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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방언.은사.신유

성령 은사 시대, 물 건너 가?

 



김삼

설교자/목회자들의 성경관은 퍽 다양하다. 성경도 하나, 그 저자이신 성령님도 한분이신데 설교자들의 견해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이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면, 저 목사는 달리 반응한다. 언론을 통해 그들의 설교를 읽거나 들을 때, 그 상이성의 큰 폭을 대강 느낄 수 있다.
이런 폭 넓은 상호이질성은 주로 신학교 배경이나 독서 체험, 또는 어떤 계기 때문에 형성된 서로 다른 신학체계 탓이다. 여기에다 일반 교우들 견해까지 보탠다면 엄청난 카오스가 배가된다. 그래서 특정교리 문제는 영적 분별력이 없는 성도에겐 자칫 혼동과 공허의 세계, 더 나아가 공포의 세계이기가 쉽다.

필자의 딴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예로부터 현재까지 교계 안에서 날카로운 대립각을 이뤄 온 공통 이슈 한 가지가 성령론, 그중에서도 은사론, 그 가운데서도 방언론이다. 이런 주제 하나씩만으로도 긴 글을 쓸 수 있겠지만, 여기선 한 가지 물음에 답을 붙여 보련다.
물음이란, 과연 성령의 이적과 표적, 은사가 초기교회 시대로 끝났고 이젠 더 존재하지 않는가 란 것이다.

많은 목회자/설교자들이 “이적과 은사는 사도 시대에만 있었고 성경계시가 완성된 이제 더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주일마다 한 두 명 아니 몇 명씩은 그런 설교들을 할 것이다. 특히 전통주의/진보주의적인 신학교에서들 그렇게 배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목회자의 교회나 신학교에선 성령의 이적과 은사가 거의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까닭은 간단하다. 원하지 않는 곳엔 나타나 주질 않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강력하시면서 온유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를 짓눌러 가면서 일부러 자신을 나타내시진 않는다. 기꺼이 환영하는 곳에만 풍성히 임하신다.
이런 차이 때문에, 은사가 나타나는 성도들은 걸핏하면 기성교회에서 왕따를 당한다. 심지어 그런 현대의 은사는 모두 성령 아닌 ‘악령’의 것이요 따라서 이단’이라고까지 치부된다. 자연히 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런데 아까 위의 그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신학자들이 생각해 낸 학적 가설이고 억설이지, 성경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성경 구절까지 인용해 가며 그런 부정적인 주장을 한다면, 성경을 '삐딱'하게 오해하고 오용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필자가 믿는 성령께선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악이다. 그런데 수많은 신학자들과 그 제자들인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믿음 대신 신학으로 성경을 보고 푼다. 그래서 잘못되고 비뚤어진 신학 정보들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를 대신한다.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은 성령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신학자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아무튼 그런 신학자나 그런 설교자들은 한 마디로 영적 분별력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신들이야 스스로 투철한 신앙인, 투철한 분별자로 여기겠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딴 건 다 믿는데 오늘날의 성령의 권능 사역은 믿지 않는다는 말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비신자와 별 차이진 배 없단 얘기다.

여기서 잠깐 딴 얘긴데..대/중/소 교회를 막론하고 목회자들이 우려하는 한 가지는 ‘내 교인’을 저 교회로 뺏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 교회에 갖출 것을 다 갖췄더라도 뭐 한 가지가 부족하면 그런 생각을 쉽사리 갖게 된다. 그 ‘한 가지’의 하나가 구원과 거듭남, 성령의 은사와 기적, 신유 등 초자연적 이슈다.

