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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문학

목월 시평을 통해 본 오착된 기독교문학 개념

목월 시평을 통해 본 오착된 기독교문학 개념


현재 필자가 지닌 자료만 갖고 논평해 본다.


I.
오래 전 이름 없는 문학상을 하나 타 본 적은 있어도 필자는 시인도 문인도 아니다. 다만 기독교인이자, 글쟁이는 글쟁이다. 또 과거 기독교 문인을 자임하는 사람들과 상당기간 친교 또는 교류해 본 일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 문인들이 말하는 소위 기독교 문학의 개념이 매우 애매하다는 것을 오래 느껴왔다. 이 애매한 느낌은 내게서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여전하다. 그들이 말하는 기독교 문학이란, 성경 표준이기보다 자기네 표준에 더 가깝다. 아마도 비단 기독교문학 뿐 아니라 기독교 예술에도 고루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성경에 대한 그들의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시편 제 23편을 비롯한 성경의 성시들을 '위대한 명작'이라고 언필칭 말들은 하면서도, 실상 그들의 태도로는 대체로 성경을 우습게 여긴다. 평소 성경을 멀리할수록 제대로 된 기독교문학이라고 치부한다.

등단지망생이나 문학도들이 성경 특히 시편 등을 본받아 신앙 시나 글을 쓸라 치면, 그들은 대뜸 '호교(護敎) 문학'으로 몰아 붙인다. 그들 나름의 기독교 문학관에서 벗어난 모든 글은 그렇게 범주화시킨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기독교 문학관은 곧 세속적 관점에서 문학성이 모자라는 글들은 다 기독교문학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들 나름의 설정이다.


그런데..하나님도 그러실까? 글쎄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독교문학의 관점은 그들과는 전혀 다를 법 하다.

가령, 송명희 시인을 보자. 필자가 보기에 그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그 어느 시인들보다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이고, 기독교 문학적인 시인의 한 명이다. 그런데 기독교 문학계 인사들은 대체로 그녀를 그렇게 봐 주질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송 시인의 작품은 '호교문학'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남의 글을 '호교문학'이라고 쉽사리 닦아 세우는 많은 문학인들의 낱말 다루기 솜씨나 맞춤법 등이 한 둘도 아니고 엉망진창일 때를 퍽 자주 발견하곤 한다.
뭘..뜻하는가?
누가 기독교 문학의 대가이고 전문가라는 것인지? 기본적으로 한글 문법부터 제대로 돼야 문학인이라고 자임할 수 있지 않을까. 가끔 한국 초등학생에도 미치지 못하는 맞춤법 솜씨를 갖고 '기독교문학' 전문가로 자처한다면 뭔가 잘못돼 있다. 얼굴과 이름을 내세우기 전에 부끄러운 줄을 좀 알자.

영어문학권 등 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학을 논하기 전, 철자와 문법부터 완벽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성경에 대한 기독교 문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세속 문인들보다 당연히 성경을 더 사랑해야 한다! 성경 진리가 몸에 배여 있어야 한다. 성경에 박식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독교문인은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 대표적인 표징의 하나가 오랫동안 기독교 문학계에 만연해 온 에큐메니즘이다.


시를 갖고 말해 보자.

흔히 종교시/신앙시/믿음시라고 일컬어지는 기독교 시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표면상 세속 시와 별로 분간이 안 된다. 정작 시인-작시자-이 누군지를 알고서야 비로소 일종의 기독교 작품(?)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들은 참 문학성/창작성이 발휘되려면, 직접적인 종교 시어가 아닌 생활 시어로서 표현되고 감지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구약의 시편은 기독교문학이 아닌 '호교문학'에 불과하다. 시편처럼 표면 상 용어부터 기독교적인 것들은 그들에게 기독교문학으로서 인정 받을 길이 멀다. 곧, 그들 나름의 기독교문학이란 보좌를 타고 앉아 재판/단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교와 구교 사이의 벽을 허물고 어느 쪽이든 기독교 시인으로 인정해 주는 잘못된 관습과 관행을 오래 길러 왔다. 그렇다면 이단/사이비 문학가들을 포함한 어떤 기독교 계열 시인도 기독교 시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못 배길 터이다. 기독교문학계의 허점이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문제종교집단의 교주요 명사인 엠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전적 또는 부분적으로 추종하는 수많은 따르미들은 역사 속에 명성을 떨쳐 온 세속 문학계 엘리트 명사들로서, 그들 다수가 '기독교 문인'들로 대접 받는다. 그중 아마도 대표적인 사람이 시인/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나 20세기의 T.S. 엘리오트일 것이다.
놀라운가?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기독교 시인으로 자타가 공인한다 한들 하나님과 성경 앞에서는 아니올시다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기독교문학이란, 처음부터 구멍 뚫린 대책 없는 개념이다.

