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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받는 유혹?


설교자들 누구나 받기 쉬운 유혹(?) 한 가지는 소위 '명언'들이나 명사들에 관한 예화를 인용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 그거야 설교자로서 당연한 것인데, 유혹이 되기나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믈론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중성적 예화나 명언들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신학교 시절 설교학 교수님은 우리 예비 설교가들이 성경 외 예화나 인용구를 거의 쓰지 못하게 했다. 그 원칙을 무시하고 굳이 인용하면, 채점에 영향이 가곤 했다. 다소 율법적인 지도체제였다. 제자들 일부는 그것을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학창시절 설교학 시간 때 배운 그 원칙을 지금도 그대로 고수하는 제자들-현 설교가들-은 거의 전혀 없을 거 같다. 이제는 자신이 자기 강단을 지키고 있으니, 자유롭게 예화를 활용하고 명언을 인용한다는 뜻이겠다.  



문제는, 애당초 그 명언을 말했거나 예화에 얽힌 사람의 삶의 열매나 뿌리 내지 배후에 대한 분별과 검증 여부이다. 설교자는 단지 그 말이나 예화가 좋아서 그 자체나 말한 사람, 배경이나 배후 같은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용하는가, 아니면 분별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사용하는가?

그런 사전 '검열' 또는 여과 과정 없이 무조건 인용하면, 청중은 그 명언/예화의 주인공을 역시 무조건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고, 더 나아가 그의 모든 것을 수용할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대체로 청중은 내막 같은 것을 잘 모르거나 구태여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물론 그 책임은 설교자에게 우선적으로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청중의 책임이겠다. 


설교 속에서 명언이나 예화, 사례가 차지하는 비중과 파워는 퍽 클 수 있는데, 까닭은 설교 도중 결정적인 대목에 적용되면서 예상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특정 명언/예화/사례를 통해 모종의 극적인 효과를 노리며, 그것으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기대치를 갖는다. 이것이 설교학 상의 기술이긴 한데, 어떤 설교자들은 설교의 중심과 주된 흐름이어야 할 성경으로부터의 효과보다는 설교 원고나 마음의 한 구석에 박아 둔 특정 유머/조크, 명언 또는 예화를 통하여 얻는 심리적/정서적 효과에 더 큰 기대를 걸 때가 있다. 일종의 심리학적 전술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성경 진리 자체에 대한 설교자와 청중의 믿음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유혹이다! 성경의 참 진리를 전하기 원하는 설교자는 이 유혹을 이기고 떨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쪽 비중이 더 큰가? 진리인가 또는 단순한 심적 효과인가? 영혼인가 또는 심리인가? 영적 효과인가, 정서적 효과인가?  


물론 설교자는 누구나, 자신이 사용하는 명언이나 예화가 설교의 핵심인 성경 진리를 밝혀 주고 더 드러낸다는 기본적이고 윤리적인 대의와 전제 아래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 듯한 말과 스토리라도 그 뿌리나 배경이 비성경적이거나 심지어 악마적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설교자의 의도야 어떻든, 아무리 선하든 간에 설교의 내적/영적 효과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경 진리를 뺀, 나머지 "진리스러워" 보이는 부차적 진리나 어록들은 혹 정신적/심리적 도움은 될지 몰라도 그 자체에 영적인 파워가 전혀 없다! 그런 명언과 예화로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오직 당신께서 실저자이신 성경 진리로만 역사하실 뿐이다. 콩푸지(공자)나 가우타마 시타르타 샤캬무니(석가), 소크라테스, 베이컨.. 등등의 '명언'을 사용했다고 해서 성령께서 "오냐, 너 잘했다. 그 사람의 명언을 걸맞게 잘 썼구나!" 하고 칭찬하실 리가 없다는 말이다. 콩푸지는 콩푸지이지 예수님일 수가 없다.     



좀 더 구체적인 일례를 들자. 흔히 한국교회 설교자는 미국 교계 저명 인사들의 말이나 스토리를 자주 인용한다. 아마도 근래에 가장 많이 사용된 대상의 하나는 헨리 나웬일 것이다. 본디 네덜란드 출신인 나웬은 카톨맄 예수회 사제에다 심리학자로, 하버드/예일 대학교 등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신교 설교가들이 천주교 사제의 책이나 말을 자주 인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웬은 신교로서는 큰 문제 대상일 수 있는 예수회(Jesuits)의 회원이며, 더 나아가 미묘하고 감성적인 언어로 독자의 미묘한 감정을 끌고 가는 심.리.학.자.인 데다 자타가 공인한 평생 소극적인 동.성.애.자.였다는 데서, 더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믿거나 말거나, 나웬은 평생 교황과 마리아를 존숭했고, 천주교회에 구원이 있다고 믿은 데다 생애 말엽 보편구원론을 주장했다. 그 무엇보다 나웬은 책을 통해 한국을 비롯한 신교계에 토머스 멀튼(머튼)의 관상 영성(contemplative spirituality)을 널리 뿌리고, 아울러 정교회의 우상숭배적인 '성화상(이콘) 기도' 따위를 적극 추천했다!   