가까운 이웃 교회엔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나는데 우리 교회에 안 나타날 경우 왠지 불안해진다. 그럴 경우 목회자의 일차적인 방편은 으레 '불건전한 신비주의’또는 ‘가짜(의 성령역사)’ 운운 하는 비판과 단죄다.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 자체보다는 자기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지식을 써먹는다.
그런 설교자들이 상투적으로 애용하는 성경구절이 바로 다음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 날 내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 이름으로 악령들을 내쫓고, 또 주님 이름으로 숱한 권능 사역을 행치 않았습니까?’ 할 텐데, 나는 그때 그들에게 선언할 것이다. ‘난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 ’.”(마태 7:22,23 이하 성구 사역)

위 성구를 들어 현대의 성령 이적과 은사를 백안시하는데 전형적인 눈 가리고 아옹 식 인용이다. 한 번 자세히 살펴 보자.

첫째로, 주님은 모든 예언/신유/축귀/권능(이적과 은사) 사역자들을 싸 잡아 저주하신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단서가 붙어 있다. 즉 불법을 행하는 자도 있고 정상적인 사역을 하는 자도 있다는 얘기다.
만일 그렇지 않고 단순히 모든 권능 사역자들이 다 ‘불법자’라면, 주님의 제자들도 포함돼야 하며 누구보다 주님 자신이 포함돼야 한다. 주님과 사도들이 모두 큰 권능 사역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맨날 말씀 전하고 맨날 예언하고 맨날 병 고치고 맨날 귀신 쫓고 맨날 은사를 활용했다.
안 그런가?

안 그렇다면 왜 성령께서 교회에 권능과 은사를 주셨단 말인가? 모두 불법자로 만드시려고? 그래서 권능을 행하는 자마다 다 지옥 보내시려고? 권능사역을 하는 자들을 모두 다 지옥으로 몰아대는 그런 하나님은 난 믿지 않으련다.
그렇다면, 큰 권능사역을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누굴까?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스스로 가로채는 사역자다.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둘째로 위 성구엔 불법으로 ‘예언’하는 자들이 우선적으로 포함돼 있다. 성령의 권능을 받지도 않고, 또 받아도 써 먹지도 않고 주님 이름으로 ‘예언’한다는 많은 설교자도 이 항목에 든다. 즉 자신을 먼저 돌아 보지도 않고 남을 비판하고 단죄하기에 바쁜 설교자도 여기 포함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단 얘기다.

물론 진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 사이비/이단도 없진 않다. 그러나 되풀이하지만, 그들의 하는 짓거리 즉 열매를 보면 안다. 그보다는 그런 ‘단죄’를 더 조심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진짜 불건전한 신비주의도 사이비이지만 진짜 성령의 역사를 ‘가짜’로 단죄하는 것도 사이비일 수 있기 때문.

단적으로 말해서 당신 자신이 성령의 초자연적 체험을 한 적이 없다면 어떻게 ‘불건전한 신비주의’라고 쉽게 분별하나?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물어 보라. 당신의 그 언질은 단지 이웃교회 죽이기 차원에서인가 아니면 진정 하나님의 교회를 염려하는 충정 차원에선가? 그 ‘충정’은 착각에선가 바른 판단에선가.

물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연 이웃교회의 저 현상이 진짜 성령의 역사일 지 아니면 악령의 역사 즉 사탄일 지 바로 가름할 만한 충분한 영적 판별력이 당신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입을 다물어라. 하나님께 다 맡기고 염려를 걷어 제쳐라. 성령 체험이 없거나 부족한 자신이나 염려하든지 그리고 당신의 할 일만 열심히 하든지, 아니면 당신도 그 교회처럼 은사와 이적을 간구하면 되지 않겠는가?

당신에게 은사와 이적이 나타나면, 그걸 보고 놀란 교인들이 도망갈 것이 우려되는가? 거기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알토란 같은 교인 또는 돈 많은 교인들을 잃을까 우려되는가? 아니면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그 성령 충만한 교회를 죽여야겠는가? 그럼 목회를 관둬 버려라! 그것이 더 진솔한 행동 방식일지 모른다.

