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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선지서

[사 58:7,11] 참된 금식 (2)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이사야 58:7,11)

섬김 마인드와 나눔 마인드

참된 금식에서 중요한 부분은 긍휼(矜恤)의 심정입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엣줄을 끌러 주고 피압박자들을 풀어 주는 것..
이 모두가 주/야웨 아버지 하나님의 인자함 - 구약성경에서 '인자함' 히브리어 '헤쎄드'는 아가페 사랑을 뜻함 - 곧 예수 크리스토의 긍휼의 심정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인자/긍휼을 우리가 맘에 받아 하기 때문에 우리가 긍휼을 베푼다고 해서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이 그분의 긍휼을 받아 구원받고 그 은덕/은총으로 살아왔기에 그분의 말씀과 명령을 따라 이웃을 섬길 뿐입니다.

이제 대언자 이사야는 또한 이 긍휼을..
배고파 굶주린 사람들,
가난한 사람과 떠돌이/나그네들,
어렵게 사는 친척들,
외로움과 괴로움에 지치고 시달린 사람들에게도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참된 금식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특히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가슴/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즈음 얼마나 이기적이고 각박한 사회입니까!
하물며 경제적으로 극난한 요즘이겠습니까. 헌금과 자선기금, 기부금 등 표면상 좋은 일에 쓰이는 돈의 대부분이 나날이 줄어가고 있다는 실정입니다.
비보이죠.
  
오늘날 이런 불우한 사람들을 제대로 돕는 교회와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전반적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돼설까요?
나 자신이 어려운 처경에 있어 보지 않고선 쉽사리 갈피 잡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 주위엔 우리의 생각과 상상 밖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느끼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버젓이 차리고 나다니기 때문이죠. 
전에도 한 말이지만..오늘날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도 자존심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좋은 생각을 지닌 교회가 그런 사람들을 돕고자 해도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전반적인 삶의 수준이 제고되면서 자존심도 그만큼 높아졌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자존심이 밥을 먹여 주진 못합니다.
받아 본 사람, 받을 줄도 아는 사람이 결국 줄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 맛보지 못한 채 남을 사랑해 줄 수 있을까요?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베풀 줄도 알게 돼 있습니다.
주님 사랑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만이 그 사랑을 나눠줄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또한 우리 주위에는 집안과 사회, 교회 등으로부터 맘 깊이 상처를 받아 안고 살아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뵈지만, 좀 더 눈여겨 보면 상처와 아픔과 고민과 스트레스로 속이 곯아 있는 심령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파악할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하고 마땅히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희희낙락 기뻐 즐기기만 하는 곳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즐거워 함이 우리의 힘입니다.
하지만 그 주님께서는 동시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수 있으려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누군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찾아내야 할 것 아닙니까? 또 그들이 토로해야 괴로운지 어쩐지를 알 것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의 건전한 친교/펠로쉽이 얼마나 긴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성도의 친교를 개인의 목적과 사리사욕에 이용하려 들어선 안됩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친교는 깨져 버리고 맙니다.
친교 역시도 서로 섬기려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참된 근접과 커뮤니케이션과 아울림을 낳게 됩니다. 우리는 "성도들 애찬의 암초" 노릇을 해선 안됩니다.

섬김 마인드! 정말 중요하지요.

섬김은 나눔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옛 속담에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이 있고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같은 세태에 나눔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은 참으로 귀합니다.
남에게 받기보다 주기를 더 즐기는 성도가 드물지만 가끔 발견하곤 하지요.
"주는 사람이 더 복되다"는 말씀을 실천하거나 천성적으로 그런 타잎인 성도입니다.

가까운 친구랑 지내다 보면 그가 가진 물건 가운데 간혹 마음에 드는 것들이 없지 않습니다. 꼭 탐심에서라기보다..왜 대수롭지 않은 듯 하면서 정말 편리하구나 느껴지는 물건들이 있잖아요. 그런 내색을 읽자마자 "응. 이것 너 가져. 난 또 있어!" 하고 선뜻 내미는 친구가 있는데..그럴 때면 미안해서 사양하면서도 더 없는 고마움을 느끼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이상으로 성도들끼리 서로 나눔으로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교훈의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요구는 아무 조건이나 대가가 없는 나눔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눔과 섬김을 할 때, 조건 없이 한다고들 합니다.
그래야 진정 희생적이고 순수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은 짧은 생각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조건을 다십니다.
대가를 내 거십니다!
즉 섬김과 나눔이 결코 대가 없는, 희생행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섬김과 나눔은 오로지 희생적이어야만 한다고,
그래야 값이 나가고 가치 있는 순수행위가 된다고,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성도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인류애일지언정 참 믿음은 아니죠.
그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 생각이 갸륵한 거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섬김과 나눔에 대해 보상을 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즉 대가 없는 무조건적 희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인류애가 아닙니다.
조건 없는 희생이나 대가 없는 봉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처럼,
우리의 수고와 봉사, 희생과 섬김과 나눔에 대하여
반드시/절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그분의 아들딸로서
그 대가를 바라고 그 약속을 믿어야만 합니다.
과연 그 대가와 약속이 뭘까요?
엄청난 것들이지요!
우리가 상상 못할 좋은 것들이며
엄청난 복입니다.

[ 다음 주일에 계속 하렵니다. ]

티엘티 독자 모두는
섬김과 나눔의 사역으로
이웃과 성도를 돕고
주님의 크신 보상을 받게 되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