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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열 처녀 비유에 숨겨진 비밀





열 처녀 비유에 숨겨진 비밀


(붉은 글씨 부분은 집필 1년 뒤에 추가된 부분임)


주님의 '열 처녀 비유'는 그 분의 종말예언(마태복음서 24장)에 잇대어 비유로서 덧붙여진 대목(맡 25장)의 일부다. 비유종말예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주님이 지상에서 하신 비유 대부분은 주님을 끝까지 따르진 않을 일반 사람들에겐 정말 극히 난해하고 거의 불가해한 것들이었다. 비록 사랑하는 제자들에겐 따로 해설해 주셨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열 처녀 비유는 어떤가? 역시 거듭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비밀이 담겨 있다. 

오래 전, 나는 본 블로그에 '슬기로운 다섯처럼'이라는 글을 '아구르'라는 필명으로 쓴 적이 있다. 독자는 전반적인 진리 파악을 위해 그 글을 참고할 수 있겠다. 



여기서는 본 비유의 더 깊은 비밀을 다뤄 보려고 한다. 


이 비유의 일차적인 특징 한 가지는 신랑과 들러리에 관한 것일 뿐, 정작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의 한 명인 신부(新婦)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왜 주님은 신부에 관해선 아무 언급을 하지 않으셨을까? 

신약 성경에서 비유로 쓰인 신부는 모듬체('공동체')인 교회를 상징한다. 아울러 최후의 신부인 새 예루샬렘 성을 가리킨다(요계 21'2,9,10). 단, 많은 신자들의 착각처럼 그렇게, 신부는 성도 개인을 결코 가리키지 않는다! 

[ 파울(바울) 서신에서 신부는 대표적 단수, 'The Bride'로 표기돼 있다. 복수 '신부들/brides'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주님의 신부"라는 표현은 잘못이다. 또 역으로, 신랑 예수는 언제나 '나의 신랑'이 아닌, '우리들의 신랑'이어야 한다. 또 주님을 주도자인 신랑으로 그린 것이 분명한 마태복음서 9'15, 맑 2'19, 뤀5'34 등에서도 신부 대신 친구들, 손님들과 아이들이 주로 다뤄졌다. ]   


필자는 여기서 주님이 신부를 성도 개인으로 오해할 미래의 잠재적 오류의 가능성을 앞서 내다보시고 미리 차단하신 것이라 이해한다. 그렇지 않다면--일각의 착각이 옳다면, 열 명의 들러리가 아니라 '열 신부'라고 하셨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부는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하고 순결한, 전체로서의 천국공동체적 교회이니만큼, 여기서 따로 논급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비유의 핵심은 공동체의 일원인 들러리들과 신랑과의 관계다. 

  



그럼, 왜 들러리도 순수한 처녀여야 하는가?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순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 왕이신 크리스토와 그 들러리들의 이 상관관계의 그림자 같은 모습이 시편 45'14에 그려져 있다. ] 

미련한 5 처녀들도 처녀였다. 그러나 처녀 같은 순결만으로는 안 된다. 아울러 슬기로워야 한다. 주님은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신다. 미련해지지 말고 슬기로우려면 어떻게야 하는가? 잠시 후 설명할 테다. 



다음으로, 이 비유의 핵심 한 가지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또는 교회의 필연적인 영적 분열에 관해서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분열돼선 안 되지만, 지상교회는 종국엔 영적으로 분열하게 돼 있다. 여기서는 각 5명씩, 즉 절반씩 반분되었다. 뭘 말해 주는가? 우리 생각보다는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뜻일까? 


그런데 무엇을 위한, 무엇으로 인한 분열인가? 구원을 위한 분별에 따른, 성령에 의한 분열이다. 


여기서의 이 구원은 궁극적인 구원이며, 표면상 예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열 처녀들 중 미련한 다섯은 예정 속에서 미련해진 게 아니다. 이들이 미련해져 궁극적으로 얻게 된 결과는 운명이 아니다. 숙명론도 아니며, 오히려 인과응보에 가깝다. 다섯은 자기 의지로 게으르고 나태하여 미련해졌고, 그래서 등만 챙겼을 뿐 등기름을 미리 챙기지 않았으며, 뒤늦게야 기름을 사서 채우려 했지만, 아뿔싸~! 원님 행차 뒤 나발 분 격이 돼버렸다. 


(lamp)은 여기서 주님을 맞이할 사람들의 구원을 전제로 한다.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을 포함한다. [ 한글로 '등'으로 번역된 낱말은 사실상 당대의 횃불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등잔은 화려한 혼인예식의 조명으로선 너무나 불빛이 약하기 때문이다! 횃불은 등잔에 비해 다루고 보관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들러리 처녀들은 횃불 다루기의 필수적 훈련을 평소 생활 속에서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여기서 기름은 말할 나위 없이 성령을 상징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나 미련했던 다섯은 다들 등잔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별도의 기름 그릇을 챙기지 않을 경우, 그 등불 심지는 타다가 말게 돼 있다. 뭘 가리키는가? 비록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재림에 대비하느라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성령 채우심(성령 충만)을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 그럴까? 


성령 채우심은 첫째로, 슬기로움과 미련함이라는 정반대 상황을 가름하는 잣대와도 같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을 구분하여 내시지 않았다. 열의 절반은 안일과 나태함 탓에 스스로 미련해져, 마땅히 할 것을 안 하고 "자빠져" 있었다. 등잔에 절대필수적인 기름 준비를 안 하고 빈둥거리고 있었다. 우리 중 다수의 자화상 아닐까? 그 결과는 뭔가? 신랑이 왔다는 급보에 극당황하여 허둥지둥 남의 기름을 넘보는가 하면, 별 도리 없어 결국 기름을 사러 밖으로 나간다. 

뭘 말해 주는가? 우리도 정작 치명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령 채움에 별 관심 없이 지내다가는 주님의 재림 때 각자 자신의 '피'를 보게 된다는 말과도 같다. 


성령 채우심은 둘째로, 아울러 궁극적 구원을 얻게 하는 방편이 된다. 

미련한 다섯은 뒤늦게나마 성령 채움을 사고자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공동체 바깥에서 나름 성령을 채워 헐레벌떡 돌아왔지만, 신랑의 냉엄한 음성--"난 늬네를 모른다"는 답만 듣고 외면 당한 것이다. 이 후엔 바깥 어둠과 영원한 저주와 뼈저린 한과 자타를 원망하며 이를 가는 쓰라림만 남게 된다.


성령 채움이 이토록 극중하다! 그러기에 교회출석만 하며 어영부영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거듭나서 성령 채우심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하는가?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고백하고(로마서 10:9,10), 첫 교회 성도들처럼 이미 지상에 영구히 와 계시는 성령의 언변을 갖고 영언('방언')을 말하는 것이다(행전 2'4). 영언을 갖고 신학적으로 왈가왈부, 가타부타하기엔 시간이 너무 급박하다. 너무 늦기 전에 거듭나서 영언을 시작하는 것이 독자의 미래와 영원을 위해 좋은 저축과 투자가 될 것이다.


독자여,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지 말자! 

더 늦지 않게 성령 채우심을 받아 슬기로운 다섯으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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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ruthnlove.tistory.com/entry/슬기로운-다섯처럼-아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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