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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뷰/뉴스논평

우리 생애에 가장 중요한 날?


 


 

우리 생애에 가장 중요한 날?
-9월 24일 교황 방미 연설에 앞서

 

 

브라이언 매클러런(기타 표기: 맥클러렌, 맥클라렌).
그를 전혀 모르거나 잊은 사람들도 혹 있겠지만, 그는 소위 '떠오름'(이머징/Emerging) 영성의 선구자이다. 지난 2009년 제3차 넥트스웨이브 컨벤션에 초청받아 방한했을 때*), 장신대학교의 임성빈 교수가 모 언론을 위한 특별 인터뷰를 통해 "기독교가 이젠 더 매력적이지 않은 시대에 교회가 교회 밖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면 목사님 같은 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하나님이 목사님을 당신의 사역 도구로 삼으신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국교회에 널리 소개하다시피 극찬한 사람이다. 그밖의 많은 교계 언론들이 그를 폭넓게 소개했다. 문제는 과연 임 교수의 말처럼 매클러런이 하나님의 사역도구이냐는 것. 하나님은 성경 진리에 철두철미한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결코 그 분의 사역도구로 쓰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이 말에 이의를 다는 독자는 자신이 문제 신자이다).
 
본 필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매클러런을 문제 인사로, 그의 다양한 글이나 연설, 대담과 책 '신종 기독교(A New Kind of Christianity)', '벌거벗은 영성(Naked Spirituality)' 등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문제영성으로 꼽았댔다. 결국 예상에 어긋나지 않게도 그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어 왔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매클러런을 주요 비평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상찬해 마지 않는 천주교황 프란치스코에 관해서이다. 허핑턴포스트 종교난에 실린 그의 최신 글에서 매클러런은 올 9월 24일을 "우리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해의 가장 중요한 날"일 수 있다고 '나름' 선언을 했다. 그 날이 천주 '교황'이 미국 연방의회에서 연설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란다.
말을 바꾼다면, 천주 '교황'이 우리 생애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다는 뜻인가? 매클러런이 크리스천이라면, 그의 이 말은 크리스천의 양식(良識)으로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생애에 가장 중요한 날은 우리가 거듭난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그 날은 바로 예수 크리스토님의 재림의 날일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날은 없을 터이다.

따라서 매클러런은 이 말을 크리스천으로 한 게 아니라, 헢 포스트에 맞게 일반인 내지 세속인으로서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 들으라고 한 말이다. 매클러런은 그 날이 "가장 중요한 날의 하나(one of the most important days)일 수도 있다"고 말한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날"(the most important day)일 수 있다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과는 의식이 다른 이야기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제 아무리 그가 교계의 명사라고 해도, 매클러런을 결코 거듭난 참 신자로 볼 수가 없다. 성경이 명백히 말해주는 거듭난 사람의 표준 안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주'교황'의 '생태치유신학'


매클러런은 특히 올해를 지구온난화 물결을 돌릴 수 있는 해로 꼽는다. 이를 위해 프란치스코 로마 '교황'이 인류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라우다토 시(Laudato Si)'가 기후변화를 위한 궁극적인 부름인 양 인상을 지우고 있다. 그런데 이 서한의 주제로 삼은 '라우다토 시'는 본래 현 '교황'이 이름을 따다 교황명으로 쓰고 있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쓴 시로, 그는 우리들의 '공동가정'인 지구가 우리와 삶을 나누는 '누이'요, 두 팔 벌려 우리를 껴안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와 '성' 프란치스코는 "누이 같다"고 한 직유에서 도약해, 금방 '누이'로 은유화 아니 그 이상으로 인격화/실제화한다. 지구를 '가야' 여신으로 섬기는 뉴에이지 사상을 연상시킨다.


프란치스코는 '성'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의 수호성인으로 부각시켜 그가 모든 창조물들과 '교신' 내지 '교통'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는 모든 존재물을 돌보려고 부름받았다고 느꼈고 그래서 아무리 작은 꽃이나 나무나 동물도 '형제' 또는 '누이'라고 불렀단다.

하지만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발상이다. 우리의 형제와 누이는 오로지 크리스천 신자들일 뿐이다! 성경은 심지어 천사들도 우리의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두 프란치스코들은 다분히 뉴에이지적이다! 사실 현대 환경보존운동은 만물이 신일 수가 있다거나 만물 속에 신이 있다는 뉴에이지적 범신론/만유내재신론과 다분히 연계돼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 지구촌을 '공동의 집/가정'(common home)이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참된 공동가정은 하늘나라이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이 지구촌 환경이 모든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하나의 '가정'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주장은 성경보다는 되레 고 문선명을 연상시킨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어서 늘 들어온 지구촌의 공해와 온난화, 이상기후 등 생태위기의 얘기를 꺼내면서 해방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새로울 것도 별로 없는 이야기지만.

이어서 '창조의 복음'이라는 제2장에서는 '신앙에 의해 제공된 빛'을 말하고 서로 다른 민족의 문화적 다양성과 예술 등을 존중해야 한다며 아울러 내적인 삶과 영성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끼친 손해를 치유하는 생태계 개발을 위해서는 그 어떤 종류의 과학과 어떤 형태의 지혜도 제외될 수 없다며 종교와 언어도 거기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톨릭교회는 철학적 대화에 열려있다며 바로 그 점에서 카톨릭교가 "신앙과 이성 사이의 다양한 종합을 산출할 수 있게 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천주교의 사회 이슈와 관련된 사회적 가르침의 개발이 그런 종합을 대표한다고 한다. 철학적 대화? 신앙과 이성 사이의 다양한 종합? 사회적 가르침?

