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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나름의 하나님 (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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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오리지널 출처: 게티 이미지 (Altered from an original Getty Image photo)

다섯 살 짜리 유치원생이 엄마한테 계속 묻는다.

“Mom, where is God?”

엄마가 대답한다.

“God is everywhere.”

아이의 호기심에 찬 눈빛은 엄마의 말도 어째 안 믿긴다는 모양이다. 
어딘가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꼭 찾아 보아야 하나 싶은 눈초리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에 대해 매일 듣고 배운다는 것이 아이나 어른이나 그리 쉽지는 않다.

오래 전 세 살이던 우리 아이도 내게 물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네 가슴 속에 계시지.”

“그러면, 내가 햄버거를 다 씹어 먹고 나면 그게 다 하나님 머리 위에 떨어지겠네?”

어? 이건 아닌데… 당황하던 기억이 새롭다.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가 계신 곳을 세 살 짜리에게 설명하기는 참으로 역부족이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질문은 어린아이들의 상투적 물음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알고 깨달아 가르치기도 어려운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다는 확답은 더 어렵다. 그럼에도, 아이가 이해가 되든 말든 우리는 우리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런저런 대답을 던져 준다.

그런가 하면 어른인 우리도 제때 즉각 하나님으로부터의 기도 응답이 없을 땐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지?” 한다.
지금까지 내 방에서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던 분이 갑자기 사라지신 듯 고개를 갸우뚱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분이 되어 간다.

어느 목회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무척 강조한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결정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매를 맞는다고 한다.
겁 먹은 어느 교인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아무 것도 못하겠다고 한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령의 인도가 무엇인지 몰라 발목 잡힌 기분이라고 한다. 

무서운 하나님이시다.
행복하고 좋은 날에는 어디론지 사라지시고, 우리의 의지대로 행할 때마다 또 인생의 우여곡절의 코너를 돌 때마다 매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화가 나신 하나님이 상상된다. 우리의 불순종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유명한 텔러밴절리스트, 조을 오스튼은 낙천주의와 긍정적인 사고가 설교의 핵심이다. 그러한 사고의 전제는, 사람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듣기 싫어 한다는 것. 그래서 까거나 야단치는 설교를 지양한다고 한다.
대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오스튼은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아 왔든 좋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고 포디엄에서 외친다. 언뜻 들으면 옳은 말 같고 이 시대에 적합한 것처럼, 흑백이 아니라 오히려 둘이 잘 조화되어 절대로 틀릴 수 없는 말처럼 들린다. 

누구에게도 거부감을 안 주는 마음을 기쁘게 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왕이면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자" 이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 하나님은 마냥 마음씨 좋은 산타클로스 같은 인상을 받는다. 누구든지 자원만 하면 이 팀에 조인하여 많은 혜택을 누릴 것 같다. 

그의 메시지에 의하면,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과 낙천적인 사고 안에 늘 계신 듯 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 사고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듯하다.

그런데, 참 궁금하다.
이곳에서의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거룩하다’ 이름 하는 분인 하나님과 그의 존전에 나가는 예배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예배라면?

우리의 예배 대상은 자명한데도 그들이 예배하는 대상은 이 땅에서의 삶과 라이프 스타일에 치중하는 것 같고 하나님은 이들의 바람대로 magic wand를 휘둘러대는 분 같아 혼란스럽다. 
하나님을 너무 친구 삼아 자기가 편한 곳에 계시게 하는 것 같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얼마 전 어느 블록에 올려진 글을 읽었다. 
최인호 작가를 모든 종교를 끌어 안는 탁 트인 사람으로 평가하고 존경한다는 내용이었다. 최 작가의 책, ‘산중일기’에 아래 대목이 있다.

"나는 불교 신도도 아니고 새삼스레 초파일을 맞아 무어 소원을 빌 것도 없었지만, 여행 중에 만나는 절에 들어서는 꼭 내 식대로 향 피우고 절 세 번 하는 법도를 잊지 않았다. 그게 무슨 즐거운 일인 양 꾸벅꾸벅 고개를 조아려 세 번씩 절을 했다.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이지만 그것이 죄라고 생각지 않는다.

불교도 좋은 종교이며 그리스도교도 좋은 종교이므로 나는 종교 앞에서는 그저 두렵고 그리고 죄송스럽다. 두렵고 죄송스러우면 그 순간만이라도 겸손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무엇이 담력이 크다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예수님과, 내가 무에 대단한 데가 있다고 천 년도 넘게 세세연년 내려오는 저 자비로운 불상의 미소 앞에서 무릎을 세울 수 있겠는가................." ( 최인호의 ‘산중일기’에서)


종교 안에 계신 '하나님'.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과 더불어 여러 종교 안에 공존하는 '하나님'이다. 인간의 너그러움. 피조물이든지 우상이든지 구분없이 다 포용하는 창조물인 인간의 너그러움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의 차이도 구분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 아니,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이 계실 수 없는 곳, 그리고 계시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억지는 아닌지? 

성경에서 보여주는 사도들과 스테반, 그 밖의 많은 순교자가 생명을 내어 놓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죽고 살았던 모습과는 상반된다.
당대의 석학이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외에는 모두 쓰레기로 여긴다고 할 만큼 예수님 믿는 것에 올인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진리이다.

최인호 작가와 같이 좋은 종교의 대열에서 타 종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종교로 설 수 없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이다.

이사야서 57:15b 은 내가 좋아하는 말씀이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이사야서 57:115b)

[“…For this is what the high and lofty One says-- he who lives forever, whose name is holy: "I live in a high and holy place, but also with him who is contrite and lowly in spirit, to revive the spirit of the lowly and to revive the heart of the contrite.”]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
동시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거듭난 나의 영.
거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위의 성구에서 contrite 라는 단어를 마음 속에 그려 보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단단한 얼음 덩어리를 믹서에 넣고 crush 한다든지 아니면 망치로 내리칠 때 산산조각 나며 바숴져 더는 얼음의 형상이 남아 있지 않는 상태를 상상할 수 있다.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바숴지고 낮아지는 회개하는 심령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자 은혜이다.
만나 주신다는 약속의 초대이기 때문이다.

나의 상한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어째 너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친구 삼은 느낌이다.

애통하고 자복하는 곳이 아닌, 높고 거룩한 곳과 상하고 낮은 심령 사이의 중간쯤, 내가 편한 곳에다 하나님을 모셔 두고 만나려는 것 같다. 

나의 심령이 바스러지는 곳이 아닌, 높고 거룩한 곳과 상하고 낮은 심령의 중간쯤, 내가 원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오산하는 것 같다.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 ‘거룩하다’ 이름 하는 하나님이 과연 그 어중간한 곳에서 나를 만나 주실까?
내 마음대로 친구 삼아 놓은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