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비평/문학

메시지와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이 분명해져라
-기독교 문학의 알맹이는 복음 메시지
 

김삼  


치밀한 기독교 정신

흔히 일반문학에서 '치밀한 작가 정신'이란 걸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치밀한 작가정신 이전에 치밀한 기독교정신이 있어야 하며, 이 기독교정신은 성경에 그 본바탕을 둔다. 성경진리에 치밀하지 못한 작가 정신을 기독교 작가 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문학의 척도는 어디까지나 성경이다. 기독교문학의 참된 비평가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먼저 인정받지 않는 문학을 참 기독교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작가, 기독교 저술가, 기독교 시인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전 먼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신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순수... 순수문학인가, 순수 크리스천인가?

소위 기독교문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멀리하고 도외시한다. 성경을 인용 또는 원용하는 사람을 우습게 보거나 경시하다 못해 심지어 천시한다. 순수 기독교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송명희 시인도 그런 일을 겪었겠지만 훗날 미주에서 활동한 고 석용원 시인도 비슷한 어려움을 당했다는 고백을 그의 시에서 엿본다.

평소 기독교문학가로 행동하고 기독교정신과 신앙을 강조하는 문인조차도 그런 경향을 유지하는 것을 봐 왔다. 성경에서 멀찌감치 거리를 둘수록 '순수문학'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성경 메시지를 담은 문학은 죄다 목적문학, 비순수문학으로 매도되다시피 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취하는 입장은 자못 이중적이고 양다리 걸치기 양상이기가 십상이다. 그런 이들을 세상에서 어느 정도 인정해 줄 지는 몰라도 객관적으로 볼 때 사뭇 타협적이고, 하나님보다 세상 눈치를 더 보는 양이다. 그런 시, 수필, 소설은 아무리 감동적이라 하더라도 복음적 파워가 없다.


분명해야 할 선

물론 크리스천이 세속문학을 한다고, 더 나아가 세속예술을 한다고 해서 나쁘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우리가 평소 즐기는 고전음악의 대부분은 세속음악이다. 세속음악계에서 활약하는 크리스천 음악인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것이 곧 기독교음악이 되고 기독교문학이 되는 건 아니다. 선이 분명해야 한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위대한 바로크 세속음악가이면서 탁월한 기독교 음악인이다. 그렇다고 야누스 같은 이중인간은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두 가지로 선명하게 분류된다. 죽도 밥도 아닌 것은 없다. 수많은 교회 칸타타를 썼지만, 세속 칸타타도 물론 썼다. 예를 들라면 아마 '커피 칸타타'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세속적인 작품을 위대한 기독교 작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성경의 다윋과 슐로모(솔로몬) 등 고대 이스라엘 왕들은 왕실에서 세속음악을 즐겼다. 이것은 전도서에 나타난 슐로모의 글(2:8)이나, 압살롬의 예루살렘 찬탈 당시 성밖으로 피난을 간 다윋 왕 및 난민을 풍성한 먹거리로 도왔던 바르찔래의 말(슈무엘B=삼하 19:35)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께 찬양으로 바친 성전음악은 별도로 존재했다.

초기 성서학자들 중에서는 성전음악인과 세속 음악인들을 혼동한 사람도 있었지만, 세속 음악과 성전음악의 구분은 왕국시대 내내 뚜렷했다. 성전 음악인들과 세속 음악인들을 명확히 구분한 에즈라/네헤미야-두 책에서 확인된다(레비 음악인과 일반 음악인들의 이름이 구분돼 있다). 선이 분명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술 중 특히 문학에서 이 구분이 흐릿한 것을 발견하곤 한다. 겉으로 봐서는 기독교 문학인지 세속 문학인지 구분이 흐리멍덩한 것을 갖고 기독교문학입네 할 때 보는 사람은 헷갈리기 마련이다. 또 그런 이들이 문학을 논할 때는 되도록 세속적 출처에서 인용하여 호소한다.
필자는 그런 경향에 식상한지 오래다. 대조적으로 현대 시문학에서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인용만 해도 마치 도덕적 목적문학이고 순수문학이 아닌 것처럼 냉대하는 경향을 본다.