엘리오트나 로버트-엘리저벹 브라우닝 부부 등을 진정한 기독교 시인으로 아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해 보는 기회도 갖고자 한다.


신구교 구분이 모호하기 짝이 없게 하는 한국 기독교 시문학의 에큐메니즘은 기독교의 진수인가? 과연 무엇이 기독교의 진수란 말인가?

어느 한국 시인이 "기독교의 절대적 진수"라고 주장한 부분엔 일리가 있으면서도 피상적 요소가 엿보이고, 특히 예수 크리스토만이 유일한 구원의 근거라는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빠져 있다. 혹 이것이 기독교문학계의 한계는 아닌지? 


기독교 문인들은 자가당착적인 결론은 피해야 한다.
입은 비뚤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기독교 문학이란, 하나님께 인정받을 때만 진정한 기독교문학일 수 있다. 즉 기독교문학의 잣대와 기준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다. 또 그 분의 말씀인 성경에 있다고 해도 맞는 말이다.그렇지 못하다면, 기독교문학이란 딱지를 떼 버려야 한다. 그냥 세속문학이든지 종교문학이든지, 아마 그래야 할 것이다. '양다리'를 걸치지 말아야 한다.



1968년은 한국 기독교문학사 상 의미 있는 해였다. 최초의 종합 기독교 시집인 '한국기독교시선'(대한기독교교육협회 편)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시선엔 10명의 시인들의 작품이 각 8편씩 총 80편 실렸다. 가나다 순으로 김경수/김현승/박두진/박목월/박화목/석용원/이상로/임인수/정기환/황금찬 등이다.
시집의 맨 앞 부분은 예배에의 부름과 낭송을 위한 김경수/석용원의 명상시 '사랑과 기도의 시편들'이다.

그런데 이 시선엔, 말이 기독교 시이지 전혀 그런 느낌이나 분위기가 아닌 작품들이 훨씬 더 많다. 바꿔 말하면 독자가 감상할 때, 그 다수는 세속 작품들과의 구분이 좀체 안 된다는 말이다. 기독교 시인이 썼다니까 그런가 보다 할 정도다.

 

II.
그 가운데서, 박목월의 작품 8편들을 보면, 하나님(내지 하느님)은 '신'(神)으로 일관돼 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는 어떤 신인지, 과연 성경의 하나님인지 잘 분간이 안 된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박 시인은 말년에 가깝게 다년간 카톨맄적 신앙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식 '하느님' 대신 편리한 '신'으로 대체해 썼을 것이다. 많은 문인들이 그렇다.
그는 어릴 때 세례를 받았지만 성당의 영세(?)였던 것 같으며, 말년엔 아내의 권고로 장로 임직을 했는데, 어떤 거듭남과 개종 과정을 거쳤는지는 분명치 않다.


필자의 말이 의아스러운 독자는 목월의 다음 시를 읽어 보기 바란다.


          뵈옵는


    발을 멈추고
    성모 마리아를 한참
    뵈옵는 그것으로
    나의 기도는 끝난다.
    산천동 뒷등성이로
    아침 산책길에
    성모 마리아를 한참
    뵈옵는 그것으로
    충만한 나의 신앙
    마리아의 얼굴에는
    그 날의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
    드릴 말씀이 없는
    나의 기도
    눈이 오는 날은
    청결한 슬픔의
    그늘이 디리어진
    동 트는 새벽에는
    환한 장미꽃
    그 얼굴을 쳐다보는 것으로
    문이 열리는
    흔들리는 나의
    감정의 물결에 따라
    동요하는 신앙
    순간마다 변모하는
    그
    어지러움 속에서
    순간마다 더운 핏줄로
    탄생하시는
    오늘의
    마리아의 오늘의
    얼굴을 뵈옵는
    그것만으로
    드릴 말씀이 없는
    나의 기도 나의 신앙
    간혹 돌아서는 골목길에서
    걸어오는 뒷모습을
    혹은 뒤돌아 보시는
    순간의 눈매를
    뵈옵게 된다.



이 작품은 놀랍게도 천주교가 아닌 신교의 '한국신앙시선집'(1974)에 버젓이 실렸었다.
이 시집은, 김준곤 목사가 대표하던 한국대학생선교회(KCCC)가 주최한 '엑스플로74 대회'를 기하여 엑스플로74 문예분과위원회(위원장 임옥인)가 엮어 펴 낸 것이다. 앞서 나온 '한국기독교시선'을 본따서 낸 것으로 보인다.

