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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General Topic

기회를 거부한 거부


기회를 거부(拒否)한 거부(巨富) 나발

-기회를 선용한 아비가일



김삼




글을 읽기 전, 먼저 바탕본문인 슈무엘A(=사무엘상. 이하 약자 '슘A') 25장을 묵상하기를 독자에게 권합니다. 직접 성경 본문을 읽어야 제대로 실감이 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회를 중시합니다. 미국인들은 흔히 공적인 인사말에서 "I am glad to have an opportunity to speak..." 곧 말할 기회를 갖게 돼 기쁘다고들 표현하곤 합니다. 사람에겐 거듭거듭 주어지는 기회도 있지만, '절호의 챈스'라는 기회도 있고, 단 한 번의 기회도 있습니다.  

기회주의자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주지만, 우리 크리스천에게도 기회라는 것은 주어지므로 기회를 중시하는 것이 마땅하고 바람직합니다. 신자들이 이 세상을 거쳐가는 나그네 삶은 단 한 번 주어진 소중한 기회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 두 번째로 "다시 살아 볼 기회"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지요. 혹 기적으로 부활했더라도 나머지 삶만 계속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흥청망청 지내고 보낼 기회가 아닙니다. 

삶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주어지는 기회들도 한 번만의, 또는 몇 안 되는 절호의 챈스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혜 있는 사람답게 "세월을 아껴라"며, 때가 악한 때문이라고 타이릅니다(에페소서 5'15b,16). 



자, 기회 선용의 방법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가 가진 것 특히 물질로써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경엔 "거한" 부자-거부였던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우선 아브라함/이짜크(이삭)/야콥 등 히브리-이스라엘-유다 민족의 선조인 족장들이 거부였지요. 미쯔라임(에짚트) 노예기였던 때야 거부가 있을 수도 없었겠지만, 카나안 정복기와 판관(사사)시대를 거쳐 왕국시대에 들어섰을 무렵에는 이미 상당수의 거부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뷔드(다윗) 왕이 왕자의 난에 치여 압샬롬에게 내쫓기자, 왕과 백성에게 침구와 먹거리 등을 제공하는 온정을 베푼 사람들, 특히 로겔림 길레아드의 바르찔래(슘B 17'27~29) 등이 그런 사람이었죠. 또 후대의 슐로모(솔로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상 유례가 드물게 부유해진 군주였고, 신약에도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 장례를 치른 아리마테아 요셒 등과 이후 교회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자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이처럼 성경엔 슬기로운 부자들도 있지만, 반대로 어리석은 부자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파울과 야코보 등 사도들은 부자가 되려는 유혹을 물리치라며 교계의 사치스런 부자들을 꾸짖기도 합니다. 다뷔드를 비롯한 시편 기자들도 당대의 악한 부자들에 관하여 간간히 언급하곤 하지요. 구약 성경에서 어리석고 악한 거부의 대표적인 예를 들라면, 물론 나발(Nabal)을 빼 놓을 수가 없죠.


슈무엘A서(삼상) 25장에 소개된 나발은 마온 광야/황무지에 있는 카르멜(갈멜)에서 목축업을 하는 부자였습니다. 마온은 헤브론에서 약14km 떨어진 곳으로 현대의 텔 마인입니다. 이곳은 인근의 지프(한글성경: 십)/칼레브/카르멜 광야 등과 함께 모두 고대 카나안 정복시대 때 유다 지족이 카나안 족을 토벌하면서 자리잡은 곳의 일부입니다(예슈아=수 15'55). 마온은 또 다뷔드가 적대자 샤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잠시 머물렀던 곳이었죠. 다뷔드는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샤울 군대의 포위망을 피하여 엔게디 동굴 요새로 옮겨갔다가 거기서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 샤울의 목숨을 살려 주어 형식적인 화해가 됐지만, 샤울을 믿을 수 없어 부근의 파란(바란) 광야로 다시 피신해 와 있었습니다(슘A 25'1).  



