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 존 비비어의 비성경적 문제점을 틈나는 대로 지적해 보려고 합니다.
샌디 심슨이 수 년 전 비비어의 문제점을 몇 가지 비평한 적이 있는데, 상당량 참조합니다.
존 비비어는 그의 책 '주님을 경외함'에서, 구약성경 호쉐아(호세아)서 6'1,2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예비시키고 단련하심에 관한 예언적 성구라고 말합니다. 또 이틀간은 부활 후의 2000년이고, 제3일은 크리스토(그리스도)님께서 우리 앞에 살아계셔서 천년통치를 하실 기간이랍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그런 때를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는 또, 호쉐아가 또 이어지는 6'3에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살고 어떻게 예비하고 추구해야 할 것을 말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비어의 이 해석적 주장은 철저히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고요?
우리 한 번 해당 구절을 직접 음미해 보기로 하죠.
"오라, 우리가 예호바(여호와/야웨)님께 돌아가자!
그 분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고쳐 주실 터이요,
우리를 쳐 상하게 하셨지만 싸매어 주시리.
이틀이 지나 우리를 되살리고,
셋째 날엔 우리를 일으켜 주시어
우리가 그 분 앞에서 살게 하시리.
자, 우리 알자, 힘써 예호바님을 알자!
그 분의 떠오르심, 새벽녘처럼 한결 같아라:
그 분은 비처럼 우리에게 오시리,
늦은비처럼, 땅을 적시리." (호쉐아 6'1-3. 사역)
이 성구(聖句)는 전통적으로 메시아 수난과 부활에 관한 메시아 예언(messianic prophecy)의 하나이며, 따라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 및 훗날-예수님 지상 생애-때의 실제 성취로써 주로 다뤄지고 해석되어야 할 구절입니다.
그러나 비비어는 아전인수 격의, 전혀 거리가 먼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이런 식의 막가기/막갖다붙이기 해석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젠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요?
그 이유는 해당 성구의 본디 의미와 정통 해석이야 어떻든, [ 크리스토님의 재림 전 지상 시스템 속에 신국(神國) 내지 '하나님의 왕국'을 미리 세워야 한다는 식의 ] 주권주의 등 자기네 어젠다에 따라 자기네 목적으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즉 '목적'영성, 미래영성, 뉴에이지영성처럼 신사도영성 배후 역시 주권주의가 개재돼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무튼, 호쉐아서의 이 성구는 분명히 예수 크리스토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메시아적 예언입니다.
럼, 왜 주어가 단수가 아닌 복수로 돼 있냐고 물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은 곧 모든 신자들의 맏형(the Big Brother, 로마서 8'29, 히브리서 1'6; 2'10-17. 참고: 요한복음서 20'17)으로서, 모든 신자들도 장차 죽음으로부터 되살게 될 그 부활, 곧 "잠자는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기 때문입니다(코린토A서=고전 15'20,23)!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한 무리입니다(로마서 6'3-5). 함께 죽어, 함께 되살아난 존재들입니다! 그 분과 함께 하늘에 앉혀진 사람들입니다(에페소서 1'20).
그럼 우리의 현재 몸은 뭐냐..? 잠시 율법에 묶인 바 되어 언젠가 죽거나 주님을 맞이하게 되지만, 주님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주님 오실 날, 먼저 되살아날 '운명'입니다(코A 15'51,52).