김준곤은 이 시집의 머릿말에서 "성 프랜시스코의 인생은 온통 시의 원천인 것 같다. 그의 기도가 시고, 그의 고뇌가 시고, 그의 사랑이 시였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래선지 이 시집엔 카톨맄 적인 작품도 포함됐다.

예부터 카톨맄계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남조의 작품도 2 편 실린 이 시집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시를 통해 신앙을 전달하고 싶어서"였단다. 그렇다면 박목월/김남조 시인을 통한 '성모흠숭' 신앙도 전달하고 싶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이 시집이 표방한 정신은 분명히 천주교를 아우르는 에큐메니즘이었음이 틀림 없다.



목월의 위 시에서 우리는 전형적인 카톨맄교의 성모 흠숭 신심을 체감한다.

시인은 성모상 앞에서 발을 멈추고 진짜 마리아도 아닌 그것을 "한참 뵈옵는" 것만도 기도의 '전부'라고 공표한다. 그 정도로 그는 성모상 바라보기에 몰입하고 열중한다. 또 성모에게 기도한다. 성모가 기도의 대상이라는 얘기다.

하나의 상(像)에 대한 이런 감정과 태도는 더도 덜도 말고 정확하게 구약성경이 지적하는 우상숭배다.

시인은 또 그 성모상 뵈옵기로 그의 신앙이 "충만해진다"고 고백한다. 그의 신앙의 표준도, 신앙의 '충만'도 성모 바라보기로 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시인이 바라는 충만은 성령충만이기보다 성모상을 바라봄으로써 오는(?) '성모충만'으로 귀결된 듯 싶어 슬프다. 

이것은 천주교권에 흔한 잘못된 신비주의, 오도된 위험한 신비 사상이라고 해도 그르지 않다. 관상 영성과 직결된 중세 신비사상과도 거의 일치한다. 실제로, 종교다원적/종교혼합적 관상가 토머스 멀튼의 사상을 이어 간 헨리 나웬도, 마리아 등 성인들의 그림을 앞에 놓고 하는, 정교회적인 소위 '성화상 기도'(이콘기도)에 관해서만 책을 한 권 쓸 정도로 적극 장려한 바 있다. 

 
시인은 또 마리아의 얼굴에 그 날의 '표정'이 서려 있다며 그 표정 읽기만으로도 '드릴 말씀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문학적, 심미적, 시적이고 상징적인 말일 테지만, 자칫 오컬트한 의미로도 풀이될 수도 있다.
오컬티즘에서 '표정 읽기'란 말은 독심술/관상보기/손금보기/운세보기와 수정구 들여다 보기 등의 말과 그리 멀지 않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진짜 표정도 아니고 '그 날의 표정'이 있을 수도 없는 조각상이랴. 고정된 조각상이기에 영구적으로 고정된 표정이라고 한다면 모를까.
일기예보도 아닌 그 날 '표정'을 읽어서 시인은 뭘 하겠다는 건가? 그 표정 읽기만으로도 '드릴 말씀'이 없다니, 정말 할 말이 없다.

시인의 말과는 달리 이어진 시구를 보면 그는 정작 성모상의 '표정'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성모상의 '표정'에 대한 찬사를 읊겠다는 것이다. 드릴 말씀이 없다더니 금새 많아진 걸 보면 시인 다운 이율배반이다.


첫째로, 눈 오는 날은 청결한 슬픔의 그늘이 드리워짐을 본단다.
그 날의 일기와 시인의 감정조절이라는 '조명'에 따라 얼굴빛이 달라지는 셈이다. 이 슬픈(?) '표정' 읽기엔 천주교도들을 위한 마리아의 온정적 배려라는 교리적 바탕이 깔려 있다.


둘째로, 동 트는 새벽에 성모의 표정은 환한 장미꽃이란다.
'장미'라..서구 중심인 천주교의 다양한 문서에서 이스라엘의 샤론의 꽃은 서양 장미 또는 부활절 백합으로 둔갑해 있다. 천주교에서 장미는 흔히 마리아 또는 아기 예수를 암시한다. 
장미는 천주교 산하의 다양한 기사단들의 하나인 '장미기사단'의 상징, 심지어 신교인 루터교의 로고로도 나타나 있고, (교주 디 맘브로와 뤀 주레에 의해 1994-97년의 수 회에 걸쳐 약 100명이 집단 타살/자살을 한 컬트인 '태양신전파(OST)' 등) 여러 비밀집단들의 주된 상징물이기도 하다.