아무튼 나발은, 소유한 양이 3000마리, 염소가 1000마리나 되는 당대로서는 거부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동 소년들을 시켜 매일 마온 광야에서 양을 치게 하고, 또 매년 이맘 때면 카르멜에서 전문 양털깎이 일꾼들을 시켜다 양털을 깎곤 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나발은 매우 미련하고 완악하며 안하무인 격인 사람이었다죠. 그는 칼레브 족속이었는데, 단지 칼레브 지역에 살아선지 아니면 실제로 칼렙 장군의 후예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뷔드와 같은 유다 지족이었습니다. 

나발에게 그나마 딱 한 가지 괜찮은 점이 있었다면, 현명하고 아름다운 아내 아비가일과 충성스런 일꾼들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의 말과 행실을 보면, 나발의 미련함을 이 슬기로운 아내가 잘 상쇄하여 목양 사업과 가계를 잘 꾸려나아가면서 더 부를 유지하고 축적했던 모양입니다. 다뷔드에 대한 아비가일의 태도에 따르면, 평소에도 비록 미련한 나발에게였긴 했지만 남편이었기에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처럼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유난한 우매와 악행을 우려하고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몰래 애통해 온 여인 같이 느껴집니다.



이 나발과 아비가일, 그리고 다뷔드의 관계에 관하여 좀 생각을 해 보렵니다. 나발은 실로 굴러 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 버린 격의 사람입니다. 그 점에서 바르찔래와는 정말 대조적이죠. 80대 나이의 바르찔래는 왕에 대한 충성과 백성을 위한 관대한 덕행 때문에 왕궁에서 함께 지내자는 다뷔드 왕의 제안을 사양하고 큰 욕심 없이 로겔림의 자기 집에서 평소대로 여생을 보냈습니다(슘B=사무엘하 19'31~39 참조). 

반면 나발은 "뒤룩뒤룩한" 욕심살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죠. 그래서 자신과 기껏 자기 집안 밖에 모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더욱이 하인들에게도 넉넉하고 좋은 주인으로 인정 받지 못했고, 어쩌다 슬프게도 아내인 아비가일에게조차 이름대로 '나발' 곧 미련하고 불량한 사람 이상으로는 별 가치가 없어 뵈는 사람이었습니다(슘A 25'25 참조). 심지어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을 다뷔드의 원수들, 다뷔드를 해치려는 무리에 견줄 정도입니다(26b). 실로 서글픈 인생이 아닌가요? 마치 주님이 들려 주신 '어리석은 부자' 비유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참고: 루카복음서=눅 12'16-21). 

정말 주님 말씀 그대로 나발 같은 이들은 "자신에겐 넉넉하면서 하나님께는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거부 나발이 놓친 기회, 아니 그가 정면 거부한 기회는 무엇이었습니까? 매우 중대한 기회들이었지요. 어쩌면, 똑 같은 다뷔드에 의하여 훗날의 다른 거부 바르찔래에게 주어졌던 기회들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발이 제공 받은 기회의 중대성에 비해 나발이 제공해야 할 것, 곧 그가 들여야 할 밑천이랄까 자원은 정말 거의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축절(祝節)인 이 양털깎기 절기에 다뷔드와 그의 부하들 약 600명을 먹일 명절 식량-그것뿐이었거든요. 더군다나 그들은 평소 거칠고 위험한 광야에서 비록 나발이 보호를 부탁한 적도 없지만 그의 젊은 목동들을 지켜 준 정말 맘씨 좋은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다뷔드는, 양떼 규모로 보니 거부가 틀림없는 나발의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씨를 당연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양털깎기 축절에 말입니다. [ 매년 초봄인 3~4월(유대력으로 대강 정월) 무렵에 실시된 양털깎기 잔치('하기가트 하 게즈')는 고대로부터 목축업이 주업인 히브리 족의 주된 축제의 하나였음. 참고: 36절, 신명기 15'19, 슘B 13'23,24  ] 이 계절에 광야에서 자칫 허전하고 쓸쓸해지기 쉬운 부하들을 다독이려고 먹거리라도 넉넉히 먹이고 싶은 다뷔드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600명을 위한 먹거리는 어찌 보면 상당히 많은 분량 같기도 하고 따라서 언뜻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나발 같은 거부에게는 조족지혈처럼 거의 아무 것도 아닌 분량이었습니다. 더구나 매일 호의호식하는 나발 자신의 먹거리에 비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는 양털깎기를 한 뒤에도 '왕의 잔치'와 같은 거나한 파티를 집에서 열고 질탕하게 먹고 마셨습니다(36절). 


