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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방언.은사.신유

걸러 낸 반쪽 짜리 복음

 


김삼

복음을 통째로 믿지 않고 이런저런 특수 여과기, 필터나 가는 체로 걸러내어 믿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이라는 필터, 과학이라는 필터, 철학이라는 필터, 자기 견해라는 필터.. 온갖 필터로 걸러서 믿는다. 반면 복음을 체로 거르지 않고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은 오히려 "좀 안 된" 사람, "맛이 살짝 간" 사람으로 취급받곤 한다.

신학이라는 필터도 진보신학 필터, 보수신학 필터 두 가지가 있다. 필자도 다년간 보수신학을 공부한 바 있지만, 진/보 양쪽이 다 성경과 복음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받지를 않는다. 신학교 시절 친구 하나는 요즘도 이런 소릴 잘하곤 한다.

성경에 나타났던 초기의 모든 계시와 이적은 점진적으로 약화돼 현대엔 거의 불필요하게 됐다. 성경 말씀만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독자도 들어본 소릴 게다. 그 말에 동의하는가? 물론 부분적으로 일리는 있어 보인다. 사실 에집트 탈출 당시의 열 재앙, 홍해 가르고 건느기, 보리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 훨씬 넘는(유대 산정법으로 당시 5000명이란 남자들만 가리킨다) 군중들을 먹이기 등 거창한 이적은 요즘 없지를 않은가?

그런 스펙태큘러한 이적들은 각 시대별로 성경의 고유한 표본적 계시 기록을 위해 필요했다고 사료된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계시와 이적이 점진적으로 약화돼 현재는 아예 "사라진" 것으로 인식하면 잘못이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사실 성경의 기록계시와 이적의 존립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안 선다. 계시가 아니더라도 이적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계시에 기록될 이적만 행하시는 분은 아니다. 예를 들면 사도 요한은 성경에 이루 기록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이적들이 있었던 사실을 귀띔해준다.

현대에 초자연적인 이적이 있다고해서 결코 기록된 성경 계시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그것이 성경에 의도적으로 추가되어 성경이 가감수정되지 않는 한 말이다. 성경 말씀은 결코 가감수정될 수 없는 대상이다! 지금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계시가 완성됐다고 해서 현대에 복음적/초자연적 이적의 필요성과 이적의 당위성 까지 사라져줘야 하는 건 아니다.

현대의 이적/은사/신유/방언 등을 부정하려 드는 현상은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나 비슷하다. 양쪽 다 체로 걸러서, 필터로 걸러서 믿는다는 것이다. "성경이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하냐?"는 식이다. 그런데 "성경이면 다 된다"는 그들의 말도 알고보면 사실이 아니다. 말로는 "성경이면 다 된다"고 해 놓고 반드시 신학의 체로 받칠 준비를 해놓고 있다.

오해하지 말라. 필자는 신학무용론자가 아니다. 신학은 필요하다. 하지만 신학이 성경의 시녀여야지 성경을 타고앉아 성경의 주인 노릇을 해선 안된다는 얘기다. 복음을 신학의 필터로 걸러선 안된다는 말이다.

주님이 하신 이적/표적/기사들은 영 사라진 게 아니라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고스란히 전승됐다. 주님의 마지막 대명('지상명령') 속엔 이적/표적/은사에 관한 교훈도 포함돼 있다(마르쿠스복음서 16:17). "말씀만 전해라. 그리고 끝!" 하시지 않았다. 성령을 보내시면서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단서를 붙이셨다. 권능? 그렇다. 그것이 뭐라고 생각되는가? 믿음으로 초자연적 사역을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과 은사다. 그것이 말씀 전파에 곁들여져야 한다는 얘기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반드시 이를 이행하셨다. 초자연적 사역으로 말씀을 뒷받침하셨다는 얘기다. 4 복음서가 다 그렇고 사도행전도 다 그렇다. 그 바탕 위에서 서신서들도 기록됐다.

짐짓 "성경 말씀이면 다 된다"면서 복음으로부터 초자연적/권능적 요소를 걸러내려고 힘께나 쓰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얘기를 하고싶은지도 모른다.

"주님, 왜 말씀만 전하시지 복잡하게스리 이적까지 행하셨습니까?"
"주님의 제자 분들은 또 선교만 하시지 왜 권능은 행하시고 그랬습니까? 그런 거 좀 하시지 마시지.."
"주님, 요즘이야 어찌 얄궂고 이상한 이적과 은사 따위가 필요합니까? 필요없죠? 그런 건 좀..흉칙하질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성령의 도래를 예고하시면서 분명히 "자네들은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오순절날 사도 페트로는 말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 자녀들을 위한 것이며 또한 모든 머나먼 사람들, 그들이 얼마이든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실 만큼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행전 2:39)

성령의 약속과 거기 자연스레 따르는 초자연적 사역/이적/은사 등은 앞으로도 주님 오실 때까지 모든 오가는 세대의 사람들-그들의 수가 얼마이든- 하나님이 부르시는 만큼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란 말이다.

이런데도 선교하러 나갈 때 반쪽 무기만 갖고 나가라는 교회들이 많다. 초자연적 권능은 빼놓고 말씀만 전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권능은 받지도 않은 채 또는 받지 말라면서 말씀만 열나게 전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름의 거창한 선교 표어까지 내걸고서는 그러고들 있다. 요지경 속이다. 아마딜로(armadillo)처럼 든든한 갑옷과 총칼은 주지도 않고 빤쓰바람에 성경책만 들고 전쟁터로 뛰라는 것과 다름아니다.

그런 것은 반쪽 짜리 선교다! 체로 걸러낸 반쪽 짜리 복음이다. 모든 사도들은 다 하나님이 뒷받침해주시는 초자연적 권능으로 사역했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보다 뭐가 더 잘 났다고 무슨 깡으로 권능 없이도 말씀만으로 선교를 할 수 있다고 믿는가? 오히려 지금은 세상이 초기교회 시절보다 더 악하고 더 강퍅하기 때문에 그때보다 더 큰 은사, 더 강력한 권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진 않는가?

물론 투철한 영적 분별력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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