그러므로 거듭난/거듭날 사람들은 주님과 하나인 공동체인 것입니다. 호쉐아서 본 성구에 담긴 뜻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비비어는 제멋대로 전혀 엉뚱한 해석을 달아 놓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성구는 '늦은비운동'과는 전혀 무관한데도 말입니다. 더욱이 심슨이 지적한 대로, 주님의 영광은 비비어의 주장처럼 '회복'돼야 할 성격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은 인간의 힘으로 '회복'되는 성질이 아니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얘기로..말세에 지구촌 규모의 굉장한 '대 부흥'이 온다는 식의 신사도들의 말은 역시 자기네 목적에 갖다 발라 맞추는 주장으로서, 말짱 거짓말입니다. 역사 속에 곳곳에 부분적인 부흥이 있었지만, 대부흥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요즘 일어나는 신'사도'/신'대언자' 양산 바람이 곧 '대부흥'의 전조가 아닙니다. '부흥강사'라는 타드 벤틀리의 현재와 과거(위임식 때)에 신사도들이 온갖 '예언'이라는 것과 '안수'라는 것으로 가히 사기꾼의 경지에 가까운 '생쇼'를 해 놓고서는, 그런 것을 갖고 '대부흥'을 이루겠다니 지나던 개가 웃을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말세로 갈수록 거짓 대언자들이 설쳐대고 배도(背道/apostacy)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마태복음서 24'11, 요한서신A=요일 4'1). 그러니까, 바로 지금이 그 시대라는 것이지요. 먼 미래가 아니라..지금 거짓 대언자들이 난리를 치고(!) 지금 배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큰 대표자 적크리스토가 오기까지 작은 적 크리스토들도 판을 친다는 겁니다(테살로니카B=살후 2'3, 요서A 4'3).
그 다음으로 비비어에게서 발견되는 또 다른 문제점은 휴거에 대한 흐리멍덩한 자세입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들어봐요..내가 (듣기에?) 가장 어..어..어..황당한 때는..사람들이 '우리 곧 휴거될 거야'라는 식의 말을 시작할 때입니다. 그들은 '이 혼잡으로부터 어서 벗어났으면..'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기껏 여기서 벗어나려고 여태 이 광야를 통과하시게 했답디까? 단지 여기서 날아가게 하시려고 이 모든 고된 훈련을 거치게 하셨다는 말인가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이유가. 우리는 바로 (이유인 그것의) '문턱'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문턱에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존 비비어의 비디오테잎 메시지 '다가오는 영광'에서. 플로리다 올랜도: 존 비비어 미니스트리)
물론 세상을 염세적으로 혐오하는 나머지 어서 속히 죽겠다는 생각은 건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 분의 다시오심을 열렬히 사모하도록 열망을 주십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님, 어서 오소서!"라고 갈망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비비어는 이 복된 소망을 비웃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 과연 휴거를 믿는 사람인지 여부조차 불분명합니다.
왜 비비어는 이런 태도를 취할까요? 그것은 모든 주권주의자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영성가들에게서 보는 지상왕국 건설 이상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표하는 '지상왕국'을 이룰 때까지는 크리스토님의 재림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기뻐할 리가 만무합니다. 크리스토님이 오시면, 그 왕국이라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차 말해 왔지만, 크리스토님께는 지상 시스템이 전혀 무의미합니다! 그 분은 거듭난 새 영들을 통하여 새 일을 하실 분이지, 썩고 낡은 지상 시스템, 이 메이트릭스에다 무엇을 심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세상 시스템과는 무관한, 찬란한 천년평화왕국을 직접 이루시고 직접 통치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주권운동자들이 자기네가 이뤄가는 지상 시스템인 언필칭 '하나님의 왕국'에 크리스토님을 모시겠다는 생각은 말짱 헛일입니다.
그들은 세상 시스템에 대한 그 어떤 집착이나 미련을 경고해 주는 요A서(요일) 2'15-17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거나, 관심이 없거나, 아예 무시하는 쪽일 터입니다.
성경은, 이 시대에 교회가 땅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주권을 갖게 된다고 말해 주지 않습니다. 카톨맄 교회의 바티칸 교황국이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아니라 세상 시스템 속에 세상과 결탁한 속된 '왕국'일 뿐입니다. 바티칸 박물관 속에 가득한 온갖 옛 우상들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그런 화려한 왕국이 아니라 배도와 큰 환난/심판(계 7'14)과 적 크리스토의 지배(요A 2'18)가 다가올 것이라 성경은 예언합니다.
다만, 크리스토께서 다시 오실 때면, 먼저 (또는 나중) 휴거로 오시고(테살로니카A 4'17), 별도로 전능하신 왕들의 왕, 주들의 주로 오시어 땅을 심판하시고 다빋의 보좌에서 1000년 동안 다스리실 터입니다(계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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