에서 텔 엘-헤시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돼 흐지부지 되는 듯 했다가..1929년엔 얼브라잍 박사가 '텔 엗-데웨이르'라고 주장했다. 텔 엗-데웨이르 설은 지금까지 대체로 견지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성경은 고대로부터 '라키쉬'로 일관돼 있다.  

라키쉬의 고고학적 발굴은 1932-38년 제임즈 레즐리 스타키, 1966/68년엔 요하난 아하로니, 1973-87년엔 텔아빕대학교팀(팀장 다빋 우시슈킨 교수)에 의해, 각각 이뤄졌다. 그후에도 1990년대까지 발굴은 이어졌다.
  
19세기 말의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아슈르 군은 당시 엄청난 양의 돌과 흙으로 라키쉬 성벽 높이의 경사언덕을 쌓아 성 진입에 성공했는데 현재도 일부가 남아 있고, 이에 맞서려고 라키쉬 자체에서 쌓아 올린 같은 높이의 경사언덕도 남아 있다. 이 공성용 경사언덕은 근동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  

또한 발굴 당시 인근 동굴 속에서 대 아슈르전 당시 것으로 보이는 시민들의 두골 1,500점이, 경사 언덕과 성벽 위에선 수많은 화살촉들과 공성퇴(攻城槌=파성퇴. 수레 위에 세운 기둥에 쇠를 씌워 성벽 파괴에 씀)에 쓰인 쇠사슬 등이 발견돼 당시 치열한 전투상을 시사해 준다. 아슈르군은 당시 5대의 공성퇴를 썼다.

이곳에서는 고대 이스라엘 국내 최대 크기(36x76m)의 단단한 석조전이었던 궁성/요새 터, 44m 깊이의 우물, 수로, 부근의 공동묘지와 무덤 등도 발견됐다.

라키쉬(현 텔 엗-데웨이르)의 다양한 유적 사진들과 관련 동영상 등을 다음에서 볼 수 있다.
http://www.lmlk.com/research/lmlk_lachish-tel.htm
http://ebibletools.com/israel/lakish/index.html   


라키쉬의 역사적 면모 

라키쉬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적어도 4개의 서로 다른 유적층이 발견됐다.

라키쉬는 미쯔라임(에짚트)의 파라오 아멘호텦 2세(주전 1453-1419년) 당시부터 이미 파피루스 문서 등에서 언급됐다. '엘-아마르나' 문서 일부에 의하면, 아멘호텦 3,4세 시대도 포함되며, 특히 라메세스3세 시대(1182-1151)엔 양측 간 교류가 가장 돈독했던 것으로 추정뇌다. 예를 들면 라메세스 당시에 유행한 꽃테두리 장식물도 발견됐다.

일찍이 카나안 정복기인 예슈아(여호수아) 당대에 야피아 왕이 다스리던 라키쉬는 이스라엘과 화친조약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을 적대, 5개 이웃 도시국가와 동맹을 했기에 멸망됐고(참고: 예슈아서 10장, 12'11) 후에 유다족의 땅으로 편입됐다(15'39). 

고대엔 돌벽이 없는 작은 집들이 주된 건물이었다. 기원전 1130년경 이 지역의 미쯔라임군 패배 당시 파괴된 흔적이 있다. 이스라엘 왕국시대 때(약 930년) 파라오 시샼이 침공해 이곳을 파괴했을 가능성도 크다(925년).

당대의 구조물로는, 텔의 서쪽에 청동기 후 시대의 해자(둘레가 못으로 둘러싸인) 신전이 3번 연거푸 같은 장소에 건립됐다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희귀 유물들은 (스타키 피살로) 모두 도난 당했다.


아무튼 이 곳은 오래 폐허로 방치됐다가 슐로모(솔로몬)의 아들인 레호보암 시대에 수도 예루샬렘을 비롯한 유다 왕국 내륙 도시들의 바람막이 구실을 하는 전략적 위치로 인해, 유다 왕국 제2의 도시 겸 요새가 됐다(연대B=역대하 11'5-9). 당시 레호보암이 요새지로 강화한 15개 도시 중 으뜸이었다.
적국이 예루샬렘을 공략하는 가장 쉬운 길이 해변 쪽으로 열린 남부 산중 협곡을 통한 침투였고, 라키쉬는 이것을 막는 중요한 거점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유다의 제 8대(또는 여왕 아탈리아까지 포함해 제 9대) 왕 아마찌야는 훗날 하나님을 배반한 뒤, 예루샬렘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라키쉬로 도주했다가 거기서 자객에게 암살됐다(왕들B서=왕하 14'19 연대B 25'27). 라키쉬가 가깝고 궁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찌야 왕대에는 지진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괴됐음직 하다(아모스 1'1, 제카리야=슥 14'5). 지진에 파괴된 듯한 고고학적 발견도 있다.