자, 그런 나발이 다뷔드 일행에게 넉넉한 아량을 베푸는 것은 정말 자기 후대를 위한 절호의 챈스였습니다. 여러 모로 그랬습니다. 


첫째로, 기막힌 선행의 기회였습니다. 다뷔드의 이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은 온정을 중시하시는 하나님께 인정과 보상까지 받는 계기가 될 터였습니다. 지금 다뷔드와 그 동료/부하들은 장기간 샤울 왕의 군대에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광야에서 우거하는 처지였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역 내의 이방인들을 포함한 나그네와 과부/고아들을 불쌍히 여겨 돌보시며, 심지어 비고의적 살인자들도 억울하게 잡혀 죽지 않게 하시려고 배려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그렇게 돕는 사람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뜻에 걸맞게 살아온 다뷔드이겠습니까. 다뷔드는 양털을 깎는 기분좋고 '좋은 날'(25'8)을 택하여 나발에게 전령을 보내어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온정을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뿐더러 하나님께 은총을 입고 복을 받는 계기였습니다. 학대받아 억울하게 쫓겨다니는 사람, 유리하는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을 돌아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요 베푸는 사람의 특권이자 기쁨입니다. 


그런데 나발은 이 기회를 발로 걷어 차버렸습니다. 남에게도 도움되지 않지만 자신에게도 불행한 인간상이죠. 


둘째로, 머잖은 미래에 왕으로 등극할 다뷔드에게 나중 보상과 후한 예우를 받을 수도 있는 기회였습니다. 의리가 깊디깊은 다뷔드는 남에게 받은 사랑과 온정은 잊지 않고 훗날에 꼭 갚는 타잎이었죠(예: 슘B 9장, 19'31~39 참조). 아울러 자기가 갚아야 할 원수는 꼭 갚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발로서는 바르찔래가 받은 제의처럼 왕궁에서 여생을 호의호식하며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고, 다뷔드 왕조 건영(建榮) 공신의 한 명으로 존중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셋째로는, 아내 아비가일에게 새롭게 인정 받을 수 있고, 어쩌면 사랑 받을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뷔드에게 (결과적으로) 아내를 내 주지 않고도 가정을 지킬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넷째로, 자신의 종들에게도 친절하고 좋은 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미지 개선의 계기였을 수 있지요. 왜냐 하면 종들조차도 평소 나발을 아예 말 상대가 되지 않는 불량한 사람으로 알고 지냈기 때문입니다(17절)


다섯째로, 자신이 일찍 죽지 않고 더 장수하면서 풍요롭게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발은 교만과 인색, 욕심 탓에 저 모든 기회를 거부하고 다 잃고 말았습니다. 가진 것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마음과 씀씀이는 좁디좁은 좁쌀뱅이에 불과했습니다. 더욱이 퉁명스럽고 거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 나발은 자기 재산도 아내도 수많은 종들도, 자기 목숨도 잃었습니다. 더욱이 이 모든 것보다도 더 무서운 상실은 바로 하나님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욕심과 인색, 불친절과 오만이란 것이 무섭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에, 더욱이 남이 스스로 요청해 왔을 때 베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흔히 우리들은 한 가지를 알지, 두 가지를 모르기가 쉽습니다. 남에게 부채를 지거나 하지 말라는 것만 알지, 남에게 꾸어 주는 사람이 복되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자 나발은 졸부중 졸부였습니다. 남에게 베풀 줄 모르는 그의 "거한" 부는 별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것이 되고 맙니다. 예리코(여리고)의 세무관, 자캐우스(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졸부였을 법하나, 주님을 만나뵌 후로는 자신이 토색한 것을 4배 갚겠다고 굳은 결단을 내렸고, 주님은 "오늘 이 집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됐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반면 율법을 잘 알아서 충실히 지키면서 영생까지도 차지하기를 바랐던 젊고 돈 많은 율법사는 돈이 아까워 결국 영생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더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설령 돈이 아까운 나머지 남에게 베풀지는 않더라도 나발처럼 오만한 태도와 말씨로 남의 분노를 사는 일은 없어야 좋다는 거지요. 나발이 만약 자기 먹거리가 아깝다면, 그냥 곱게 돌려 보낼 일이지, 열 전령들과 그들의 우두머리인 다뷔드 자신을 조롱하여 분노케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발은 베풀기를 거절하는 말조차도 곱지 않고 나발 불듯 함부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투를 한 번 살펴 보죠:

