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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교회력과 교회명절

'성탄절' 소비주의(consumerism)



어릴 때 생각이 납니다. 
누나로 따르던 자매님이 번쩍이는 브로치와 강렬한 색감의 스카프, 은장식줄 등으로 꾸미고, '헤로드 왕'으로 등장했습니다. 교회 연극을 위한 분장이었는데 무척 화려해 뵈더군요.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이맘 때면, 으레 교회는 반짝이는 금은빛 또는 상록수 색깔로 장식되곤 하죠. 높은 종탑이나 교회 옥상에 아스라한 사다리나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 건물 둘레를 울긋불긋오색전등으로 장식하기도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 예수 곁을 마리아/요셒 부부가 내려다보며 지키는 탄생 장면을 나무판에다 페인트로 정성껏 그려 붙이기도 했습니다. 성탄절 시즌에 사람들이 교회당에 나오면서 그런 장식들을 우러러 볼 때면, 사뭇 자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관행은 우리가 평생 지켜 온 것들입니다. 놀랍게 오래오래 유지돼 온 전통이죠.  
변증가 탐 맥매언(데이브 헌트와 함께 '베레아의 부름' 공동대표)은 '기독교 소비주의'에 대하여 경고한 바 있습니다마는..저는 크리스마스 전통이야 말로 기독교 소비주의의 전형적인 표본의 하나라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 때 대표적인 소비주의 상징은 크리스마스 추리(트리)입니다. 화려한 장식물들이 줄줄이 내어 걸린 대형 크리스마스 추리가 교회당 안 마당이나 예배실 앞쪽에 세워집니다. 꼭대기의 번쩍이는 큰 별, 금은색 장식 띠, 별빛처럼 또는 안개꽃처럼 명멸하는 작고 귀여운 색등들, 큼직큼직한 유리/플라스팈 구슬/방울 등 온갖 오너먼트가 주렁주렁 매달려,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을 흐뭇하게(?) 해 줍니다. 꼬마 어린이들부터 어른들까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흐뭇한 기분에 도취합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더욱 화려해져 가는 양상입니다. 또 상록수 화환이 곳곳에 내어 걸립니다. 이 모두가 기분을 돋구어 주는 소비주의 아이템들입니다. 이런 것들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 추리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성경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각적 만족과 기분, 분위기를 위한 것일 뿐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강단과 교회당 안팎 주변을 장식하는 붉은 포인세타 화분들도 소비주의의 표상입니다. 포인세타는, 미국 최초의 주 멕시코 외교관을 지낸 프리메이슨, 조울 포인세트의 이름을 딴 꽃이기도 합니다. 그 붉은 색깔이 이 추운 계절에 사람들을 몹씨도 따스하게 자극하는지 교회 강단을 꾸미는 데도  쓰입니다.  
 
이런 화려한 소비적 양상은 주로 구교에서 온 전통입니다. 화려한 색깔의 구교 '사제복' 등 그들의 외양과 일맥상통하는 국면입니다. 구교가 청렴한 종교라굽쇼..? 화려한 바티칸과 바티칸 박물관도 청렴합니까..??? 바티칸이 세계 최고의 부자의 하나라는 사실은 아시나요? 우리 눈 가리고 아옹 같은 소리는 좀 그만합시다.

크리스마스는 온통 축제 분위기입니다. 강렬한 색감의 온갖 색깔/색조들이 이 계절을 장식합니다. 대강절의 각 주마다 장식하는 소위 '교회(절기)색'도 구교가 정한 대로 따라갑니다. 교회에서는 또 이맘 때 화려한 음악회, 연극/뮤지컬 등이 공연됩니다. 그룹이 함께 공연하기 위한 무용복, 합창단복, 연극 복장 등이 제작되기도 합니다. 연극을 위한 분장과 소도구들도 필요합니다. 

분위기 돋우기 위주인 그런 음악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연주되지만, 과연 참 성탄절이 아닌 이 계절에 진정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계절의 분위기와 기분이 주가 되지는 않나요? 우리의 무지와 불식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덮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영광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진정 이 계절을 그 아드님의 탄생일로 받아 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걸까요? [ 하나님이 진정 아드님의 탄생일로 삼으신 날은 부활하신 날이란 진리를 독자는 아시는지..?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연주나 공연의 대부분도 계절 분위기 돋우기, 소비주의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크리스마스 뮤짘을 감상한다는 데 사람들은 흐뭇해 합니다. 이것은 거리에서 울려나는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럴과도 과히 다르지 않는 느낌입니다. 


