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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6:6-10] 눈물의 가치


바탕본문: 구약성경 시편 6'6-10


 
    김삼


사람의 눈물은 누구나 한 가지 뿐입니다만, 눈물의 의미는 다양합니다.
엄마의 관심만을 바라고 앙앙 우는 철없는 어린아기의 눈물이 있는가 하면, 맘과 몸이 자라가면서 덩달아 성숙해지는 정서에 따라, 슬픔과 서러움, 배고픔과 아픔, 괴로움과 쓰라림, 공감과 온정 또는 원망과 원한, 회한 등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 가운데는 심지어 기쁨과 고마움의 눈물까지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원인과 성격의 정서에 따라 우리는 눈물 짓곤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눈물 한 가지가 회개의 눈물입니다.
물론 참된 회개의 눈물을 가리키지요. 거짓 회개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참 회개를 귀하게 보십니다.
마음 속 깊이 우러나는 뉘우침과 통한, 탄식과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결코 무시하시지 않습니다.


시편 제 6편은 고대의 이스라엘 왕, 다빋(다윗)이 잘못을 뉘우치며 하나님의 온정을 호소한 기도시입니다. 다빋은, 살아 계셔서 지금까지 자기를 도와오신 예호바(여호와) 하나님의 현존을 믿기에, 절절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매달립니다.

이 시에서, 다빋은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 징계를 두려워 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겉으로도 얼굴과 몸이 수척해졌지만, 몸 속으로도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린다고 고백합니다. 만약의 쉐올(스올/음부)과 죽음까지도 경계하며 떨고 있습니다(5절).
막다른 상황임을 느끼지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다빋은 주님의 은총과 치유, 돌보심과 구원을 안타깝게 그리며 갈망하고 있습니다.

눈물의 회개가 특히 주목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지요.

이 부르짖음 속에서 다빋은 눈물의 가치를 말합니다.
그 가치란, 우리가 정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값어치가 있다고 인정하시는 정의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눈물, 그 분이 들으시는 울음소리이지요!
제 아무리 많은 눈물을 쏟았다 하여도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으니까요.

다빋은 얼마나 울었나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잠자리/요를 푹 적실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띄운다'는 말은 눈물이 온통 홍수가 되어 침상이 배처럼 둥둥 떠 다녔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입니다만..그만큼 엄청나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다빋처럼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야 비로소 하나님께 상달되고 참된 회개로 인정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눈물의 물리적/화학적 분량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지요.
얼마나 참되고 가치 있는 눈물이냐는 것.. 
얼마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눈물이냐는 것입니다.


뉘우치는 사람의 눈물도..

   속에 쌓였다가 걷잡을 수 없이 나오는 눈물,
   참다 참다 터지는 눈물,
   물 담긴 비닐백에 '빵꾸'라도 난 양 자신도 모르게 문득, 주르르~ 흐르는 눈물..
   또는 애써 눈물을 흘리려도 나오지 않아 답답하게 못해 쥐어짜는 듯한  눈물

등등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눈물이 진정스럽고 참되냐는 것이지요.


다빋은 자신의 잘못과 죄 때문에 주님 앞에 너무도 죄스러워서 탄식하고 한숨 짓다 못해, 급기야 엉엉 울고 통곡하다가 지쳐 침상에 쓰러지기까지 울었다고 했습니다.
울고 불고, 또 울었습니다.
그의 눈은 퉁퉁 붓고 근심으로 기력과 시력이 약화되기까지 했습니다. 근심걱정, 수심, 슬픔으로 안력이 약화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흔히 있는 증상이었던 것 같습니다(욥 17'7, 시 31'9; 38'10; 88'9; 이르미야=예레미야애가 2'11; 5'17)


성경에서 다빋이나 이르미야(예레미야)처럼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도 드물 터입니다. 