   "다뷔드가 누구야? 이샤이(이새)의 아들은 또 누구고? 요즘 자기 주인에게서 제멋대로 떨어져 나가는 종놈들이 많다는데. 아니 내가 왜 내 빵과 내 물과 내가 내 양털깎이 일꾼들을 위해 잡은 (양)고기를 갖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놈들에게 줘야 하냐고?" (필자 사역)


자, 나발은 지금 자기 입으로 상당히 고도의 조롱과 비소를 통해 다뷔드와 그 부하들을 욕보이고 있습니다. 미련한 그답지 않게 말입니다. '우둔'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다뷔드를 빗대어 조소하고 깔보고 모욕하며 심지어 분노와 복수심을 일으키기까지 똑똑해뵈는 아이러니를 연출합니다. 

'요즘 자기 주인에게서 제각각 떨어져 나가는 종놈들이 많다는데.'라는 말은 곧 다뷔드가 자기 상전인 샤울 왕에게서 이탈하여 마구 싸돌아다닌다는 식의 암시입니다. 이 말 한 마디만으로도 다뷔드의 격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발 자신은 재산을 갖고 왕 같은 독립적인 존재로 수하의 일꾼들을 부리지만, 목동 출신인 다뷔드는 아무리 용맹스럽다 해도 뛰어봤자 벼룩인 쫓기는 신세이고 왕의 수하에서 피하여 나와 다니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즉 있는 자, 가진 자로서 없는 자, 무력한 자들을 깔보고 싸잡아 모독하고 있는 셈입니다. 현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교계에서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이런 상당히 고차원의 모독을 할 수 있는 나발의 언어 구사 능력을 볼 때, 정작 그의 미련함은 자신의 머리 자체보다도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을 가려 절제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설령 다뷔드에 대하여 머릿속으로는 그런 발상을 갖고 있더라도 입밖에 내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일부 학자들은 나발이 실제로 다뷔드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다고 하지만, 자신과 같은 지족인 유다족에 속한 이샤이의 아들 다뷔드에 관한 소문을 나발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뷔드가 이샤이의 아들로서 샤울 왕 수하에 있다가 쫓겨 다니는 상황을 나발이 스스로 알았을 가능성이 몰랐을 가능성보다 더 높습니다.  

결국 나발은 말을 가리지 않는 자기 미련함 탓에 자기보다 선한 동족을 여지없이 욕보인 셈입니다. 



둘째로, 나발은 이렇게 모독할 만큼 충분히 다뷔드를 알았으면서도, 기왕에 다뷔드와 부하들이 자기 목자들에게 베풀어온 보호와 도움의 온정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거나 깡그리 무시해 버릴 정도로 완악하고 미련합니다. 또한 상대의 분노와 보복심을 자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예감하지 못할 만큼 우둔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들도 나발 같은 이런 어리석음을 가끔 또는 자주 자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보호와 도움을 깨닫지 못하고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없을까요? 많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발, 나발 하고 그를 비판하는 우리도 현대의 나발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내가 산들을 향해 내 눈을 들리.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나?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예호봐(여호와)님께로부터!"라고 묵상하고 고백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다뷔드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평소 광야에서 나발의 목자들과 함께 지내며 양 한 마리라도 잃지 않게 그들에게 준 도움에 대하여 최소한의 답례라도 기대하고 왔습니다. 웬만한 주인 같으면 "아, 참 고맙군요! 그래 그래, 우리 목자들을 주야로 지켜 주기에 그동안 얼마나 애들을 썼나요! 이 식량으로 제대로 보답이나 될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성의를 표해 드릴게요. 혹 모자라면.."이라고 할 것 같지 않나요.  