하지만 성경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풀어 쓰거나 효과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기독교문학의 한 기술이다. 예컨대 기독교문학은 성경이라는 내용물을 나의 경험과 잘 조화시켜 잘 포장한 유리병과도 같다고 생각된다.


잼과 잼 병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른데..오래 전 종종 슈퍼마켓에 들러 보면, 스위스제 잼이나 젤리 병이 유달리 우아해 보였다. 겉 포장이 요란스럽지 않고도 우아하면서 다채로웠다. 속에 든 잼이나 젤리가 정말 맛있게 보였다. 포장의 효과가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잼과 젤리다. 아무리 포장과 병이 아름답다고 해도 안에 든 것이 없이 병 속이 텅 비어있다면, 잼 병일 뿐이지 잼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우아한 겉포장과는 달리 내용물이 맛이 형편없어서 기대치 밖이라면 우수상품이라고 할 수 없다. 

반면 겉 인상과 속에 든 내용물의 맛이 잘 어울리거나 거의 일치할 정도로 또는 포장을 능가할 정도로 맛이 좋다면, 그 포장은 성공한 것이다. 바른 것일수록 이미지와 메시지가 같은 법이다.

잼은 여러 가지 성분을 갖고 있다. 미국의 모든 식품과 먹는 의약품은, 연방식품의약국의 규정에 따라, 반드시 내용물의 성분분석 표시를 하여 겉포장에 딱지로 붙이게 되어있다. 성분분석표시에 따르면, 내용물에 함유된 성분을 거의 환하게 알 수 있다.

요즘은 이 성분이 자연물에 가까울수록 인체에 더 유익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물론 자연물이라고 해서 다 유익하고 좋은 건 아니지만. 순수한 자연일수록 인체 속에서의 반응과 효과가 좋다는 것이다. 가장 자연적인 환경에서 기른다는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야채와 과일이 값도 비싸고 인기도 좋다. 자연식품이 더 좋다고 해서 생식도 강조하고 생약 성분을 강조한다. 생약 성분이 많고 화학 성분이 적을수록 부작용이 덜 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대개들 인식하고 있다.

기독교문학도 속에 든 메시지 즉 성분이 확실해야 한다. 기독교문학에서 '자연 요소'를 강조한다면 성경 메시지가 뚜렷해야 함일 것이다. 뭐든 자연에 가까울수록 좋듯 기독교문학도 성경에 가까울수록 독자에게 유익하다.


삶과 체험 속에서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요즘 흔한 생식을 보면, 천연 재료를 그대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씻고 말리고 얼리고 가루로 빻는 공정과정이 필요하다. 문학적인 과정도 그렇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여기저기 다 인용해 옮겨 놓는다면 그것은 성경주해나 설교이지 문학은 아니다. 성경기자의 작품을 베껴다 놓은 것이로되 개인의 창작품은 아니라는 말이다.

기독교 문학은 성경을 작가 나름대로 소화시키고 풀이하고 해석하고 삶의 체험 속에 반영되고 상호작용(interaction)된 것을 내놓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없이 참된 기독교문학이기가 어렵다.

그러면서 기독교 문학이 가진 가장 중요한 본질 즉 가장 중요한 성분은 성경 자체다. 다른 문학과 특히 성분이 다른 점이라면, 기독교문학 메시지의 내용물의 본질인 성경은 항상 영혼을 살리는 단맛 꿀맛을 간직한, 영원불후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기독교 문학의 바탕이자 척도인 성경을 최고의 표준으로 삼지 않는 이상 참된 의미의 기독교문학이 정립될 수 없다.  메시지와 이미지는 같으면 같을수록 좋다. 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