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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시107)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큰 물에서 사업하는 사람들

예호봐(여호와)님의 행적과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깊은 물에서 보곤 하네 

그분 말씀으로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치솟고

(배가) 하늘 드높이 솟구쳤다 깊은 데로 푹 꺼지자, 위기감에 혼(魂)들이 다 녹는다네

술취한 듯 그들은 휘청대며 비틀거리니, 온갖 항해술도 헛것!

그래서 그들이 괴롬 속에 예호봐님께 울부짖자, 그분은 그들을 곤경에서 끌어내시되,

광풍을 잠잠하게, 물결을 잔잔하게 하셨다네

바다가 평온해져 다들 기뻐했고, 그분은 그들 바라던 항구로 이끄셨네

-시 107'23~30 (성구는 필자 사역)




감사송의 하나인 시편 제107편의 가운뎃토막인 이 시는 특별히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과 자연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하심이 정말 실감나게 그려진 정경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성령님이 기록하신 계시입니다만.


배를 타고 깊은 바다 위를 항해하다 노도광풍(怒濤狂風)을 겪어 본 사람은 누구나 그 기막힌 처경을 백분 이해할 것입니다. 거센 바람에 밀리고 파도에 얹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도로 깊은 바닷속으로 곤두박질하듯 처박혀, 금방이라도 침수되고 침몰할 듯한 상황은 실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경국(境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실제로 그런 상황을 기록해 놓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잡아 니네베로 가야 할 것을 정반대로 타르쉬쉬(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지중해 연안의 요파 항에서 배를 탔다가 폭풍 속에서 결국 한때나마 물고기 밥이 됐다가 간신히 살아난 요나 이야기(구약 요나서 참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스토리이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만난 돌풍 탓에 톡톡히 겪는 어려움(마르코스=마가복음서 4'36~41), 그리고 선교사 사도 파울이 죄수가 되어 군대와 선원들과 다른 죄수 노예 등 모두 276명이 탄 채 이탈리아로 가려고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서쪽 바다로 항해하던 중, 돌풍 유라퀼로를 만나 파울의 기도와 헌신 끝에 모두 구원받는 일이 있었죠(행전 27장 참조). 그밖에도 파울의 고난 여정을 보면, 바다에서 3회나 파선을 겪고, 밤낮 하루 꼬박 바닷물 속에서 지낸 적도 있다고 토로합니다(코린토B서=고후 11'25). 


위의 경우들 모두가 위 본문의 대목과 너무나 일맥상통하는 내용들이지요.



본 시편 기자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던 것일까요? 머릿글과 앞쪽 문맥 그대로, 광야에서처럼 바다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일은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다른 근로자들처럼 뱃사람들도 바다 위에서 그들 나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이든, 바다를 즐기는 항해가이든, 사람이나 짐을 목적지에 실어나르는 수송업자 또는 무역상이든, 바다를 지키는 해군이든, 심지어 남의 배를 털려고 노렸다가 앗아가는 해적이든, 제각기 바다 위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부딪는 일은 바로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에서 일어나는 돌발변수입니다. 배를 탔다면 누구나 겪어야 하며,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닷물이 거센 바람과 만날 때 굉장한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거센 바닷바람에 밀려 산더미 같이 달려들며 넘실대는 파도와 싸우고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도 파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희생 당하고 마는 예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거선 '타이태닠' 호의 경우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죽어갑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똑같이 해난(海難)을 만나도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라도 그 분을 믿음으로 의지하려는 의존신앙-그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런 이들을 돕고 살릴 길을 준비하십니다. 

유라퀼로 광풍을 만난 일행 가운데 사도 파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그 승객들을 죄다 맡다시피 맡아 하나님의 구조의 손길을 힘입게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손길을 100% 절대 의지하지 않고서는 파울이 조난 당한 276명을 자기 힘으로 다 살려낼 길이 없었지요.  

육신적으로야 그들과 똑 같은 연약한 인간인 그가 어떻게 100% 구조를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구출자(Deliverer), 구조자(Rescuer), 구원자(Savior)이신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시 107편 기자는 바로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유의할 부분이 있습니다. 꼭 바다 위에서 구조 받아야만 비로소 감사할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조 받지 못하고 죽어갈 때, 꼭 하나님을 원망해야 할 일일까요? 


지난 번 '세월호' 사건 때 바다 한 가운데서 억울하게 배 안에 갇힌 채, 구조받지 못한 크리스천들도 있었습니다. 또 그 가운데는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살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타이태닉 선상에서도 남을 위해 끝까지 헌신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물에 빠진 선객들에게 자신의 탈것 등을 갖다 주고 도와 주며 천국 복음을 전하고, 그러다 지친 자신은 끝내 거룩하게 죽어간 존 하퍼 목사 같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은 죽어갔지만,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지 살아남았다고 감사할 일이고, 죽어 갔다고 감사하지 못할 일일까요? 그렇지 않죠.

둘 다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 하면 사랑으로 친구를 살려 주느라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버린 사람에게는 장차 올 내세에서 궁극적인 보상과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시 107편의 이 대목을 우리는 단순히, 거친 바다와 같은 이 세상의 노도광풍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간신히 생존한 사람들로서 감사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비록 남을 위해 빠져 죽었어도 영원한 항구까지 가는 사람들도 함께 감사의 대상으로 고려해 넣어야 할 일입니다. 


이 새해도 인생의 바다에서 늘 승리하는 우리의 천국 항해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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