나발에게서는 그런 보답/보은의 정이 조금치도 보이질 않네요. 지금 그의 태도는 마치 "도대체 너희가 뭔데 멀쩡한 우리 목자들에게 그런 혜택을 베푼다는 거야? 너희 아니라도 우리 애들이 그동안 다 잘들 해 왔거든? 괜히 양식 구걸이나 하려고 그딴 소릴랑은 말아. 난 너희 같은 무리 때문에 내 소중한 식량을 축 낼 처지가 아냐. 우리끼리만으로도 족해. 어서들 딴 데 가서 알아 봐!" 하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이런 태도가 사실 세상 부자들 대다수의 태도라는 것을 우리가 알지 않나요. 소위 졸부들 말입니다. 필자도 이런저런 졸부들을 꽤 많이 만나봤는데, 놀랍게도 그들 다수는 소위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명목상의 신자'들이겠지요. 물론 청지기 정신을 가진 훌륭하고 관대한 부자들도 없진 않지만 매우 드뭅니다. 교계에서 훌륭한 부자라고 소문은 났지만 사실 이름 내기, 생색 내기인 경우도 흔하지요. 


우리는 그래선 안됩니다! 그런 자세는 하나님 앞에 망령된 것이며 사실상 미련한 나발과 대동소이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내가 보유하고 있지만, 실상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래선 안됩니다. "내 교회, 우리 교회"주의는 크리스토님이 교회의 머리이고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심을 망각하게 할 때가 잦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중대형교회 자체 분규 사태들의 대부분은 교회에 대한 물적/정신적 소유의식 탓에 발생합니다. "여태껏 내 헌금과 에너지를 쏟아부었으니 나도 이 교회의 지분을 가진 셈이지. 암, 내 것이고 말고!" 식의 발상입니다. 유형교회/제도교회 중심이며 자못 물질적/시각적인 교회관입니다. 그런 곳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실 구석이 없습니다. 그냥 인간들이 모여 인위적으로 하나의 사회체제인 '교회회사'를 꾸려갈 뿐입니다. 그런 곳엔 입 나발, 말 나발만 불어대는 현대의 나발들이 많습니다.  


참된 교회란, 거듭난 사람들이 누구나/저마다 청지기 의식을 갖고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니.."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듬체여야 합니다. 거기엔 "내 껀 모두 내 꺼!"라고 재며 남을 낮춰보는 나발 같은 교인이 있을 구석도 없거니와 있어서도 안 되지요. 그래야만 진정한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라오디케아 교회에선 현대의 나발들이 흔히 발견됩니다. 그런 사공 나발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물이 아닌 산으로 올라가버리고 맙니다. 



기회를 차지한 아비가일


철저히 기회를 거부한 남편 나발과는 달리, 아비가일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최대한 선용한 슬기로운 여인이지요. 그는 남편 나발이 미련하게 대답하여 다뷔드의 전령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한 종의 말을 귀띔해 듣자, 지체하지 않고 즉시 행동에 들어갑니다. 집에 있는 빵과 건과 등 다양한 먹거리들을 챙겨 다뷔드와 부하들의 근거지를 향해 부랴부랴 떠난 것입니다. 다뷔드가 남편에게 직접 보복할 위험을 막기 위한 기회의 선용입니다. 나발과는 정반대로 그는 종의 말을 믿어 주고 중시했습니다. 종이 그녀에게 귀띔한 것에서, 미련한 나발과 종들 사이의 관계와는 달리, 그녀와 종들 사이엔 일종의 굳은 신뢰감이 쌓여 왔음을 느낍니다. 


만약 아비가일이 종의 말을 긴가민가 하고 주저하면서 "뭐, 좀 더 기다려 봐야지.." 했다면, 남편과 함께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몰살될 뻔 했지요. 

