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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는 왜 검소해야 하나?



교회에서 기껏 사 준 자동차를 자기 임의로 '엎그레이드'시켜 더 고급스런 자동차로 바꿨다는 목회자 얘기를 최근에 들었다. 수 년 전 '설교 황제'쯤으로 불리던 한국 교계의 모 명사가 명품 브랜드 승용차를 탄다고 해서 말썽난 적도 있다. 한 기자가 왜 그런 차를 몰고 다니냐고 묻자, 교인에게 선물로 받았다면서 왜 크리스천은 좋은 차를 타면 안되느냐는 식으로 답했단다. 


크리스천들이 고급차를 탈 수 없다는 법도 없겠지만, 사역자가 과분한 자가용차를 타고 버젓이 다녀도 좋다는 법은 더구나 없다. 내 소견은 이렇다. 교우든 사역자든 최대한 검소한 것이 좋지만, 사역자들은 더구나 그렇다. 사역자가 분수에 넘게 고급스러우면 교인들에게 결코 본이 못된다. 단연코!



오해 마라. 필자가 소위 '청빈주의'를 지지해서도 아니다. 불교나 천주교라면 몰라도 기독교는 가난이나 청빈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창세기부터 번영과 풍요를 약속하는 진리다. 기독교는 결코 '가난의 종교'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천주교를 보고 사제나 수사들의 '청빈'함이 좋아서 그리로 개종한다는데, 실상 천주교만큼 화려한 겉치레 의식 중심의 종교도 드물다. 그들의 온갖 화려한 의식과 건축물과 사제들의 의상을 보라. 바티칸은 지상의 어떤 종교보다 더 부유하며, 바티칸 박물관에 든 역사적 '고물'과 골동품만 해도 엄청난 천문학적 값어치가 있다. 그러니 천주교가 본질적으로 검소하다는 착각은 말기 바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곳곳의 교계에서 노골적인 호화를 누리고 사치를 부리는 사역자들이 많다. 그들 다수는 이른 바 '번영신학'인들로 불리는 '믿음의 말씀' 또는 신사도 계열 텔리밴젤리스트들이며, 그들이 모은 재물은 물론 거의 모두 교인들의 헌금에서 나온 것이다. 집필이나 강의로 모은 자력수입도 많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도 교인들의 희생과 헌금으로 커진 교회로 말미암아 명사가 되어 그런 것이지, 처음부터 혼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안 그런가..?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용 제트기까지 타고 다닌다. 평소 최신식 의상 차림이고, 호화 저택을 장만해서 살면서 가족의 씀씀이도 호화판이며, 분위기가 "끝내 주는" 고급 호텔과 고급 식당에서 감각적으로 즐긴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고, 심지어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내노라고 살아야 모범적이다"고 아연실색할 주장들을 한다. 거의 그들의 추종자들이나 시청자들이나 교인들이 그들의 전하는 말씀에 대한 믿음과 신뢰감에서 십시일반 바치거나 보내준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사역자들은 잘못이다! 철저히 잘못돼 있다. 그들이 목자로 자임한다면 그야말로-주님 말씀 그대로- 딱 삯꾼 목자들이다. 

그들은 성경 창세기 1장부터 명시된 복/번영/형통의 언약과 원리를 알고 이용은 하지만, 철저히 악용한 것이다! 그들은 교계의 졸부들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성경의 언약과 원리 자체가 잘못되어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을 악용하는 사역자들의 잘못이다. 우리는 획일주의여선 안된다. 성경에 복/번영/형통/성공이 아예 '없다'는 일부 사역자들의 주장도 잘못이요 거짓이다.    

  

아무튼 그들은 섬기는 사람의 위치를 잊어버렸다. 섬기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더 높아지려 해선 안된다. No! 사치는 어느 모로든 남보다 수준이 훨씬 더 높아지는 상황이다. 구약 대언자 아모스나 신약의 사도 야코보는 그런 부와 사치를 단죄하고 꾸짖는다. 


