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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엘티 우스개 만보(慢步): '반갑습니다'


기도원에 본격적인 장기입주를 하게 되었다. 
준비한답시고 이런저런 생필품을 장만하면서 새 '슬리퍼'(플라스틱 샌들) 한 켤레도 사다가 현관 신발장 내 호실 쪽에 두었는데,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 약간 속상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또 다시 구입한다는 것도 좀 그래서, 하릴없이 요새 유행하는 각질 제거용 버선발로만 버텼다. 

며칠 후 나의 새 슬리퍼가 신발장의 딴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앗, 내 신발이 여기 있다니~!" 실종됐던 자식이라도 찾은 듯 너무도 반가워 얼른 집어다 도로 내 자리에 갖다 놓고, '새 거라서 탐내는 사람이 있나 보다. 잘 간수해야지.' 생각하다가 문득 신발장 한 구석에 이런 종이 팻말이 붙은 것을 발견했다: "제 노랑 슬리퍼 가져가신 분은 도로 갖다 놓으세요. 혹시 보신 분은 핸드폰 010-0000-0000으로 연락주시고요. XXX 권사" 

'흠, 나 같은 피해자가 또 있군. 나도 잃어먹기 전 잘 챙겨야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궁리하던 끝에 기발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오호! 그러면 되겠군' 싶어, 나도 신발장 내 자리 바로 위에다 종이팻말을 만들어 붙였다. 

   "언터처블..악성 무좀환자 신발임."  

되찾은 신발을 팻말 아래 들여다 놓고는, 속으로 "요런 거 몰랐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누군가의 인기척에 놀랐다. 그는 나와 종이팻말을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속을 들킨 거 같아 민망해져 있는데.. 
   "반갑습니다." 그렇게 말했다. 엉겁결에 "아, 예. 저도요.." 하고 꾸벅 인사했다. 
   "똑 같은 슬리퍼라 전 제 신발인 줄로 착각했네요.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눈을 들어 보니, 정말 내 것과 똑같은 슬리퍼가 자리잡고 있었다. 파랑 바탕에 발등의 굵은 흰 띠.. 그도 그럼 잃었다가 되찾았다는 말인가. 이 슬리퍼의 색깔이 유난히 눈에 띄게 탐스러운가보다.

그런데 누군가의 뒷말을 들어보니, 그는 이 기도원에 수시로 출입하는 진짜 악성무좀 환자였다! 치유기도를 시작한 지 한 10년 되었단다.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말에 씨가 든 것이었다. 
으헉, 이런~! 울며 겨자 먹기로 그날부터 새 신발을 포기하고 그냥 냅뒀다. 그 뒤론 비슷한 슬리퍼가 눈에 띄면 절로 역겨워졌다. 나 역시 병 고치러 왔다가 거짓 팻말 제작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회개, 신유불신증, 타인의심증, 불안증에다 특정 슬리퍼 혐오증, 무좀 공포증까지 두루/고루 겹쳤다. 혹부리가 '혹 덤'을 받은 격이다. 

얼마 후 다시 새로 산 신발과 함께 팻말도 바꾸었다:
   "필요하시면 신고 돌려 주세요. 단 무좀환자분에겐 기꺼이 기증합니다."
  
그 기도원 신발장은 그후 팻말 천지가 되어 버렸다. 얼마 후 기도원 입구에 이런 팻말이 자리잡았다:  "무좀환자는 안수를 사양합니다. 그냥 개인기도 바람"

그 얼마 후 기도원 근처의 한 건물에 간판 하나가 나붙었다: 
   "무좀환자는 누구나 환영! 신유로 고치세요."

기도원에서의 그 슬리퍼 악연(?) 후 악성무좀 환자가 된 나는 옳다구나 그리로 향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막 벗을 때였다.
누군가가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참고: 이 일화는 우스개일 뿐 실화가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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