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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돌려 받는 대가들 (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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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병원에서 일하는 영양사가 아들 아이의 병실을 찾아왔다.
맹장이 터져 수술을 받으면서 투입한 항생제가 위벽과 장을 다 헐게 해 소화기능에 무리가 온 아이에게 어떤 음식들을 삼가야 할지 가르쳐 주러 온 것이다. 맵거나 향이 진한 음식을 피하라는 것은 상식이지 싶은데, 과일과 채소 현미, 통밀(whole wheat) 등 섬유질이 많아 평소 몸에 좋은 것으로 알고 있는 음식은 모두 먹어서는 안 되는 blacklist에 올랐다.

이유인 즉, 섬유질은 위가 소화하지 못하므로 위를 쓸어 내려 아프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리 좋은 것도 상황과 사람에 따라 유익 대신 해가 되기도 한다. 사람마다 건강상태를 고려하지 않고는 무조건 현미밥과 통밀빵만을 몸에 좋다고 권장할 수는 없겠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은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프고 병이 들기도 한다.

호선이는 깨진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총명한 얼굴과는 달리 거리를 두고 눈치를 보는 아이다. 사춘기 시절을 겪는 남자 아이에게는 대부분 아빠가 멘토 역할을 해야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그럴 아빠가 안 계셨다. 아빠에게 받은 상처탓인지 어른에게 대한 불신이 가득하다. 그의 총명한 머리와는 달리 사회성이 많이 부족한 아이다. 쉽게 마음을 열지도, 한 군데 정착하지도 잘 못하는 아이다. 

지난 주 뉴욕을 방문하면서 지금쯤은 성인이 된 이 아이가 궁금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훨씬 밝아진 모습과 더는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보호하려는 모습도 사라진 아이였다. "Hi" 하는 목소리도 힘이 있고 자연스럽게 웃는 아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자신이 쓴 편지에 의하면,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고 자기 자신도 상관하지 않던 자기에게 관심을 주고 기도해 준 것을 고마워 한다던 아이다. 모두가 귀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더 돌봐야 하고 더 친근감 있게 대하고 한 번이라도 더 웃어 주고 싶은 그런 아이다.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지는 아이다. 그래서 더 궁금했나 보다. 지금쯤은 더 성숙해졌을 아이.
그런데 그는 보이질 않았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문화라고 볼 수 있는 예의범절 중 중요한 것 하나는 ‘인사’ 이다.
어려서부터 고개 숙여 인사하는 법을 배웠다. 특히 어른에게는 먼저 깍듯이 인사해야 한다. 그냥 어른들을 지나치는 젊은 사람에 대해 "젊은 게 어른 보고 인사도 안 해" 하고  주위 어른들이 하시는 비난의 소리도 살면서 참 많이 들은 것 같다.

나이뿐만 아니라 지위가 있다거나 영향력이 있는 경우는 더욱 정중히 인사해야 한다. 설사 눈을 마주 볼 수 있는 거리에서의 만남이 아닌데도 먼저 인사를 안 한다고 트집을 잡기도 한다. 

이 아이도 누군가가 "왜 인사 안 해?" 라는 소리에 속에 꾹 눌러 담겨 있던 분노가 폭발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거친 언어와 화는 기름에 던진 성냥불 같아 막대한 손해와 상처를 남기고 전소시킨다.

그의 불 같은 화가 엉뚱한 사람에게 쏟아 부어진 셈이다. 아직도 완전히 치료받지 못한 상처와 떨쳐 버리지 못한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쓴 뿌리로 남아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듯한 어른의 ‘너 왜 인사 안 해?’ 는 마치 아픈 우리 아이에게는 그 좋은 과일도 채소도 적당한 음식이 아니듯, 속이 아픈 호선이는, 가르치기 위한 어른의 악의 없는 멘트가 그의 속을 긁어 놓은 모양이다. 그 아이의 변해 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고 마음이 아파 그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 기도해 본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먼저 인사 안 한다고 하기 전에. 먼저 전화 안 한다고 하기 전에. 이것저것 to-do-list를 손에 들고 평가하기 전에. 어른인 우리는 왜 먼저 ‘Hi’를 못 할까? 왜 먼저 웃어주지 못할까? 왜 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왜 먼저 전화하지 못하나? 왜 먼저 배려하지 못하나? 

위아래를 가리기 위한 권위의식 강요는 관계에서 치명적이다.
권위를 사용하여 내게만 중요한 것. 아니면 나의 삶의 방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관계에 있어 독과 같은 요소다. 힘과 권력, 위치 그리고 권한 내지는 영향력을 이용해 전혀 힘이나 권한과 위치가 없는 이를 조정하거나 견제하려는 것은 가족관계를 비롯해 그 어느 인간관계도 삐거덕 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방법은 더욱 아니다. 서로 관계가 소원해지는 지름길일 뿐이다. 