다빋은 특히 회개의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시편에 그가 죄나 잘못을 뉘우친 부분들이 자주 나타납니다.
그는 너무나 하나님을 존숭하고 범사에 그 분을 가끼이 하면서 지도를 받았기에, 자신의 죄 탓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신을 가장 애통해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르미야는 망해가는 조국을 대신하여 슬퍼하고, 위하여 애통하였습니다.
그를 흔히 '눈물의 대언자(=선지자/예언자)'로 부르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조국이 망해가는 모습을 보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렸고(렘애 2'16; 3'48; ), 이윽고는 망해가는 '딸', 시온을 향하여 역시 눈물을 강물처럼 흘릴 것을 선포합니다. 눈동자를 쉬지 말고 눈물을 흘리라고 강권합니다! 또 마음 역시 주님 앞에 물 쏟듯 토로하라고 말합니다(이상 이르미야 2;18,19).

이르미야는 울다 울다 못해..  

   오, 내 머리통은 우물, 내 눈은 눈물 샘이라면!
   죽임 당한 내 딸, 내 백성을 위해 낮과 밤으로 울 텐데!

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눈물을 귀히 보시고 그의 애통을 받으셨기에, 그 눈물이 헛되지 않게, 정해진 70년 곧 때가 차자, 그 백성을 되돌려 보내십니다.
 

백성과 나라를 위해 슬퍼 눈물을 흘리신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기도 하셨지요.
그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같은 정서를 지니셨기에,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아셨고, 이해하시고 느끼시고 맛보시고 온정과 체휼을 느끼시고 함께 슬퍼하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구약 기자는 그 분을 '슬픔의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예샤야후=이사야 53'1-6).
결국은 사람의 하나로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주님은, 눈물과 애통을 귀하게 여기셨기에 "행복하여라 애통하는 사람들! 그들이 위로 받을 것이다"(마태복음서 5'4)고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바로 그 주님이 심히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기도 하셨고(히브리서 5'7), 중요한 때 울기도 하십니다(요한복음서 11'35).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그 분의 눈물을 보시고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또, 회개의 눈물을 흘린 대표적인 사람으로 사도 페트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세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 같이 페트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중죄를 기록하면서 그가 닭의 울음소리를 세 번 듣자 눈물로 통회했던 진실을 명기하고 있습니다(마태 26'75). 그가 이스카리옽(가룟) 유다와 거의 동등한 그런 큰 죄를 짓고도 가까스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전기도 때문이었습니다(루카복음서=눅 22'32)

회개의 눈물!
바로 그것이 페트로와 유다의 다른 점이었습니다.


사도 파울은 말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시오" (로마서 12'15)

사도 야코보도 "슬퍼하고 애통하며 우세요! 여러분의 웃음을 울음으로, 여러분의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세요!"(야코보서 4'9)라고 권고합니다.

이처럼 성도의 눈물은 고귀한 것입니다.


성도의 눈물은 가치와 값어치가 있고, 하나님이 보시고 기억하신 바 됩니다. 헛되지 않고 대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히즈키야 왕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통보를 받고 너무나도 서러워 하나님 앞에 통곡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네 눈물을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수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왕들B=열왕하 20'5).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다"고 선언해 주신다면, 어디 이보다 더 큰 감격과 위로가 있겠습니까!


다빋은 나의 눈물을 주님의 단지에 담으소서 라고 호소합니다(시 56'8).
 
시편 기자는 눈물 뿌리며 씨를 뿌린 사람들은 기쁨의 외침 속에 수확할 것이라고 말합니다(시 126'5).


눈물이 메마른 시대와 사회, 세태 속에서 우리는 이 말씀들을 다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눈물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그 분의 '눈물단지'에 담아 두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날이 곧 옵니다(요한계시록 21'4).
슬픔과 아픔, 애통과 눈물이 없는 곳에서 영원히 살 그 날에.


눈물이 말라 버린 이 세대 속에서..
우리는 함께 웁시다.
함께 애통합시다 .
함께 눈물을 흘립시다.


하나님께서 티엘티 모든 독자들의 눈물을 보시고,
기억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