사역자는 섬기는 자로서 마땅히 낮은 마음가짐을 지녀야 옳다. 이를 테면 생활수준 면에서 되도록 "low profile"이어야 옳다. 가진 것이 넉넉하다고 그것을 맥시멈으로, full로 누리려고 해선 안된다. 왜냐고? 사역자들의 생활 수준이 지나치게 높으면, 교우들이 시험 든다. 안 그럴 것 같아도 반드시/어느새 들게 되어 있다. 


이단 교주들의 대다수는 사치한 티를 뵈고 표를 낸다. 아래에 짓눌려 교주님 교주님 받드는 노예 같은 교우들의 등을 타고 전에 못 누려본 것까지 누리며 떵떵거리고 산다. 

바꿔 말하자면, 사역자가 생활 수준이 고급스럽고 사치하면, 혹 교리적으로는 이단이 아닐지언정 그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이단스럽다". 아무리 다른 면에 빼어나고 훌륭한 사역자라도 그렇다. 초기 교회의 선배 사역자들, 사도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역자는 '청빈주의'를 추구할 필요가 없지만, 사치해서도 안되며 검소해야 한다. 파울처럼 때에 따라 풍요(사치가 아님!)에도 처할 줄 알고 가난에도 처할 줄 아는 균형적 삶의 태도를 지녀야 바람직하다. 구약 현인 아구르처럼 "..나에게 가난도, 부도 주지 마시고 다만 내 몫의 먹거리를 내게 주소서"(잠언 30'8)라고 고백해야 한다. 

사역자라면, 때때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것은 '청빈주의'가 아니다.  


   "비록 무화과가 맺히지도, 포도나무가 결실하지도 못하고,

   감람나무는 열매를, 밭들은 먹거리를 내지 않으며, 

   우리엔 양떼가, 외양간엔 가축들이 없어도, 

   나는 예호바님 안에서 기뻐하리! 

   내 구원의 하나님 안에서 즐거우리!" (하바쿸 3'18 사역)

  


사역자는 이처럼 검소해야 한다. 사치와 낭비벽은 사역자의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의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사역자는 일반 교우들보다 더 낮은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치할 수가 없다. 허영심을 갖고 호화판으로 지낼 수 없다. 그리고 아마도 사역자가 가장 아껴야 할 것은 시간일 것이다. 시간 낭비도 일종의 사치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에너지도 걸맞게 아낄 만큼 아껴야 한다. 절제나 균형이 없이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마구 에너지를 낭비하다간 일찍 가기가 쉽다. "천국 일찍 가면 좋지~" 할지 몰라도 일찍 가면 그만큼 일을 덜 하게 된다. 



그리고 교우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모범적이고 선한 교사/사역자들과 자신들의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갈라티아서 6'6). 그러지 않을수록 교사/사역자는 소외 당하고 외로워지기 쉽다. 다른 교우나 교사/사역자가 보지 않고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늘 혼자서만, 식구와만 즐기고 그걸로 끝이라면, 과히 교우답지 못하다 할 것이다.   


사도 파울은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뿐 아니라 자신을 돕는 사역자들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지녔었다. 심지어 그들을 자신의 '심복'(심장과 복부!)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신처럼 아끼기도 했다(참고: 필레몬서 1'12). 

오늘날도 사역자들 간에 이런 심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성도들도 그런 파울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사역자들이 검소할수록 교우들은 더욱 그들을 본받고 싶을 것이다. 반면 사역자가 드높은 맘가짐을 갖고 사치할수록 성도들은 속으로 그를 멀리하게 될 것이다. 

겉으로만 검소한 체 하고, 실제로는 혼자 또는 식구끼리 호화판으로 지내서도 모범은 아니다. 


 

섬기러 오셨던 주님을 생각해 보라.

그분이 언제 사치하신 적이 있었던가? 모든 제자와 따르미들이 제공해 드리는 것들을 갖고 언제 흥청망청하셨던가? 주님께 값진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까지도 주님 앞에 사치는 아니었다. 

물론 주님은 슐로모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하실 분도 아닌 왕이시고, 모든 것들의 주인/주재이시다. 그러나 누리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생명까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마땅히 주님을 본받아야 한다.

남을 섬겨야 한다. 섬김을 받으려 해선 안된다. 

그런데 사역자들의 사치와 허영이라니, 웬말일까?

사치와 호화는 성도와 거리가 멀다. 

하물며 사역자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