나의 자녀나 그들의 친구나 교회의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을 일방적인 조건과 터무니 없는 기대치 그리고 인위적인 잣대 없이 바라보고 대할 수 있을 때 가장 친절하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나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런 나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반응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혹시 내가 그 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나 한 사람의 이런 목소리가 누구의 맘을 따뜻하게 녹이고 누구의 잠재력을 끄집어 내며 누구의 상처를 싸매고 용기를 주며 누구의 귀와 마음을 열고 눈을 열어 내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할지 모른다면 해 볼 만 하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아이들은 일부러 안 듣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듣는다는 것이다. 바꾸어 놓으려는 억지와 권력의 행사보다는 이런 목소리를 들려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른인 우리도 이들을 존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격체로. 

그들의 모습 그대로가 사랑할 만한 모습이다.

“어머, 영호야! 오랜만이야. 어떻게…?” 하며 반가워 하는 나의 "잘 지내지?” 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네, 알아요, 살 더 쪘지요…?” 라며 대답하는 아이.
그런 말 하려는 맘은 추호도 없던 내가 다 머쓱해진다. 

오랜 만에 만난 영호. 어려서부터 비만인 아이다. 지금은 키가 훨씬 컸으나 아직도 육중한 몸의 소유자다. 중학생 때의 영호는 귀여운 아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Thank you, 선생님" 하면 이 아이는 "I love you, 선생님” 하던 아이다.

‘영호야, 너 어려서 참 귀여웠어.”

“저 아직도 베이비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아요.”

그의 나이나 체격에 어울리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의 두 팔로 안아도 그의 몸 반도 안을 수 없는 한 덩치 하는 28살 난 청년으로 변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오래 전의 영호의 모습으로 대해 주길 바라는 그만의 표현으로 들린다.

‘영호야…사랑해…네 모습 그대로” 그의 앞에서는 하지 못 한 말이다.

오늘 종일 그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 속에 머문다. 그리고 기도한다. 나의 표현하지 못한 사랑보다도 더 높고 깊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호의 마음 속에 부어지기를. 그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 본다. 


은혜는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함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그렇듯 우리의 사랑도 조건 없이 아낌 없이 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내게 돌아오는 것이나 수고를 염두에 둘 이유가 없다. 

“우리처럼 청소년 때 좋은 추억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나는 잊어 버리고 기억 못하는, 오래 전 더불어 함께 보낸 많은 시간을 기억하고 고마워 하는 아이. 지금은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재선이의 말이다. 어느 새 우리의 화제는 자녀양육으로 접어든다. 수없는 여느 부모의 지나간 발자취를 그도 여지 없이 깨닫는다.

"그래 맞아…그래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거지….”

오랜만에 어른 같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 내가 돌려 받은 것이다. 

수양회를 가려면 운전하는 사람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었다.
키도 크고 순하고 착한 고등학생인 현호 밖에는 우리의 caravan 을 운전할 사람이 없다. 가는 날, 오는 날 두 서너 시간 걸리는 거리를 현호가 운전하는 동안은 쉴 수 없던 나의 기도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의 기도세례를 받던 현호의 결혼식 날이다.
서른을 훌쩍 넘은 의젓한 청년이다. 새로운 가정을 시작하면서 행복해 하는 그의 모습이 이날 내가 돌려 받은 대가이다. 

몰라 보게 자라 버린 아들 아이에게 웃으면서 제임스가 말한다.

“You know…we were reprimanded a lot…”

농담하듯 나의 과거를 짓궂게 들춰 낸다.

"Mom still does that to me…” 아들아이가 맞장구 친다. 

나는 누구보다도 제임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지나치게 엄한 아버지 밑에서 기특하게 잘 커 준 아이. 집안의 제사 때마다 어디론가 뛰쳐 나가던 아이. 제임스 아버지의 불호령을 두려워 하는 그의 어머니의 한숨과 사라져 버린 아이 가운데 나는 어찌할 바 모르던 옛일이 문득 생각난다.

이제는 바라만 봐도 흐뭇한 청년이 되었다. 더는 탕탕 튈까 봐 조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같이 지낸 시간을 고마워 하는 그의 마음을 나는 너무도 잘 안다. 그의 편안한 모습이 내가 돌려 받은 대가면 대가다. 

.............


병원에서 준 영양사의 지시 사항을 보니 먹을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줄이자고 몸에 안 좋다는 흰 쌀밥과 흰 밀가루빵만이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영혼도 치료하신다. 모든 것을 아시는 지혜의 하나님은 누구의 지시도 필요가 없으시다. 그래서 그분의 은혜는 항상 맞춤형이다. 

혹시 나의 가장 친절하고 따뜻한 사랑을 담은 목소리가 은혜의 도구가 되지 않을까?
겉에 보이는 대로 평가하지 않는 너그러움이나 지나치게 계산하지 않는 여유로움도 나름의 믿음의 표현이다.

실제로 일하시는 이는 우리의 의원이신 예수님과 성령님이시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