 

필자가 과거 한 때 기독교 방송국 객원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매 주일 각 교회 설교자들의 설교를 분석하다가 발견한 놀라운 점 한 가지가 여기저기 강단에서 나웬의 '명언'들이 수시로 무차별 인용/살포되고 회중석에서는 무조건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청중이 '아멘'까지 하고 있었다. 

일부 설교자는 한 술 더 떠, 나웬이 마치 진정한 선교사였던 양 요란하게 찬사를 던지며 선전 홍보까지 하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출판업계나 서적계가 나웬의 책 대다수를 무차별적으로 열심히 한글로 옮겨 적극 보급한 것도 이 문제 영성 뿌리기에 한 몫 했다. 한국 기독교 출판업계는 돈 될 만한 책이라면 이렇다 할 검증 없이 다 옮겨 보급하는 성향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나웬이 속해 있던 예수회가 도대체 어떤 단체이던가? 중세인 16세기의 (종교)개혁 직후, 신교에 대응하여 구교에서 일어난 반개혁(counter-reformation) 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창설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사도 요한의 제자였다는 안티옼의 이그나티우스와 혼동하지 말 것)는 유렆 국가들의 세계 식민지 개척에 종교적으로 앞장섰던 인물이다. 로욜라의 제자이자 예수회 공동 설립자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프란시스 자비에르/재비어)는 항해 탐험가들이 이끄는 식민지 개척단에 종교 도우미 격으로 나서서 일본 토쿄까지 왔었다. 그 바람에 훗날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침공했던 일본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데려온 예수회 사제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였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전래된 것은 정치적이고 이교적인 카톨맄교이지 참 기독교가 아니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현대의 예수회도 신교를 비롯한 세계를 종교정치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내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과히 틀리지 않다. 우리가 믿든 말든, 바티칸에 정치적 본부를 두고 있는 카톨맄교는 세계 위에 파워를 행사하려는 야심 같은 것이 엿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야심은 비밀집단과 통한다. 그런데 우리 보통 사람은 이런 데 신경 쓰지 않고, 교회만 잘 되길 바랄 뿐이다. 


나웬은 잘 다듬어진 미묘한 심리학적, 심미적, 감성적 언어에다 (신교 선교사이기도 했던)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까지 이용해 가며 신교계에 깊숙이 파고 들어 온갖 잡된 영성을 뿌렸으니, 가히 정신적인 종교식민지 개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웬의 저서들을 마치 신교 영성의 표본인 양 마구잡이로 뿌려온 한국 일각의 기독교 서적계와 설교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아무리 고운 말과 글을 썼어도, 나웬은 신교인이 아니고 구교인이었을 뿐이다. 그나 테레사 수녀가 믿은 예수는 성경의 예수님과는 사뭇 다르다.  



또 다른 예로, '적극적(긍정적) 생각의 힘'으로 널리 알려진 현대 긍정철학의 기수, 노먼 빈슨트 필의 경우를 들자. 그의 "긍정적"인 말은 흔히 예화에서 쓰이곤 한다. 본디 감리교 목사였다가 훗날 미국 개혁교단(RCA)으로 옮긴 필은 뉴욬시 마블 칼리지에잍 교회의 목회자였지만, 동시에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진 비밀집단 고위 단원(스카티쉬 라잍 33단)이었다. 헉~, 목회자가 비밀집단 단원이라니!   

필은 비밀로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자신이 프리메이슨임을 자랑하곤 했다.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설교가였고 '가이드포스트' 창간자였던 필은 메이슨 신전 채플린까지 지낼 정도로 비밀집단에 열성적이었다. 


그의 무조건적 긍정철학은 오늘날 수많은 설교가들이 자주 써 먹는 설득 수단의 하나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 말씀에 예와 아멘으로 답하기를 바라시지만, 비판과 검증 없는 무조건적 긍정철학은 성경의 것이 아니다! 비판하지 말랬다고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여과없이 수긍하는 것은 동시에 성경이 명하는 분별과 검증의 여지를 몰아내는 일종의 독단이다. 긍정철학은 목회자의 독재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래서 설교자는 성경 말씀 이외에는 함부로 남의 글과 예화를 생각 없이 마구 사용하지 말아야 옳다. 과연 듣는이, 성도들에게 도움될지를 몇 번이고 깊이 생각하고 통찰하면서 판가름하고 써야 옳다. 내 입을 통해 생각 없이 청중에게 마구 뿌려진 명언이나 예화나 조크가 그들의 영혼에 어떤 플러스 또는 마이너스 영향을 끼칠지, 그 무엇보다 성경적이고 영적인 건전한 영향을 끼칠지 여부를 미리 헤아려 결정하고 써야 한다. '명언'을 한 사람이나 예화의 중심 배경을 미리 분별하고 검증해야 옳다. 


진정한 신교 설교자/목회자라면 구교 사제 더구나 예수회 회원의 말이 아무리 달콤하고 좋게 들려도, 인용하지 말아야 옳다! 청중에게 부정적인 마이너스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령님께서는 그런 세속인이나 문제 명사들의 '명언' 나부랭이를 통하여 결코 역사하시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바로 성경의 저자이심을 잊지 말아야겠다. 설교자는 세상 명언이나 예화의 파워에 대한 기대보다 성경 진리에 대한 믿음을 더 강화해야 옳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경우에 알맞은 말은 은빛 배경 속 금빛 사과랬다(잠언집 2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