이런 점에서 아비가일은 여느 아낙네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판단이 기민하고 명석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순발력/기동력이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어진 기회 선용에 있어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경우에 따라 그런 점이 언제나 바람직하고 도움되지 않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크리스천들 특히 여성들은 아비가일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더구나 다뷔드에게 말할 기회를 최대한 선용했습니다. 그는 다뷔드가 400명을 거느리고 쳐들어오고 있는 중이란 사실을 몰랐댔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그러리라 예상은 했을 터입니다. 짐을 실은 나귀를 따라 자신의 나귀를 타고 가면서 그는 무엇보다 우선 다뷔드의 고조된 보복감정을 조속히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고, 슬기로운 말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다뷔드를 만난 순간, 급히 나귀에서 내려 얼굴이 땅에 닿도록 납짝 엎드리면서 다뷔드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듭니다. 다뷔드는 상당한 양의 먹거리를 실은 나귀를 데리고 타고 온 하인들에 이어, 이 아름다운 여인이 저만큼 나귀를 타고 오더니 자신을 보자마자 땅에 엎드려 절하는 데 적지아니 놀랐을 터입니다. 물론 하인 중 누군가가 미리 귀띔을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어서 24~31절에 나오는 아비가일의 호소는 절세의 가언(佳言)이라고 할 대목입니다. 이처럼 슬기가 넘치고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는 말도 드물 터입니다. 이 아비가일의 호소에서 우리가 느끼는 점은 그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온 믿음의 여성이며, 그녀 자신의 말이기보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초자연적인 구변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녀의 입을 통해 다뷔드의 섣부른 응징길을 막고 계십니다(26절).

아비가일은 더구나 다뷔드와 그의 삶을 익히 알고 있었던 듯하며(28절 등 참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직접 그녀를 통하여 말하는 느낌이 듭니다. 흐르는 듯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다뷔드의 분노는 눈 녹듯 사그러들었음이 분명합니다.  한 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고, 경우에 걸맞은 말은 은빛 바탕에다 아로새긴 금빛 사과란 성구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비가일은 우선 다뷔드의 분노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처음부터 잘 선용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립니다(24a, 28a). 또 억울한 현실과 그 배후의 사실을 시인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며(25), 더 나아가 상대의 현실과 장점을 인정해 주고 위로합니다(28b~31).   

이것은 남의 마음을 "읽어", 심리조종을 하는 말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아비가일은 남편과 집안 남자들을 다뷔드의 칼에서 무난히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또한 다뷔드의 직접 응징을 막고 대신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도록 이끄는 기회를 활용합니다. 그럼으로써 다뷔드의 죄책감을 줄이는 데도 최선을 다합니다(31절). 즉 다뷔드의 죄악(39절)도 막고, 일단 남편의 목숨을 건져내면서도 나발 자신의 죄악이 자기 머리로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비가일은 남편을 잃는 대신 행여 다뷔드의 집안 여자가 될 기회도 선용하고 있습니다(31b). 아비가일은 뭔가 나발에게 곧 닥쳐올 운명(37,38)을 예감한 듯합니다(26b, 29b). 그래서 나발이 거의 죽자마자 다뷔드의 아내, 즉 미래의 유다 왕후의 한 명이 된 것입니다(41,42).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뷔드는 구약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뷔드가 나발에 대한 부하들의 보고에 접하여 즉시 분노하며 일어나 당장 수하의 400명을 데리고 나발의 집으로 다짜고자 쳐들어가는 행동은 당대로서는 충분히 정당한 응징적 자세인 지는 몰라도, 신약시대로서는 결코 맞지 않는 상황입니다. 신약인으로서는 다뷔드 같은 감정으로 그 같은 행동을 취해서는 안되죠! 

이 점을 수많은 현대 신자들이 혼동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수많은 애국 신자들은 비윤리나 사회 부조리 등에 대하여 분노하고 사람들을 마구 미워하고 규탄하면서 운동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어떤 정당대응을 하려 드는데,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를 않습니다. 