성경은 100% 믿어야 한다. 70% 정도 믿으면서 100%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99.99%도 100%는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2000년전 오순절 그 날 땅에 내려 오신 성령께서 현재까지 지상에 존재해 계시면서 계속 사역하신다고 여러 모로 밝혀 준다. 그 때 오신 성령님이 사라지시지 않았다.

물론 성령께서 그 전엔 지상에 오신 적이 없다는 건 아니다. 성령은 요단강가에서 침례받으신 예수 크리스토께 비둘기처럼 온전히 임하여 물 붓듯, 기름 붓듯 부어졌다. 또 더 오래 전 구약 예언자/왕/사제들, 사사나 원로 등 정치인들에게 부분적으로 임하셨다. '부분적'이란 말은 기름부음을 통한 부분적 권능과 은사를 주셨지만, 성령께서 그들 속에 온전히 내재하진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약시대/교회시대/성령시대의 시작인 오순절 이후부터는 성령께서 지상교회에 임하여 계시면서, 믿는 자들의 구원 사역과 거듭남과 온전한 내주(인간 속에 계심), 이적과 기사, 은사와 성령의 열매로 크리스토가 교회의 머리이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그 성령님은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 성자 크리스토의 영이시다.

사도들이 체험했던 이적/은사/신유 등 초자연적인 역사는 그러므로 오늘날도 고스란히 존재하고 나타난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성령은 계속 계시며 사역하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지금도 과거와 동일하게 사역하시길 원하신다. 예수 크리스토는 어제나 오늘, 앞날에 영원히 한결 같으시기 때문이다. 어제 일하시던 주님이 오늘은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현재는 성령의 사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신학도들은 하나님을 ‘반 쪽 짜리’ 신으로 제한하고 있다. 하나님의 손을 묶어 두고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을..?” 할지 몰라도, 인간이 믿음을 화합치 않으면 하나님의 손을 묶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중시하는 나머지 성경 가르침에만 치중하고 성령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반 쪽 짜리 신앙일 수 밖에 없다. 그런 교회들이 주위에 수두룩하다. 아니 대다수다. 그런 교회는 자연히,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교회를 질시하고 심지어 박해하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그럼 초기교회에 넘쳤던 성령의 이적과 은사는 교회에 아직 존재하는가?
그 이전에 먼저 물어 보자. 사도서신들을 읽어 보면, 초기교회 시대도 세상은 오늘날 못지 않게 무척 악했다. 죄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친다고, 초기에 성령의 이적/은사가 필요했다면, 지금처럼 과거보다 몇 백 배 몇 천 배 더 악해진 세상에서 성령의 이적/은사 없이 올바른 복음 전파와 영적 전쟁이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은 스스로 신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성경 말씀이 완전한 계시로서 존재하기에 더이상 성령의 권능/이적/은사가 필요 없다면, 성령이 쓰신 말씀이 성령님 자신을 대체해 버리고 성령님은 필요 없다는 셈이 된다. 이적과 은사를 나타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성령을 묶어 버리는 셈이다. 그럼 성령은 명목 상의 하나님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독자가 이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예수님 자신을 보라. 예수님은 성령을 물 붓듯 기름 붓듯 부음 받았기 때문에 온갖 표적과 기사가 가능했다고 성경은 밝힌다.
   "곧, 하나님이 나자렛 예수에게 성령과 권능으로 기름 부으시자 그 분이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 억눌린 모든 이들을 고쳐 주셨으니, 하나님이 그 분과 함께 하신 때문입니다"(행 10:38).


즉 하나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셨기에 예수님의 사역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것은 물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들도 성령의 권능적 이적과 은사가 나타났기에 사역이 가능했다(행 2:4,43, 4:29,30, 5:30.. 등등).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말씀과 이적이 늘 병행됐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적은 하나님 편에서 말씀을 확증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보자.