마리아를 장미로 비유한 것은 거룩하기보다 다분히 세속적이다. 표면상 남/녀 간의 세속연가에 불과한 '노래들의노래'(아가) 속에 흔한 비유의 하나처럼 느껴진다. 신약 성경엔 예수님이나 마리아를 꽃으로 비유한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다! 사도들이 문학적 소양이 없어서 그랬겠나.
그런 상징이나 비유는 모두 고대 신화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빌리고 꾸어온, 유미주의적인 천주교 발상에서 왔을 뿐이다.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된 그네들의 숱한 그림/조각에서 느껴지는 그런 유미주의다.


셋째로, 시인은 더 나아가 환한 장미꽃의 마리아상을 쳐다보는 것으로 '문'이 '열린다'고 고백한다.
시인이 의식하든 못 하든 이런 표현은 대단히 위험스런 암시다. 마음 문이 열리면, 그릇된 사상/신앙의 침투 및 그 수용은 시쳇말로 '상황 끝'을 뜻한다.
그릇된 사상과 그릇된 신앙은 성령님의 것일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정체가 뭔지는 자명하다. 단지 겉 보기에 장미처럼 아름답다 해서 실체도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다. 악의 절정인 싸탄도 얼마든지 휘황찬란하고 광명한 천사처럼, 수 천 수 만의 장미 다발처럼, 장미의 태산처럼 꾸미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리아상에 대한 이 시인의 헌신과 열정은 구중심처 같아서 점입가경이다. 자신의 흔들리는 감정의 동요에 신앙이 순간마다 변모하는 어지러움을 잠재우고(?) 다잡아주기 역시 마리아상 뵈옵기에다 공로를 돌리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작곡가들이 최고의 가락과 최상의 화음으로 동정녀 '마리아'/마돈나(='나의 여주/女主'!)에게 바친 수많은 '아베 마리아'에서 느껴지듯, 시인의 감정을 오히려 물결처럼 흔드는 것 자체가..그리스/로마 여신상들처럼 으레 콧날이 오똑한 백인 미녀(?)로 묘사되는 조각상인 마리아상일 듯 싶다.
과연 하늘의 진짜 마리아도 이 조각상을 자신으로 수납하고 이해할까?

 
그런데 그 감정 기복의 어지러움 속에서 마리아 아니 마리아상이 "순간마다 더운 핏줄로 탄생"하신단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 감상한 적이 있는 '테레제'라는 천주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세상 소녀들처럼, '사운드 오브 뮤짘'의 주인공인 마리아가 속세를 그리듯 그렇게 '속세'를 배회하다 다시 '탈속귀성'(脫俗歸聖)한 테레제의 더운 몸이 차가운 마리아상과 합해지던 '신비적' 합일의 순간..배경음악은 (프리메이슨이었던)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였다.   

풍부한 시인의 상상이야 어떻게 '나래'를 펴든, 마리아상에 더운 피가 흐르고 새로 탄생할 일은 없다. 환각일 뿐이다. 그러니까..상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게 꼭 시적이고 문학적인 상상인지는 몰라도.   
 

이 시인은 또 자신이 흠숭하는 그 마리아 상이 골목길에서 걸어오는 뒷 모습 또는 뒤돌아보는 눈매를 '뵙는다'고 끝까지 상상으로 자판하고 마무리한다.
마리아 상이, 시 23편 기자를 따르던 그 선과 사랑(=인자/인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 옛날 마리아가 유월절을 준수하러 예루샬렘 성전까지, 그리고 귀갓갈에 남편 요셒과 동행했듯, 시인과 늘 동행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시인에겐 마리아가 삶의 전부인 거 같다. 예수 크리스토가 아니라. 


여기서 시인의 의도하는 바를 간추려 공식화 해 본다면, [ 마리아상=성모=산사람=숭모대상=수호성인=평생동반자=여신? ]이라는 다중등식이다. 

즉 실제 성모도 아니고 전혀 닮았다고 할 수도 없는 비생명체에 불과한 한 조각상을 실제 성모로 생각할 뿐더러, 그 대상을 숭앙하고 그녀에게 기도를 한다는 점에서 매우 신비적이고, 비성경적이다.

이것은 카톨맄교의 소위 '신심'일지언정 성경적으로 보면, 결코 참 신앙의 진수도, 바람직한 초기 신앙도, 원시적 순수 신앙의 모습도 아니다. 철저히 잘못된, 오도된 신앙이다.   

그런데도 이 시가 기독교시선에 버젓이 실려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문학계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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