다뷔드는 부하들을 위한 의분에서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발의 목자들을 도운 자신에 대한 나발의 조롱에 치를 떨었습니다. 물론 우리 역시 다뷔드의 감정을 백분 이해합니다. 죄 없이 샤울에게 쫓겨다니는 것도 억울한데, 나발의 그런 조롱을 들으니 얼마나 분통하겠습니까? 하물며 나발의 목자들에게 그런 보호의 도움을 베풀었는데도 온정 대신 이런 모욕을 받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 터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뷔드의 행동은 율법적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나발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나발은 실로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아비가일을 통해 다뷔드의 손으로 직접 나발을 응징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아비가일은 슬기롭게도 그 어느 인간의 응징을 통해서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발이 심판을 받도록 맡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뷔드라는 구약적 의와, 구약시대에 이미 보여진 아비가일이라는 사뭇 신약적인 정신의 대조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신약인인 우리는 자신들이 직접 의분이라는 감정과 거기 바탕을 둔 행동을 통하여 직접 어떤 '해결'을 보려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기가 내게 달렸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시대, 신약시대인 지금도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는 신자들이 흔합니다. 장 칼뱅이 다스리던 제네바 종교정권은 수많은 시민 신자들을 화형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대의 구교의 화형을 본뜬 것으로 율법적인 관행이었지요. 신약시대에 신자들이 정의를 행한다며, 구약인들처럼 사람들을 심판하고 마구 죽일 수가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고, 그래선 안됩니다!

신약인들은 사람들을 죽여 천국으로 보낸다든지 지옥으로 보낸다든지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시대에는 다뷔드처럼 의분에 차서 "내가 이런 인간(나발)을 그냥 둘 수 없다. 당장 그를 쳐죽여 쉐올로 내려보내야지!"라고 선언하며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주권주의 운동권이나 신사도운동권, 찌온(시온)주의 운동권 등에서는 그런 발상을 갖고 행동하는 인사들이 흔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며 세상이나 교계 인사들을 상대로 맹렬히 싸우며 직접 공격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특히 이스라엘과 유대계를 위한다는 크리스천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한 가지는 예수님 당대에도 유대 군중 대다수가 그분을 반대하고 증오했듯, 오늘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찌온운동주의자들은 결코 예수님을 참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직도 '눈엔 눈, 이엔 이'의 원칙 위에서 행동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샬롬'은 예수 크리스토의 사랑 안에서 잃어진 영혼들에게 일차적 관심을 갖는 기독교적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은 제외시켜 버리고 모두들 육적 이스라엘의 정치적 안정과 승리를 위해야 한다는 율법적, 조건부적 샬롬일 뿐입니다. 


아울러 바티칸 정권을 통하여 지상의 '신국' 이상을 구현하려고 시도해 온 천주교도 종교재판과 마녀 사냥, 중세의 소위 '십자군'과 화형 등 온갖 시대착오적인 행위를 저질러 왔는데, 이 모두가 구약적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천주교는 본래 사제를 중심한 구약적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시대착오적 발상과 행동들입니다! 

우리는 다뷔드를 성경대로의 신앙 위인과 메시아의 그림자적 군주로 믿고 시편 등을 통해 감동을 받지만, 그의 구약적/율법적 신념과 응징 행동 등을 그대로 답습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됩니다. 구약은 어디까지나 구약이고, 신약은 어디까지나 신약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모든 잃어진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나발이 오늘 살아있다면 그는 또 다른 잃어진 영혼이지, 우리의 보복 대상이 아닙니다. 미련한 나발 같은 사람이든 똑똑한 아비가일 같은 사람이든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잃어진 영혼들이며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우리의 온정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잃어진 영혼에 관심을 갖기보다 세상 변혁과 지상의 신국(theocracy)이라는 시대착오적 발상을 갖고, 과감하고 과도한 현대의 사상적/행동적 '개혁'을 주장하는 인사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세상 '7 권역 내지 일곱 산의 '정복'을 드높이 부르짖는 사람들을 조심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결론은 우리는 주어진 선한 기회를 어리석게 물리치지 말고, 믿음으로 잘 선용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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