사람들은 또, 크리스마스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크리스마스 추리 아래 놓아 두었다가 가족끼리 주고 받는 선물도 있고, 교우들끼리 교환하는 선물들도 있습니다. 이 계절을 알리고 정신을 주고 받는 카드도 오갑니다. 

이 모든 소비주의에 부응하여,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신상품을 개발하여 내 놓습니다. 그래서 매년 정기적으로 교회에서 소비되는 아이템들도 상당수 됩니다. 

외국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관련 상품으로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이는 산업체들도 많습니다. 성탄절은 그래서 가장 큰 대목철의 하나입니다.  

한국의 물질 문화가 풍요로워짐에 따라 한국교회의 성탄절 풍속도도 눈에 띄게 점점 화려해져 가는 양상입니다. 이것이 꼭 나쁘다곤 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소비문화가 발달하고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세계 각국의 교회마다 매년 그런 장식과 분위기 조성에 뿌리는 돈은 지난 십 여 세기 동안 전체 통계를 낼 수만 있다면 아마 어마어마한 액수가 될 것입니다. 
 
꼭 엄청난 돈을 흥청망청 써 버려야 소비주의인 것만은 아닙니다. 생각과 말만으로도 소비주의일 수 있습니다. 하물며 큰 전통이겠습니까. 
 

우리는 소비주의의 정의와 개념 적용을 자칫 혼동하기 쉽습니다. 잘못하기가 일쑤라는 말입니다. 

어느 죄 많은 여인이 고가의 소중한 향유병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와 발에 아낌없이 붓고 발라 헌신할 때, 이스카리옽(가룟) 유다 같은 제자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그 광경을 비웃으며, 그 향유와 그 값을 아까워 했습니다. "차라리 저걸 가난한 사람들에게 썼다면.."라고 짐짓 여성과 예수님의 소비주의(?)를 탓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큰 위선입니다. 그들 마음 속은 주님과 여인을 질투/질시하는 마음, 죄 많은 여인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마음, 심지어 물질과 여성에 대한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결코 그 값비싼 향유와 여인의 행동을 '소비주의'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상품을 소비했더라도 세속적인 소비주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장례 곧 죽음을 위해 바쳐진 것입니다. 그 여인을 비롯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사하는 표이기도 했습니다. 그 향합을 깨뜨린 희생은 곧 모든 죄인들을 위해 향합보다 귀한 당신의 몸을 "깨뜨려" 그 피를 흘려 바치신 주님의 거룩한 희생을 상징하고도 남습니다! 고대 제사 때 바쳐진 관제, 전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머나먼 곳에서 오랜 기간 여행을 거쳐 마침내 아기 예수의 탄생지에 와서는, 아기께 경배하고 황금/유향/몰약을 바친 박사들의 드림과 바침도 소비주의는 아닙니다. 그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소비주의의 상징인 번득이는 헤로드 궁성에서가 아니라, '떡집', 베틀레헴의 가난한 아기 왕, 예수님께 기꺼이 경배하길 원했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그런 헌신과 희생입니다. 그것은 소비주의가 아닌 헌신주의, 희생주의입니다. 인간들의 기분 내기, 화려한 분위기 돋우기 식 소비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기분과 분위기, 눈요기를 위한 많은 것들이 헌신과 희생 쪽으로 돌려진다면, 더 크고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어린이들과 어른을 막론하고 희생과 헌신주의를 배워야 옳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기분 낼 것 다 내고, 갖고 싶은 것 다 가지며 사는 화려한 소비주의는 교회 전통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도들도 그 어떤 초기교회도 그런 소비주의를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분명 후대에 생긴 잘못된 전통입니다. 
교회는 되도록 검소해야 합니다. 단정해야 합니다. 다만 금욕적/'청빈'적 율법주의가 아닌, 희생주의/헌신주의입니다.