라키쉬는, 물론 유다 역사 가운데서도 히즈키야 왕대에 가장 강력한 요새도시였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대에, 아슈르의 산헤립 대왕은 라키쉬 함락/정복 후 아슈르 니네베(현 '쿠윤짘')에 있는 벽화(부조)로서 기념했다. 이 사건은 왕들 18'13-17, 19'8, 연대B 32'9, 예샤야후(이사야) 36'1-3, 37'8 등으로 입증된다. 이 때 라키쉬 시민들은 모두 포로가 돼 멀리 적국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수도 예루샬렘을 제외한 대다수 도시가 그랬다.

히즈키야/이사야와 동시대의 대언자였던 미카는 라키쉬의 준마/전마차(병거)들을 언급했을 만큼 이곳의 군사력이 돋보였다(미카=미 1'13). 미카는 라키쉬 시민들의 특별한 죄악상을 꾸짖었다. 곧, 라키쉬는 딸 찌온(예루샬렘)의 죄악의 시작이고, 여기서 이스라엘의 허물이 보였다고 한 것이다. 제2의 도시였던 만큼 얼마나 교만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훗날 라키쉬는 요시야 왕대(?)쯤에도 잠시 복구됐으나 그 규모가 선대에 못 미쳤다. 성문은 작아졌다. '라키쉬 서신들'은 이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라키쉬는 유다에 속해 있다가 586년경 다시 네부칻네자르의 바벨론 군에 의해 다시 함락/방화된다(예레미야서 34'7).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다인들이 돌아와 라키쉬를 비롯한 여러 옛 도시에 정착했다(네헤미야서=느 11'30 ).

라키쉬에서는 바빌론 이후인 페르시아-헬라 시대의 주택들도 발견됐다. 또 비슷한 시대(?)의 태양신당도 1960년대에 Y. 아하로니에 의해 발굴됐다. 석회암 제단들도 발견됐다. 그중 하나는 '이븐트'(향단)라고 아람어로 새겨져 있었다. 


자체 점토문서

20세기 발굴 당시, 이곳의 한 돌집 실내에서는 고대 히브리어 글자가 적힌 점토문서 파편 20여점이 발견됐다. '호샤야후'(=호쉐아)란 사람이 라키쉬 함락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이 문서들은 예루샬렘 외에 최후까지 버틴 라키쉬/아제카 두 도시를 언급했다. 한 문서는 대언자들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해 필자가 대언자였을 가능성도 보인다.  
또 유다 말기인 590년경 제데키야 왕 당시 사령관들끼리 주고 받은 서신들도 있다.


    항아리 손잡이의 라멜렠 인장 문양


항아리 손잡이의 라멜렠 인장

1990년대엔 라키쉬에서 중요한 발굴이 있었다. 주로 히즈키야 왕대의 관인(官印, 'LMLK 인장'이라고도 불림)이 찍힌 저장용 흙항아리(진흙단지)의 손잡이들이 403점 발견됐다(참고: http://www.lmlk.com/research/lmlk_hh02.htm).

여기엔 21 가지 다양한 문양의 도장으로 찍힌 2천여 인장 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이 문양들에 해당하는 도장들이 실제로 발견된 적은 없다(63개의 관인 아닌 개인 인장은 별도로 발견됐다). 항아리 일부는 원형이거나 또는 복원됐다.

관인이 찍힌 항아리들은 그밖에도 예루샬렘을 비롯, 유다/벤야민/시메온 지족 지역 71개 지점과 북이스라엘 왕국에 속했던 지역 4개 지점에서도 발견됐지만, 라키쉬가 415점으로 가장 많다. 따라서 이 항아리는 군사용 비상식량 비축용 또는 특히 히즈키야 왕대의 납세용/십일조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 예로, 라키쉬를 요새화한 초기인 레호보암 시대에도 15개 도시들 중 하나로서 양식/기름/포도주를 저장했던 기록이 있다(연대B 11'11,12).