이것을 뭉뚱그리면 천주교가 성경 진리와 복음이 아닌 철학적 대화와 복합영성 내지 혼합영성으로 향후 기후 환경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세계종교를 리드해 나가겠다는 의도가 아닐 수 없다. '교황'은 성경 진리를 통해 크리스토님과 사도님의 말씀대로 왜 교회와 세상이 하나 될 수 없느냐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경을 부분적으로 이용하고 여타 '교황'과 카톨맄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해 가며 교회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논술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교황'은 창세기에 기재된 창조기록이 그 상징적/해설적인 언어를 통해 인간 존재와 역사적 실재의 심오한 가르침을 준다고 주장한다. 상징적 언어? 뭔가 수상쩍다. 어떤 언어 말인가? 그는 또 성경에 의하면 창조주 하느님, 우리 이웃인 인간, 지구라는 피조물 사이의 하모니라는 중대한 3중관계가 깨지고 터졌는데, 이것의 한 가지 치유가 '성' 프란치스코가 체험한 그 '하모니'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 프란치스코가 각 피조물과의 "우주적 화해"를 통해 어떤 의미의 원초적인 무죄/순수로 돌아갔다고 한 보나벤추라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류의 문제는 죄악이며, 이 죄의 문제는 오직 예수 크리스토의 중재에 의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로 해결되며, 피조물과의 화해는 인간이 아닌 오직 크리스토의 평화통치로 가능해지는 그 다음 문제이다. '교황'의 주장처럼 피조물인 지구과의 '우주적 화해'로 죄 문제가 해결되어 원초적인 무죄와 순수로 돌아가게 되진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다분히 뉴에이적 신학을 방불케 한다.

결국 '교황'이 말하는 이 '우주적 화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천주교의 중재로 지구촌의 온 종교까지 서로 화해하고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원초적 '순수'로 돌아가겠다는 발상임이 미뤄 짐작된다. 이것은 성경적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기보다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타락도시 바벨론의 몸짓에 더 가깝다.


'교황'은 성경을 통달하여 이 서한을 쓴 것처럼 행동하지만, 카톨릭교의 발상과 이상과 목표대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사실 성경은 비록 하나님이 지구촌을 비롯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시어 그 독생자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여셨지만, 현존하는 지상 체제는 세상 임금, 세상 신인 마귀 사탄이 (한시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세상 것이기에(!),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 속할 수 없고 세상으로부터 성별되어야 한다고 교훈해 준다(참고: 요한A서=요일 2;15~17, 코린토B서=고후 6'14~18, 요한계시록 18'4).
만약 천주교와 역대 '교황'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애초부터 저딴 발상을 전개할 수 없는 것이다!


천주교는 겉으로는 세속에서 초탈한 듯 포장해 왔지만 실상 뿌리깊이 세속적인 종교이다. 그들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사상에 따라 세속 체제와 세속 시스템 위에다 '교황'이 주체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근본적으로 오착된 신앙체계이다. 성경은 그런 체제의 교회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참 신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해 있다고 말씀하셨고 사도는 거듭난 사람은 이미 주님과 연합하여 하늘 보좌에 앉히운 존재라고 말한다.


'교황'의 공개서한의 후반에 대해서는 차후 더 상세한 언급할 기회를 가지련다.



끝으로, 매클러런에 관해 재차 언급한다.
그는 지구촌 환경 문제를 위해 "한 용기있는" 무슬림 지도자 그룹이 유대인들과 기타 지도자들처럼 자신들의 전통 안에서 강력한 목청을 냈다고 대변하듯 전하고 있다. 여지 없이 비교종교학적, 더 나아가 종교혼합적 색채까지 띠려 한다.


매클러런은 기후환경 변화의 선언을 노예해방이나 대학살 방지에 비유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그는 서두에서 미국 남북전쟁이 있기 전 노예제를 자동폐지할 수 있는 성공적인 비폭력운동을 이끌었더라면, 역사가 얼마나 바뀌었을 것인가라고 유도질문을 한다. 그러면서 마틴 루터 킹이나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이 미국과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주의를 비폭력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인간의 의도를 동력화할 수 있었음을 그 예로 들고 있다. 그는 또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 당대인들이 그를 성공적으로 패배시킬 수 있었다면 어땠겠냐고 짐짓 묻는다.

아울러 그는 세계종교대회를 선전하고 있다. 마치 이 대회가 크리스천으로서도 부인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인 것처럼 억지 치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이 보고 있는 매클러런이란 어떤 사람인가? 시사지 타임은 2005년에 그를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인'의 한 명으로 꼽고 있다. 물론 타임은 순수 세속지에 불과하며, 따라서 언론이 몰아가는 그런 기세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복음주의자? 과연 그런 명칭이 그에게 걸맞은지 어쩐지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련다. 그런데 매클러런이 기독교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가? 독자가 이 글을 읽어왔다면 그 영향의 알맹이를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어느 모로 보나, 매클러런은 참 크리스천이 아닌 세상 사람이다. 그는 수많은 다른 소위 '영성가'들처럼 기독교의 이름을 내걸고 기독교를 이용하는 사람이지, 참 기독교를 증진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에 사실상의 마이너스를 가져오는 사람이다. 그가 천주교의 앞잡이임은 거의 틀림이 없다.
그는 본질상 하나님의 참 자녀의 하나가 아니라 세상의 자식이다. 그의 말과 행동거지들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매클러런의 말과 사상을 조심하라. 그의 사상을 흡입하기보다 경계하라. 물론 교황도 마찬가지로 조심할 대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