    “또 그들(제자들)이 나가 어디서나 전파했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일하시어 따르는 이적으로 그 말씀을 확증하셨다.”(맑 16:20)

그런데도 그런 이적과 은사도 없이, 우리가 무슨 대단한 ‘짱’이라고 말씀과 ‘깡’으로만 권능적인 사역이 가능하다는 얘긴가? 너무나 독단적, 편파적인 얘기다. 전통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이 얼마나 우스운 얘긴지 더 깊이 살펴 보자.

예수님 당시에도 구약 성경은 있었다. 또 제자들, 사도들도 구전으로 된 ‘복음서’와 일부 서신서를 보유했다고 봐야 한다. 즉 계시록 같은 후대 기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약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단지 당대에 아직 없었던 완본 신약 성경을 지금 우리가 갖고있기 때문에 그것 하나로 성령의 이적과 치유, 은사 없이 사역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그런 주장은 ‘신약성경책 절대우상주의’ 내지 신학절대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말씀만을 강조하는 대다수 전통교파 신학교에 성령의 권능과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성령께선 그분을 진정으로 환영하는 곳에만 오신다. 사람들의 의지를 무시하고 아무 데나 찾아오시진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계시시대가 완성됐기 때문에 현대엔 결코 성령의 은사와 이적이 나타날 수 없고 또 나타나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과 그 후학들은, 자신도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않을 뿐더러, 그들이 가르치는 교인들에게도 성령님이 일하실 기회를 막고 있는 거침돌과 장애물 같은 존재다.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격이다. 신학의 틀에 묶인 자신들도 불쌍하지만 그 교인들은 더 불쌍하다. 신학자들이여,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

그 다음으로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중요한 가설 한 가지는 성령의 강림, 은사와 이적들이 초기교회에서 ‘단회’로 끝났다는 주장. 소위 ‘단회설’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성령님이 2000년 전에 한꺼번에 권능과 이적, 은사들을 쏟아 주시곤 더이상 그런 역사를 하시지 않거나 점점 약화되다가 아예 사라졌다는 설이다.
바꿔 말하면, 초기교회 때 콸콸 흐르던 거대한 오순절 성령의 강물 줄기가 이젠 시냇물처럼 줄어들어 ‘졸졸’ 흘러내리거나 말라 버렸다는 것이다. 이 역시 넌센스다.

요런 가설도 신학자의 눈에 씌운 요상한 선글래스 탓에 나온 헛소리다. 미안한데, 성경은 그와는 정 반대로 얘기한다. 자, 다음 구절을 보자.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 자녀들을 위한 것이며 또한 모든 머나먼 사람들, 그들이 얼마이든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실 만큼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행 2:39)

위에서 ‘머나먼 사람들’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 즉 지리적으로 떨어진 사람들뿐 아니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택한 사람들을 말한다. 즉 오는 세대 중에서 하나님이 부르실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약속된 것이 성령의 선물이란 것이다.

사도 페트로가 위의 말을 할 때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하지 않았다.

   “이 (성령 선물의) 약속은 하나님이 택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단, 성령의 이적과 신유, 은사는 빼놓고 말입니다.”


페트로가 군중 앞에 처음 나섰던 그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일부 전통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조용한 성령’이 아니셨다. 페트로와 120성도와 수천명 유대인들이 목격한 그 성령님의 강림은 분명히 “보고 듣는” 모습으로였다. 페트로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른손에 높여지시어, 그 아버님께 성령의 약속을 받아, 그 분(예수님)이 이를 부어주시니 곧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바입니다.”(행 2:33)

초기교회의 증인들이 “보고 들은” 성령 임재의 모습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방언이었다! [‘방언’이란 한자 용어는 지역적 개념이 부가된 잘못된 번역어다. 마치 사투리나 지역언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원어 ‘글로싸’나 영어의 ‘tongues’는 그런 지역적 개념이 포함돼 있지 않다].