LMLK는 '라+멜렠' 즉 "왕의 것", "왕께 속함", "왕의 명령에 따른 비축용", "정부 소관", "왕에게 보낼 물품"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적어도 네 군데의 국내 올리브 유나 포도주 명산지의 소출 가운데 상품(上品)을 저장해 둔 것으로 추정된다. 


 '라멜렠' 인장들은 독수리? 케루빔? 쇠똥구리?

'라멜렠' 인장엔 퍽 다양한 모양들이 있다. 새 날개 (또는 새) 모양의 무늬 아래위에 글자가 새겨진 인장 그림들은 왕 또는 종교적 성격의 이콘이다(참고 http://en.wikipedia.org/wiki/LMLK_seal). 새 보다는 쇠똥구리/풍뎅이에 더 가까운 문양들도 있다.

새/날개 모양이 뭘 뜻하는지는 논란이 많다. 심지어 몰롴(몰렠) 신을 상징하는 부엉이를 가리킨다는 설도 있는데, 예호봐님을 집중적으로 섬긴 히즈키야 왕대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황당한 주장이다. 특히 몰롴은 멜렠과 어원이 같기에 더욱 LMLK과 연계된다는 식의 주장은 현대 프리메이슨계가 하는 이설이다.
그러나 만약 항아리가 히즈키야 이전의 왕대의 것이라면 가능도 한 얘기이다. 

여기에 대해, 본 필자는 이 새/날개가 우선적으로 독수리 또는 케루빔 천사로 볼 수 있다는 견해이다.

성경은 광야에 흔한 독수리를 매우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긍정적/부정적 양쪽으로 모두 언급했다. 여기선 긍정적인 면만 논하련다. 
성경이 독수리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것은 특히 그 힘과 새끼를 보호하고 훈련시키는 본능에 관해서다. 그래서 고대 광야시대 때 예호바(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것을 독수리가 어린 것들을 보호하는 데다 비유했다(미쯔라임출국기=출애굽기 19'4, 신명기 31'11).

흥미롭게도 히즈키야 왕대에 생존한 예샤야후가 기록한 예샤야후서엔 독수리를 언급한 부분이 있다! 바로 예샤야후(이사야)서 40'31과 46'11에서다. 46'11은 확실히 대군주를 가리킨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독수리는 보호/왕권/위엄/권위/권력 등을 가리킨다고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 대다수 서구 국가에서도 독수리 문장이 왕권을 가리킨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독수리 날개는 고대 제국들의 이교 신들을 상징하기도 했다. 특히 바벨론/페르시아 유적에서는 펼친 독수리 날개 한 가운데 원이 들어간 문양이 자주 발견되는데, 가운데 원은 태양신을 가리킨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날개는 불사조를 뜻하기도 한다. 

히즈키야 왕대의 라멜렠 독수리 문양 한 가운데의 원은 태양신을 가리킬 리가 없다! 당시 태양신을 섬겼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독수리를 그리다 보니 자연히 타국의 원을 넣은 독수리문양을 흉내 냈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일리 있는 쇠똥구리 설

새나 독수리 특히 부엉이보다는 쇠똥구리에 가까운 문양들은 히즈키야 왕을 상징한다는 설도 있다.

쇠똥구리는 아다시피 동물의 배설물을 굴려 모아 먹이로 저장한다. 마찬가지로 히즈키야는 배설물과 같은 과거의 악을 추려 모아 버렸다는 식이다. 히즈키야는 어린 시절을 아버지 아하즈 왕의 우상숭배의 죄악상을 보면서 자랐다. 의로운 맘을 품은 그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모든 우상숭배의 흔적을 말끔히 철폐해 버렸다.
마치 쇠똥구리가 똥을 모아 굴려 내듯.

그런 의미에서보다는 쇠똥구리가 열심히 쇠똥을 모으듯, 알뜰히 양식을 거둬 모아 저장한다는 뜻이 더 강할 수 있다. 또 히즈키야를 쇠똥구리로 의인화 해서 인장을 만든다는 발상은 약간 우습고 거북살스럽다.
 
쇠똥구리 역시 당대 미쯔라임(에짚트)의 주요 상징물이기도 했다. 


아무튼 히즈키야 대의 독수리/쇠똥구리 로고는 이방신 숭배와는 무관하다고 보는 발상이 건전하고 안전하다.


필자는 외래어 발음을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