사도 페트로는 분명히, 사도행전 10:44에서 [방언=성령부어주심]이란 등식으로 봤다. 다음 구절을 보자.

   “페트로가 이 말을 할 즈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페트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부어짐을 인하여 놀랐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하면서 하나님을 기리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페트로가 말했습니다. ‘이 분들이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는데 누가 감히 물로 세례/침례 베푸는 걸 막을 수가 있겠소?’”

따라서, 지금도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들리게 확실히 임하시는 성령의 체험을 해야 초기교회 성도들과 우리 사이에 공평한 ‘거래’가 이뤄진다. 물론 믿음 있는 이들에게만 부어 주시는 약속이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늘 한결 같으시기 때문이다. 그 분의 약속도 늘 동일하다.

이런 주님의 약속이 오늘날엔 통하지 않는다는 신학자들은 한 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보려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필자의 은사들도 포함된) 그런 신학자들에게 지금 필자는 “성경을 삐딱하게만 읽지 말고 똑바로도 한 번 읽어 보셔요”라고 권하고 싶다.

신학자들은 과거 초기교회 때(그들 보기에) 시끄러웠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엔 조용해 주길 원한다. 그러니까 조용히 살고 싶은 신학자 기분과 정서에 맞게 성령님과 신자들의 입을 막겠다는 것이 그들의 짧은 생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분 좋으신 날만 해를 돋우시는 게 아니라 매일 어김 없이 해돋이와 해지기를 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날마다 태양이 변함 없이 뜨고 지듯, 초기교회의 이적과 신유와 은사는 오늘도 변함 없이 존재한다. 믿음으로 기다리고 바라는 이들에게 나타난다. 성령님은 오순절 이래 항상 계시기 때문이다. 오순절에만 왕창 그리고 살짝 주시고, 현대는 단지 신구약 성경 합본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능과 은사를 싹 거둬 가 버리시는 ‘얌체’같은 성령님이 아니시란 얘기다.

자, 역사적으로 한 번 증명해 보자. 과연 성령의 권능을 초기교회의 120성도에게만 주셨는가?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임하시는가?

초기교회 120명에게 "보고 듣게" 임하신 그 성령님은(행 2:2-4)..

  • 그날, 유럽과 소아시아 각처에서 몰려온 3000여 유대인들이
    보고 듣게 부어주셨고 (행 2:5-13)
  • 몇 년 후 믿고 침례/세례를 받은 (옛 마술사) 시몬도 눈으로 "보고" 놀란 것이며(행 8:13,18),
  • 훗날 바울이 된 샤울도 다마쉨(다마스쿠스) 체험 후 받았고 (행 9:17. 비교: 코린토A=고전 14:18),
  • 수 십 년 후 페트로가 코르넬리우스 집을 방문했을 때도, 모두 “들을 수 있게” 성령이 임하셨고 (행 10:44-46),
  • 수 십 년 후, 아폴로 목사가 돌보던 에페소 성도들도 파울의 안수를 받고 성령의 임하심을 따라 방언과 예언을 했다(행 19:6).

그리고, 그로부터 백년 후..수세기 후..2000년 후도 마찬가지다. 예수 크리스토는 한결 같으시다.
이제 끝으로, 2000년전 오순절날 페트로가 인용한 요엘의 예언을 되새겨 보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 내가 나의 영을 모든 이들에게 부어줄 테니
너희 아들들, 너희 딸들이 예언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
또 내 종들과 여종들에게도 그때 내 영을 부어줄 테니
그들도 예언하리.’..”

위의 ‘마지막 때’가 언제라고 생각되는가? 2000년전 오순절만이었나? 오늘날까지인가? 필자가 보기엔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다.
그리고..성령님은 필자에게 감동 주시길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바퀴처럼 함께 간다"고 하셨다. 은사만 갖고 자랑하지 말고, 열매도 맺어야 한다는 얘기다.

외래어 발음은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하자는 생각입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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